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월호

‘이회창 신당’ 실체와 파워

2위 내줘 동력 급감… 한나라 내분이 한 가닥 희망

  • 김영화 한국일보 정치부 기자 yaaho@hk.co.kr

    입력2008-01-09 18: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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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의 대선 출마설이 나돌 때만 해도 반신반의했지만, 그는 결국 대선에 뛰어들었다. 한때 20% 중반의 지지율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는 정도(正道)가 아니라며 선을 그었고, BBK 검찰 수사발표는 이명박 당선자에게 날개를 달아줬다. 그리고 12월19일 이 전 총재는 초라한 성적표를 얻는 데 그쳤다. 무소속 이회창 후보의 두 달여 대선 행보와 향후 행로를 짚어봤다.
    ‘이회창 신당’ 실체와 파워

    이회창 전 한나라당 대표는 싫건 좋건 4월 총선에서 또 한 번 한나라당과 전면전을 치러야 하는 처지다.

    이회창 후보의 출마설이 언론에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한 것은 2007년 10월19일 연합뉴스가 ‘이회창 출마설’을 보도하면서부터다. 그러나 당시 조간신문들은 연합뉴스 기사를 인용 보도하면서도 ‘설마…’ 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이전에도 타블로이드 주간지에서 이 후보의 미확인 출마설을 여러 번 다뤘고, 연합뉴스 기사도 그 수준을 크게 넘어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후보가 2006년 12월 경희대 특강에서 “‘상유십이 순신불사(尙有十二 舜臣不死·아직 배가 12척 남아 있고 신은 죽지 않았습니다)’라는 이순신 장군의 장계를 떠올릴 때마다 전율 같은 감동을 느낀다”고 해서 정계 복귀 가능성이 점쳐졌을 때도, 신년 인사 때 이 후보 스스로 출마 의사가 없음을 명확히 함으로써 해프닝으로 일단락된 적이 있다.

    하지만 이 무렵부터 이 후보의 사무실이 있는 서울 남대문 단암빌딩에 정치부 기자들의 출입이 잦아진 게 사실이다. 물론 만에 하나라도 사실로 확인되면 낙종(落種)할 수 있다는 방어적 성격이 강했다.

    이 후보는 출마설에 대해 한동안 긍정도 부정도 않는 전략으로 일관했다. ‘아니다’라고 하면 될 일인데 뜸을 들이자 출마설은 눈덩이처럼 커져갔다. 단암빌딩에서 이 후보를 보좌해온 이흥주 특보가 출마 가능성을 암시하는 발언을 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비좁은 단암빌딩 사무실에는 10여 명의 기자가 상주하기 시작했고, 이 후보가 칩거에 들어간 서울 서빙고동 자택 앞에는 방송 카메라진이 새벽까지 진을 쳤다. 특히 이 전 총재가 서청원 전 한나라당 대표를 만난 데 이어 서빙고동 자택에서 강삼재 전 부총재를 면담하는 등 지난 대선에서 자신을 보좌한 인사들을 잇달아 만난 것으로 확인되면서 출마설은 갈수록 힘을 얻었다.

    그 후 이 후보는 “때가 되면 말씀드리겠다”는 말을 남긴 채 부인 한인옥씨와 함께 지방 칩거에 들어갔고, 5일 만인 11월7일 전격 출마기자 회견을 열었다. 이로써 이 후보 출마설은 취재진과의 숨바꼭질이 20여 일 계속된 끝에 사실로 확인됐다. 다만 2002년 대선 패배 뒤에도 보좌를 계속해온 측근들은 꽤 오래전부터 이 후보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감지했다고 한다. 이 후보가 측근들에게 ‘출마’란 용어를 직접적으로 사용한 적은 없지만 이심전심으로 속뜻을 읽은 것이다.

    측근들 사이에선 출마를 권유하는 분위기가 더 강했지만, 출마에 반대하는 인사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쪽도 이 후보의 출마 가능성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의 출마가 대선판도에 몰고 올 격랑을 생각하면 당연했다. 72세의 노(老)정객 이회창은 그렇게 돌아왔다.



    조직도 돈도 없었다

    이 후보 진영은 강삼재 전략기획팀장과 이흥주 홍보팀장 ‘투톱’ 체제로 운영됐다. 5선 의원 출신 강 팀장은 선거 전략을 진두지휘하고 자원봉사자 일색인 캠프의 규율을 책임졌다. 캠프 관계자들은 “당신들은 감기에 걸려도 직무태만”이라는 강 팀장의 다그침에 알 수 없는 힘을 얻었다. 43세의 나이에 집권여당 사무총장에 오른 강 팀장은 강력한 리더십으로 화려한 정치생활을 하다 ‘안풍(安風·안기부 자금 선거 전용) 사건’으로 정계를 떠났었다. 그런 강 팀장이 외롭게 법정투쟁을 할 때, 한나라당 총재이던 이 후보가 측근인 서정우 변호사와 이정락 변호사에게 “당을 위해 고생한 사람”이라며 무료 변론을 당부했다고 한다. 이때 도움으로 강 팀장은 2005년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이회창 신당’ 실체와 파워

    국민중심당과의 단일화 또한 이 전 총재가 창당을 해야만 하는 이유다.

