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8월호

이재오 순천 선암사 심야 격정 인터뷰

“공안검사 박철언 덕 본 강재섭이 내게 색깔론 들이대다니…”

  • 조성식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airso2@donga.com

    입력2006-08-08 16: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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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당대회는 수구, 부패, 정치공작의 집결장이었다
    • 기득권 지키려 10년간 당에 헌신한 동지를 빨갱이로 몰아?
    • 5·6공보다 더 잔인한 정치테러 자행한 사람들과 함께 일 못해
    • 이명박에게 “나를 위해서라도 제발 개입하지 말라” 했다
    • 선거 당일 박근혜의 돌발행동은 노골적인 유세 방해
    • 한나라당 정권 못 잡으면 내 정치인생도 끝나
    이재오 순천 선암사 심야 격정 인터뷰
    한나라당 이재오(李在五·61) 의원이 칩거하는 선암사(仙巖寺) 입구에 도착한 것은 밤 10시가 다 돼서였다. 칠흑 같은 진입로에는 호우(豪雨)의 뒤풀이인 듯 안개가 넘실대고 있었다. 승용차가 어둠을 뚫을 때마다 안개는 유유히 포위망을 풀었다 조였다 했다. 길 양옆으로 늘어선 아름드리 고목들이 긴 머리채를 흔들며 낮게 신음했다. 절이 가까워질수록 시냇물 소리와 개구리 소리가 커졌다.

    이 의원의 거처는 대웅전 옆 작은 숙사였다. 이틀 전인 7월12일, 그는 전당대회가 끝나고 처음 열린 최고위원회의에 불참했다. 그러고는 다음날 이곳으로 왔다. 그렇잖아도 불공정 경선 논란으로 전당대회 후유증에 시달리던 한나라당은 이 일로 더욱 시끄러워졌다. 언론의 요란한 관심 속에 일부 의원과 당직자들이 절을 찾아와 그를 위로하고 돌아갔다.

    맨발로 툇마루에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이 허허로웠다. 회색 개량한복을 입고 있는데, 언뜻 승복과 비슷했다. 스스로도 “옷에서 중 냄새가 너무 난다”며 멋쩍게 웃었다.

    전남 순천시 승주읍 조계산 자락에 위치한 선암사는 신라 때 세워진 고찰로 보물로 지정된 삼층석탑과 일주문, 승선교 등 유적이 많은 곳이다. 그가 이 유서 깊은 절을 찾은 것은 ‘유서 깊은’ 인연 때문.

    “민주화운동하던 시절 수배 당했을 때 이곳에서 숨어 지냈어요. 1970년대에 6개월, 1990년대에 2개월가량 있었죠. 반(半)중이죠, 뭐.”



    ▶ 내려오신 이유가 뭡니까.

    “허허. 제가 정치를 한 10년 했잖아요. (잠시 침묵) 앞으로 계속 정치하려면, 정리할 건 정리하고 나 자신을 되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몸담은 당의 모습도 다시 보고.”

    “부정적 이미지 한꺼번에 표출”

    그의 목소리는 단조(短調)였다. 느리고 어둡고 슬픈 듯한. 표정도 그랬다. 그의 진정성이야 좀더 대화를 해봐야 알겠지만, 적어도 말투와 눈빛만으로는 ‘쇼 하는 것 아니냐’고 트집 잡기 힘들었다.

    ▶ 그동안 자신을 돌아볼 여유가 별로 없으셨죠?

    “그랬죠. 당에 들어온 이후 당만 보고 지내왔기에. 최근까지도 원내대표하면서 당을 지키기에 급급했지 당이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는지를 제대로 돌아보지 못했어요. 이번 전당대회를 거치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간 한나라당의 부정적 이미지라는 게 수구, 부패, 정치공작 따위였는데, 그런 이미지를 많이 고치는 데 기여했다고 자부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이번 전당대회에서 한나라당의 부정적 이미지가 한꺼번에 표출됐습니다. 그게 가장 나를 슬프게 한 거지.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서 과거사 청산한다고 할 때 한나라당의 반응은 ‘왜 미래는 보지 않고 자꾸 과거만 캐느냐’였어요. 그런데 보세요. 이번 전당대회에서 10년간 함께 한 동지를 과거의 일로 옭아매려 했어요. 그것도 지난 날 민주화운동하다가 억울하게 사상범으로, 좌경으로 몰렸던 일을 갖고. 원내총무, 사무총장, 원내대표 등 주요 당직을 두루 거친 동지를 빨갱이로 몰아붙이는 이 당이 과연 국민에게 무슨 희망을 줄 수 있겠습니까.

