2005년 10월호

해외 지도자들의 쓸쓸한 귀국, 멀어진 자주독립의 꿈

  • 정경환 동의대 교수·윤리문화학 cw3581@hanmail.net

    입력2005-10-13 15: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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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외 지도자들의 쓸쓸한 귀국, 멀어진 자주독립의 꿈

    1945년 11월 23일 개인 자격으로 귀국한 김구(가운데)등 임시정부 요인들.

    역사는 침묵 속에서 전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면서 늘 우리에게 교훈을 안겨준다. 역사에서 교훈을 체득하지 못하는 민족은 불행한 역사를 되풀이하게 마련이다. 독일 통일을 이룬 철혈재상 비스마르크는 “범인(凡人)은 경험에서 배우지만 나는 역사로부터 배운다”는 말을 남겼다.

    과거의 비극적 역사가 되풀이되는 걸 막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무더운 여름날 깊은 지하 갱도에서 석탄을 캐는 광부처럼 ‘역사의 광부’가 돼야 한다. 우리 민족은 필설로는 표현하기 힘든 고난을 강인한 불사조 정신으로 극복해 오늘에 이르렀다. 역사에는 어두운 면도 있고 밝은 면도 있다. 어두운 역사는 미래로 나아가는 데 참회와 반성의 계기를 마련해주고, 광명의 역사는 우리 민족에 대한 자부심을 불러일으킨다.

    해방이냐, 광복이냐

    2005년은 광복 60주년이 되는 해다. 60년 전인 1945년 8월15일이 한국 현대사에 주는 의미는 간단치 않다. 광복이 되자 해외에 머물던 정치지도자들이 하나 둘 귀국했고, 그들의 움직임에 따라 해방정국은 크게 출렁거렸다.

    해외 정치지도자들의 입국과정과 그 의미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우선 8·15의 의미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세계사에서 현대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를 지칭하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그러나 우리 민족에게 현대의 기점은 1945년 8월15일이다. 일본의 한국에 대한 식민통치는 세계의 식민통치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 만큼 잔인한 것이었다. 민족의 얼과 말, 그리고 역사를 송두리째 없애려고 했고, 심지어 민족을 완전히 일본에 복속하게 만들려 했다.



    식민통치의 이론적 근거는 한국과 일본은 같은 조상과 같은 근원을 가진 혈연적 연대관계라는, 이른바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이다. 이는 자연스럽게 민족말살정책으로 귀결됐다. 이에 따라 일제는 무자비하고 악랄한 통치를 감행해 식민정책에 동조하지 않는 세력과 인물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일제 36년사는 우리 민족에게 치욕의 역사이고 불행한 역사의 대명사다. 그렇기 때문에 8·15는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극적인 민족 부활의 의미를 담고 있다.

    8·15가 지닌 역사적·국제정치적 의미는 간단치 않다. 먼저 8·15를 해방으로 보느냐, 아니면 광복으로 보느냐는 엄격히 말하면 큰 차이가 있다. 해방과 광복은 일제 식민통치의 사슬이 끊어졌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해방은 타율적 개념이고 광복은 자율적 개념이다. 해방으로 규정할 경우, 우리 민족의 독립이 연합국의 전후 처리과정의 일환으로 이뤄진 현실은 반영되지만, 이역만리에서 풍찬노숙하면서 오직 국권 회복을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들을 과소평가하는 어리석음을 범할 수 있다. 반면 광복으로 규정하면, 우리의 독립운동은 살지만, 1945년 8월15일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고 볼 수도 있다. 이렇게 볼 때 8·15는 해방과 광복의 유기적인 결합이다.

