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4월호

허준영 전 경찰청장 격정 토로

“임기제 청장 내쫓은 잘못된 정치, 내가 바로잡겠다”

  • 조성식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airso2@donga.com

    입력2006-03-27 10: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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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준영 전 경찰청장 격정 토로
    세계적으로 알려진 이탈리아 칸초네 ‘오 솔레미오’. 고등학교 음악시간에 배운 것으로 아련히 기억되는 이 노래를 지난 두 달간 아마 열댓 번은 들었던 것 같다. 허준영(許准榮·54) 전 경찰청장의 휴대전화 컬러링이기 때문이다. 허 전 청장은 지난해 연말 시위농민 사망사건으로 사퇴한 후 언론 접촉을 피해왔다.

    3월초, 그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인터뷰가 아니라는 조건이 붙은 이날 대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짐작한 대로 그가 ‘오 솔레미오’를 무척 좋아한다는 사실. 지난해 10월 리언 러포트 주한미군사령관이 초대한 만찬석상에서도 이 노래를 ‘답례’로 불러 박수를 받았다고 한다. 그날 그를 더 우쭐하게 한 것은 “그 어느 때보다도 잘 불렀다”는 부인의 칭찬. 게다가 ‘앙코르’ 요청에 가사가 어렵기로 유명한 ‘My Favorite Things’(뮤지컬 ‘사운드 오브 뮤직’ 중 한 곡)를 불러 또 한 번 미국인들을 놀라게 했다나.

    그는 2월말 서울 여의도에 있는 14평짜리 오피스텔을 임차했다. 사무실 겸 사람 만나는 장소다. 이곳에서 3월6일, 4시간여에 걸쳐 인터뷰가 진행됐다.

    집기래야 4인용 식탁과 볼품없는 작은 소파가 고작인 이 비좁은 사무실은 을씨년스럽기 그지없었다. ‘꽃샘추위’가 어른거린 탓인지 실내 공기도 싸늘했다. 단정한 양복 차림의 그에게서 원칙과 규정 준수가 몸에 밴 공무원 특유의 반듯함이 느껴졌다.

    그는 인터뷰 내내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았으며 기자와 마찬가지로 한 번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얼굴 표정은 밝았으나 약간 긴장된 기색도 비쳤다. 단련된 이마와 야문 눈맵시는 그가 유도 유단자에 만능 스포츠맨이라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줬다. 고집도 셀 것 같고.



    “대답, 그렇게 하는 게 아니다”

    묵직한 목소리엔 절제된 뜨거움이 배어 있었다. 그는 작심한 듯 사퇴 비화를 공개하면서 청와대에 대해 강한 유감을 표출했다. 아울러 시위 대응방식, 수사구조 개혁 등 경찰 현안에 대한 소신과 참여정부에 몸담았던 고위 공직자로서의 소회, 나아가 정계 진출의 포부까지 밝혔다. 그에 덧붙여 경찰총수에 이르기까지 삶의 행로도 반추했다.

    사퇴 후 그는 모처럼 가족과 함께 오붓한 시간을 보냈다. 터키, 이집트, 그리스 3개국을 8박9일로 돌아보는 단체관광도 했고, 중국과 일본에도 다녀왔다. ‘10년 후의 한국’ 등 책도 여러 권 읽었다.

    “그동안 일요일 개념 없이 살아오긴 했어도 짬을 내 스키도 타는 등 노는 것은 그런 대로 흉내를 내봤거든요. 그런데 요즘 ‘내가 노는 법과 쉬는 법의 차이를 몰랐구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진정한 휴식이 뭔지 몰랐다는. 특별한 활동 없이 쉬면서 사색하는 지금의 시간이 굉장히 소중하게 여겨집니다.”

    그는 요즘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직업안내용 책 집필을 구상하고 있다고 했다.

    “우리나라는 청소년에 대한 직업 오리엔테이션이 제대로 안 돼 있어요. 외교관(그는 외무고시 출신으로 외교관 생활을 하다 경찰에 입문했다)과 경찰관 경험을 토대로 청소년에게 직업선택에 대한 지침을 주는 책을 쓰고 싶습니다. 어린 시절 동네 아저씨나 아주머니들이 ‘너 커서 뭐가 될래?’ 물으면, 다른 애들은 ‘대통령’이라고 했는데 나는 ‘교통순경이 되겠다’고 했어요. 어느 날 어머니가 지나가다 그 얘길 듣고 저를 한쪽 구석으로 끌고 가서는 ‘대답, 그렇게 하는 게 아니다’고 주의를 줬어요. 대통령이든 육군대장이든 교통순경이 ‘서라’ 하면 서야 하니 교통순경이 최고라고 여기던 기억이 납니다.

    고교 시절엔 경찰서장, 외교관, 검사 등을 염두에 뒀어요. 그런데 막연하게만 생각했지, 그 직업들의 ‘데일리 워크’에 대해선 전혀 몰랐어요. 어떤 통계를 보니 직장인 82%가 자신의 직장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더군요. 그건 개인의 불행이자 국가적인 불행이지요. 그런 점에서 경찰이나 외교관의 길은 이런 것이다, 내가 해보니 이런 점이 좋고 이런 애로점이 있더라 하는 생생한 정보를 주고 싶습니다.”

    그간 언론 접촉을 피한 이유에 대해선 이렇게 설명했다.

    “저의 갑작스러운 사퇴로 경찰이 큰 충격에 빠졌기 때문에 조직이 안정되기 전까지는 언론에 나오는 게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신임 경찰청장에 대한 국회 청문회 절차도 남아 있었고.”

    -한나라당에서 경북도지사 공천을 제의했다는 소문이 들리던데요.

    “제의라기보다는 그런 논의가 있었는데 결정하진 못했습니다. 정치 자체에 대해 아직 고민하는 중이라…. 만약 순조롭게 (경찰청장직을) 끝마쳤다면 어찌됐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어요. 대학 강단에서 후배를 양성한다든지, 통일·외교에 대한 관심이 크니 외교관 생활을 한다든지 했겠지요.”

    “한국 소도 웃고 외국 소도 웃을 일”

    자연스럽게 화제가 그의 사퇴 얘기로 넘어갔다.

    “그 사건(시위농민 사망)에 대해 책임이 없다는 게 아니라 경찰청장이 책임지고 물러날 사안은 아니었다고 보거든요. APEC 정상회담이 (지난해) 11월18일에 열렸는데, 3일 전인 15일에 서울에서 농민집회가 있었습니다. 경찰은 APEC을 정상적으로 치러야 하고 쌀 개방에 따른 농민들의 안타까운 심정도 달래야 하는 이중의 부담 속에 시위 진압에 나섰어요. 그날 경찰관 218명이 다쳤는데 그중 30명이 골절상 이상의 중상이었습니다. 농민은, 우리가 파악하기로는 30명가량 부상을 당했어요. 농민단체는 113명이라고 발표했지만. 그것을 인정하더라도 경찰관이 2배나 더 부상당하면서 불법 폭력시위를 관리하는 나라가 세상에 어디 있냐는 거죠. 경찰이 그만큼 농민의 안타까운 마음을 헤아려 인내로 대처했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시위농민들 중에 건강상태가 좋지 않은 사람과 70대 노인이 돌아가셨습니다. 그것도 과거 이한열 사건처럼 경찰의 명백한 과실로 사망한 것도 아니고, 집회 도중 경찰에게 당한 것으로 추정되는 부상의 후유증으로 돌아가신 상황이거든요. 이한열 사건 때는 현장 지휘관인 서장 선에서 문책을 받았어요. 그런데 그보다 책임이 덜한 상황에서, 그것도 정치적인 영향을 받지 말라는 취지로 임명한 임기제 청장을 내몬 것은 이 나라의 정치가 잘못된 탓이라고밖에 볼 수 없죠. 이것이 제가 정치를 바로잡아야겠다는 결단을 내리게 된 계기입니다.