    그간 당의 부정적 이미지를 없애기 위해 중앙당사 팔고 천막당사 차리고 천안연수원 헌납한 것이 다 거짓말이라는 게 드러난 겁니다. 당 지휘부가 자기네의 수구적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당에 10년간 헌신한 동지를 빨갱이로 만들었어요. 이런 당이 정권을 잡을 경우 자리 다툼, 이권 다툼이 어떨지는 불을 보듯 뻔한 일 아니겠어요. 그래서 이 당이 국민에게 희망을 줄 수 있을지 깊은 회의에 빠진 겁니다.”

    단단히 사무친 모양이다. 생각보다 강한 톤으로 당을 비판한다. 당과 국민이라는 말이 한 세트로 움직이고 있다.

    “내가 최고위원을 하고 안 하고, 최고위원회의에 참석하고 안 하고는 중요한 게 아니에요. 내가 1등 할 수 있었는데 2등 했다, 대표 될 수 있었는데 안 됐다, 이런 차원의 얘기는 별 의미가 없어요. 나 개인의 문제라면 툭툭 털고 일어나면 그만이지만, 당이 국민을 속이는 문제는 개인이 아픔을 털고 일어난다고 해결될 게 아니잖아요. 다시 말하면 여론조사에서 내가 1등 했는데, 국민은 대선승리를 이끌 당 대표로 이재오를 원했는데, 그것이 당의 공작으로 뒤집어졌다는 불만을 제기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10년간 몸담고 앞장서서 지켜왔던 당의 이런 모습이 과연 국민에게 희망을 줄 수 있을지, 내 얼굴에 분칠하고 헤픈 미소를 짓는다고 언제까지 국민을 속일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는 겁니다.”

    ‘이재오는 빨갱이니 찍지 말라’

    ▶ 당, 당 하시는데, 이 의원께서 원내대표 할 때는 당 지휘부에 본인도 속해 있던 것 아닙니까.

    “그럼요. 포함되지. 지금도 그렇고.”

    ▶ 이 의원께서 지금 말하는 당의 개념 또는 실체는 무엇인가요.

    “이번 전당대회에서 드러난 한나라당의 모습을 말하는 거죠.”

    ▶ 당이란 건 사람이 이끌어가는 것이니, 현재 한나라당을 이끌어가는 사람들의 문제라고 보면 맞습니까.

    “그렇게 봐야 하지 않겠어요? 이번에 그 사람들이 하나같이 색깔론으로 공격하고, (대선 주자) 대리전이라고 뒤집어씌웠어요. 사람들을 동원해 신문에 저의 전력을 왜곡하는 광고를 내지 않나, 할머니들 시켜서 (대의원들에게) ‘이재오는 빨갱이니 찍지 말라’고 얘기하지 않나. 이런 것들이 그간 숨겨온 당의 실체라는 거죠. 당 대표라는 권력을 둘러싼 경쟁에서 마지막 수구의 실체가 드러난 거예요. 내가 원내대표로 당을 이끌 때는 이러지 않았어요.

    나는 누구의 과거를 따져본 적도 없고 누군가에 대해 과거의 잣대로 지금의 모습을 평가한 적도 없어요. 지난날 어떤 아픔이나 과오가 있든지 지금의 모습이 중요하다는 것, 그것이 제가 당을 이끌어온 일관된 자세 아니었습니까.”

    ▶ 이 의원 말씀대로라면 그간 한나라당이 나름대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 오다 전당대회에서 갑자기 ‘구태’의 전형이 나타난 셈인데, 그 이유가 뭘까요. 아까 ‘국민을 속여 왔다’는 표현을 쓰셨는데.

    “속였다기보다는 국민의 눈에 그렇게 비쳤다는 거죠.”

    ▶ 특정 계파의 문제라고 보십니까.

    “저는 그렇게 봅니다.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는 사람들, 내가 대표를 맡을 경우 생성될 한나라당의 이미지가 자신에게 손해를 끼칠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마지막 발악을 한 거지.”

    발악이라. 그의 발언 수위가 점점 높아진다. 그렇지만 목소리는 차분한 편이다. 그런데 그는 최고위원 경선에 출마할 때 당내 반대파의 움직임이나 공격을 예상치 못했단 말인가.