    또한 8·15는 아무리 부인하고 싶어도 부인할 수 없는 이중 구조를 지니고 있다. 즉 8·15는 해방·독립·광복이라는 긍정적 의미 외에 분단·분립·분열이라는 부정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8·15는 해방의 기쁨과 분단의 아픔을 동시에 가져온 비극적인 기념일로 재평가해야 한다. 8·15가 지닌 긍정적 의미는 계승·발전하고, 부정적 의미는 다시는 그러한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경계하는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해외 정치지도자들의 입국과정은 이처럼 8·15의 성격과 밀접히 관련돼 있다. 8·15가 양면적 성격을 가지고 있지 않고 우리 민족의 자체 역량으로 성취한 ‘완전한 광복’이었다면 해외 정치지도자들의 입국은 매우 빠르고 수월하게 진행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8·15는 1945년 시점에서 보면 우리 민족에게 일제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축복에만 머물게 하지 않고 국토분단이라는 비극을 맛보게 했다. 8·15는 결과만을 놓고 보면 민족의 주체적 역량의 성과라기보다는 연합국 전승(戰勝)의 산물이다. 그렇기에 해방을 제공한 연합국의 전략적·군사적·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요리되는 비극이 일어난 것이다. 더욱 냉철하게 말하면 8·15는 강대국의 약소국가 지배라는 기존 질서의 재편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일본의 제국주의와 미국의 자유주의는 근본 성격이 다르지만, 완전한 자주독립국가를 갈구하던 한민족 처지에서는 외세에 의한 지배체제가 이어졌다는 점에서 크게 달라진 게 없었던 것이다. 1945년 8월15일 성립된 미 군정체제는 민족지도자의 운신의 폭을 좁히는 외연적 요인이 됐다.

    개인 자격으로 비밀리 귀국

    8·15가 지니는 이런 의미 때문에 해외 정치지도자들, 특히 민족진영의 3영수라 일컫는 김구, 김규식, 이승만의 입국과정은 순탄치 못했다. 이들 민족지도자 3명이 수십년의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할 당시 이미 한반도의 남쪽에서는 미 군정체제가 성립돼 있었다.

    미 군정은 군정 관계자가 천명했듯이 당시 남한에서 유일한 권력체로 군림하고 있었다. 미 군정장관 아놀드는 1945년 10월10일 기자단 회견에서 “북위 38도선 이남의 조선에는 오직 한 정부가 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또 10월16일 미 군정의 하지 사령관은 “군정청은 일본의 통치로부터 인민의, 인민을 위한, 인민에 의한 민주주의 정부를 건설하기까지의 과도기간에 38도선 이남의 조선지역을 통치·지도·지배하는 연합군 최고사령관 지도하에 미군이 설립한 임시정부다. 군정은 남조선에서 유일한 정부”라며 미 군정의 유일합법성을 강조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독립운동의 대표적 지도자이던 김구, 김규식, 이승만의 입국은 자연히 미 군정이라는 실질적인 권력체로부터 강력한 저지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민족 지도자들이 스스로의 의지와 역량에 따라 국민의 성원 속에 해방된 조국 땅에 당당하게 들어온 것이 아니라 국제정치의 냉엄한 현실에서 개인 자격으로 비밀리에 입국한 것은 우리 민족의 비극적 앞날을 예견하는 것이었다.

    일제 강점기 말 민족시인 윤동주는 ‘참회록’에서 “날이면 날마다 나의 손바닥과 발바닥으로 나의 거울을 닦아보자”면서 일제 강점기를 사는 식민지 지식인의 참담한 심정을 자성하는 글로 남겼다. 광복 60주년을 맞이해 우리 민족은 8·15를 해방과 독립이라는 차원에서 기뻐만 하지 말고 왜 8·15가 자주적인 통일국가 수립의 출발점이 되지 않고 분단국가 성립의 출발점이 됐는지 자성해야 할 것이다.

    완전한 자주독립국가 꿈꾼 백범

    이제 한국민족주의의 영원한 신화로 일컬어지는 백범 김구의 해방에 즈음한 생각과 입국과정을 규명하도록 하자. 일제 강점기 백범의 독립운동은 한국민족운동사에서 결코 지울 수 없는 금자탑을 쌓았다. 그는 나라가 기울어가던 1876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1949년 6월 안두희의 흉탄에 맞아 서거할 때까지 오직 조국과 민족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다. 한말에는 동학혁명과 의병운동, 그리고 교육운동에 뛰어들었고, 일제 강점기에는 강인한 의지를 가지고 독립운동을 벌였고, 해방정국에서는 반탁운동과 통일운동을 통해 조국에 대한 그의 임무를 다했다.

    그는 개인적인 이해관계나 사사로운 행복을 초월해 민족과 세계라는 거시적인 가치에 자신을 일체화했다. 모두 앉아서 죽기만을 기다리던 때에도 그는 분연히 일어나 민족 전체에 희망의 불꽃을 안겨주었고, 어떠한 절망적인 환경에서도 좌절하지 않는 불사조의 민족정신을 온몸으로 실천했다.

