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월호

‘정운찬 대망론’

“왼쪽, 오른쪽에서 센터링하면 ‘중앙공격수’는 골 넣게 돼 있다”

  • 조인직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cij1999@donga.com

    입력2007-01-05 11: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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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운찬  대망론’
    1년도 채 남지 않은 차기 대통령선거. 한나라당 3인의 잠재후보와 고건 전 총리의 동향은 이미 매일같이 신문 정치면 한 칸을 차지한다. 그러나 여당인 열린우리당은 상대적으로 조용하다. 통합파니 재창당파니 해서 정계개편에 대한 논의는 무성하지만 이렇다 할 대책이 나오지 않는다. 무엇보다 구심점이 되어줄 만한 대권후보가 없기 때문이다.

    열린우리당이 ‘불임(不姙)정당’ 소리를 들은 것은 어제오늘이 아니다. 고건 전 총리의 대선 출마가 가시화되지 않던 한때 정동영 전 의장이 여론조사에서 지지율 15%선을 턱걸이한 적은 있지만 그 후로는 10%는커녕 5%대에 진입한 당내 인사도 찾기 어려웠다. 최근 한두 달 사이 여론조사 동향을 보면 김근태 현 의장을 비롯해 한명숙 총리, 이해찬 전 총리, 천정배 전 법무부 장관, 정세균 산자부 장관, 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 등 비교적 지명도가 높은 인사들의 지지율도 1~4% 수준이다. 그래서 ‘반올림하면 모두 0%’라는 웃지 못할 농담도 오간다. 정당 지지율 또한 일부 조사에서는 열린우리당이 민노당이나 민주당과 비슷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현재의 여당과 ‘여권’의 잠재력은 다르다. ‘여권’이란 단일화든 옹립이든 유사시 반(反)한나라당 전선에 언제든 포함될 수 있는 세력을 뜻한다. 여론조사기관 매트릭스의 2006년 11월 조사에서 ‘노무현 정부 이후 원하는 정부 성향’을 묻는 질문에 ‘보수안정’이 48.2%, ‘진보개혁’이 45.1%로 비슷하게 나온 사실은 이런 관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렇다면 여권의 유력후보는 누구인가. 2006년 중반까지만 해도 ‘대세론’에 ‘대안부재론’까지 합쳐지며 고건 전 총리쪽으로 정리가 되는 듯했다. 그러나 한때 30%가 넘던 고 전 총리 지지율은 최근 15%대까지 떨어져 3위에 머물러 있다. ‘애매한 중도 성향 인사들의 소극적 참여’로 회자됐던 희망연대 역시 공식 출범한 지 4개월이 지나고 있지만, 정당도 아니고 결사체도 아닌 채 뒷심을 잃어가고 있다는 평가다. 한때 고 전 총리에게 매달리다시피 하던 민주당도 “고건 중심의 정계개편은 절대 없다”며 해이해진 당내 분위기를 추스르고 있다.

    ‘작전상 중도’와 ‘원조 중도’



    앞서 언급한 현 정부 주요 국무위원 출신 여당 의원들이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과거나 지금이나 회의적인 시각이 우세하다. 박원순 희망제작소 이사가 대안으로 거론되지만 아직은 대중성이 약하다. 진대제 전 정보통신부 장관은 새 사업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은 2006년 서울시장선거 때 한순간에 내려앉은 ‘지지율의 추억’ 탓인지 선뜻 옹립하자는 목소리를 듣기 어렵다. 이런저런 이유로 ‘강력한 여권 후보’로 거론되는 인물은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현 경제학부 교수)밖에 없는 듯하다.

    정 전 총장은 이미 여권에서 ‘영입 1순위’로 점 찍어놓은 지 오래다. 김한길 열린우리당 원내대표는 2006년 12월 기자간담회에서 오픈프라이머리 계획에 대해 언급하며 최근 고건 전 총리와 만나 이야기를 나눈 사실을 공개한 데 이어 ‘정운찬 전 총장을 만나 서로 좋은 감정을 가지고 헤어졌다’는 말을 꺼냈다. 공개석상에서도 이미 정운찬 전 총장은 고 전 총리와 함께,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여권으로부터 ‘원투 펀치’의 예우를 받는 상황이다. 이미 여당 내에서는 다음과 같은 대권 시나리오가 나돌고 있다.