    “알고는 있었지만 그 정도일 줄은 몰랐죠. 내가, 의원들이 직접 뽑은 원내대표 아니었습니까. 재선(의원) 때도 직선 원내총무였고. 서울에서 3선을 한 사람입니다. 그간 아무도 내 전력이나 사상에 대해 시비를 걸지 않았어요. 의원들이 바보입니까. 보수파 입김이 센 한나라당에서 내게 원내총무나 원내대표를 맡긴 건, 나라는 인간에 대한 믿음뿐 아니라 내 사상에 대한 믿음이 전제됐기에 가능한 일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왜 뒤늦게, 당 대표 선거를 앞두고 그런 걸 문제 삼느냐는 거죠.”

    이재오 순천 선암사 심야 격정 인터뷰

    이재오 의원은 ‘완전히 던지는 것’을 포함해 여러 가능성을 놓고 깊이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논란이 된 그의 전력은 이른바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 사건에 연루됐다는 것. 공안당국에 따르면, 남민전은 1976년 2월 ‘반유신 민주화와 반제 민족해방 운동’을 목표로 조직된 비밀단체로 1979년 10월 지식인, 학생 등 84명이 검거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지난 3월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는 고 김남주 시인을 비롯한 이 사건 관련자 29명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됐다.

    그런데 남민전 사건이 조작이든 아니든 자신은 관련 없다는 게 이 의원 설명이다.

    “남민전 사건이 터진 건 내가 교사들의 지하조직인 한국민주투쟁위원회(민투)를 이끌고 서울시내 중·고교 교사조직의 명예총재를 맡은 죄로 감옥에 가 있을 때였어요. 두 사건이 거의 동시에 터졌지만 내용이 달랐어요. 우리는 긴급조치 9호로, 남민전 사람들은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됐어요.

    그러다 10·26이 일어났어요. 긴급조치가 해제됐으니 우리를 석방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석방하지 않고 남민전 산하단체로 엮은 거예요. 전두환 신군부가 들어서는 데 사전 정지작업으로 민주화운동 한 사람들을 감옥에서 내보내지 않고 국가보안법으로 옭아 맨 겁니다. 그 사건을 총지휘한 검사가 박철언이었잖아요. 그 박철언 밑에서 누가 일을 했습니까. 박철언한테 기대 민정당 전국구 의원을 받은 게 누구입니까. 바로 강재섭이잖아요. 그런 강재섭이 나한테 색깔론을 들이대면 안 되죠.

    지난날 민주화운동 하다가 좌익사범으로 몰려 한 청춘이 스러지고, 한 가정이 파괴당하고, 자식이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해 아저씨로 부르고, 그 아버지보다 오히려 자기 집에 자주 들르는 정보과 형사를 더 따르고… 그런 아픔이 우리에게 있잖아요.

    그런데 자기들의 알량한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그런 슬픈 가족사를 가진 동지를 빨갱이로 몰아 전당대회를 치른다? 그걸 이성을 가진 정당으로 볼 수 있겠어요? 이런 모습으로 국민을 위하고 서민을 위한다고 할 수 있겠어요? 10년간 함께 한 동지를 과거 민주화운동을 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빨갱이로 몰아붙이다니… 5·6공보다 더 잔인한 정치테러잖아요. 그런 사람들이 (이번에) 다 지도부가 됐잖아요. 여기에 한나라당의 고민이 있는 것 아니겠어요?”

    이 의원이야 억울하겠지만, 그의 당무 거부 또는 당무 불참은 어쨌든 막 출범한 새 지도체제를 뒤흔들고 당의 단합을 해친다는 점에서 비난 받을 소지가 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단호했다.

    “그 속에 내가 설 자리가 없어요. 2등 한 사람이니 발언권이야 있겠죠. 그러나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국민이 저렇게 거꾸로 돌아가는 당에 정권을 맡길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거기에 최고위원 하나 더 있고 없고가 뭐 중요하겠어요. 나 개인에게는 물론 당과 나라에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거죠. 그러니 정말 저의 10년 정치인생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고 한나라당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거예요. 저의 행위는, 뭐 그냥 기분으로, 대표 안 됐다고 화풀이하는 차원을 훨씬 넘는 거잖아요.”

    “그만둘 생각도 한다”

    ▶ 그만둘 생각까지 하는 건가요.

