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5월호

경제 안정 치적으로 덮을 수 없는 전두환의 폭압정치

  • 김승채 고려대 겸임교수·정치학 ksc77@korea.ac.kr

    입력2007-05-02 18: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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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제 안정 치적으로 덮을 수 없는 전두환의 폭압정치

    1981년 3월 제12대 대통령에 취임한 전두환.

    1979년 부마항쟁에 이은 박정희의 사망은 권위주의체제의 극점이 사라진 사건으로 민주화의 청신호로 받아들여졌다. 체제 내 자유파인 민주공화당과 온건 반대세력인 신민당은 국회에서 권위주의 폐기와 대통령 직선제에 합의했다. 군부는 온건한 장교 집단이 장악하고 있었고, 이들은 군부의 이익이 보장된다면 민주화를 반대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권위주의 해체와 민주주의 달성에 대한 전망을 밝게 했다. 그러나 민주화에 대한 낙관은 비관으로 전환되고 급기야 암흑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상황이 발생했다. 12·12쿠데타에 따른 강경파의 군부 장악은 권위주의체제가 지속되는 것은 물론 다시 견고해질지 모른다는 우려를 낳았다.

    이런 상황이 발생하자 권력블록 내부에서 논의됐던 타협을 통한 민주화는 허공의 메아리가 됐고, 지배블록 자체도 정부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한 민주공화당과 새로운 실세로 등장한 신군부, 그리고 재빨리 신군부 권위주의호(號)에 승선한 관료와 독점자본 등으로 분열되고 재편됐다. 바야흐로 신군부와 관료, 독점자본 연합이라는 새로운 지배블록이 형성됐다.

    전국적인 재야세력인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국민연합)도 제도적 개혁을 강조하는 점진주의자와 대중 동원을 통한 가투(街鬪)를 주장하는 행동주의자로 분열됐다. 학생운동도 재학생 중심의 단계적 투쟁론과 복학생 중심의 전면적 투쟁론으로 분열됐다. 지배블록 내의 온건파 소멸, 민중 전선의 분열, 그리고 제도권 정치세력의 대안 창출 부재로 신군부의 영향력이 급속히 커졌고 그들의 독점적 권력 장악은 민주화 이행의 물꼬를 권위주의 재강화로 돌리는 결과를 낳았다.

    박정희 사후 민주화를 갈망한 세력에게 5·18민주화운동이나 ‘80년 서울의 봄’은 민중의 불가항력적인 항복을 뜻한다. 반대세력의 무기력한 대응은 신군부의 위상을 한층 제고시켰다. 이 과정에 신군부는 5·18민주화운동의 사례에서 보듯 민중의 거센 저항과 이에 대한 강력한 제압이라는 극적인 상황을 창출하면서, 자신들만이 유일한 정치세력임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군부가 가장 선호한 전략적 선택은 ‘전면 대결을 통한 권위주의 체제로의 공공연한 복귀’였다.



    8분 만에 이뤄진 정권 탈취

    1980년 초반의 민주화 시도는 준비 안 된 민주화 세력의 ‘우연적 기대’가 ‘필연적 좌절’을 겪는 과정이었다. 그것은 1987년의 민주항쟁과 전두환 주연, 노태우 조연의 6·29선언으로 전환점을 맞게 됐다. 이런 점에서 전두환 정권에 대한 평가는 한국정치사와 민주화의 역정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과제다.

    1905년 일본은 을사늑약 체결로 500년 역사의 조선을 삼켜버렸다. 이는 참으로 역사상 보기 드문, 합법을 가장한 불법적인 침탈이었다. 을사늑약 체결은 불과 몇 시간 만에 이뤄진 것이었다. 전두환이 정권을 탈취하는 데 걸린 시간은 이보다 훨씬 더 짧았다. 단 8분 만에 끝난 분(分)치기 찬탈이었다.