    ▲2007년 3, 4월에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지지율의 바닥을 찍는다 ▲재창당이건 리모델링이건 정계개편을 한 뒤 정운찬 전 총장을 영입하고 오픈프라이머리를 띄운다 ▲막판에 가면 결국 단일화든 러닝메이트든 정리가 될 것이므로 고건 전 총리가 꼭 오픈프라이머리에 참여하지 않더라도 상관없다.

    ‘정운찬  대망론’

    ‘야구 마니아’로 알려진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

    열린우리당뿐만이 아니다. ‘고건 대세론’에서 빠져나온 민주당도 통합신당을 염두에 두며 정 전 총장에게 노골적으로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김효석 원내대표는 최근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지키고 시장경제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대통령으로 나와 나라를 이끌어야 한다. 범여권의 대선 후보로 정운찬 전 총장 같은 분도 될 수 있다”고 강조한 바 있다.

    여권의 핵심관계자는 “20, 30대 젊은층과 수도권 중산층, 호남 및 충청에 있던 전통적 지지기반을 회복시킬 요소를 다 갖췄다”며 정 전 총장의 잠재력을 높이 평가했다. 수도권의 한 여당 의원은 “미국이든 한국이든 지금 세계적 대세인 정치지형을 보라. 왼쪽, 오른쪽에서 다 중앙으로 센터링하고 있다. 그러다보면 중앙공격수는 발만 갖다 대도 골을 넣게 돼 있다”고 비유했다. 최근 한 언론사에서 대권후보군(群) 성향조사를 한 결과 현재의 대선 잠재 후보들은 1~10까지의 이념 스펙트럼에서 모두 ‘중도’에 해당하는 4.5~5.5를 기록했다. 이는 후보들이 보수와 진보라는 원래의 정체성을 감추고 ‘작전상 중도’를 표방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게 이 의원의 분석이다. 이런 현실에서 원래 중도 성향이 강한 정 전 총장이 더욱 돋보일 수 있다는 진단이다.

    ‘시대정신’의 어드밴티지

    단순히 정치공학적 관점에서 정 전 총장이 거저 먹고 들어가는 점수는 얼마나 될까. 초선에서 3선까지 여당에서 선거를 몇 번 치러본 몇몇 의원과 보좌관을 만나 그들의 의견을 종합해봤다.

    먼저 정 전 총장의 출신지는 충남 공주다. 여권후보가 누구든 호남에서의 싹쓸이가 재현된다고 가정할 때 결국 누가 영남과 충청에서 기본 표 이상을 얼마나 더 얻느냐가 관건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적어도 호남 출신 후보보다는 고향표라는 ‘비빌 언덕’이 하나 더 있다는 것은 큰 이점이라 할 수 있다. 직선제 이후 20년간 ‘TK-PK-호남-PK’ 구도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니 인구비례든 뭐든 ‘한 번은 충청도 차례’라는 한국인 특유의 ‘배려 정서’가 번질 법도 하다.

    다음으로는 헌법보다 상위에 있다는 이른바 ‘국민정서법’을 통한 ‘여론재판’에서 그가 문제없이 통과할 수 있겠냐는 부분. 지난 대선에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도 사실상 아들의 병역 문제가 최대 패인이 된 데서 보듯 재산, 병역, 친·인척 관리, 부동산 문제 등에서의 오점은 후보 결격사유와 직결된다. 정 전 총장의 경우 아직 본격적인 검증은 이뤄진 바 없지만 그는 오래전부터 최소한 서울대 총장 직무를 무난히 수행할 수 있을 정도의 주변관리는 해놓았다는 게 지인들의 평가다.