    “그런 생각도 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 선거과정에 이미 너무 큰 상처를 받은 것 같습니다.

    “예상된 상처라면 받아들일 수 있어요. 선거라는 게 어차피 이기고 지는 싸움이니. 하지만 도를 넘어선 안 되잖아요. 우리가 적과 싸우는 것도 아닌데. 집단지도체제에서 대표는 의장 노릇밖에 못해요. 모든 걸 최고위원들이 함께 의결하니. 그런데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동지를 빨갱이로 모는 정당이니 제 고민이 깊지 않겠어요.”

    ▶ 사태의 핵심은, 정치권에서 얘기하듯 차기 대선구도와 관련된 대리전 논란 아닐까요.

    “내가 이명박 시장한테 그랬어요. 이 시장이 개입하면 박근혜 대표가 개입하지 않겠느냐. 내가 볼 대 박 대표는 중립이다. 그러니 공연히 개입하지 말라고. 나를 위해서라도 개입하지 말라고. 나는 끝까지 박 대표를 믿었어요. 그런데 저쪽에선 나와 가까운 박창달(전 의원)이 이 시장 쪽 사람이라는 점을 들어 이 시장이 내 편을 든 것처럼 얘기하는데, 사실이 아니에요. 사실 박창달은 이 시장보다 나와 더 친해요. 대구 친구로, 오래 전부터 알았으니. 정말 이 시장이 서운하게 여길 정도로 개입하는 것에 반대했어요.

    대리전이라고들 하지만, 막상 당 대표가 되면 대리전이라는 걸 할 수 없어요. 의원들이 가만히 안 있죠. 대표가 특정후보와 밀착돼 있으면 후보경선이 불공정해질 수밖에 없을 테고, 불공정한 경선으로 선출한 후보로는 대선에서 이길 수 없죠. 한나라당 이름으로 대선에서 승리하는 게 중요하지 누구를 후보로 내세우느냐는 중요하지 않아요. 박(근혜)이든 손(학규)이든 이(명박)든. 공정하게 경선을 관리해 한 사람의 후보를 내고, 한나라당 이름으로 정권 잡는 게 중요하지.”

    그가 고뇌하는 표정으로 이마에 손을 갖다댔다. 기자를 보다가 허공을 보다가 했다. 그는 “이런 상태라면 한나라당에는 미래가 없다”고 단언했다.

    “난 슬퍼요. 분노하는 게 아니라.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정당인 한나라당이 부패한 보수를 깨끗한 보수로, 중도 보수를 개혁적 보수로 바꾸는 데 앞장 서 왔어요. 그게 내 인생관과도 일치하고. 그래서 10년간 한나라당에 버티고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지금 이 모습이 슬프지. 분노 이전에.”

    ▶ 당 대표 선거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건 결국 ‘박심(朴心)’ 아니었나요. 불공정 경선이라고 주장하시는데, 실제로 박 전 대표가 어느 정도 개입했나요.

    “선거 당일 현장에서 드러났잖아요. 유세 후보로 7, 8번 2명 남았을 때였어요. 내가 7번으로 막 유세를 시작하는데, 박 대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다른 곳으로 이동했어요. 그러자 기자들이 다 그쪽으로 몰리고 (단상) 영상에서도 박 대표만 비쳤어요. 명백한 선거방해였죠. 그보다 더 노골적인 방해가 어디 있나요. 누구든지 자기가 지지하는 사람을 위해 뭔가 해줄 순 있다고 봐요. 그런데 도가 지나쳤잖아요.”

    “대의원들에게 사인을 준 거예요”

    ▶ 그만큼 그쪽에서 사정이 다급했다고도 볼 수 있을까요.

    “(원내대표 하면서) 6개월간 혼신의 노력을 다했는데, 결국 믿음을 못 준 건 내 불찰이지. 당의 안정을 위해 진심으로 (박 대표를) 모셨는데…. 어쨌든 내 부덕의 소치죠. 그것 때문에 박 대표에게 서운하다는 건 아니에요. 사람들이 후보 연설을 듣고 누구를 찍을 건지 결정하는 순간인데, 내가 유세에 들어가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모든 시선을 자기에게 집중시키고 별로 할 얘기도 없으면서 대의원들과 악수하면서 유세의 맥을 끊어버렸어요. 그건 대의원들의 표심을 자극하면서 어떤 메시지, 사인을 준 거예요. 이재오 찍으면 안 된다는.