    제 인생의 1막은 마감했어요. 이제 2막이 시작되는데, 내가 만약 정치를 한다면 품위유지나 하는 그런 정치는 하지 않겠다, 그간의 시행착오를 바탕으로 우리 정치가 좌도 우도 아닌 바른 길로 가도록 온몸을 던져야 하지 않겠나, 그런 쪽으로 생각이 기울고 있습니다. 다만 고위공직자를 지낸 사람이 정치를 한다는 게 쉽지는 않겠구나 하는 생각은 들어요. 제가 나름대로 의협심이나 정의감이 강한데, 소신대로 정치를 할 수 있으면 성공하는 것이고 기존 정치 풍토에 동화되면 실패하는 건데… 하여간 상당히 조심스럽습니다.”

    -물러난 이유를 수긍할 수 없다는 거죠?

    “소가 웃을 일이죠. 한국 소도 웃고 외국 소도 웃을 일이죠. 내가 아는 외국 사람들은 다 이해하지 못하더군요. 12월24일인가 국가인권위원회에서 그 사건에 대한 조사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인권위 발표에 내심 신경이 쓰이더군요. 국가기관은 현실에 바탕을 둔 이상을 추구해야 하는데, 인권위는 그렇지 않은 결정을 내릴 때가 많았거든요. 그런데 그날 발표를 보니 우리가 보기에 일부 지나친 면도 있지만, 실무자 선에서 과잉진압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쪽으로 결론이 나기에 대체로 수긍할 만했습니다. 이것으로 일단락되겠구나 싶었지요.

    (12월)27일 11시에 사과 기자회견을 했지요. 경찰의 모든 허물은 청장의 책임이다, 지휘관으로서 늘 부하의 잘못에 대해 책임진다는 자세로 일해왔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물러나는 건 옳지 않다, 이런 사건에 대해 국가 공권력의 상징인 경찰 사령탑에게 책임을 물으면 국가와 대통령의 권위가 떨어진다고. 경찰청장의 책임은 곧 대통령의 책임이 아니겠습니까. 최선의 대책은 실무자에게 책임을 묻고 청장은 평화적인 시위문화가 정착되도록 노력하는 것이고 유가족에게 사과하는 것이죠. 그 정도로 사태를 마무리하려고 했어요.”

    그에 따르면 12월27일 아침 청와대 모 수석이 전화를 걸어와 사과 기자회견을 하지 말고 곧바로 사퇴할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어떻게 그 당으로 출마하느냐”

    -아까 말씀하는 걸 들으니 국회의원 출마도 고려하는 것 같습니다.

    “기회는 얼마든지 있을 것 같더라고요. 그런데 여건이 맞아야 하니. 어떤 사람이 모 지역에서 저에 대한 인지도를 조사한 결과를 알려줬는데, 55%라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뭐 이리 낮아 정치를 하겠나’ 했더니 깜짝 놀라더라고요. ‘이 정도면 엄청나게 높은 수치’라며. 보통 10여 퍼센트밖에 나오지 않는다고.”

    -여권에서도 도지사 출마를 권유한다죠?

    “열린우리당 중진의원과 청와대측이 만나자고 해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때마다 출마하지 않겠다고 분명히 말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내가 대구·경북 지역에서 열린우리당 후보로 나간다는 소문이 도는 거예요. 나를 아는 많은 사람이 ‘실망스럽다’고 하더군요. 어떻게 그 당으로 출마하느냐, 쓸개도 없느냐고.”

    -열린우리당 간판으로 나갈 생각은 거의 없다고 보면 맞나요.

    “그거는 뭐, 이념을 떠나 도리가 아니지 않느냐 생각해요. 그쪽에서 나한테 제의하는 것 자체가. 잘하던 경찰청장을 내칠 땐 언제고 이제와 (도지사) 나가라는 게 말이 됩니까.”

    -말씀을 들어보니 한나라당으로 가실 것 같네요.

    “한나라당도 아직 정신을 못 차렸어요. 제 철학과 맞는 정치집단과 함께할 생각입니다. 어느 정도 경력이 쌓이면 기성 정치에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사람들과 새로운 정치를 해보고 싶어요. 주변에서 무소속을 권유하는 사람도 있어요.”

    -결단하는 데 마지막까지 걸리는 게 무엇입니까.

    “단순히 직업으로서 정치인이 되는 게 아니라 어떤 철학을 갖고 정치를 할 것인가, 내가 국민에게 기꺼이 봉사할 수 있는 자세가 돼 있는가, 이런 고민이죠. 인생을 길게 보고 판단하려 합니다. 국민이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보는 경찰청장과 달리 정치인은 곧바로 비판의 대상이 되거든요. 국민에게 희망을 주고 큰 선물을 주는 정치인이 돼야지, 그렇고 그런 싸가지 없는 정치인이 돼서는 안 되겠다는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거죠.”

    인터뷰가 끝난 후에도 한 가지 의문이 머릿속을 어슬렁거렸다. 그가 정치를 하겠다는 뜻은 분명히 밝히면서도 언제 어떤 방식으로 입문할지에 대해선 여운을 남긴 탓이다. 그의 가치관이나 기질로 봐선 정치를 한다면 아마도 뚝심 있게 잘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경찰을 그토록 사랑하는 그가 임기를 채우고 정상적으로 물러났더라면 그 자신을 위해서나 국가를 위해서나 더 좋았을 거라는 아쉬움이 들었다. 인터뷰는 재미가 덜해지겠지만.

    “우리는 청와대와 바로 통해”

    허준영 전 경찰청장 격정 토로

    지난해 12월30일 경찰청에서 열린 허준영 경찰청장 퇴임식. 경찰 직원들은 허 청장을 성원하는 내용의 현수막을 내걸고 기립박수를 쳤다.

    “내가 오전에 사퇴하면 오후에 대통령이 대(對)국민 사과성명을 발표한다는 시나리오였어요. ‘대통령의 뜻이냐’고 물었죠. 그건 아니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이건 대통령이 사과성명을 낼 사안이 아니다’라며 거부했습니다. 나중에 대통령을 만나서도 똑같은 얘기를 했어요.”

