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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국의 혁명’ 꿈꾼 5·16, 정권탈취와 민주압살로 귀결

  • 김영명 한림대 교수·정치학 ym789@hanmail.net

‘구국의 혁명’ 꿈꾼 5·16, 정권탈취와 민주압살로 귀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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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급기회 소멸에 따른 직업적 불만

이렇게 보면, 5·16군사정변과 군부의 정치적 지배는 각각 사회적 요인과 군사 제도적 요인의 결합으로 이뤄지며, 각 수준에서의 요인은 다시 (사회·정치) 구조의 요인과 (행동) 동기의 요인으로 구분된다.

먼저 군사 제도적 수준을 보면, 쿠데타 당시까지 진행됐던 군부의 양적, 질적 성장이 군부가 5·16 이후 오랫동안 정치적 지배력을 행사하는 데 구조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군부는 6·25전쟁의 와중에 급속히 성장해 1950년 10만 병력에서 1956년엔 70만 대군으로 변했다. 1958년 10만이 감축돼 이후 60만 규모가 유지됐는데, 이는 한국사회에서 단일 집단으로는 가장 큰 규모였다. 이러한 군부의 양적 팽창은 민간집단이 미성숙한 현실에서 자연히 사회적인 역할의 팽창으로 이어졌고, 남북한의 대치 상황에서 더욱 심화됐다.

그러나 양적 팽창보다도 정치적으로 더 중요했던 것은 6·25전쟁 이후 군부가 이룬 급속한 제도, 기술, 조직의 발전이었다. 미국의 막대한 군사 원조와 훈련 지도로 성장한 군부는 1961년경 한국에서 가장 근대화하고 서구화한 집단이라 할 만했다. 대학과 관료 등 근대화의 길을 가던 민간 집단이 있었으나, 그들은 탄생이 체계적이지 못했고 규모가 작았으며 정치·경제적 참여가 제한돼 있었다.

군부가 민간사회에 비해 먼저 근대화하고 제도적으로 발전한 것은 당시 많은 신생국에서 볼 수 있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이러한 차이는 자연히 군 장교들에게 민간 엘리트에 대한 불신감을 조장했고, 진정한 국가 발전을 담당할 세력은 자신들밖에 없다는 일종의 소명의식, 곧 군 장교의 통치의식을 부추겼다.



이러한 구조적 요인들은 군 장교들의 구체적인 행동 동기를 통해 정치 개입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군의 정치적 행동 동기는, 실제 당사자가 어떻게 인식하든, 구국의 소명의식만으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행동의 주체가 품고 있는 개인적, 파당적 또는 군부 전체의 집단적 불만의 소산인 경우가 많다.

5·16 주역들의 경우, 군 내부의 불만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상급 장교들의 부패와 이들을 이승만이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데 대한 불만이었고, 다른 하나는 진급 기회의 소멸을 중심으로 한 직업적인 불만이었다. 둘 다 한국 군부의 뿌리 깊은 파벌주의와 연결돼 있었다.

이승만은 건국 초기에 군 장성들과 후원-피후원의 관계를 맺고 특정 장성들에게 시혜를 제공하는 대신 군을 부정선거와 야당 탄압에 동원하는 등 개인 권력의 확대에 이용했다. 그 결과 군은 매우 부패했고 정치 개입이 비일비재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를 정치적 통제의 수단으로 삼았다.

권위주의와 민주주의의 필연적 대결

이런 상황이 군 장교들 사이에 상급자와 하급자 간 갈등을 일으켰고, 군부의 소요는 장면 내각 수립 이후 하급자 주도의 정화운동으로 본격화했다. 이러한 갈등이 같은 교육 경험과 전투 경험을 지닌 청년 장교 집단으로 구성된 소수의 모반 집단을 형성했다. 즉 그들은 군 정화운동이 실패하고 사회정치적 혼란이 가중되자 이를 한번에 해결할 목적으로 쿠데타라는 직접적인 무력 행동을 통한 정권 탈취를 감행한 것이다.

이러한 군 내부의 사정에 덧붙여 당시 한국사회의 혼란 역시 5·16군사정변의 주요 요인으로 작용했다. 특히 이승만 정권 말기에 이르러 군 내부의 불만과 사회정치적 혼란이 어우러지자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불만세력이 쿠데타를 계획하기 시작했다. 이승만 통치 말기와 장면 시기에 만연한 사회정치적 혼란은 쿠데타 계획에 직접적인 촉매로 작용했다.

사회정치적 요인을 구조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그것은 한마디로 ‘수입 민주주의의 위기’라고 표현될 수 있는 것이었다. 이승만 정권의 수립과 함께 도입된 서구식 자유민주주의는 들어오자마자 곧 타락했고, 4월 봉기 이후 시도된 장면 정부의 민주주의 부활 노력도 민간사회의 욕구와 국가 능력 간의 괴리로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이 자유민주주의의 이상 그 자체를 부인하면서 강력한 국가와 효율적인 행정을 앞세운 군 장교들의 정치 개입과 장기 지배의 구조적 여건을 마련했다. 이런 점에서 5·16군사정변은, 건국 당시 도입된 서구 자유민주주의의 실험이 여의치 않자 이를 거부하고 강력한 군부-관료적 국가와 효율적인 경제 개발을 전면에 내세운 권위주의 세력이 당시까지의 복잡했던 힘겨루기를 일단락지은 사건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군사정권의 등장과 장기 지배는 수입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사회정치적 상황과 민간집단보다 군부가 먼저 발전한 군부 내적 조건에 근본적인 원인을 두고 있었다. 이러한 구조적 상황 속에서, 군의 성장 및 파벌 갈등을 통해 청년 모반 집단이 형성됐고 이들에게는 통치의식이 무르익었다. 쿠데타라는 구체적인 행동 동기는 당시 일어났던 군 정화 운동의 실패와 사회정치적 혼란이 유발했다. 이상과 같은 군사 제도적 수준과 사회적 수준에서 존재했던 구조적 및 동기적 원인들이 군사 쿠데타를 촉발하고 군부의 장기적인 지배체제가 존속할 수 있게 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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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명 한림대 교수·정치학 ym78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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