    그런데 이런 걸 자꾸 얘기하면 내가 떨어진 데 대한 서운함을 표출하는 것으로 비치기 때문에 지금까지 신문이나 방송에 이런 얘기 안 했어요. 월간지니 다 얘기하는 거지.”

    ▶ 박근혜 전 대표의 행동은 문제 삼을 만하네요.

    “그러니 이회창씨도 그 점에 대해선 이재오한테 사과하라고 얘기한 거죠.”

    ▶ 이회창씨는 이명박 전 시장한테도 똑같이 뭐라 했잖아요.

    “왜 공연히 언론에 ‘야성’과 ‘개혁’을 얘기해 이재오를 미는 것처럼 보였느냐는 지적이죠. 그렇게 들릴 수 있겠죠. 강재섭씨를 두고 야성과 개혁의 이미지를 떠올릴 사람은 없을 테니까.”

    ▶ 당 요직을 두루 거친 것은, 말씀하신 대로 상당수 의원의 신뢰가 있었기에 가능했겠죠. 그런데 그런 신뢰가 박근혜라는 유력한 대선후보의 손짓 하나로 무너진 셈이네요.

    “결과적으로 그렇게 됐죠.”

    이재오 순천 선암사 심야 격정 인터뷰
    ▶ 한나라당이 1인 정당으로 비칠 소지가 있네요.

    “그렇게 얘기할 수도 있겠죠. 거기에 색깔론이 가세하는 등 당이 전면적으로 후퇴하는 모습이 나타났죠. 새 지도부 면면이 다 그렇잖아요. 그러니 당에 어떤 희망이 있는지 회의가 생길 수밖에요.”

    이 의원은 “그 사람들과 같이 일하려니 갑갑해서 그런 것 아니냐”는 질문에 허허 웃기만 했다.

    ▶ 의원님의 정체성과 안 맞지요?

    “국회의원은 같이 할 수 있어요. 지역구에서 뽑아준 거니. 그러나 지도부는 달라요. 지도부의 덕목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국민의 신뢰와 도덕성이잖아요.”

    ▶ 그런 점에서 부적절한 분들이 있다는 거죠?

    “그렇게 말하면 인신공격이 되니, 내가 갑갑한 거지. 당이 갑갑하고. 한나라당을 생각하는 모든 사람이 갑갑한 거지.”

    “기득권 지키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

    ▶ 이 의원께서는 나름대로 지난 6개월간 박 전 대표에게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줬다지만, 반대로 저쪽에서는 이재오와 같이 갈 수 없다, 우리 사람이 아니라는 인식을 가졌던 것 같은데요.

    “허허. 그거야 그쪽에 물어봐야지. 내가 어떻게 아나요.”

    ▶ 근본적으로 한나라당의 이미지나 정체성에 안 맞는 사람이라고….

    “안 맞는다면 어떻게 10년 동안 있으면서 여러 중책을 맡았겠어요.”

    ▶ 박 전 대표가 결정적인 순간에 그런 행동을 한 건, 많은 사람이 얘기하는 것처럼 이 의원께서 당 대표가 되면 자신이 대선후보로 나서는 데 지장이 있을 걸로 생각했기 때문일까요.

    “공정선거관리위원회 만들면 대표는 손 떼게 돼요.”

    ▶ 그럼 왜 그랬을까요.

    “그게 참 나로서도….”

    ▶ 그걸 이 의원께서 모르면 누가 아나요.

    “글쎄, 한마디로 신뢰를 못 준 거죠, 뭐. (경선을) 공정하게 관리하지 않고 결국 특정주자 편을 들 것이라는 의혹을 없애주지 못한 저의 불찰이고 능력의 한계죠.”

    ▶ 그런 이유라면 신임 강재섭 대표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그래서 내가 지금…. 강 대표가 연설장에서 ‘박근혜 대표를 위해, 박 대표를 청와대로 보내기 위해 나를 버리겠다’고 말했어요. 그 말은 사실 지독한 말이잖아요. 이미 한나라당 대선후보는 박근혜로 정해졌고, 자신은 박 후보를 위해 당 대표직을 바치겠다는 말 아닙니까. 그렇다면 이미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은 끝나버린 거지. 당 대표가 그런 마음을 갖고 있다면 경선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그것도 나를 슬프게 한다는 거지.”

    ▶ 전당대회 이후 박 전 대표와 통화한 적은 없나요.