    그리고 그는 민족의 이익만을 위하는 편협한 민족주의(국수주의)에 머물지 않고 세계 평화와 문화국가의 이상향을 추구한 열린 민족주의자이자 평화주의자였다. 그가 ‘세계적 대가정론’을 제창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김구의 ‘세계적 대가정론’은 1945년 12월27일 발표된 ‘삼천만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성명에 구체적으로 언급돼 있다).

    나아가 그는 독재를 배격하고 자유를 근간으로 하는 민주주의를 자신의 이념으로 설정했다. ‘나의 정치이념은 한마디로 표시하면 자유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는 자유의 나라라야 한다’는 그의 글(‘자유이념’ 중 한 구절)에는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소신과 의지가 잘 드러나 있다.

    이러한 가치와 이념을 가지고 있던 백범에게 일제는 어떤 경우라도 용납하기 어려운 타도의 대상이었다. 그는 비록 악(惡)의 세력인 일제가 일시적으로 기승을 부리지만 역사의 기나긴 발전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반드시 패퇴할 것으로 확신했다. 1930년대 초 일제가 기세 등등하게 만주와 상하이를 점령해 독립에 대한 희망이 약해질 때도 그는 일제가 멸망할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그래서 독립운동가 대부분이 떠난 임정을 그는 쓰레기통에서 주운 배춧잎으로 허기를 채우면서 해방되는 그날까지 수호했다. 그는 비록 임시정부이지만 우리의 ‘정부’ 간판을 지키고자 했다. 이것은 그의 독립에 대한 강인한 의지의 표출이자 일제의 식민통치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민족정신의 표현이었다.

    이처럼 완전한 자주독립정부 수립에 대한 열망을 가진 백범은 한반도의 남단을 장악한 미국에 매우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일제 강점기 백범은 우리 민족에게 일종의 메시아적 희망을 갖게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미국은 한반도에서 특정 세력, 특히 소련의 독점적인 지배를 방지해야 한다는 정책목표를 가지고 신탁통치안에 따른 좌우연합정부 수립을 추구하고 있었다. 이러한 정책을 실현하기 위해 미국에 우호적이고 미국의 정책에 동조하는 인물과 세력을 찾았다. 미국은 백범을 미국의 정책에 순순히 따를 인물이 아니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백범은 민족의 주체적인 역량에 의한 완전히 자주적인 통일국가를 신생 독립국가의 모형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백범의 자주사상과 미국의 한반도 분할정책은 충돌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고, 그것은 1945년 민족해방과 동시에 촉발됐다.

    백범은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하늘이 준 기회로 생각하고 그때까지 불신하던 좌파를 포용해 좌우연합정부를 수립하고 광복군을 확충했다. 그는 일제로부터 우리 민족이 해방됐을 때 우리 민족의 발언권과 자주권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일(對日)전에서 우리 민족이 일정한 몫을 수행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중국과의 연합전선을 의미하는 한중연합론을 주창했고, 국내 진공(進攻)작전을 위해 미국과의 합동훈련도 실시했다.

    해외 지도자들의 쓸쓸한 귀국, 멀어진 자주독립의 꿈

    일제 강점기에 해외에서 항일독립투쟁을 전개했던 민족지도자 3인. 김구(왼쪽)는 완전한 자주독립국가를 꿈꾸었고, 김규식(가운데)은 좌우연합론을 주창했다. 반면 철저한 반공주의자 이승만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했다.

    미 군정, 백범 귀국 소식 통제

    백범이 일본의 갑작스러운 항복을 접하고 “아! 왜적의 항복! 이것은 내게는 기쁜 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었다”고 안타까움을 표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 자격으로 입국하기를 원했지만 미국은 개인 자격으로 입국하기를 종용했다. 백범이 해방 소식을 듣고 나서 기쁨의 눈물을 흘린 대신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라고 비통해한 것은 해방된 조국에 대한 외세의 개입을 우려한 선견(先見)이었던 것이다. 스스로 해방을 쟁취하지 못한 민족의 설움을 그는 귀국과정에서 몸소 겪어야만 했다.