    정 전 총장의 1남1녀 중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아들은 이미 병역을 마쳤다. 정 전 총장이 미국 컬럼비아대 비즈니스 스쿨 교수 시절인 1970년대 후반에 현지에서 태어났지만, 아무 잡음 없이 시민권을 포기하고 병역의무를 다한 것은 ‘노블레스 오블리주’ 차원의 접근법이 고개 들면 ‘플러스 알파’로 작용할 소지도 있다. 그의 측근으로 분류되는 한 인사는 “모 대기업이 ‘알아서 모시기’ 차원에서 그의 아들에게 구조조정본부의 좋은 자리로 입사 오퍼를 했으나, 정 전 총장이 괜시리 입방아에 오를까봐 거절한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386 정치인들이 즐겨 거론하는 ‘시대정신’을 놓고 봐도 정 전 총장은 불리할 게 없다. 그는 경제와 민생이라는 화두 앞에서 빛을 발할 수 있는, 경제학·금융학 전문가라는 배경을 지녔다. 이 때문에 다른 후보의 경제정책을 비평할 때 상대적으로 ‘무게감’이 더할 수밖에 없다.

    교육 양극화가 대선 이슈로 떠오른다고 해도 저소득층, 농어촌 자녀 특별입학전형을 만든 당사자로서 어드밴티지가 남다르다. 그가 일관되게 주장해온 ‘고교입시 부활’도 정책으로 가다듬어질 경우 휘발성을 지닐 것이라는 전망이다. 좀 과장해서 부모의 재산 정도에 따라 갈 수 있는 학교가 정해진 지금 상황에서는 교육 양극화가 더 심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개천에서 더 많은 용이 나려면’ 강북이나 지방에도 경쟁구도를 통해 들어갈 수 있는 명문고를 육성해야 하고, 그러다보면 자연히 강남 쏠림 현상은 완화될 것이라는 논리다. 이는 중산층 이상에서 소구력이 높은 그의 ‘경기고-서울대’ 브랜드가 서민층에도 어필할 수 있는 배경이 된다.

    “리더십 검증됐다”

    정 전 총장은 존경하는 인물로 조순 전 서울시장과 김종인 민주당 의원을 꼽는다. 조 전 시장과는 서울대 상대 시절부터 이어져온 스승과 애제자 관계이지만, 김 의원과는 ‘사회에서 마흔 살 넘어 만난 사이’라는 점에서 그 인연이 궁금했다. 김 의원을 만나 정 전 총장의 ‘대권후보론’에 대한 생각을 물어봤다.

    ▼ 요즘도 자주 만나신다고 들었습니다. 20년지기라면서요.

    “1986년인가, 정운찬 교수가 국립 서울대 교수이면서 직선제 개헌 성명을 주도했거든요. 저는 당시 집권 민정당 소속 국회의원으로 여권의 기획파트 일을 맡고 있었어요. 그러니 어찌 보면 서로 반대편에 있었는데, 정 교수의 노력이나 신념이 참 가상해 보이더라고요. 가뜩이나 정권에서 이런저런 트집을 잡을 때인데. 격려 겸 위로를 해주려고 제가 먼저 연락해서 만나자고 했습니다. 그게 좋은 인연이 됐죠. 요즘도 소주도 마시고 대포도 하고 그러는데, 글쎄 한 열흘에 한 번쯤은 보나보네요. 전화는 더 자주 하고.”

    정 전 총장은 최근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김종인 의원이 정치인 중 자주 만나는 유일한 분”이라고 말한 바 있다. 5공 시절 전두환 대통령이 정 전 총장을 “잡아넣으라”고 했지만 김종인 의원이 앞장서서 막아줬다고 한다. 다음은 김 의원의 회고.

    “그때도 여론조사를 했죠. 요즘처럼 신문에 나지는 않는 내부 조사였는데 무척 정확했어요. 그런데 5공 막판에 전두환 대통령 지지율이 지금 노무현 대통령 지지율하고 똑같았어요. 한 자릿수 퍼센트…. 그때나 지금이나 정권 잡고 있는 사람들만 모르죠. 그래도 그때는 6·29라는 돌파 카드나 있었지, 지금은 손쓸 게 없네.”