    “없어요.”

    그는 박 전 대표에 대한 감정을 묻자 특유의 느릿한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서운하기보다 슬픈 거지. 한 정치인이 자신의 진심을 끝까지 남에게 의심받게 했다는 것 자체가 슬픈 거지. 허허.”

    ▶ 두 가지 관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사적인 면으로는 이 의원을 둘러싼 논쟁이 있었고, 공적인 면에서는 당선된 최고위원들의 면면을 볼 때 보수회귀 성향이 강하게 나타났단 말이에요. 그 원인이 지방선거 압승과도 관계있을까요.

    “지방선거 압승에 따른 오만함도 분명히 있죠. 그런데 핵심은 구(舊)세력의 불안심리죠. 이재오가 대표가 되는 데 대한. 아무래도 가는 길이 너무 다르잖아요. 민주화운동했던 사람이 당 대표가 된다? 그럼 민주화운동을 방해하고 탄압했던 사람들로서는 자기네 기득권을 지키기 힘들 거라고 생각하겠죠. 나는 안고 가겠지만. 그 사람들이 지레 겁을 먹은 거죠.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 아니었겠어요.”

    이 의원의 목소리는 탄식조였다. 말의 강도로 봐서는 뭔가 일을 낼 것 같다. 그의 말대로 단순히 대표가 못 된 데 따른 섭섭함이나 울분 차원이 아니라 근본적인 문제라 할 수 있는 정체성을 두고 고민하고 있지 않은가. 기득권이니 정치테러니 길이 다르니 하면서.

    “가해자는 죄의식 때문에 항상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해요. 뭐가 잘못 됐느냐, 당연한 것 아니냐고. 반면 피해자는 가급적 가해자를 잊고 싶어해요. 그 악몽을 떠올리고 싶지 않은 거죠. 그래서 ‘시대상황이 그랬으니 어쩔 수 없지’ 하고 안고 가려 해요. 화해하려 하고, 용서하려 하고. 그런데 가해자 위치에 섰던 사람은 자신의 죄의식을 피해자에게 전가하려 하죠.”

    “한나라당은 오만의 극치죠. 시대 흐름을 못 읽는 우물안 개구리예요. 자기네끼리 박수치고 연호하니 그게 세상의 전부인 줄 알아요. 집권하려면 그런 건 기본이고 그 외에 많은 것이 더해져야 하는데….”

    “한나라당은 우물안 개구리”

    옆에 있던 진수희 의원이 “색깔론을 들이대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행위”라고 거들었다.

    ▶ 그런데 그런 게 먹혔잖아요.

    “그게 한나라당이에요.”

    이 의원이 냉소적으로 내뱉었다.

    ▶ 색깔론은 일반 국민의 정서와는 동떨어진 것 같은데요.

    “일반 국민은 내게 가장 많은 표를 줬어요. 여론조사에서는 압도적으로 1등 했잖아요.”

    ▶ 지방선거 압승과 별개로 한나라당의 대선 승리에 대해 회의하는 사람이 많아요.

    “맞아요. 그래서 내가 고민하는 겁니다. 나는 이미 독재시대에 민주화운동한 것으로 한 시대에서 내 역할을 다한 사람이에요. 내가 지금 한나라당에 있는 건, 그래도 이 당이 자유민주주의 세력의 중심으로서 깨끗한 당, 개혁적인 당이 돼서 남북문제도 해결하고 교육문제도 해결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 일에 남은 정치인생을 바치겠다는 생각이거든요. (당선되기) 힘들다는 서울에서 세 번이나 됐는데, 이제 한 번 더 하면 어떻고 덜 하면 어떻습니까. 만약 정권 창출에 실패하면 지역구민에게 국회의원 한 번 더 시켜달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세 번이나 정권 창출에 실패한 당의 사람이. 어차피 한나라당이 정권 못 잡으면 내 정치인생은 끝나요.”

    ▶ 지방선거 이후 공신력 있는 여론조사 기관(중앙리서치)에 따르면, 한나라당의 압승 이유에 대해 응답자의 대다수(79%)가 여권의 실정에 따른 반사이익이라고 답했습니다. 후보나 공약이 맘에 들어 선택했다는 사람은 소수(16%)에 지나지 않았고요.

    “그건 우리도 잘 알고 있어요.”

    ▶ 어떻게 보십니까. 상당수 국민이 한나라당이 좋아서 지지하는 건 아니라는 얘긴데요.