    중국에서 국내 진공작전을 진두지휘하던 백범은 일제의 갑작스러운 항복에 따른 깊은 충격에서 벗어나 9월3일 ‘국내외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성명을 통해 해방정국에 임하는 자신과 임정의 시각을 밝혔다. 여기서 백범은 14개항의 당면정책을 천명하면서 임정이 주축이 돼 “국내외 각 계층, 각 혁명당파, 각 선교단체, 각 지방대표와 저명한 민주영수회의를 소집하도록 적극 노력할 것”(6항)을 언급했다. 또한 1항에는 “임시정부는 최속 기간 내에 입국할 것”임을 밝혔다. 김구의 이런 언급은 비록 미 군정이 남한을 점령하고 있지만 임시정부가 정국을 주도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백범의 9월3일 성명은 남한의 실제적 권력인 미 군정을 자극했다. 미 군정은 김구가 임정의 주석 자격이 아니라 개인 자격으로 귀국해야 한다는 사실을 임정측에 강경한 어조로 전달했다. 임정을 하나의 정파나 정당으로 인정할 수는 있지만 정부로는 인정할 수 없다는 미 군정의 완고한 시각을 드러낸 것이다. 이는 또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전설적 인물인 김구의 자주독립 움직임에 미리 쐐기를 박는 행위이기도 했다.

    그래서 백범은 중국 정부가 마련한 열광적인 송별회와는 어울리지 않게 11월23일 미 군정의 하지 사령관이 보낸 군용비행기를 타고 쓸쓸히 개인 자격으로 입국해야만 했다. 임시정부의 주석 김구, 부주석 김규식, 국무위원 이시영 등 임시정부 요인 15명은 오후 1시 군용비행기를 타고 황해를 건너 오후 4시5분경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백범은 1919년 3월 조국을 떠난 지 27년 만에 환국한 것이다.

    그러나 미 군정이 백범의 환국 소식을 통제한 탓에 김포공항에는 환영인파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백범을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은 밖을 볼 수 없는 밀폐된 장갑차를 타고 숙소인 경교장에 도착했다. 백범이 경교장에 도착한 지 한 시간 후인 6시경 미 군정은 “오늘 오후 4시 백범 선생 일행 15명이 서울에 도착했다”는 짤막한 성명서를 발표했다. 자력으로 해방을 쟁취하지 못한 민족의 비극이었다. 백범이 도착했다는 소식은 금방 퍼져나갔고 경교장 일대는 발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인파로 가득 찼다.

    우사 김규식은 한국 근현대사에 어느 누구도 견주기 힘들 정도로 큰 위업을 남겼다. 그럼에도 우사에 대한 연구는 다른 이에 비해 미비하기 이를 데 없다. 그는 1881년 부산 동래에서 태어나 1950년 12월 만포진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할 때까지 나라의 독립과 통일을 위해 헌신한 애국지사였다. 냉철한 지성을 갖춘 우사는 광복 이후 자신의 삶을 좌우 통합을 위해 바쳤다. 그러나 그런 그를 맞이한 것은 좌절과 고난이었다. 결국 그는 6·25전쟁 때 인민군에 납북돼 모진 시간을 보내다가 조국통일의 원대한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조국” “통일”을 외치면서 이승을 떠났다. 비록 좌와 우가 손을 잡는 통일국가 수립이라는 그의 이상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조국에 대한 그의 사랑과 통일사상은 민족사에 뚜렷이 남아 있다.

    “좌우 이념은 민족이라는 틀에 용해돼야”

    그에게서 이념은 민족의 가치에 비하면 하위 개념이었다. 그는 1897년 17세에 미국에 유학해 로녹대학과 프린스턴대학에서 각각 영문학 학사와 석사학위를 받을 정도로 일찍이 교육의 중요성에 눈뜬 사람이었다. 1913년 중국으로 망명하기 전까지 연희전문학교에서 강의하고 기독교청년회 총무직 등을 맡아 애국계몽운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그는 나라의 위기를 교육으로 극복하려고 했다. 6년간의 미국 유학생활을 통해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갖게 됐으나 거기에 매몰되지는 않았다. 나라가 위기에 빠져 있을 때는 특정 이념에 사로잡혀 분열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는 게 그의 신념이었다.

    그는 남녀노소, 이념의 편향성에서 벗어나 민족 구성원들에게 민족주의 사상을 심는 데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하의 조국에서 웅지를 펴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효과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1913년 4월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 이후 원동약소민족대회(1918)와 파리강화회의(1919)에 참석해 한국 독립을 위한 외교적 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나아가 임시정부의 초대 외무총장을 맡아 조국독립을 실현하기 위해 헌신했다.

