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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교전 4주년 총력취재

“연평해전·서해교전은 김정일 ‘평화협박 전술’ 지시받은 3호청사·인민무력부·해군사령부 합동작품”

북한 핵심권부 전직 관료들의 정밀증언

  • 신동아 특별취재팀

“연평해전·서해교전은 김정일 ‘평화협박 전술’ 지시받은 3호청사·인민무력부·해군사령부 합동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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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평해전의 경우, 김 위원장은 ‘햇볕정책’ 이후 이완된 북한의 협상우위를 찾을 방법을 구상하라는 지시를 내리고 이에 따라 3호청사는 DMZ(비무장지대)에서의 국지도발 등 다양한 방안을 검토했다. 그러나 정주영 현대 회장의 금강산 개발사업 등이 진행되고 있어 적절치 않다는 결론을 내리고, 마지막에 착안한 것이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에 언급돼 있는 서해 북방한계선의 문제였다.

이를 근거로 서해에서 해상 무력도발을 일으킨다는 3호청사의 기획안은 김 위원장의 극찬 속에 통과됐고, 해군사령부 차원에서 은밀히 실행 작업이 진행됐다. 이를 담당한 해군사령관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격려할 만큼 김 위원장의 ‘특별한 관심’ 속에 준비됐다는 것. 애초에 ‘소규모 해상 교차사격’ 정도로 계획됐던 해전이 생각보다 확대되어 사실상 북한측이 대패했음에도 불구하고, 김 위원장은 군의 노고를 치하하고 서해함대 경비정의 성능개선을 직접 지시했다는 증언이다.

서해교전의 경우, 김 위원장이 5월1일 해군사령부를 직접 방문해 구성원들을 일일이 격려해가며 준비한 사건이었다. 교전이 끝난 후에도 “사실상 우리가 이긴 전쟁”이라며 치하를 아끼지 않았고, 책임을 물어 경질했다고 발표한 서해함대 8전대장은 1년 뒤 복직했다는 것이다. 두 해전의 기획, 준비, 실행, 사후점검에는 3호청사와 인민무력부 구성원들이 참여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사후점검 과정에서 교전에 투입됐던 북한 해군 병사들을 통해 당시 상황을 세밀하게 복원해 이를 김 위원장에게 보고했다.

‘신동아’는 다양한 방법으로 수집한 관련증언을 ‘로동신문’ 등 당시 북한의 공식매체에 실린 기사내용을 통해 가능한 부분까지 최대한 검증한 뒤, 이를 시간 순으로 정리했다. ‘신동아’는 서해교전 직후 출간된 2002년 8월호의 ‘6·29 서해교전은 김정일의 ‘6·15 격침작전’이었다’ 기사를 통해 남측 군 당국의 조사결과와 정보기관이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사건의 진상에 접근한 바 있다. 다시 한번 총력을 기울여 북측 당국자의 회고와 증언을 취재한 이 기사를 통해 ‘서해교전의 실체’를 더욱 생생하게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다.

알려진 대로 1994년부터 1998년 사이 북한에서는 300만명 이상의 주민이 굶주림으로 사망했다. 이 때문에 정권에 대한 주민들의 불만이나 동요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커졌다. 여기에 1998년부터 본격화된 국제사회의 인도주의 지원물자와 한국의 대북지원도 간단치 않은 문제를 야기했다. 북한 주민들에게, 반세기 이상 ‘주적(主敵)’으로 교육 받았던 미국과 한국 ‘지도자 동지’도 주지 못하는 식량을 무상으로 보내준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었다. ‘남한’이라고만 해도 “왜 남조선으로 부르지 않았느냐”며 정치범 수용소로 연행하던 북한체제에서, 많은 이가 한국 혹은 대한민국이라고까지 자연스럽게 부르는 지경이 됐다.



더욱이 수백만이 굶어죽는 상황에서도 김일성의 시신을 안치할 금수산기념궁전 건설에 수억달러의 돈이 투입됐다. 평양 시민들을 비롯한 주민들의 반감은 커질 수밖에 없었고, 자연히 남한에서 올라오는 무상지원을 ‘고맙게’ 생각하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남한의 대북지원으로 인해 적대감이 희박해지는 북한주민들의 의식변화는 ‘체제불만’을 넘어 ‘체제위협’이 될 수도 있었다. 김정일은 이러한 주민 정서를 되돌리기 위해 ‘남조선은 북침의 기회를 노리는 민족의 적’이라는 실체적인 증거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햇볕정책에 담긴 ‘경제지원과 교류로 한반도의 평화를 안정적으로 관리한다’는 문구에 자극을 받은 김정일은, 이후 두 차례 교전의 출발점이 되는 첫 번째 교시를 내린다. 1999년 4월3일, 조선노동당의 대외·대남전략부서가 모여 있는 모란봉구역 전승동 ‘3호청사’에 “적들이 햇볕정책을 대북정책으로 고착시키는 만큼 우리는 평화협박 전술로 주도권을 확보해야 한다”고 지시한 것이다. 그는 이 자리에서 ‘우리의 총창 우(위)에 평화가 있다’는 노래를 높이 평가했다. 1996년 무렵 왕재산 경음악단에서 창작한 이 노래야말로 “선군(先軍)시대의 명곡이고 명답”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김정일은 “체제대결을 첨예하게 유발시킬 수 있는 전술안을 통이 크고 대담하게 작성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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