    12월29일 사퇴한 그는 이틀 뒤인 31일 노무현 대통령의 청와대 만찬초대에 응했다. 부인을 동반했는데, 대통령 부부와 문재인 민정수석이 함께한 자리였다.

    “솔직히 만나고 싶지 않았어요. 하지만 국가원수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에 갔죠. 수사구조 개혁의 필요성을 얘기하고, 제 사퇴 건에 대해선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열어 사과할 사안이 아니었다’고 말씀드렸어요. 국무회의나 수석보좌관회의에서 유감을 표명하는 정도가 옳지, 불법 시위과정에 발생한 일에 대해 국가원수가 대국민 사과를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그는 “대통령이 ‘미안하다’는 얘기를 하지 않던가”라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예전엔 운동권이 야당과 연결돼 있었는데, 요즘엔 청와대와 통하니 경찰이 참 난감합니다. 운동권이 뭡니까. 좀 거칠게 말하자면, 평생 경찰을 적으로 여겨온 사람들 아닙니까. 예전엔 시위를 하면 정보형사가 개입해 협상이 가능했어요. 예컨대 시위하다 사람이 죽은 경우 가장 큰 쟁점은 장례비용이거든요. 경찰 쪽에서 ‘우리가 모금을 하든지 해서 장례비는 대주겠으니 처벌은 서장 선에서 끝내자’고 제의하면 시위대측도 대체로 받아들이곤 했지요.

    그런데 지금은 그런 게 안 먹히는 분위기예요. 경찰에서 그런 얘기를 하면, ‘야 임마, 우리는 청와대와 바로 통해’ 이렇게 말해버리거든요. 그러니 운동권 목소리가 증폭되죠. 제가 퇴임사에서 ‘새해에는 목소리 큰 사람이 국민의 고막을 찢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말한 것은 운동권을 염두에 둔 것이었어요. 전날 밤에 퇴임사를 썼는데, 애초엔 ‘운동권’이라는 표현을 썼다가 ‘목소리 큰 사람’으로 바꾼 겁니다. 요즘 사방에 운동권이 꽉 차 있는데, 그렇게 말하면 자칫 운동권을 매도하는 걸로 비칠까봐….”

    12월27일 허 청장은 청와대측이 제시한 ‘사퇴 시나리오’를 거부하고 사과 기자회견을 강행했다. 청와대 분위기를 감지한 기자들이 사퇴 여부를 묻자 “사퇴는 없다”고 못박았다. 이날 오후 노 대통령은 기자회견을 열고 사과성명을 발표했다.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경찰청장 사퇴 문제에 대해 “본인이 알아서 결정할 일”이라고 말했지요.

    “사퇴를 종용하는 얘기나 다름없었지요. 당시 민노당에서 ‘탄핵’ 운운하며 압박했는데,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 진짜 탄핵을 하는지 지켜보자. 그렇게 해서 이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부각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죠. 이번 기회에 불법폭력시위를 뿌리뽑을 수만 있다면 탄핵을 당해도 괜찮다고. 탄핵요건도 안 되지만 설령 정치권에서 밀어붙이더라도 헌법소원을 내는 방안이 있을 테니. 그렇게 마음을 다잡았는데, 다음날 청와대에서 만나자는 연락이 온 겁니다.”

    “처음부터 대통령 뜻이라고 했으면…”

    다음날 시내에서 만난 청와대 모 수석은 전날 사과 기자회견 취소를 요구한 수석과는 다른 사람이었다(허 전 청장은 기자에게 두 사람의 이름과 직책을 밝혔으나 기사에서는 밝히지 말아달라고 했다).

    “협조해달라고 간곡히 부탁하더군요. ‘민노당을 끌고 가야 한다’ ‘새해 예산안을 통과시키는 데 민노당 협조가 필요하다’고. 대통령이 국정운영에 막대한 부담을 느낀다니, 국가공무원으로서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 때문에 국가예산이 통과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마지막 도리를 다한 거죠.”

    -그 자리에서 바로 사퇴 의사를 밝혔나요.

    “그렇죠. 그런데 시점은 좀 조절하려 했어요. 12월30일까지 예산안이 통과되면 되니까, 30일 오전에 사퇴해도 늦지 않겠다는 생각이었죠. 곧바로 물러나지 않음으로써 내가 생각하는 길이 바르다는 것을 좀더 알리고 싶었던 겁니다. 그런데 그 수석이 다음날 전화를 걸어와 ‘빠른 협조’를 부탁했어요. 상황이 너무 좋지 않으니 가급적 빨리 사퇴해줬으면 좋겠다고. 한나라당이 (사학법 개정 문제로) 장외투쟁을 벌이는 탓에 민노당이 캐스팅 보트를 쥐고 있던 거지. 그래서 결단을 내렸죠.”

    -대통령의 뜻이라고 하던가요.

    “그건 별도로 확인하지 않았어요. 수석이 말하는데, 누구 뜻이냐고 물어보는 게….”

    -하긴 그 수석 정도면 대통령의 뜻이나 마찬가지겠네요.

    “그렇죠.”

    -그래도 대통령의 뜻을 직접 확인하고 싶지 않았나요.

    “그건 도리가 아닌 것 같아서요.”

    -처음 다른 수석이 전화했을 때는 물어보셨다면서요.

    “그때는 당연히 물어봤죠. 처음부터 대통령 뜻이라고 얘기해줬다면, 제가 그렇게 버티지도 않았을 텐데….”

    -결국 정치논리로 그만두신 거네요.

    “그렇죠. 내가 ‘정치를 하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굳히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된 셈이지요.”

    -“청장의 거취는 본인이 알아서 결정할 일”이라는 대통령의 말을 들었을 때 섭섭했겠습니다.

    “당연하죠. 그런데 대통령 뜻이라기보다 참모진 의견이라고, 옆에서 보좌를 잘못하고 있다고 생각했죠.”

    -당시 청와대의 처지는 이해가 되십니까.

    “수용할 수 없죠.”

    홍콩 경찰의 권위

    그가 계속 버티었다면 정국은 어떻게 굴러갔을까. 청와대는 어떤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었을까. 그가 대답할 성격의 질문은 아니지만, 그의 견해가 궁금해 물어봤는데, 그는 거기에 대해선 말하지 않고 시위문화에 대한 소신을 거듭 밝혔다.

    “우리나라에서는 해마다 연인원 300만명이 시위를 합니다. 전국 어디서든 하루에 1만명씩은 시위를 한다는 얘기죠. 이런 나라가 세계에 없습니다. 폭력시위든 평화시위든 시위 자체를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고요. 국가적으로 얼마나 큰 낭비입니까. 시위로 해결될 일이면 시위하기 전에 해결해주든가, 시위로 해결되지 않을 일이라면 시위를 해도 들어주면 안 되죠.”

    -선진국에서도 시위는 자주 일어나죠. 크게 할 때도 있고.

    “우리같이 밥 먹듯이 하진 않지요.”

    -경찰의 시위진압 방식에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지 않습니까.