    1980년 5월17일 오전 10시 국방부 제1회의실에서 주영복 국방부 장관 주재로 육해공군의 주요 지휘관 44명이 참석한 전군지휘관 회의가 열렸다. 이들은 10·26 직후 선포된 비상계엄을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대해 군 내부의 의견을 통일하고 국민을 겁주고 위압을 과시하자는 속셈을 갖고 있었다. 주영복 장관이 정치풍토 쇄신, 불순세력 제거 등 정치적 발언을 하자 군수기지사령관 안종훈이 반론을 폈다. 이에 이희성 육군참모총장이 “이 회의는 이미 정해진 안건을 놓고 의견을 듣는 자리”라고 차단하자 더 이상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이 회의 결과를 가지고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 겸 중앙정보부장 서리는 이날 오후 최규하 대통령을 면담해 전군지휘관 회의내용을 보고하면서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와 대통령 긴급조치에 의한 국회 해산, 국가보위부 설립을 건의했다. 최 대통령은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에 동의했다.

    비상계엄 전국 확대를 결의하기 위한 국무회의는 이날 밤 9시42분 무장군인이 에워싸고 있는 중앙청에서 열렸다. 야전전투복에 총에 착검까지 하고 복도 양쪽에 도열한 군인들 앞을 지나 외부 전화가 차단된 중앙청 국무회의실에 도착한 국무위원 중 상당수가 이미 초주검의 상태였다. 반(反)역사적 을사늑약에 부(否)를 던진 의로운 선대 생각이 전혀 나지 않았는지, 아니면 서슬 퍼런 강압적 분위기에 주눅이 들었는지 몰라도 국무회의에 참석한 국무위원들은 신현확 국무총리 주재로 열린 ‘계엄의 전국 확대 선포의 건’에 대해 제안 설명은커녕 찬반토론도 없이 가결했다.

    이로써 부마항쟁과 10·26사태를 거치면서 활활 타오르던 민주화의 불길은 단 8분 만에 완전히 꺼지고 말았다. 계엄치하에선 대통령 바로 밑에 계엄사령관이 위치하도록 계엄법에 명시돼 있기 때문에 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면 통수권 전체가 대통령과 계엄사령관으로 넘어가게 된다. 그런데 최규하 대통령은 군부에 대항하거나 군부의 강압을 이겨낼 어떠한 기제도 실질적으로 장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는 전두환에게 권력이 이양됨을 의미한다. 결국 전두환은 8분 만에 정권을 탈취하는 데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권력욕 강한 ‘투박한 군인’

    전두환은 1931년 경남 합천군의 벽지인 율곡면 내천리에서 가난한 농부의 7남매 중 5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부친을 따라 1~2년 만주에 가서 소학교 1년을 다니다가 귀국해 대구에서 독학으로 소학교 4학년에 편입했다. 6학년 학적부에 기재된 그의 성격은 “침착한 성질을 가지고, 겸손·친절하고 모든 일에 열의 있음. 주의력, 기억력, 이해력이 풍부하며 책임감이 왕성함”이다.

    초등학교 졸업 후 전두환은 대구공업중학교에 입학했는데, 이곳에서 평생의 인연이 된 노태우를 만난다(노태우는 1년 후 경북중학교로 전학). 육군사관학교가 정규 4년제로 개편된 첫해인 1951년 전두환은 11기로 입학했다. 원래 그는 육군종합학교 후보생에 지원해 합격했으나 어머니가 합격통지서를 찢어버리는 바람에 종합학교에 입학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육사 입학이 뒷날 대통령에 오르는 데 발판이 된 것을 생각하면 그것은 전화위복이었다. 전두환이라는 한 개인의 인생과 한국 정치사의 중대한 이정표가 육사 합격통지서로 바뀐 셈이다.

    전두환을 비롯한 육사 11기생들은 육군의 정사(正史)가 자신들과 더불어 시작한다는 자부심에 가득 차 있었다. 전두환은 졸업하면서 “나는 사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지 못했지만 군 실무에서는 단연코 으뜸가는 장교가 되겠다”고 공언했다. 그는 육사 졸업앨범에 ‘멸사돌진(滅死突進)’이라는 글을 남겼다. 이것은 군인 전두환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5·16군사정변이 일어난 후 대위에 지나지 않은 그가 혼자 군사혁명의 본거지인 육군본부로 가서 박정희를 만나 “이 군사혁명을 지지할지 반대할지 직접 판단하기 위해 찾아왔다”고 말한 것이나 박정희가 군복을 벗고 함께 일하자고 여러 번 권유했지만 한사코 사양하고 군에 남은 점에서도 군인 전두환의 저돌적인 면모가 읽힌다.

