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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선 획정에서 남북정상회담까지 ⑮

이승만 장기집권의 토대, 부산 정치파동과 발췌개헌

  • 김일영 성균관대 교수·정치학 iykim@skku.edu

이승만 장기집권의 토대, 부산 정치파동과 발췌개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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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2년 국회 내 반(反)이승만 세력은 내각제 개헌 추진으로 이승만을 실각시키고 장면을 옹립하려 했다. 이에 맞서 이승만은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군을 동원해 의원들을 압박했다. 미국은 북진통일을 주장하는 이승만을 휴전의 걸림돌로 여겨 한때 장면 추대를 지지했지만, 전쟁 승리와 확고한 ‘반공’ 정책 유지를 위해 이승만 지지로 돌아섰다. 결국 40여 일간의 헌정 중단 사태는 대통령 직선제와 양원제 도입이라는 발췌개헌으로 끝을 맺었다.
이승만 장기집권의 토대, 부산 정치파동과 발췌개헌

1952년 발췌개헌안 국회 표결 광경.

전쟁과 정치는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 레닌은 이 관계를 “전쟁은 정치를 다른 수단으로 연장한 것”이라고 했고, 마오쩌둥(毛澤東)은 “정치는 피를 흘리지 않는 전쟁이고, 전쟁은 피를 흘리는 정치”라고 했다. 두 혁명가는 전쟁과 정치가 수단을 달리하는 권력추구방식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1950년 6월25일부터 1953년 7월27일 사이 한반도에서는 전쟁과 정치가 동전의 양면처럼 긴밀한 관계임을 보여주는 상황이 연출됐다. 한편에서는 총을 쏘고 피를 흘리는 정치(즉 전쟁)가 벌어졌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총도 쏘지 않고 피도 흘리지 않는 전쟁(즉 정치)이 전개되었다.

전선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치는 동안에도 후방에서는 전시상황을 최대한 활용해 권력을 유지하거나 빼앗기 위한 정치가 계속되고 있었다. 당시 정치는 전쟁의 일부분이었으며, 전쟁 또한 정치의 연장선에서 벌어졌다. 이러한 전시(戰時) 정치의 정점이 부산 정치파동과 발췌개헌이었다. 이승만은 이 두 사건을 통해 1960년까지 장기 집권할 수 있는 정치적 토대를 마련했다.

장면 옹립공작과 미국의 지원

1948년 8월15일 정부 수립 이후부터 1950년 6월25일 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이승만 정부는 늘 의회로부터 쫓기는 처지였다. 한 번도 국회에서 안정적인 다수 의석을 차지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열세는 전쟁이 터진 후에도 계속됐다. 전쟁 발발 초기 이승만 정부는 잦은 정책 실패 내지는 실수를 범했다. 예컨대 전쟁 발발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빼앗긴 점, 피난민이 가득한 한강교를 폭파해 많은 양민을 사상케 한 일, 국민방위군의 이름으로 동원된 수많은 청장년이 제대로 먹지도 입지도 못하고 죽어간 사건, 거창지역에서 민간인을 ‘통비(通匪)분자’로 몰아 학살한 사건은 모두 이승만 정부로서는 책임을 모면하기 어려운 실책이었다. 야당 세력은 국회에서 연일 정부의 비정(秕政)을 질책했고, 이승만의 지지도는 날로 떨어졌다.

1951년 5월7일 이승만은 국민방위군 사건과 거창민간인학살사건의 책임을 물어 각료 몇 사람을 교체하면서 내무장관 조병옥도 경질했다. 이승만의 측근 비서가 작성한 5월4일자 경무대 일지(log)를 보면, 이승만은 조병옥의 경질을 한국정치에 대한 미국의 간섭을 차단하고, 더 나아가 미국이 6·25전쟁을 자국에 유리하게 끌고 가려는 것에 대한 저항의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무초 대사가 대통령을 방문해 조병옥의 사표를 수락한 데 대해 항의했다. 조병옥은 무초의 사람이었으며, 그를 통해 미국인들은 다음 선거를 통제하려고 했다.…이제 조병옥이 사라졌기 때문에…무초는 다른 인물을 찾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온화한 장면이었다. 무초는 자신의 사람을 잃었지만, 아직도 다음 선거에서 이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국무부는 다가올 몇 해 동안 한국을 그들의 손아귀 안에 두고 싶어 했다. 선거는 한국전쟁을 제한전(조기 휴전을 의미-필자)으로 끌어가려는 미국의 계획을 실현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만일 미국이 자신들의 계획에 동조하는 한국의 대통령을 갖게 된다면, 미국으로서는 중국에 한반도의 절반을 갖게 할 수도 있다. 이승만의 재선은 이러한 미국의 계획과 맞지 않을 것이다. 이승만이 어떤 조건도 붙이지 않고 한국의 완전독립을 계속 주장하리라는 사실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5월2일 부통령이 대통령에게 와서 말하기를, ‘모든 사람’이 총리와 국방장관을 묶어 그 자리에 장면을 앉히는 것이 최선이라고들 한다고 말했다(R. T. Oliver, Syngman Rhee and American Involvement in Korea, 1942-1960, pp.381-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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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영 성균관대 교수·정치학 iykim@skku.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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