    “지금 최루탄을 쓰지 않고 있잖아요. 안 쓰겠다는 결단은 쉽지만 다시 쓰겠다는 결단은 굉장히 어렵다고. 시위진압의 기본 원칙은 격리입니다. 시위군중과 경찰이 몸싸움하는 사태가 일어나선 안 되거든요. 최루탄 사용은 그런 격리의 원칙에 맞는 거죠. 그런데 최루탄을 안 쏘니 시위대가 경찰에 근접해 물리력으로 맞섭니다. 저쪽에선 쇠파이프와 죽창을 들이대는데 경찰은 진압봉이 고작이에요. 무력 자체에서 경찰이 약한 겁니다. 이런 식으로 하면 앞으로도 부상자가 속출하고 사망자도 다시 나올 겁니다.”

    -경찰의 과잉진압이나 몸싸움에서 빚어지는 감정적인 대립이 과격시위를 부추긴다는 지적이 있는데요. 방패로 내려찍는다든지….

    “죽창과 쇠파이프를 휘두르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을 일이죠. 원인이 그쪽에 있는 거예요. 방패를 들고 있으면 방패가 워낙 무거워 경찰봉을 쓸 수가 없어요. 그래서 경찰봉 쓰는 대원은 뒷줄에 따로 있어요. 자기방어 차원에서 방패를 휘두르는 거예요. 내 사퇴를 계기로 평화로운 시위문화가 정착됐으면 합니다.”

    그는 과격시위에 따른 경찰의 ‘수난’을 공권력 권위의 실추로 간주했다.

    “현재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가 공권력에 권위가 없다는 점이에요. 경찰관 권위가 떨어지니 국가 공권력 권위가 떨어지죠. 스티커 하나 발부하는 데 30분씩 실랑이해야 하고…. 국가적으로 엄청난 비용 손실이지요. 공권력의 최선봉인 경찰이 이러니 청와대 권위도 떨어지죠. 정책을 발표해도 국민이 잘 믿지 않고.”

    허준영 전 경찰청장 격정 토로

    “경찰은 경찰답게 행동하는 것이 정부에 보탬이 되는 거지요. 그렇지 않으면 국민이 얼마나 불안하겠습니까.”

    그러면서 홍콩 주재관 시절의 경험담을 들려줬다.

    “홍콩에, 스탠리마켓이라고 우리나라의 이태원 비슷한 곳인데, 주차질서가 엉망이었어요. 차량대수로만 봐도, 우리나라 같으면 교통순경 열 명이 달려들어야 정리되겠구나 싶었지요. 그런데 모터사이클을 탄 경찰관 한 명이 나타나자마자 차들이 알아서 설설 기면서 금방 정돈되더라고요. 홍콩 경찰 한 명이 한국 경찰 열 명 몫을 하는 거죠. 이 얼마나 국가예산을 효과적으로 절감하는 일입니까. 요즘 우리 사회를 보며 가장 안타까운 게 바로 기본적으로 필요한 권위와 질서가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봅니까.

    “권위주의 정부에 대항하던 운동권 문화의 영향도 있지요. 민주화한 세상에서는 없어져야 하는데, 관성이 붙어 공권력에 저항하는 행태가 답습되고 있는 거죠. 소리 지르고 폭력에 호소하는 것이 정당화되는…. 문화원에 불 지르고 했던 일들이 다 사면받고 있잖아요. 이런 풍토가 지속돼서는 안 돼요. 이제는 사회가 민주화됐으니 좌로도 우로도 치우치지 말고 똑바로 가야죠.”

    “편법 쓸수록 권위 약해져”

    -시위할 때 보면 경찰 저지선을 두고 자주 충돌하는데, 이를 막을 방법이 없을까요.

    “폴리스라인은 절대 넘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인식해야 하는데, 우리 시위대들은 그걸 무너뜨려야 언론에도 보도되고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죠. 그렇게 억지를 부리는데, 실제로 억지 부려서 이기는 경우가 많거든요. 시위한다고 들어줄 것이라면, 평화적으로 얘기할 때 들어줘야죠. 경찰이 스스로를 ‘하수종말처리장’이라고 자조적으로 표현하지 않습니까. 농민시위만 해도 그래요. 진작 농정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대비했어야죠. 왜 모든 부담을 경찰에 떠넘기느냐 말이죠.”

    -한때 시위대 앞에 여경을 배치하는 방안도 선보였는데요.

    “쇼이고 이벤트죠. 일종의 편법인데, 공권력이 편법을 쓰면 점점 권위가 떨어지죠. 원칙에 충실하고 시스템으로 해결해야지. 진짜 열 받은 사람들과 마주치면 여경이라고 해결되겠습니까.”

    -청와대측에선 사퇴를 압박한 적이 없다고 하던데, 사실과 다른가 봅니다.

    “뭐, 궁극적으로는 제가 결단을 내렸으니까. 어쨌든 제가 무슨 뇌물을 먹은 것도 아니고, 여자 성추행한 것도 아니고, 파업할 때 골프 친 것도 아닌데, 임기제 청장의 취지를 살려야지….”

    지난해 12월 그의 사퇴 여부가 정치적 쟁점이 됐을 때, 경찰 내부에서는 그가 농민사망사건 이전에 이미 몇 가지 사안을 두고 청와대와 갈등을 빚어 사퇴 압력을 받아왔다는 얘기가 돌았다.

    기자가 파악한 대표적인 갈등 사안은 세 가지다. 첫째는 이른바 9·15 공청회. 지난해 9월15일 한나라당 이인기 의원 주도로 국회에서 열린 수사권조정 공청회에 2000여 명의 전·현직 경찰관이 참석한 사건이다. 그 자리에는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참석해 박수를 받았다. 둘째는 그해 10월 허 청장이 국회 정보위 국정감사에서 강정구 교수 신병 처리에 대해 ‘구속 의견’을 밝힌 사건. 마지막으로 그해 11월 경찰청 지시로 일선 경찰서에서 검찰의 피의자 호송지시를 거부해 검찰의 반발을 부른 사건이다.

    청와대는 이 사건들이 발생할 때마다 허준영 경찰청장에게 관련 부서 책임자 문책을 요구했는데 허 청장이 거부했다는 것이 갈등설의 요지다. 기자는 이와 관련해 지난 1월 청와대 민정수석실에 질의한 바 있다. 문재인 수석은 답변을 통해 갈등설과 농민사망사건 이전에 사퇴를 압박했다는 의혹에 대해 전면 부인했다. 또한 세 사건과 관련해 경찰에 경위 파악을 지시한 적은 있지만 문책을 요구한 적은 없다고 설명했다.

    “청와대가 섭섭해할 일 아니다”

    허 전 청장의 얘기는 좀 달랐다. 세 사건 중 두 사건에 대해선 ‘사실상’ 문책을 요구했고 자신이 이를 거부했다는 것. 먼저 9·15 공청회.

    “그런 것(문책 요구) 없었어요. 그 전에도 비슷한 내용의 공청회가 여러 번 있었는데, 한나라당 의원이 주도한 것이라 그런지 그날 공청회 모양새가 안 좋았던 것 같아요. 하지만 경찰관들이 공청회에 몰려간 것은 특정 정당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에요. 제가 대통령께도 말씀드렸지만, 수사권 조정이 경찰, 검찰의 영역 다툼이 아니라 국가 권력구조 정상화의 문제라는 의식을 가진 경찰관들이 자발적으로 참석한 것입니다.”