    1969년 11기 이후의 장교모임인 북극성회 회장을 맡은 그는 11기의 선두주자로 부상하면서 지도자의 꿈을 키웠다. 그의 군인정신은 월남전 파병 당시 “강한 훈련만이 전쟁에서 승리를 보장한다” “용자(勇者)는 살고 겁자(怯者)는 죽는다” “전우를 아껴라”고 말한 데서도 잘 드러난다.

    집권과정이 비슷하고 정치 통제와 경제 집중을 국정운영의 초점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전두환은 종종 박정희와 비교된다. 하지만 박정희는 주변 엘리트였고, 전두환은 핵심 엘리트였다. 국가 장래를 걱정하는 우국지사형의 박정희와 달리 그는 운이 좋은 출세지향적 군인이었다.

    전두환은 심신이 강건하고 성격이 소박·단순·정직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이라면 어떠한 어려움도 무릅쓰고 밀어붙이는 강인한 기질을 가지고 있다. 10·26사태 이후 합동수사본부장으로서 김재규를 민주 의사(義士)로 추앙하고 그의 석방을 요구하는 일부 여론을 묵살하고 아비를 죽인 패륜아를 그대로 살려둘 수 없다며 처형한 것이나, 육군참모총장이자 계엄사령관인 정승화가 수사에 비협조적이면서 자신을 일선지역으로 쫓아내려 하자 12·12로 반격한 것은 대표적인 사례다.

    정치·행정학자 204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역대 대통령 평가 설문조사(1998년 한국외국어대 안병만 교수)에 따르면, 전두환은 응답자들로부터 박정희(44.5%) 다음으로 ‘개인적으로는 싫어하지만 통치자로서는 존경한다’는 평((21.8%)을 받았다. 이는 전통적인 인간관계와 권위주의적 정치체제에 익숙한 국민정서와 관련된 것일 수도 있다.

    전두환의 출세욕은 민주적 가치관이나 도덕률로 적절하게 통제되지 못했다. 그는 민주주의적 가치관을 체계적으로 익힐 기회를 충분히 갖지 못한 투박한 군인이었다. 이런 면은 그가 김영삼 정부 시절 대통령 재임 중의 엄청난 비리로 법원으로부터 추징금 2250억원을 선고받고 여론의 질타를 받았을 때 사리사욕을 챙긴 것이 아니라며 자신감 있게 결백을 주장한 점, 그리고 수감 중 울분을 삭이지 못해 옥중단식을 하다가 석방될 때 기자회견을 하면서 웃음 지으며 당당하게 말한 데서도 드러난다.

    권위주의 색채의 한국적 민주주의

    경제 안정 치적으로 덮을 수 없는 전두환의 폭압정치

    5공 폭압정치의 상징인 삼청교육대(1980년 8월12일 강원도 원주).

    전두환은 능력보다는 인정과 의리를 중심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혈연과 친소(親疎) 따위의 ‘1차적 인간관계’를 중시하는 사람이다. 취임 직후의 “내 친척이나 내 자식, 그리고 나 자신을 포함한 그 누구든 법과 질서를 어기면 추호의 아량도 없이 법에 의해 제재를 받게 될 것”이라는 호언은 이철희·장영자 사건, 명성 사건, 새마을운동본부 비리 사건, 범양사건 같은 친인척 비리로 허언(虛言)이 돼버렸다.

    전두환은 뚜렷한 지도이념이나 통치철학 없이 10·26 이후 국정 혼란을 틈타 쿠데타로 집권한 과도기적 지도자다. 군인정신에 투철한, 출세욕 강한 군인이었기에 국가운영에 필요한 지도이념이나 통치철학을 갖고 있지 않았다. 단지 그는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고 군 규율에 따라 부하를 다스리는 일에 익숙한 전형적인 군인이었을 뿐이다. 따라서 그에게 수준 높은 국정철학을 기대하는 것은 애초 무리였다.

    이런 점에 비추어 본다면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 전두환이 품고 있던 국정철학 혹은 지도이념은 당시까지 한국사회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이던 자유민주주의와 반공, 그리고 근대화 혹은 경제발전이 전부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역대 대통령들을 보면 비록 취임 전에는 역사인식과 철학이 없었더라도 일단 대통령이 된 다음엔 나름대로 그럴듯한 국가통치철학 혹은 지도이념을 제시한다. 이런 점에서 전두환도 예외는 아니었다.