    ▼ 정 전 총장의 대권 도전을 격려하는 편인가요.

    “정치라는 건 기본적으로 본인이 판단해서 할 문제 아닌가요. 제 개인적으로는 정 전 총장을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순간적인 이용가치가 있다는 생각에 정치권이 러브콜을 보내는데, 거기 잘못 말려들면 사람 망가지는 것도 한 순간이거든요. 물론 상황이 무르익고 하면 권고도 하고 추천도 할 수 있지만 지금은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 대선에 나간다면 승산이 있다고 봅니까. 대학교수 출신이라 험한 정치판에서 리더십을 발휘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시선도 있는데요.

    “노무현 대통령이 왜 실패했습니까. 준비 안 된 대통령이기 때문이잖아요. 3년 반 동안 로드맵만 그리다가 어떻게 대통령을 하겠습니까. 우리 둘이 만나면 나라걱정 많이 하지요. 제가 볼 때는 그래도 정치, 경제, 외교, 안보 등 다양한 이슈에 대해서 정 전 총장이 무척 해박한 사람입니다.”

    김 의원은 정 전 총장이 탐욕스럽지 않고, 특정 이익집단과의 선천적·후천적 결탁도 없다는 등 그의 장점을 역설했다. 훗날 발목 잡을 친·인척이 많지 않다는 의미로 풀이되는데, ‘주변이 간단하다’는 부분 또한 강조했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했지만 대권후보로서 정 전 총장을 ‘홍보’하는 데는 거침이 없었다. 김 의원은 그중에서도 정 전 총장의 리더십을 높이 평가했다.

    “1년 전 황우석 박사 사건 때 보세요. 여론과 맞서면서 진상조사를 했지 않습니까. 그렇게 나라 망신당하면서도 국회, 청와대, 정부 모두 소극적으로 움직였어요. 또 황 교수측의 극렬 지지자들이 끼어들었지 않습니까. 그러나 뒤에 가서 역시 서울대가 학문의 전당 노릇을 120% 했다는 평가가 쏟아지지 않았습니까. 정 교수는 용기 있는 지식인입니다. 한국에 학문하는 사람은 많아도 지식인은 드물다고 하잖아요. 그런 점에서 그는 ‘정치 철새’ 교수들과도 다르죠. 그가 총장을 하면서 그런 식의 위기돌파 리더십에 대해 여러 차례 검증받았다고 생각해요.”

    개혁주의자 vs 엘리트주의자

    정운찬 전 총장은 ‘개혁주의자이자 엘리트주의자’라는 게 일반적 평가다. 경기고-서울대 출신 인맥을 티나게 챙기는 것만으로도 일단 기본적인 친(親)엘리트 성향으로 비칠 만하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쓴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와 남다른 친분이 있다는 것 등을 예로 들며 ‘원적(原籍)’상으로는 좌파에 가깝지 않냐고 하는 사람도 드물 게 있다.

    ‘정운찬  대망론’

    정운찬 전 총장은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과 공식석상 외에 최근 2년간 따로 만난 적은 없다고 한다.

    왼쪽과 오른쪽 사이에서 정체성 갈등을 겪는 그의 모습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실제 그는 사석에서 지인들을 만나면 현 정권과 열린우리당에 대해 노골적인 반감을 표시한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취기가 오르면 “다시 과거로 돌아가도 이회창 후보는 찍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는 것. 2006년 5·31 지방선거 한 달쯤 전에 정 전 총장과 거나한 술자리를 가졌다는 한 인사는 “꼬치꼬치 캐묻자 그가 말했다. ‘열린우리당은 싫다’고. ‘그러면 후보로는 한나라당밖에 없지 않냐’고 했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서로 술자리 정신상태였다는 것은 감안해야 한다”고 전했다.