    강정구 교수 구속의견 발언과 관련해서는 자세하게 답변하며 공안(公安) 문제에 대한 소신을 피력했다.

    “그게 제 사퇴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국가경영에 동참하는 차원에서 그런 발언을 했고, 그것이 정부에도 득(得)이 됐다고 봐요. 경찰청장이 구속의견을 전달하고, 검찰총장이 구속방침을 밝히고, 법무부 장관이 불구속 원칙을 천명했습니다. 또 사회단체들이 서로 다른 목소리를 냈어요. 법원이 판단 기준을 마련하는 데 이런 다양한 시각이 보탬이 되는 거죠.”

    “주의를 줘야 하지 않겠나”

    -공안사건에 대한 구속수사 관행이 문제가 됐었죠.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할 거냐, 아니면 구속해서 재판할 거냐는 판사가 결정할 일이라고 봐요. 다만 경찰은 최일선에서 공권력을 행사하는 기관이기 때문에 현존 질서를 유지하고 사회에 경종을 울린다는 취지에서 구속의견을 밝힌 거지요. 그 사람이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체제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면서 인천의 맥아더 장군 동상 훼손을 정당화하는 논리를 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수사기관에서 구속의지를 천명하고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니 동국대에서 직위해제가 되는 등 제동이 걸린 거죠. 만약 경찰부터 불구속한다고 나가떨어졌다면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마구 떠들고 다닐 것 아닙니까. 그 경우 사회적으로 치러야 할 비용이 얼마나 크겠어요. 경찰은 경찰답게 행동하는 것이 정부에 보탬이 되는 거지요. 그렇지 않으면 국민이 얼마나 불안하겠습니까.”

    -사전에 청와대 기류를 살피지는 않았습니까.

    “청와대 기류를 모르진 않았어요. 그래서 사실 정보위 감사에서 정형근 의원이 그 문제에 대해 질문했을 때 될 수 있으면 내 입으로 그런 얘기는 안 하려 했어요. 경찰에 수사권도 없기 때문에. 그런데 정 의원이 ‘경찰이 수사결과를 토대로 검찰에 제시할 의견이 뭐냐’고 자꾸 묻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구속’이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그걸 청와대에서 섭섭하게 생각했다면, 청와대가 잘못 판단한 거죠. 공안사건의 경우 수사 초기부터 검찰과 협조하게 돼 있고 그 문제에 대한 판단도 이미 검찰과 조율한 상태였거든요.”

    -그 일에 대해 청와대에서 유감을 표시했지요?

    “나한테 직접 뭐라 하지는 않았어요. 다만 서울청 보안계에서 검찰에 사건을 송치할 때 ‘구속의견’을 제시한 것을 두고 ‘실무 책임자와 서울청장한테 주의를 줘야 하지 않겠냐’고 말한 적은 있습니다.”

    -사실상 문책 요구였네요.

    “문책을 요구하려 얘기를 꺼낸 것 같은데, 내가 앞서 말한 것과 같은 논리를 전개하니까 톤다운 된 것 같아요. ‘주의’라고 표현하더라고. 묵살했지요.”

    -경찰에 수사권도 없는데, 굳이 ‘구속 의견’을 밝힌 건 신중치 못한 태도가 아니었나요. ‘적절한 방법으로 수사하고 있다’든가….

    “경찰청장으로서 그런 사람은 엄하게 다스리겠다는 의지를 보여줄 필요가 있었어요. 그대로 두면 동조하는 무리 때문에 치안에 부담이 되거든요.”

    지난해 10월 천정배 법무부 장관의 ‘지휘권 발동’ 파문으로 강 교수 구속 여부가 사회적 논란거리로 떠올랐다. 당시 보수 언론은 구속·불구속 수사의 의미를 따지는 법적 논쟁보다 그것이 여권의 방침이라는 점에 주목한 정치적 논쟁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

    “내가 판사라면 구속영장 발부 안할 것”

    그런데 당시 ‘중앙일보’ 여론조사에 따르면, 국민 여론은 법무부 장관의 지휘권 발동에는 공감하지 않으면서도 강 교수의 신병 문제에 대해선 ‘관대한’ 태도를 보여 눈길을 끌었다. ‘불구속 수사’ 의견이 31%에 이르고, 아예 ‘수사대상이 아니므로 학문적 토론에 맡겨야 한다’는 견해가 33%나 돼 ‘구속 수사’ 의견(34%)를 압도했다. 이 얘기를 꺼내자 허 전 청장은 유연한 사고(思考)를 드러냈다.

    “개인적인 의견을 말하자면, 제가 만약 판사라면 구속영장이 청구될 경우 영장을 발부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경찰은 경찰의 본분이 있는 거죠. 자유민주주의체제를 부정하는 사람을 제재하는 것이 경찰이나 검찰의 도리죠. 그리고 경찰이나 검찰은 (구속 여부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는 것에 지나지 않아요. 최종 판단은 법원에서 하니.”

    -같은 의견 제시라도 경찰과 검찰은 경우가 다르죠. 경찰은 그야말로 의견 제시에 지나지 않지만, 수사권을 가진 검찰이 구속 의지를 강하게 밝히는 것은 구속영장 발부에 영향을 끼친다고 봐야죠.

    “그건 그렇죠.”

    허준영 전 경찰청장 격정 토로

    고교시절부터 경찰서장이 되고 싶었다는 허준영 전 경찰청장은 “청장까지 지냈으니 인생 목표를 초과 달성한 셈”이라고 했다.

    -그런데 청와대는 강 교수 구속 의견을 제시한 경찰 보안라인 책임자를 무슨 명분으로 문책하겠다고 한 겁니까.

    “문책은 할 수 없지요. 다만 검찰에 송치할 때 ‘경찰 의견은 불구속’이라고 했어야 한다는 거지.”

    -어떤 기준으로요?

    “인권, 불구속 수사 원칙… 뭐 그런 논리지요.”

    그는 “불구속 수사 관행이 자리잡아야 한다는 건 옳은 얘기긴 한데…” 하고 말꼬리를 흐렸다.

    -과거 공안사건들에서 구속수사 관행의 오점이 컸잖아요. 악용하는 사례도 많았고.

    “그런 것이 쌓여 지금에 이르러 어떤 원칙이 마련된 거지요. 얼마 전 대법원장이 ‘압수수색 영장도 신중하게 발부하라’고 말했던데, 저는 올바른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강정구 교수 사건 때 천정배 장관도 제가 보기엔 잘 판단했어요. 법무부 장관의 도리를 다한 거죠. 김종빈 검찰총장은 검찰총장의 도리를 다한 것이고. 다만 그것 때문에 김 총장이 물러날 필요는 없었다고 봅니다. 이렇게 여기저기서 나온 다양한 의견이 합쳐져 시대에 맞는 새로운 여론이 형성된 다음에야 경찰이 (불구속 의견을) 말할 수 있는 거지, 수사권도 없는 경찰이 새로운 룰을 창출한다는 건 시건방진 일이죠.”