    전두환은 1980년 9월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해 대통령에 선출된 뒤 취임사에서 정치이념으로는 자유민주주의, 경제이념으로는 시장경제를 내세웠다. 그러나 전두환의 자유민주주의는 박정희 시대처럼 권위주의적 색채가 농후한 한국적 민주주의였으며, 시장경제도 자유로운 경쟁을 전제로 한 것이 아니라 국가가 개입하는 것이었다.

    자유민주주의라는 통치철학 혹은 지도이념에 비춰 보면, 전두환의 국정 운영은 집권과정의 정통성 결여와 정권 초기의 비정상적인 조치들이 맞물리면서 여론과는 거리가 먼 방향으로 나아갔다. 합법적인 절차 없이 군사작전 하듯 단행된 삼청교육은 대표적인 사회통제조치였다.

    또한 주요 야당 정치인들을 부패한 정치인으로 단죄하는 정치규제를 단행하고, 박정희 유신정권도 하지 않았던 관제 야당(민주한국당, 한국국민당, 민권당, 민주사회당) 창당으로 경쟁적 정당제를 외면하면서 권위주의체제의 태생적 불안정성을 극복하려 한 점, 언론사 통폐합과 언론인 대량해직을 통해 언론을 무력화한 점, 지식인사회에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 점, 저항세력에 대한 무지막지한 억압 등이 그렇다. 이것은 전두환의 시각으로는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바탕으로 하되 국민의 생존과 안전을 보장하는 한국적 민주주의였다.

    한편 경제적인 차원에서 그의 시장경제 이념은 여러 학자와 국민이 긍정하듯이 물가안정과 경제성장을 이루고 중화학공업에서 성과를 낸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를 위해 사용했던 강압적인 물가안정책(현실적인 물가인상안에 대한 철저한 억압으로 그 폐해가 노태우 정권에서 표출되기 시작함), 중요 국가 경제정책 결정과정에서 위임이라는 명목으로 이뤄진 자유방임적 구조에 따른 경제비서관, 장관, 실무국장 사이의 혼선과 리더십 부재, 국가 주도의 기업 통폐합 등은 시장경제 이념을 저버린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전두환의 이러한 비민주적 행동과 비시장경제적 추진과정은 국가 위기와 혼란의 국면에서 안정을 최우선으로 생각한 그의 가치관이 투영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폭력 앞세운 정당성 위기 극복전략

    전두환은 관료적 권위주의 강화, 의회의 시녀화, 언론의 지배도구화, 재벌과의 유착, 국민의식의 탈정치화 등을 지배전략으로 구사했다. 전두환 체제는 유신체제에 버금가는 강성 권위주의를 유지했다. 전두환은 국가보안법, 반공법, 집시법 등 기존 법률체계 외에 정치활동정화법, 사회보호법을 신설하고, 국가 안보 및 정보기관을 통해 사회통제를 강화했다. 전두환 정권하에서 정치규제법으로 검거된 사람은 유신체제에서의 4361명의 3배에 가까운 1만2039명이었다.

    특히 전두환 정권은 태생적인 정당성의 위기(legitimacy crisis)를 극복하기 위해 폭력기구를 앞세워 군·관료·재벌의 3자연합을 중심으로 하면서 민중을 배제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법적으로 노동 3권(단결권·단체교섭권·단체행동권)이 보장됐으나 명목적인 규정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강도 높은 억압정책에도 노학연대가 확산됐고, 한국노총의 대안 세력으로 민주노조가 출현했다. 전두환 때의 노사정 관계는 겉으로는 안정적이었지만 속으로는 시한폭탄처럼 불안했다.

    전두환은 사회악일소특별조치 및 계엄포고령 19호를 발표, 사회정화를 실시한다는 명목으로 1980년 8월4일부터1981년 1월24일까지 6만755명의 사회사범을 영장 없이 체포하고 그중 3252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했으며, 3만9742명을 삼청교육대로 끌고 가 인권을 유린했다.

    1983년 이후 정치규제 해제와 해직교수 복직, 제적학생 복교 등 제한적으로나마 유화적인 정책을 시행했지만, 억압적 지배전략은 정권 내내 이어졌다. 5공 출범 이전에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가, 출범 이후에는 사회정화위원회가 주도했다.