    김종인 의원은 정 전 총장을 ‘케인지언’이라고 표현했다. 그야말로 현대 자본주의 국가에 걸맞은 실용주의자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좋은 학교 나오고 미국에서 자본주의 경제학을 공부한 사람인데, 기본적으로 좌파라는 건 말도 안 된다. 본인도 스스로를 케인지언이라고 한다. 수요-공급법칙만 가지고 안 되는 게 간혹 있지 않은가. 경쟁원리만으로 안 되는 것, 그런 것은 국가에서 보조해줘야 한다. 그리고 나머지는 시장에 맡겨야 한다… 그는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

    대선에 출마하려면 당장 돈이 필요하며, 갖가지 연(緣)으로 얽히고설킨 정치권 특유의 조직관리를 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파이터’ 근성이 떨어지고 대접받는 데만 익숙할 것으로 여겨지는, 일반적인 서울대 교수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의 역량에 의문부호를 찍는 이도 적지 않다. 이런 시각에 대해 그의 한 지인은 그가 총장 시절 최초로, 또 최대 규모로 학교발전기금을 현금만 1600억원 모은 사례를 예로 들었다.

    “물론 돈을 모은 데는 재계에 발이 넓은 사회과학대 후배 A교수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하지만 어쨌거나 그런 사람을 알고 적소에 배치한다는 게 리더십 아니겠는가.”

    정 전 총장이 이번 대선에 나올 가능성이 정말 있을까. 나온다고 하는 쪽에선 “그가 인터뷰에서 하는 말을 들어보면 항상 1%의 여지는 남겨둔다. 고민의 일단을 드러낸 것”이라고 주장한다. 요컨대 이 바닥 생리상 “절대 안 한다”고까지는 안 했으므로 아직 가능성은 충분하다는 논리이다.

    ‘오지랖 넓은 분위기 메이커’

    서울대 총장 시절 그가 출입기자들과의 저녁자리에서 남긴 발언들 가운데 지금에 와서 새삼 확대 해석되는 사례도 몇 건 있다. 대표적인 것이 그가 노무현 정부 초기 한국은행 총재, 나아가 경제부총리 자리까지 공식·비공식적 루트를 통해 제안받았을 때의 에피소드. 그는 “좋은 자리에 왜 안 들어가시냐”는 기자들의 물음에 늘 “서울대 총장이 국무총리급인데 어떻게 그보다 낮은 자리에 들어가냐”고 답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그가 건넨 말은 “국무총리 윗자리만 마음에 있다더라”는 말로 절묘하게 변주돼온 게 사실이다.

    말 만들기 좋아하는 여의도 정가에서는 “총장 퇴임 인터뷰가 취임 인터뷰보다 더 많더라” “‘정치가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말보다는 아무래도 ‘나라 일에 훈수는 두겠다’ ‘향후 내 역할을 고민 중이다’라는 말에 방점이 더 찍혀 있는 것 아니냐” “정치에 뜻 없다는 사람이 이런저런 분야의 사람들은 왜 그렇게 많이 만나고 다니냐” “캠프가 벌써 몇 개나 있다던데” 하며 의혹의 시선을 보낸다.

    정봉주 열린우리당 의원은 최근 “본인은 거부의사를 분명히 하고 있지만 정 전 총장과 접촉한 기자들은 ‘출마의사’가 있다고 보는 경우가 많다. 일종의 이중 플레이를 하고 있다고 본다”고도 했다.

    안 나온다는 쪽에서는 정 전 총장이 2006년 9월8일 서울대 정치학과, 외교학과 총동창회 초청 간담회에서 명확하게 거취를 표명한 것을 상기시킨다. 당시 그는 대선 출마 의사를 묻는 동문들의 질문에 “나는 정치에 관심이 없다고 여러 차례 밝혔다. 앞으로 각종 대선후보 여론조사에서도 내 이름은 빼줬으면 좋겠다”고 비교적 단호하게 말한 바 있다.