    그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발생한 피의자 호송거부 사태 때도 청와대측에서 관련자 문책을 요구한 것으로 보인다. 경찰청 수사구조개혁팀에서 전국 지방경찰청에 ‘검찰의 직수(直搜) 사건 피의자 호송 요구를 따르지 말라’는 공문을 내려 보낸 게 발단이었다.

    “일선에서 계속 곪아온 문제예요. 우리나라엔 검찰 수사관이 5000명, 경찰 수사관이 1만6000명 있어요. 우리나라같이 검찰이 기소권 외에 수사권까지 독점하는 나라도 없거니와 검찰이 일부 수사권을 가진 독일과 같은 나라에서도 검찰 수사관이라는 직책 자체가 없어요. 자체 수사인력이 없기 때문에 검찰의 수사지휘권은 항상 경찰을 통해 행사되지요. 그런데 우리나라 검찰의 경우 자체 수사관이 있는데도 검찰이 수사한 사건의 피의자 호송이나 유치장 입감(入監)을 경찰에게 시킵니다.

    어떤 문제가 있냐면, 예컨대 검찰 수사관들이 수사하다가 점심 먹으러 가면서 관할 경찰서에 전화해 ‘여기 있는 피의자를 경찰서 유치장에 수감해두라’고 지시해요. 그래서 피의자를 데려왔다가 검찰 수사관들이 점심 먹고 들어오면 다시 검찰로 피의자를 데려가야 해요. 매사가 이런 식이에요. 경찰이라고 호송전담요원이 있는 것도 아니거든요. 형사가 자기 담당 사건 수사하다 말고 뛰어가야 해요. 낮이고 밤이고. 데려가라 하면 데려가고, 데려오라 하면 데려오고.”

    검찰이 할 일을 경찰에 떠맡겨

    -그런 중요한 공문을 내려보낼 때는 경찰청장 결재를 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요.

    “이 문제에 대한 일선 경찰서의 질의가 많았다고 해요. 수사구조개혁팀에서 팀장 명의로 그에 대한 답신을 내려보낸 거지. 사건이 터진 후 팀장을 나무랐어요. 우리야 다 아는 내용이지만, 잘 모르는 국민에게는 충격을 줄 수 있으니 앞으로 그런 사안은 사전에 구두 보고하라고.”

    -청장에게 사전에 보고하지 않았다는 말이죠.

    “과장(팀장) 전결사항이긴 했지만, 사전에 주요 내용을 보고하는 게 좋았겠죠. 어쨌든 팀장을 그다지 심하게 나무라진 않았어요.”

    -청와대측에 따르면, 허 청장께서 관계자 문책과 관련해 ‘인사 때 반영하겠다’고 약속했다는데요.

    “문책을 요구했는데, 곤란하다고 거부했죠. 대신 ‘정기인사 때 반영하는 것을 검토하겠다’고 했습니다. 청와대측의 불만은 ‘가만히 있으면 알아서 해줄 텐데 왜 자꾸 시끄럽게 하느냐’는 것이었어요. 하지만 그 문제는 욕먹더라도 이슈화할 필요가 있었죠. 곧이곧대로 해서는 도무지 일이 진척되지 않으니. 수사권 문제를 생각하면 데모하는 사람들 심정이 이해된다니까. 우리 사회 기득권층의 이해관계와 맞물려 개선하기가 쉽지 않아요. 피의자 호송 문제만 해도 총리실에서 조정해준다고 했는데, 아직 안 되고 있잖아요.”

    경찰 주변에서는 그가 지난해 12월 경찰 고위간부 인사안(案)을 두고 청와대 민정수석과 마찰을 빚었다는 얘기도 나돈다. 하지만 문재인 수석은 이를 부인했고 그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것 없었어요. 인사는 이 정부의 강점 중 하나였습니다. 요즘은 검증 시스템에 탈이 났는지 모르겠지만. 저도 소신껏 인사했습니다.”

    경찰청장이 청와대와 인사를 협의하는 대상은 경무관급 이상 고위간부다.

    -청와대에서 경찰 인사에 간섭하지 않았다는 얘기인가요.

    “재임 중 한 번 인사를 했는데, 청와대측이 지역안배 차원에서 의견을 제시하긴 했지만, 대체로 제가 마련한 안대로 인사가 이뤄졌습니다.”

    생면부지 유인태 수석의 전화

    인사와 관련해 그는 자신이 참여정부 초기 청와대 치안비서관에 발탁된 경위를 털어놓기도 했다.

    “강원청장을 하고 있을 때 이 정부가 출범했습니다. 대통령 취임 직전 정권인수위원회에서 어느 날 연락이 왔어요. 정무수석에 내정된 유인태씨였습니다. 나와는 일면식도 없었어요. ‘저 유인태라고 합니다. 평이 좋더군요. 같이 일 좀 합시다’ 하더군요. 당시 인수위 지침에 따라 공직자들에 대한 다면평가가 실시되고 있었어요. 유인태씨 제의를 받아들여 치안비서관이 됐습니다. 가보니 공무원 출신은 거의 없고 대부분 선거캠프에서 온 사람이거나 운동권 출신이더라고요. 업무와 관련해 의견이 맞지 않은 경우도 있었지만 꽤 재미나게 지냈어요.”

    그는 “치안비서관 재직시 돈 안 드는 선거풍토를 만드는 데 일조했다는 보람을 느낀다”고 덧붙였다. “청와대 386참모진과 코드가 맞지 않아 힘들진 않았느냐”고 묻자 “이런 얘기는 조심스러운데…” 하며 말을 아꼈는데, 거듭된 질문에 마지못한 듯 입을 열었다.

    “운동권… 이 사람들이 총명하고 문제점을 잘 지적하는 장점은 있어요. 그런데 연륜이 짧고 실무경험이 없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덕목이 겸손이거든요. 내가 지켜보니 출발할 때 보이던 겸손한 자세가 자꾸 흐트러지더라고요. 정권 초기 저녁에 회식을 하면 소주잔을 기울이면서 국가 장래를 걱정하곤 했어요. 그런 게 굉장히 멋있게 보였는데, 점차 그 순수성이 퇴색하는 것 같더라고요.”

    청와대 근무 시절 그와 가장 가깝게 지낸 사람은 현 열린우리당 의원인 유인태 정무수석이다.

    “요즘은 연락을 안 하고 지내지만, 당시 저는 유 수석에게 큰 매력을 느꼈습니다. 겉보기와 달리 상당히 합리적인 면이 있었어요. 효순·미선양 사건이 잠잠해졌을 때인데, 시위를 계속 부추기는 무리가 있어 경찰이 주동자 몇 명을 잡아갔습니다. 대다수 비서관이 나보고 ‘빨리 풀어주라’고 했어요. 저는 ‘경찰은 합법·불법 여부만 판단하게 해야 한다’며 반대했습니다. 당연히 분위기가 어색해졌지요. 그때 유 수석이 ‘그 ××들, 얼마나 애 먹였으면 경찰이 잡아갔겠노. 그런 놈들은 ×나게 패버려야 돼’ 하고 제 편을 들더군요. 그 한마디로 썰렁했던 분위기가 다시 살아났죠.”