    두 사람은 선거 기간 호흡이 찰떡궁합처럼 잘 맞았다. 강 팀장은 법조인 출신의 이 후보에게 부족한 정치 마인드와 조직통솔 능력을 채워줬다. 이 후보는 출마선언 기자회견을 마친 뒤 수행비서 편으로 강 팀장에게 두 사람끼리만 연락하기 위한 휴대전화를 건넸다고 한다. 2002년 이후 자신을 도왔던 이른바 ‘OB’ 정치인들이 찾아왔을 때 ‘외곽 지원’을 해달라며 물리친 것과 비교하면 강 팀장에 대한 이 후보의 신임이 얼마나 두터웠는지 짐작할 수 있다.

    1993년 이 후보가 국무총리에 오를 때 비서실장으로 발탁된 이래 인연을 이어오고 있는 이흥주 팀장은 측근 중의 측근이다. 이 팀장은 후보의 심중을 가장 정확하게 파악하는 인물로, 이채관 수행부장, 지상욱 박사, 최형철 박사 등 이른바 ‘단암빌딩 멤버’와 함께 캠프의 산파역을 해냈다.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된 뒤로 홍보팀장을 맡아 홍보업무는 물론이고 캠프의 살림살이까지 책임졌다. 온화한 성격의 이 팀장은 정치권에 발이 넓어 국민중심당 등으로 캠프의 외연을 넓히는 데도 한몫 했다. 심대평 국민중심당 대표와는 국무총리 행정조정실에서 함께 근무한 인연이 있어 지금도 매우 가까운 사이다.

    하지만 두 사람의 고군분투에도 불구하고 무소속 후보의 한계는 분명했다. 돈도, 조직도, 사람도 없었다. 대선후보 등록 첫날인 11월25일의 일이다. 이 후보는 후보 등록 첫날 서류를 접수할 것으로 예고됐으나 등록 마감시간이 다 돼가는데도 캠프에선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캠프에선 “후보 일정 때문에 등록을 26일로 미뤘다”고 둘러댔으나, 자금 조달을 맡은 담당자는 “오늘까지 들어오기로 했던 선거 기탁금 5억원이 안 들어왔다”고 속사정을 털어놓았다.

    귀족 이미지 벗었지만…

    이런 일은 선거 기간 내내 계속됐다. 11월27일 오전 10시로 예정된 공식 선거운동 출정식이 1시간30분가량 미뤄진 것도 돈 문제였다. 선거전에 대비해 계약한 유세 차량 100여 대의 음향장치 비용 10억원을 전날까지 지급해야 했는데, 대금 납부기한을 맞추지 못하는 바람에 제작업체로부터 차량출고를 거부당한 것. 행사장에 늦게 도착한 이 후보는 “행사가 엉망이죠? 너무 추운데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돈을 덜 냈더니 유세차량 제작업체측에서 차를 안 주더군요. 그래서 늦었습니다” 하며 머리를 숙여야 했다.

    무소속 후보는 후원회를 통해 모금을 할 수 없다. 후보자의 재산으로 선거를 치러야 한다. 최형철 행정팀장은 “이 후보의 아들딸이 모두 대출을 받았고 사돈들도 일부 도움을 줬다”고 말했다. 큰아들 정연씨의 장인인 이봉서 전 동력자원부 장관은 캠프 사무실이 들어선 단암빌딩을 소유한 재력가이고, 차남 수연씨의 장인도 지방에서 사업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위 최명석 변호사의 부친 역시 2002년 대선 때 ‘가회동 호화빌라’를 빌려준 자산가다.

    하지만 선거 후반부에 지지율이 3위로 추락하자 차입마저 쉽지 않았다. 이 무렵 이흥주 팀장이 사무실에서 전화통을 붙잡고 자금융통을 사정하는 모습이 자주 목격됐다. 이 팀장은 이번 선거를 위해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는 등 6억원을 끌어왔다. 이런 식으로 해서 이 후보는 선거 기간 100억원 정도를 조달한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이는 정당의 공식 선거비용 상한선인 465억원에 턱없이 못 미치는 수준이다. 게다가 후원금을 모금할 수 있는 정당은 일반적으로 정당 활동비를 선거자금으로 전용한다. 무소속 후보는 선거자금에서 정당 후보와 ‘게임이 안 되는’ 셈이다.