    ‘정운찬 캠프 3개 가동 중’이라는 소문은 이미 금융가 ‘찌라시’에도 등장했었다. 정 전 총장의 핵심 지인은 “아마 20년 가까이 몸담고 있는 한국금융학회의 선후배들과 조순 전 서울시장 선거캠프에 몸담았던 꼬마 민주당 출신 386 보좌관 그룹, 총장 시절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던 학내 보좌그룹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정 전 총장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의기투합해서 그에 대한 ‘우호여론’을 전파하는 것을 두고 정치결사체인 ‘캠프’에 빗대서야 되겠냐”고 반문했다.

    “평소에는 안 만나던 사람을 갑자기 만난다면 선거운동으로 해석될 수 있겠지만, 정 전 총장을 조금만 알아도 그런 이야기는 안 한다. 각계 선후배들과 오지랖 넓은 것은 물론이고, 가수 조영남, 두산 야구선수 손시헌부터 해서 무슨 오페라 단장이니 무용수니 뮤지컬 배우니, 평소에도 그야말로 누구든 격의 없이 만나지 않는가.”

    정 전 총장의 다른 지인도 “보통 만나자고 해서 가보면 각기 다른 필드 사람 서너 명이 함께 와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 데서 친구 맺어주고 편하게 분위기 만드는 데는 분명 일가견이 있는 분”이라고 말했다.

    정 전 총장이 가까운 지인들에게 말한 것을 종합해보면, 5·31지방선거 전후부터 정계 진출을 촉구하는 ‘공식 오퍼’가 쏟아졌다. 8월에는 ‘친노(親盧) 핵심’으로 꼽히는 의원이 직접 서울대까지 찾아와 “내년에는 큰일을 하셔야 하지 않겠나” 하고 설득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2006년 상반기에는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가 강금실 전 법무장관을 데리고 나와 정 전 총장과 만난 적도 있다고 한다. 강 전 장관이 서울시장 출마선언을 하기 며칠 전이었다고 한다.

    이 자리에서 이 전 부총리는 “강금실 전 장관이 서울시장이 되도록 도와달라”는 취지의 말을 했고, 강 전 장관은 정 전 총장에게 “앞으로 대통령 되실 분이신데…, 잘 도와주세요”라고 했다는 것. 정 전 총장은 “그때도 정치는 할 생각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전달했다”고 지인들에게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정 전 총장은 기자와의 전화 통화에서 “정치엔 생각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무슨 말이든 하면, 그리고 또 언론에 나가면 자꾸 오해가 생긴다”며 인터뷰 제안도 정중히 사양했다. 서울대 정운찬 교수 연구실로 무작정 찾아가보는 수밖에 없었다.

    “다음 대통령 요건은 ‘기초’와 ‘배려’”

    방 한켠을 차지하고 있는 두산 베어스 사인볼과 한국시리즈 우승모자가 눈에 들어왔다. 난데없이 들이닥친 불청객 때문에 곤란해진 그에게 화제도 돌릴 겸 야구 이야기를 꺼냈다. 마침 한국이 아시안게임에서 대만, 일본에 연패한 며칠 뒤였다. 야구 마니아답게 그는 선수 구성의 잘못, 감독·코치진의 판단 실수 정황 등 몇 가지 예리한 진단을 들려줬고, “자만하지 말라는 경고다. 이번에 잘 졌다”로 결론을 내렸다. 분위기가 사뭇 풀어졌다.

    ▼ 대통령 지지율이 최악으로 떨어졌습니다.

    “참…. 걱정입니다. 앞으로의 대통령은 어떤 분야에서건 기초가 있어야 하고요,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남에 대한 배려가 꼭 좀 있었으면 합니다.”

    ▼ 3년 반 전에 노 대통령을 지지하지 않았나요.

    “그래도 이회창 총재보단 낫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그 전에도 김대중 후보를 찍었고…. 적어도 부정부패는 좀 줄어들 것이라는 나름의 믿음은 있었고, 뭐 굳이 말하자면 ‘병풍’이 제 맘에 들었죠. 정대철, 김원기 이런 분들…. 그런데 몇 년 지나고 보니…. 제가 서울대 총장 재임 중 대통령과 독대하지 못한 유일한 케이스라더군요. 안타깝죠.”