    그는 경찰청장 사퇴에 유 수석의 설득 전화가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는 일부 언론의 보도내용에 대해 “거짓말”이라며 “통화한 사실이 전혀 없다”고 부인했다.

    순경 출신들에 대한 승진 배려

    임기제 청장의 강제 퇴진은 경찰 조직을 뒤흔들었다. 그의 퇴임식장에는 그를 지지하는 현수막이 걸렸고, 많은 경찰관이 눈물을 쏟으며 분개하고 아쉬워했다. 모 경찰 간부가 청와대에 경찰 모자를 소포로 부치는 ‘불경스러운’ 사건도 일어났다. 이 간부는 모자와 함께 보낸 편지에서 “노무현 대통령께 제 명예를 돌려드린다”며 “정치권은 허준영 경찰청장 사임이라는 형식으로 경찰과 (시위진압) 대원들을 폭력배로 낙인찍어버렸다”고 강한 불만을 나타냈다.

    -퇴임식 때 눈물을 흘리신 것은 분한 감정 때문이었습니까.

    “복합적이었죠. 멸사봉공(滅私奉公)의 ‘제복 조직’의 옷을 벗는다는 게…. 수사권 조정 문제를 비롯해 마무리해야 할 일도 많았고 청장 2년차에 새로 할 일도 많았고…. 서울청에서 본청으로 옮길 때 싸둔 가방을 한 번도 열어보지 못할 정도로 바쁘게 지내다 갑자기 그만두게 되니…. 그것도 어처구니없는 일로. 그릇된 정치가 공권력을 훼손한 거죠.”

    -사퇴 이후 경찰 조직이 안팎으로 위기를 맞았습니다. 윤상림 사건으로 도덕성에 큰 상처를 입고, 한창 속도를 내던 수사구조 개혁 문제도 주춤하고, 인사제도에 불만을 품은 하위직 경찰관들이 경찰대 폐지를 주장하는 등 내부 분열 양상마저 보이고 있습니다.

    “제가 가장 신경을 쓴 부분도 바로 경찰 내부의 단합과 화목이었어요. 경찰은 출신성분이 다양해 아직 메인 스트림(주류)이 없어요. 앞으로 경찰대 출신 중에서 총수가 나오면 메인 스트림이 형성되겠지만. 경찰대 출신, 간부후보생 출신, 고시 출신, 순경 출신… 이처럼 다양한 구성원들 사이의 간극을 줄이기 위해 승진 소요기간을 단축하고 특진 소요기간도 폐지했습니다. 순경으로 들어와도 잘만 하면 3~4년 안에 경위까지 올라갈 수 있게 하고 총경 심사 때 순경 출신들을 배려하는 쿼터제 방안도 마련했습니다. 경찰은 큰 조직이기 때문에 자칫 힘이 분산되기 쉬워요. 그러면 국민에게 제대로 된 치안서비스를 제공할 수 없지요. 중요한 시기인 만큼 다들 마음을 모으고 청장을 중심으로 단합하기를 바랍니다.”

    -경찰대 폐지론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세요.

    “어느 조직이든 마찬가지겠지만, 정책을 담당하는 지휘부에는 최고의 엘리트 그룹이 필요합니다. 경찰 조직이 워낙 크고 경찰관 수가 많기 때문에 한 해에 120명씩 배출되는 경찰대 출신 간부를 소화하는 데 별 문제가 없다고 봐요. 순경 출신들과 조화를 이루면서 자리매김할 수 있다고 봅니다. 직접 겪어보니 경찰대 출신들이 조직에 기여하는 바가 커요. 수사권 조정 문제만 해도 경찰대 출신들이 주도하고 있는데, 논리적으로 검찰을 압도해요. 경찰 업무가 점점 더 전문화되고 국제화되는 추세라 고도의 지적 수준을 가진 사람이 필요합니다. 다만 요즘엔 순경 출신도 다 대졸자인 만큼 승진 등에서 경찰대 출신과 간극이 벌어지지 않도록 제도적으로 뒷받침해야죠.”

    -경찰 내부에서는 윤상림 사건에 대해 검찰이 경찰에 타격을 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경찰간부 관련 의혹을 키웠다는 시각이 있더군요.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 많은 훌륭한 검사가 모여 수사를 하고 발표를 해도, 검찰이 기소권과 수사권을 독점하고 있기 때문에 국민의 신뢰를 얻기가 어려워요. 수사를 제대로 했는지, 공정하게 했는지를 들여다볼 수 있는 장치가 없거든요. 그런데 수사는 경찰이 하고 검찰이 기소단계에서 검증하는 시스템이 갖춰지면, 견제와 감시 원리로 더욱 공정한 수사가 이뤄질 수 있다는 거죠. 권력의 속성상 감시와 견제를 받지 않고 독주하면 스스로 정화될 수 없습니다.”

    -지난해 경찰이 수사한 대형사건 중에 ‘브로커 홍’ 사건이 있는데, 최근 1심에서 홍씨에게 무죄가 선고돼 부실수사 의혹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경찰 주변에서는, 그 사건이 로비 의혹만 있지 범죄혐의 면에서는 별 내용이 없었는데, 보고를 받은 허 청장이 ‘경찰 100명이 다쳐도 좋으니, 검사 한 명만이라도 옷을 벗겨라’고 수사 확대를 지시하는 바람에 무리한 수사를 벌였다는 얘기가 있어요. 수사구조 개혁 문제에 활용하려 했다는 의혹이지요.

    “나는 그런 식으로 안 합니다, 허허. 아마도 ‘내사(內査)를 엄정하게 하라. 누구 두려워하지 말고 하라’고 얘기했는지는 몰라도. 저는 그런 야비한 짓을 할 인물이 못 됩니다.”

    고시 3관왕 출신 경찰서장 꿈꿔

    그는 전형적인 TK 출신이다. 대구에서 태어나 경북고를 졸업했다. 1980년 외무고시에 합격한 그는 1984년 외교관 생활 4년 만에 경찰로 옮겼다.

    “사연이 길어요. 고등학교 때부터 장래 직업으로 경찰서장, 외교관, 검사를 염두에 뒀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경찰서장 쪽으로 마음을 굳혔습니다. 대학(고려대) 졸업 후 서울대 행정대학원을 다니면서 3대 고시를 한꺼번에 준비했어요. 군대는 그 전에 갔다왔고요. 여러 책을 종합해 서브노트를 기가 막히게 만들었어요. 그것만 보면 합격할 수 있을 정도로. 한 3년간 하루 15시간씩 공부했죠. 당시엔 외무고시가 1월, 사법고시가 4월, 행정고시가 8월에 있어 한 해에 고시 세 개에 다 응시할 수 있었습니다. 최초의 ‘고시 3관왕’ 출신 경찰서장이 되고 싶었던 거죠. 그런데 외무고시에 합격하고 나서 일단 외무부에 들어갔어요. 나이도 찬 데다 고시 출신이 경찰간부가 되는 데는 해당 부처에서 2년 이상 근무한 경력이 필요했거든요.”