    “국민이 열린우리당으로는 안 되겠다 해서 한나라당에 희망을 거는 건데, 이번 전당대회를 통해 한나라당의 실체가 고스란히 드러났잖아요. 이런 모습으로 국민에게 표를 달라는 건 국민을 속이는 거죠. 당 내부 개혁도 못하면서 정권만 잡겠다는 거냐고 비난받을 수밖에요.”

    ▶ 당을 어떻게 바꿔나가야 한다는 건가요.

    “가장 중요한 건 내부 변화죠.”

    ▶ 구체적으로 무엇이 어떻게 바뀌어야 한다는 건지.

    “이번 전당대회에서 드러난 불건전한 모습부터 없어져야 하지 않겠어요.”

    ▶ ‘불건전’이라는 표현을 쓰셨으니 말인데, 이번 재보선 공천만 하더라도 부적절한 인사를 공천했다가 뺐다가 백의종군한다는 사람을 다시 들이밀고….

    그가 또 대답 대신 허허 웃기만 했다.

    ▶ 여기자 성추행 사건 등 도덕적으로 해이한 현상이 자주 나타나죠.

    “내가 그런 것에 대해 얘기했다가 이번에…. 한나라당은 오만의 극치죠. 시대 흐름을 못 읽는 우물안 개구리예요. 자기네끼리 박수치고 연호하니 그게 세상의 전부인 줄 알아요. 집권하려면 그런 건 기본이고 그 외에 많은 것이 더해져야 하는데….”

    ▶ 항간에는 김덕룡 의원 공천비리 사건이 이 의원의 작품이라는 얘기가 떠돌아요. 당 개혁 차원에서 치고 나갔는데, 그것이 박 대표의 뜻과 어긋나게 터져버렸다고요.

    “전혀 사실이 아니에요. 제도적으로도 그렇게 될 수 없고요. 최고위원회의에서 여러 중진 의원이 결정하는 것이지 제가 혼자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인간적으로만 보면 오히려 내가 김 의원을 보호하는 게 맞지. 이와 관련된 유언비어도 전당대회 때 등장했어요. 또 정인봉 공천 뗀 것도 내가 한 것처럼 퍼트리고. 내가 (대표가 되면) 소장파 의원을 최고위원으로 임명하려 했다는 둥 공작 차원의 유언비어가 난무했어요. 한국 정치가 버려야 할 모든 구악이 집결한 거지.”

    “정치인은 월급쟁이가 아니다”

    ▶ 이 의원께서 생각하는 개혁방향과 원희룡 남경필 권영세 등 소장파 의원들의 개혁노선에 어떤 차이가 있나요.

    “대체로 같아요.”

    ▶ 당내에서 소장파에 대한 반감과 견제가 만만찮잖아요.

    “한나라당의 전통적인 보수성이 소장파가 가진 진보성을 용납하지 않는 거지. 그건 큰 문제가 아니에요. 사실에 대한 판단이나 정치적인 견해 차이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고 대화하면 풀릴 수 있어요. 그런데 이번 전당대회에서 나타난 문제점은 그게 아니잖아요. 의심하고, 패 가르고, 몰아붙이고…. 정치적 주장의 차이가 아니니 심각하다는 거죠.”

    이 의원은 향후 진로에 대해 ‘완전히 던지는 것’을 포함해 여러 가능성을 놓고 깊이 고민하고 있다고 밝혔다.

    “정말로 던진다면, 뭔가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정치를 할 수 있다는 확신이 설 때야 돌아올 겁니다. 밥벌이하려고 정치하는 게 아니잖아요. 정치인은 월급쟁이가 아니잖아요.”

    여권에 대한 생각을 떠보았다.

    ▶ 정치라는 게 상대가 같이 움직여줘야 하는 건데, 여권이나 노 대통령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좀 잘하라는 거지. 민심 따라서.”

    ▶ 원내대표로서 협상해보니 어떻든가요. 영 대화가 안 되던가요.

    “좋은 점도 있고. 영 대화하지 못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는 내일(7월15일) 아침 지리산에 오를 예정이라고 했다. 절을 나서는데, 산을 무너뜨릴 듯이 우렁찬 개구리 소리가 좀체 놓아주지 않았다. 절을 휘감아 도는 냇물이 어둠 속에서 허옇게 으르렁거렸다. 그 속에 사람의 목소리는 한없이 작고 초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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