    ▼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에게 수시로 정책방향을 조언하신다는 얘기가 들리더군요.

    정 전 총장은 이 대목에서 정색을 하고 강하게 부인했다. 아마 이런 이야기들이 확산되며 ‘여권후보론’으로 포장되는 것을 경계하는 듯했다. 김근태 의장은 정운찬 총장의 경기고, 서울대 경제학과 1년 선배다.

    “그건 정말 사실이 아닙니다. 최근 2년 동안 공식석상 아닌 데서 김근태 선배를 따로 만난 적도 없어요. 며칠 전에 전화를 하셔서 부동산 대책에 대해 물으시길래 공급을 확대해야 한다는 원론적 이야기를 들려줬어요. 그전에도 당에서 서민경제회복위원회인가를 만들 때 전화를 주셔서 ‘정 총장 같은 분이 위원회를 맡아주면 좋을텐데…’라고 지나가는 소리로 한마디 하신 게 전부입니다. 제가 열린우리당 정책에 관여한 바는 전혀 없어요. 그쪽 분들 따로 만나뵌 적도 없고요. 기본적으로 현재의 그쪽 정책에 공감하는 부분이 매우 적습니다.”

    정 전 총장은 공식석상에서도 비교적 직설적으로 여당의 경제·교육·외교정책을 비판했다. 최근 열린 한 특강에서는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 때 ‘자주(自主)’ 한다고 하길래 ‘속으로만 하고 겉으로는 협력하라’고 말한 바 있다. 실력을 기르고 30~40년 후에나 주장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우편향 세력은 자주를 겉으로 내세워서 얻을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에 강조하지 않을 뿐”이라고도 했다.

    ‘정운찬  대망론’
    ▼ 여권과 이심전심으로 교감이 있다고 보는 시각은 여전합니다.

    “아마 저를 좀 아끼신다고 생각하는 선배분들이 그냥 듣기 좋으라고 자꾸 말씀을 만드시는 것도 같습니다. 김근태 선배에 대해 인간적으로는 가장 순수한 정치인이라고 생각하고, 또 제가 특별하게 좋아하는 캐릭터인 것도 분명합니다. 다만 그분이 복지부 장관 하실 때나 또 당에서 무슨 일을 하실 때 제가 그렇게 정책적으로 공감한 적은 없던 것 같아요.”

    문득 2005년 정 전 총장이 향후 서울대 입시를 통합교과형 논술 위주로 개편하려 했을 때가 떠올랐다. 당시 여당 교육위 위원들은 ‘사실상 본고사를 보는 것’이라며 정 총장에게 사퇴를 촉구하는 등 압박을 가했다.

    ▼ 교육위 소속 여당 386의원들, 그러니까 정봉주, 이인영, 최재성 의원 등과는 좀 악연이 있지 않나요.

    “그때 참 난감했죠. 말도 안 통하고. 그러고보니까 그 문제 가지고 김근태 선배랑 한 번 통화한 적이 있네요. 그 의원들이 김근태 선배 계보라고 누가 그러더라고요. ‘김 선배 계보 쪽의 서울대 죽이기가 너무한 것 아니냐’고 했더니 ‘요즘은 의견이 맞지 않는 의원들은 당에서도 어쩔 수가 없더라’고 해요. 그때 좀 실망하기도 했죠.”

    “운하? 노는 도로도 많은데…”

    ▼ 본인의 이념성향을 정확하게 표현하면 어떤 겁니까.

    “우리나라에 보수, 진보가 따로 있나요? 정말 미세한 것 몇 개 빼놓고 정치권은 다 똑같은 거 아닌가? 전 굳이 말하자면 중도입니다. 내년이면 제가 환갑인데, 나이 육십 먹은 사람이 그래도 어떨 땐 노무현 대통령 말도 맞다고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뉴라이트 이야기로 화제가 옮겨갔다. 5·16을 혁명, 4·19를 학생운동으로 ‘정정’했다고 해서 논란을 일으킨 뉴라이트 교과서 파동에 대해 물었다.