    그의 정치사상은 어떤 특정 이념에 매몰돼 민족의 대동단결을 해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 골격이다. 즉 좌와 우의 이념은 민족이라는 큰 틀에 용해돼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그의 좌우통합 내지 좌우연합론은 일제 말기 김구가 주창한 좌우연합국가론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광복 이후에는 좌우합작운동과 남북협상을 주도하는 원천이 됐다. 김규식의 사상은 탈냉전 이후 화해와 협력이라는 세계사적인 동력과 부합하는 것으로 마땅히 재평가받아야 한다.

    “국내 치안, 임시정부가 맡겠다”

    미 군정은 임시정부를 정부로 인정하지 않았다. 임시정부를 정부로 인정하면 미 군정의 존재가 무의미해지기 때문이었다. ‘임시정부의 위신과 권위’(1943년 7월26일 장제스와의 회담에서 전한 ‘한국독립운동의 계획안’ 중)를 주장하는 임시정부 부주석 김규식은 미 군정 당국이 보기엔 김구와 더불어 요주의 인물임에 틀림이 없었다. 해방 당시 김규식은 임시정부의 고위직인 부주석직을 수행하고 있었기에 김구와 마찬가지로 개인 자격으로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임시정부는 남한의 유일한 권력체인 미 군정에 대해 임시정부의 권위를 인정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임시정부가 망명지인 중국에서 미 군정에 제시한 요구사항은 첫째, 귀국 후 국내 치안을 임시정부가 맡을 것. 둘째, 귀국 후 군대를 편성할 것. 셋째, 입국 후 미군 헌병의 보호를 받지 않을 것. 넷째, 미 군정은 정치활동에 관여치 말 것 등이다.

    임시정부의 이런 요구는 한반도에서 미소 협조를 바탕으로 신탁통치안을 구상하던 미 군정의 존재를 사실상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에 미 군정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었다. 미 군정이 임시정부 요인들에게 개인 자격으로 귀국할 것을 종용한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우여곡절 끝에 우사 김규식은 1945년 11월23일 김구 주석과 함께 환국했다. 중국으로 망명한 지 32년 만에 귀국하는 그의 기쁨은 조국의 어지러운 현실에 묻히고 말았다.

    모든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에는 양면이 있다. 양면이 없는 사건과 인물은 인간사에 존재하지 않는다. 긍정과 부정이라는 양면을 통해 역사 속의 사건과 인물은 후세에 교훈으로 복원된다. 우남 이승만에 대한 평가엔 그런 양면성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임시정부는 좌경화됐다”

    이승만은 한편으로는 일제에 굴복하지 않고 해방되는 그날까지 끈질기게 독립운동을 전개했다는 점에서 독립운동의 화신으로, 또한 해방정국에서 일찌감치 남한 단정(單政)을 주장해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했다는 점에서 건국의 아버지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철저한 반공사상으로 좌우연합에 의한 정부 수립을 시도도 해보지 않고 좌절시킨 주인공으로, 독립운동 과정에서는 독선과 독단으로 초대 임시정부 대통령직에서 탄핵당한 인물로, 또한 건국 후에는 장기집권을 통해 민주주의를 유린했다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이승만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우리 역사의 소중한 자산으로 계승하고, 부정적인 평가는 민족의 미래를 위한 자성의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승만은 1875년 황해도 평산에서 출생해 1965년 7월 하와이의 미 육군병원에서 사망할 때까지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우남에게 일본 제국주의는 결코 수용할 수 없는 악의 화신이었다. 그는 자신만이 나라를 구할 수 있다는 강한 근왕의식(勤王意識)을 가지고 있었다. 전통적인 왕족의 후예로서 자부심이 강한 우남에게 조선 왕조를 멸망시킨 일제는 반드시 타도해야 할 민족의 원수였다.

    그는 성인이 되면서 일제에 대한 적개심을 더욱 구체화했다. 조국을 수호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독립협회에 가담해 애국계몽운동인 민권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독립협회가 개최한 만민공동회에서 가장 유명한 연사였다. 독립협회가 정부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하자 이를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한 조선 왕조는 1898년 12월 독립협회에 해산명령을 내렸다.