    최형철 팀장은 “무소속으로 나가는 것이 쉬운 일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직접 부딪쳐보니 너무 힘들었다”고 토로했다.

    이뿐 아니다. 이 후보는 선거 기간 신문광고를 한 번도 내지 못했고, 30회까지 가능한 TV·라디오 광고는 15회만 내보냈다. 각각 22회씩 가능한 TV와 라디오 방송연설도 모두 합해 4회에 불과했다. 그나마도 다른 후보가 20분씩 연설할 때 이 후보는 5분짜리 연설을 내보냈다. 또 지방 투어 때면 5000원짜리 국밥으로 끼니를 때우고, 장급 여관 숙박을 계속했다. 이런 사정이 이 후보의 귀족적 이미지를 쇄신하는 효과가 있었을지는 몰라도, 미디어 정치가 승패를 가르는 작금의 선거환경에선 발목을 잡는 족쇄나 다름없었다.

    BBK 때문에 출마 결심?

    ‘이회창 신당’ 실체와 파워

    12월5일 BBK 검찰 수사발표를 TV로 시청하고 있는 이회창 후보 캠프 관계자들.

    두 번의 대선 경험으로 이런 어려움을 몰랐을 리 없는 이 후보는 도대체 왜 출마했을까. 게다가 맞상대인 이명박 당선자는 당내 경선에서 이기고 대세론을 구가하지 않았던가. 이 후보의 출마 초기, ‘스페어 후보론’ ‘페이스메이커론’등 구구한 억측이 나돌았다. 여러 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했겠지만, 결정적 계기는 이명박 당선자의 BBK 연루 의혹이었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진다. BBK 검찰 수사결과가 발표되면 ‘보수 대 보수’ 전쟁에서 이회창 후보가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게 될 것이고, 경선 승복이라는 원칙에 발목 잡혔던 박근혜 전 대표와 손잡을 수 있는 여지도 상대적으로 넓어져 해볼 만한 싸움으로 봤다는 분석이다.

    물론 이 후보는 줄곧 “BBK 사건 때문에 출마한 것은 아니다”라고 부정했다. 사실 BBK 사건이 아니더라도 이 후보가 ‘이명박씨는 문제가 많은 후보이며, 이로 인해 정권교체가 안 될 수도 있고, 정권교체가 되더라도 제대로 된 정권교체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위장전입, 자녀 위장취업 등 도덕성에서 흠결이 드러났고, 정통 보수 진영의 잣대를 들이대면 보수도 진보도 아닌, 원칙 없는 정치인으로 비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약점에도 불구하고 좌파정권에 실망한 민심(民心)은 여전히 이명박 당선자에게 압도적 지지를 보내고 있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결국 유력 대선후보가 ‘BBK’라는 형사사건에 연루되지 않았더라면 과연 이 후보가 출마를 결심했겠느냐는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 후보측 선거 전략의 변화를 되짚어봐도 BBK 사건이 이 후보 캠프 전략의 핵심 축이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검찰의 BBK 수사발표가 있던 12월5일. TV로 수사결과 브리핑을 지켜보던 강삼재 팀장과 이흥주 팀장 등 캠프 관계자들의 얼굴에선 강력한 반전 카드였던 ‘BBK 한 방’이 연기처럼 사라진 것에 대한 허탈감이 짙게 배어났다.

    이후 캠프는 우왕좌왕했다. 캠프측은 오후 1시로 예정했던 검찰 수사발표에 대한 이 후보의 입장발표를 3시로 연기했다. 내부에선 회의가 거듭됐다. 캠프측은 결국 이 후보가 기자들의 질문에 간단히 답하는 것으로 형식을 간소화했다. ‘BBK에 너무 연연하는 모습으로 비쳐서는 안 된다’는 명분론과 ‘BBK 검찰 수사발표를 반박하지 않으면 앞으로 선거가 어려워진다’는 현실론이 충돌한 것이다. 결국 이 후보는 이날 회의에서 BBK 사건에 정면 대응하기로 기조를 정했다. 그리고 기자들과 만나 “발표 내용이 황당하고 국민의 의혹을 전혀 풀지 못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BBK 사건에 대해 “내용을 잘 모른다”며 한발 물러서 있던 기존의 태도와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강삼재 팀장은 다음날 기자들과 만나 이렇게 털어놨다.

    “BBK 수사발표 이후 선거의 두 축이 무너졌다. 이명박 후보가 주가조작에 연루됐다는 정도까지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BBK나 도곡동 땅 실소유주 문제 등 적어도 박근혜 전 대표가 이명박 후보와 결별할 수 있는 명분을 줄 만큼의 문제점은 드러날 것으로 봤다. 검찰이 이명박 후보를 완전히 클리어(결백)하게 만든 바람에 박 전 대표와 손잡는 것도 어려워졌다.”