    “뉴라이트도 너무 나가신 거 아닌가 싶어요.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데요…. 근데 듣자하니 그날 행사장에 있던 뉴라이트 교수님들이 많이 다치셨답니다. 멱살을 잡힌 정도가 아니라 심한 폭행이 있었던 것 같던데 그러면 안 되죠.”

    ‘중도’의 모범답안과도 같은 반응이었다.

    몇 가지 관심사는 말을 돌려 물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몇몇 잠재적 대권후보에 대한 인상을 물어봤다.

    “이명박 전 시장은 아마 운하 때문에 발목 잡힐 수도 있지 않을까 싶네요. 지금 시골 땅 주변에 노는 도로가 얼마나 많은데, 그걸 이용해서 물류 나르고 그러면 안 되나요?”

    “고건 전 총리요? 고등학교 선배시죠. 2003년인가 한번 공식행사 석상에서 뵈었는데, 2시간 동안 옆자리에 앉아 계시면서 한말씀도 안 거시더군요.”

    다음 대선에 투표는 누구한테 할 생각이냐고 물었다.

    “아휴, 지난 번에도 별 기대 안 했어요. 총장이니까 투표는 꼭 해야겠고…, 글쎄 이번엔 안 할까 하는데요(웃음).”

    부동산 얘기가 빠질 수 없었다.

    “서울대 운동장 새단장해 기뻐”

    “지금 집값은 별수가 없죠. 이렇게 오른 건 노무현 대통령 잘못 아닌가요? 그냥 더 떨어지지 않게 유지하는 게 가장 좋은 거 같아요. 떨어져도 담보가 행사되면 그건 경제 전체에 더 안 좋은 문제를 야기할 것이고….”

    이어 그는 지론인 “지방 명문고를 부활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이어갔다. 고교입시가 부활하면 학군 프리미엄이 사라지고, 학군으로 오른 시세가 꺼지다보면 전반적인 부동산 안정 기조에 기여할 것이라는 게 요지다.

    경쟁논리 도입 측면에서는 오른쪽과 궁합이 맞고, 교육기회 균등 관점에서는 왼쪽의 주장과도 선이 닿는다.

    그는 유달리 ‘공부는 열심히 하는데 집안에서 받쳐주지 못하는 계층’에 관심이 많다. 앞서 말한 대로 엘리트주의와 진보개혁 성향의 아이덴티티가 결합된 때문인 듯하다. 이날도 그는 “예전에 어느 대형 로펌 변호사 한 분이, 아들이 삼성 장학금 5000만원 받아서 미국 유학 간 이야기를 자랑처럼 하시데요. 저는 그건 아니라고 봐요. 장학금은 돈 없고 공부 잘하는 학생들에게 우선적으로 가야 하는 것 아닌가요?”

    마침 독일에서 오랜만에 정 전 총장을 만나러 왔다는 그의 초등학교 동창이 연구실로 들어왔다. 동창생 점심식사 자리에 끼어 몇 가지 질문을 더 건넸으나 더 이상 정치권 현안에 대한 의미 있는 대답을 듣기는 어려웠다.

    동창생은 “예전에 공부 잘하는 아이들은 대개 운동을 잘 못했잖아요. 근데 여기 정 교수는 그렇게 뜀박질을 잘했어요. 왜 그 ‘찜뽕’이라고 아세요? 고무공으로 툭 치고 달려가면 세이프…. 그걸 그렇게 귀신같이 잘했다니까”라며 정 전 총장의 남달랐던 운동신경을 화제로 삼았다.

    정 전 총장은 서울대 교수식당 바깥으로 보이는, 고무트랙과 잔디로 새로 단장한 운동장을 바라보며 “내가 총장 하면서 저걸 제일 잘한 것 같아요. 저 운동장 저렇게 꾸며놓으니까 보기도 좋고 운동하기도 참 좋잖아요”라며 싱글벙글이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여권의 정운찬 대망론이 ‘상상의 나래’ 혹은 ‘짝사랑’으로 끝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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