    그 한 해 전인 1897년 구속된 이승만은 1904년 고종의 특사로 석방될 때까지 약 7년간 수감생활을 했다. 이때 저술한 것이 유명한 ‘독립정신’이다. 여기서 이승만은 “세계와 마땅히 통해야 한다”며 외교론을 강조했다. 그의 독립운동 방법론은 외교론으로 집약된다. 무력 투쟁론에 반대한 그는 국제외교를 통해 각국의 동정과 지지를 얻는 방법이 최선의 길이라고 믿었다. 아울러 그는 공산주의를 철저히 배격했다. 공산주의자는 타도의 대상이지 결코 대화나 협상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해외 지도자들의 쓸쓸한 귀국, 멀어진 자주독립의 꿈

    1945년 10월16일 귀국한 이승만이 이튿날 조선총독부 앞에서 대중연설을 하고 있다.

    이승만은 해방정국에서도 공산주의와 타협하는 데 절대 반대했다. 반면 미국은 좌우 합작 내지 연합노선으로 정부를 수립하는 정책을 추구하고 있었다. 1947년 3월 트루먼 독트린으로 미국이 소련에 대해 결별을 공식 선언한 후 좌우연합정부를 수립하겠다는 정책을 바꿔 한반도 문제를 유엔으로 이관할 때까지는 이승만도 미국의 배척 대상이었다.

    이승만은 미국의 대(對)한반도 정책을 불신했고 1946년 6월의 정읍 발언에서 드러냈듯이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을 강력히 주장했다. 소련과의 협조는 애당초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이승만은 선수를 쳐 미국을 압박했다. 이처럼 그는 해방정국에서 반소반공 노선을 천명했다. 김구의 좌우연합 노선에 불만을 품었던 이승만은 심지어 임시정부에 대해서도 “이미 좌경화돼 신생 독립국의 주체가 될 수 없다”고 비판했다.

    이승만은 임시정부 요인들이 자기보다 먼저 귀국해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 미국 당국에 강력히 요청해 1945년 10월16일 맥아더의 군용기를 타고 해외에 있던 민족진영 3영수 중 가장 먼저 입국했다. 귀국 일성으로 “나는 앞으로 우리의 자주독립을 위해서 일하겠거니와 싸움을 할 일이 있으면 싸우겠습니다”라고 한 데서 알 수 있듯이 그는 미국의 우산을 거부하고 자주독립의 기치를 내걸었다. 그에 따라 미국과 미 군정은 그를 경계했고 타협을 모르는 고집불통의 인물로 인식했다.

    김구의 이상론과 이승만의 현실론

    해외정치지도자의 입국과정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해방된 조국의 미래가 결코 밝지만은 않았다는 점이다. 미소 열강의 분할정책은 우리 민족에게 광복의 기쁨을 온전히 누릴 여유를 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광복의 순간을 분단국가로 나아가는 출발점으로 만들어버렸다. 우리 민족의 의지와 관계없이 이뤄진 분단은 민족 내부의 분열과 결합돼 더욱 공고해졌다. 해외 정치지도자들이 해방된 조국 땅에 정부 요인의 자격으로, 지도자의 자격으로 입국할 수 없었던 비극은 우리 민족의 비극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들은 민중을 등에 업고 자주독립을 원한 반면 미 군정은 미국에 우호적인 정부 수립을 원했기에 양자의 충돌과 갈등은 운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해외 정치지도자들의 입국과정에서 또 하나 주목할 것은 김구의 이상론과 이승만의 현실론의 대비다. 이승만은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할 때부터 좌파와의 협조를 거부하는 독립노선을 추구했다. 이러한 독립노선은 자연스럽게 단호한 반소반공 정책으로 나타났다.



    반면 김구는 자유주의자로 자처했지만 민족의 역량을 결집하기 위해서는 이념의 굴레에서 벗어나 좌우가 동반자로서 한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두 사람이 가진 이상과 현실의 충돌은 해방정국의 혼란상을 대변하는 것으로 이후 한국 현대정치사에 대한 규제력으로 작용했다.

    해외 정치지도자들의 입국과정을 규명하면서 새삼 느낀 점은 비록 국제사회가 탈냉전의 틀에서 화해와 협력을 지향하고 있지만 민족의 자주적인 역량을 구축하는 것은 시대를 초월한 생존전략 또는 발전전략이라는 것이다. 오랫동안 망명생활을 했던 애국지사들의 입국과정을 보면서 그들의 후손이자 민족의 일원으로서 깊은 자괴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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