    전두환 정권하에서 의회는 행정부의 시녀였다. 재적의원의 3분의 1을 선거 없이 선출하는 전국구 제도를 마련해 의석의 3분의 2를 제1당(黨)이 차지하고 나머지는 그 밖의 정당, 그것도 관제 야당에 할당함으로써 적어도 1985년 총선 전까지는 예산이나 법안을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었다.

    전두환은 채찍과 당근으로 언론을 통제했다. 채찍은 언론사를 통폐합하고 870여 명의 언론인을 해직하고 언론기본법(1981년 1월)을 제정한 것이었다. 아울러 언론인 비리 예방이라는 명목으로 기자의 처우개선을 유도해 권언(權言)유착을 시도하기도 했다.

    “힘 가진 사람이 하고 싶은 대로”

    전두환에게는 재벌과 대기업도 협박과 통제의 대상이었다. 단적인 예가 7대 재벌이던 국제그룹의 파산이다. 명목적으로는 부실경영이 원인이었으나 실제로는 정치자금과 관련된 강제조치로 평가되고 있다. 재벌로부터 거둬들인 전두환의 비자금이 약 7000억원이라는 사실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전두환은 레포츠를 통한 국민의 탈정치화를 도모하기도 했다. ‘국풍81’이라는 행사를 마련해 춤과 노래의 한마당을 펼쳤고,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올림픽 유치로 국민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그가 상식에 어긋나게 두 차례나 시구(始球)한 프로야구의 출범은 국민의 정치적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구실을 했다. 또한 야간통행금지 해제와 교복자율화 등 탈정치적 행정으로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안간힘을 썼다.

    전두환의 국가통치전략은 이처럼 권위주의적이고 패권주의적이었다. 1987년 2월과 3월, 당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등으로 정부 여당이 야당과 학생, 재야세력의 공세에 밀리고 있을 때 그가 “정치란 힘 가진 사람이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게 원리”라고 말한 것은 권위주의에 철저하게 의존했음을 보여준다.

    전두환은 민주화를 요구하거나 자신의 정견을 비판하거나 저항하는 세력은 적(敵)으로 간주했다. 이와 관련해 앞서의 설문조사에서 전두환의 정치적 반대자에 대한 태도를 묻는 질문에 ‘억압했다’는 답변(91.6%)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나머지 8.4%의 응답자가 ‘회유했다’에 동의한 사실이 눈길을 끈다. 응답자 중 ‘타협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전혀 없었다.

    4·13 호헌 조치는 정치세력의 역량을 잘못 평가한 중대한 정치적 실수였지만, 이를 철회함으로써 중대한 정치적 고비를 넘긴 것은 평가할 만하다.

    전두환은 종종 “민주주의에는 ‘다수결의 원리’가 있는데도 야당이 여당과 정부에 복종하지 않고 계속 정치공세를 취함으로써 국회가 깡패집단처럼 저질이 되고 도떼기시장처럼 무질서하게 운영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자신은 “대통령으로서 말없는 절대 다수 국민 편에서 일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경제제일주의도 전두환의 중요한 국가통치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전두환은 국가경영 차원에서 정치와 경제의 관계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그래서 그는 재임 중 다른 어떤 것보다 경제에 최우선 순위를 두고 이것을 일관되게 추진했다.

    경제만큼은 치적

    경제전문가에게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라고 했다든가 “아무리 정치가 잘돼도 경제가 잘못되면 잘된 정치라고 생각할 수 없다”고 강조한 것도 경제우선주의에 대한 절대적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전두환의 집권을 전후한 1979~1980년 한국은 부마항쟁, 10·26사태, 제2차 석유파동 같은 사회정치적 불안요인으로 물가상승률 24.9%, 실업률 5.2%, 경제성장률 -3.9%를 기록했다.

    이와 같은 경제적 악조건에서 출범한 전두환 정권은 경제제일주의로 연평균 GNP 성장률 7.57%, 실업률 4.1%, 수출증가율 15.8%를 기록했고, 한국경제 사상 처음으로 1986년과 1987년에 각각 47억달러, 100억달러의 경상수지 흑자를 냈다.