    하지만 강 팀장은 “그렇다고 해서 한나라당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이 후보가 BBK 검찰발표라는 상황을 보고 기회주의적으로 움직인 것은 아니다”라고 단서를 붙였다.

    “프로 정치인은 정권에 대한 욕망과 상황논리로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지만 이회창 후보는 법률가 출신의 아마추어 정치인이다. 양심을 판단기준으로 삼아온 이 후보는 그런 식으로 자기 설득이 안 된다.”

    創黨은 벼랑 끝 카드

    BBK 수사 발표 직후, 밖에서는 이 후보의 사퇴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안에서는 패배주의가 팽배했다. 뭔가 돌파구가 필요했다. 그래서 내놓은 것이 ‘창당(創黨)’ 승부수다. 이 후보는 12월9일 TV연설을 통해 “곧 우리의 소중한 가치를 지키고 미래 비전을 함께하는 모든 세력을 아우르는 새로운 정당을 만들 것”이라며 창당을 기정사실화했다.

    사실 이 후보가 처음부터 창당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다. 한나라당과의 관계 때문이다. 이 후보는 한나라당을 언젠가 함께 갈 우군세력으로 규정해왔다. 11월17일 마산 강연에서 “후보 한 사람 잘못 때문에 한나라당 전체가 후보 인질이 됐다”고 발언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강 팀장은 “아무리 조건이 어려워도 이 후보가 무소속으로 나온 것은 나중에 한나라당을 중심으로 집권당을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라면서 “처음 지지율이 이후에도 유지됐으면 창당 방침을 밝히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창당 방침은 캠프 동요를 막기 위해 내놓은 처방 성격이 짙어 번복하기 어렵다. 이 후보를 위해 정치적 모험을 한 많은 사람의 미래가 달려 있기 때문이다. 당장 12월3일 후보 단일화에 합의한 국민중심당 문제가 있다. 국민중심당은 협상 과정에서 ‘이 후보가 대선 중간 후보직을 사퇴해선 안 되고 대선 이후에도 정치를 계속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건 것으로 알려졌다. 국민중심당 핵심 관계자는 “이 후보는 이제 죽지 않기 위해서라도 정치를 계속해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한나라당이 대선자금 문제를 포함해 모든 것을 다 들쑤셔놓을 것”이라고도 했다. 이제 이 후보는 싫건 좋건 4월 총선을 앞두고 다시 한번 한나라당과 총부리를 맞대야 하는 처지다.

    문제는 그가 새롭게 만드는 당이 충청당에 머무느냐, 아니면 전국정당의 기틀을 갖추느냐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각 진영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만큼 상황은 유동적이다. 당장 이 후보 캠프의 핵심이던 강삼재 팀장도 “총선까지 이 후보를 도울지는 고민해봐야 하는 사안”이라고 말하는 실정이다.

    자민련인가, 민국당인가

    이회창 후보측에서 꼽는 가장 이상적인 시나리오는 2008년 총선을 앞두고 박근혜 전 대표 진영이 당 내분 와중에 한나라당에서 떨어져 나와 이 후보와 자연스럽게 손을 잡는 것이다. 박 전 대표가 움직이지 않더라도 공천 물갈이에서 탈락한 한나라당 의원들이 대거 이 후보 진영으로 합류할 가능성도 있다. 이렇게 되면 이미 충청권을 기반으로 한 국민중심당 세력을 등에 업은 이 후보가 충청과 영남에서 무시 못할 세력으로 부상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이 후보측에선 범(汎)여권에서도 대선 패배 후 이합집산 과정에서 상당수 의원이 올 것이라고 내심 기대하는 분위기다. 당장 이 후보 캠프 주변에선 선거 막바지에 합류한 김혁규 전 경남도지사를 따라 대통합민주신당 의원 4~6명이 거취를 고민하고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 이 후보측 핵심 관계자는 “대선 이후 이명박 당선자에 대한 견제 심리가 작용하고 BBK 특검법이 통과돼 의혹 공방이 계속되면 총선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그러나 이 후보는 대선에서 2위 정동영 후보에게도 훨씬 뒤지는 3위에 그쳤다. 충청권에서도 참패했다. 이 후보는 대선 패배를 추스른 뒤 신년 초부터 4월 총선에 대비해 창당 작업을 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한나라당의 분열 등 새로운 변수가 없으면 ‘이회창 신당’은 동력을 얻지 못할 것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이 후보는 12월19일 “저의 여정은 끝나지 않았다”고 말해 내년 신당을 창당해 총선에 출마할 뜻을 내비쳤다. 분명한 것은 총선은 ‘대쪽’ 이미지의 이 후보에게 대선 때보다 더 탁한 정치물을 먹도록 요구하는 ‘나쁜 전쟁터’일 수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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