    그는 외교관 생활을 하면서 나머지 2개 고시도 거머쥘 요량으로 공부를 계속했다고 한다. 프랑스 연수를 떠나면서도 서브노트 30권을 챙겨갔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것 때문에 나머지 고시를 포기하게 됐다고 한다.

    사연은 이렇다. 프랑스에서 1년간 연수한 그는 곧바로 영국으로 건너갔다. 프랑스 외무성 주선으로 런던에 있는 프랑스대사관에 파견돼 그곳에서 추가로 6개월간 연수하게 된 것. 런던에 도착한 날 밤, 도로주행 체계가 달라(영국에선 차가 좌측통행) 몇 시간 동안 헤매다가 겨우 여관을 잡았는데, 차는 여관 앞 길가에 세워뒀다. 너무 피곤해 웬만한 짐은 차에 둔 상태였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차문이 열려 있고 짐 가방이 보이지 않았다. 알고 보니 슬럼가였다.

    “다른 어떤 것보다도 서브노트를 잃어버린 게 아팠죠. 그것을 찾으려고 며칠간 영국 경찰을 쫓아다녔어요. ‘한글은 이렇게 생긴 거다’고 샘플을 보여주면서. 끝내 못 찾았어요. 공부할 의욕을 잃었지요. 그 길로 나머지 고시를 포기했습니다.”

    연수가 끝나고 귀국한 이듬해 경찰 간부를 지원했다. 치안감인 면접관이 물었다.

    “그 좋은 외교관을 그만두고 왜 경찰이 되려 하나.”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외교관보다 경찰서장이 좋아서 지원했습니다.”

    그는 “부하직원들에게 경찰인의 자부심과 긍지를 늘 강조했다”고 했다.

    “경찰에 와서 ‘외교관 그만두고 왜 왔느냐’는 질문을 수도 없이 받았어요. 그럼 이렇게 반문했지요. ‘당신, 경찰관이 외교관보다 못한 직업으로 생각한다면, 외교관 하지 왜 경찰관 하고 있느냐’고. 그런데 직업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무섭더라고요. 장모님이 주변에서 ‘사위 뭐 하노’ 물으면 ‘외교관이야’ 하고 큰소리치던 분인데, 경찰로 옮기고 난 뒤로는 ‘내무부에 있어’ 하는 겁니다. 어느 날 처가에 들렀다가 장모님이 친구와 통화하면서 또 그렇게 얘기하시는 걸 듣고 제가 한마디 했어요. ‘장모님께서 저의 직업을 부인하시면 저는 제 결혼을 부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장모님이 기겁을 하고 그 뒤로는 ‘내무부’ 소리를 안 했어요. 저는 청소년들에게 ‘자신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직업을 선택하라’고 말하고 싶어요. 만약 여건이 안 맞아 차선을 택하게 된다면 자기 최면을 걸어 자신의 현 직업이 최고로 생각되도록 하라고.”

    “저, 부드럽고 낭만적인 사람이에요”

    그런데 그는 도대체 왜 그토록 경찰서장이 되고 싶었을까.

    “어릴 때부터 장래 직업으로 공무원만 생각했는데, 그중에서도 경찰서장을 꼽은 건 공직자의 상징이자 국가정체성 수호의 최일선 지휘관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해보니 기질에도 맞아요. 경찰서장은 종합적인 행정업무를 하는 자리로 그 지역의 치안 지휘관으로 볼 수 있어요. 일반 행정이야 시장이나 군수도 하지만, 치안 관리는 경찰서장만이 할 수 있죠. 경찰서장으로서 첫 부임지가 경북 영양인데, 거기서 제 구상대로 지역 치안을 이끌면서 정말 보람을 느꼈습니다. 상부에서 허락한다면, 평생 시골 서장만 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그는 “검사에 대한 열망은 상대적으로 약했냐”는 질문에 “형사소송법을 공부하며 매력은 느꼈지만 폭이 상대적으로 좁은 게 아닌가 생각했다”며 “사시에 붙더라도 경찰로 갈 생각이었다”고 검사들이 들으면 ‘자존심’이 상할 얘기를 했다.

    그의 부친도 경찰관이었다. 순경으로 시작했는데, 간부시험을 보기 위해 휴직했다가 6·25전쟁이 터지자 아예 그만뒀다고 한다.

    “아버지는 경찰을 멋있는 직업으로 생각하셨어요. 제가 외교관에서 경찰로 옮길 때 적극 찬성하셨죠. 외교관 사위 본다고 좋아하던 처가에서는 못마땅해했지만.”

    그는 운동을 좋아하고, 잘한다. 어릴 때부터 유도를 익혔고, 스케이트, 스키, 육상에 능하다. 2002년 중앙경찰학교장(치안감)을 지낼 때는 충주 국제마라톤대회에 출전, 풀코스를 완주해 주변을 놀라게 했다. 시골 서장을 지낼 때부터 하루에 10㎞씩 꾸준히 뛴 것이 도움이 됐다. 그 시절 그는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조깅을 했는데, 직원들도 뛰게 했다. 직원들은 순번을 짜서 돌아가면서 한 명씩 그와 함께 뛰었다.

    “처음엔 어색하고 서먹하다가도 한 시간 같이 뛰며 연애 얘기를 비롯해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나면 친밀감이 생기더라고요. 그렇게 몇 달 지나자 직원들의 성격이나 적성을 웬만큼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인사를 하는데 감이 팍팍 오는 거예요. 누구를 어디로 보낼지.”

    그는 “성격이 직선적이고 좀 거칠어 보인다”는 기자의 지적에 멋쩍은 표정으로 “굉장히 부드럽고 낭만적인 면이 있다”고 반박(?)했다.

    “어릴 땐 음악, 미술에 취미가 있었어요. 상도 받았고요. 학교 다닐 때 농땡이는 쳤지만, 문학에 관심이 깊었어요. 특히 명작을 원어로 읽기를 즐겼습니다. 대학 시절 앙드레 지드 작품은 불어로 읽어야 제 맛이라고 해 불어로 읽었고요. ‘파우스트’나 ‘데미안’은 독어로 읽었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영어로 서머싯 몸의 ‘인간의 굴레’를 읽었습니다. 직원들이 나를 어려워한다는 얘기를 가끔 들었는데, 아마도 참모들의 능력을 내가 생각하는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훈련 차원에서 엄정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일 겁니다.”

    그는 얼마 전 ‘싸이월드’를 이용해 인터넷에 홈페이지를 만들었다. 어느 날 그가 외출한 사이에 딸이, 지난해 그가 해수욕장에서 웃통 벗고 찍은 사진을 올려놓았다. 사진을 본 지인들이 그의 근육을 보고 다들 놀랐다고 한다. “다들 나를 밥살로 아는데, 벗으면 운동살이에요.” 그는 딸 둘을 뒀는데, 둘 다 대학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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