    그리고 임기 내내 5% 안팎의 물가안정을 유지했다. 중화학공업의 연평균 성장률은10.8%에 이르렀다. 그에 따라 제조업에서 중화학공업이 차지하는 비중도 1981년 55.4%, 1982년 52.5%에서 1987년엔 57.5%로 증가했다. 아울러 비교적 낮은 수준의 불균등 분배를 유지함으로써 후세에 경제 분야에서만큼은 큰 치적을 남겼다는 평가를 받게 됐다.

    그렇지만 전두환 정권이 경제 분야에서 성과만 낸 것은 아니다. 전두환은 통화정책이나 외환정책 같은 경제이론에 대한 이해도가 낮아 이 분야에서는 올바른 정책을 추진하지 못했다. 청와대 경제팀에 직업관료나 전문가를 기용함으로써 청와대 비서진, 장관, 실무 관료인 부처 국장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하고 충돌이 잦았다.

    더욱이 전두환은 낮은 수준의 경제지식 탓에 불합리하고 실현 가능성 없는 모순된 정책을 결정하거나, 월간 경제동향보고회의를 1년에 한두 번만 소집했으며, 심지어 가끔 자신이 내린 명령조차 잊어버릴 정도로 경제정책에 대해 불성실한 태도를 보였다. 그럼에도 많은 학자가 전두환의 경제적 성과를 인정하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한편 공직자 부정부패의 면에서 전두환은 완전히 실패한 지도자라고 할 수 있다. 친인척 비리 엄단을 강조했지만 실패했다. 그는 퇴임 후 백담사로 쫓겨가기 직전 대(對)국민 사과문을 발표하면서 친인척 관리에 소홀했음을 후회하면서도 “대통령의 친인척이 되자 처음의 놀라움과 자랑스러움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주위의 유혹에 흔들려 말썽을 빚었다”고 함으로써 부정부패의 본질을 주변으로 돌리는 무책임함을 보였다.

    후안무치한 부정부패

    그는 2003년 4월말 추징금 미납으로 재산문제가 불거지자 전 재산이 29만1000원뿐으로 측근과 자식들이 생활비를 대주어 겨우 먹고사는 정도라고 밝혔다. 그것이 진실이라면 10여 명씩 떼지어 골프장에 가고, 골프장에서 과도한 사례비를 주면서 통 큰 씀씀이를 과시하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또 부인 명의의 10억원대 재산, 70억원이 넘는 장남의 재산, 30억원이 넘는 손자의 재산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김대중 대통령 취임 직후 박지원 비서실장이 취임인사차 방문했을 때 그가 “한 건 해서 부하들에게 풀라”고 말한 것은 ‘제 버릇 뭐 주지 못한다’는 속담을 생각나게 한다.

    10·26 이후 혼란한 국내 정치상황에서 12·12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은 한국적 민주주의 이념을 가진 국가질서 회복을 기도했다. 그리고 경제제일주의와 안정적인 국가 위기관리를 내세워 정통성 시비를 극복하려 했다. 이에 대해선 긍정적인 결과도 있었다. 그러나 정치발전과 민주화라는 역사적 과제와 시대적 요구에 대해서는 눈감은 지도자라 할 수 있다.

    경제 안정 치적으로 덮을 수 없는 전두환의 폭압정치
    김승채

    1959년 서울 출생

    고려대 정치학 박사

    한국정치학회 섭외·편집위원, 한국국제정치학회 총무위원, 21세기정치학회 연구분과 위원장 역임

    現 고려대 정치학과 겸임교수, 한국정당학회 총무이사

    저서 : ‘동아시아 민주화운동의 국제적 비교: 한국의 광주· 6월항쟁과 중국의 천안문 민주화 운동’ ‘선진 한국의 비전과 전략: 정치사회의 통합력’ ‘국가안보 정책 결정과정과 언론, 의회의 역할’


    경제가 어렵고 살기 힘들어진 요즘 전두환 시대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목소리가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국가 주도의 강압적인 경제제일주의 정책은 노태우 정부에 이르러 그 후유증을 드러냈고 지금까지 한국경제의 그림자로 작용하고 있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특히 전두환이 언론의 자유와 국회의 권위를 인정하고 다수 국민의 정당한 요구를 수용하는 정치적 노력을 기울였다면 민주주의의 진정한 실천이 절실히 요구되는 오늘날 국민이 대한민국의 미래에 거는 기대에 한층 힘이 실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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