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월호

동지상고 은사 김진하 선생이 기억하는 ‘이명박 군’

“명박이한테 당할까봐 교사들이 수업준비 열심히 했죠”

  • 최호열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honeypapa@donga.com

    입력2008-01-10 11: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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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지상고 은사 김진하  선생이 기억하는 ‘이명박 군’

    이명박 당선자는 김진하 선생에 대해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스승”이라고 고마움을 표했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는 평소 연설이나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린 글에서 ‘잊지 못할 스승’ 두 사람을 꼽았다. 그들이 없었다면 자신은 대학에 진학할 수도 없었고, 그랬으면 현대건설 입사도 서울시장도 대통령후보도 불가능했을 거라고 했다.

    한 사람은 집안 형편 때문에 그의 고교 진학을 반대하는 어머니를 설득해 비록 야간상고이지만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도록 해준 중학교 3학년 때 담임이고, 또 한 사람은 고교 시절 은사 김진하(金鎭河·80) 선생이다. 이 당선자가 서울시장으로 재직 중이던 2005년 10월 자신의 싸이 홈피에 올린 김진하 선생에 대한 글은 많은 이에게 감동을 줬다.

    “저에겐 고향과도 같은 선생님이 계십니다. 김진하 선생님! 야간상고 시절 3년 동안 저에게 수학을 가르쳐주신 분입니다”로 시작된 글엔 옛 추억과 선생에 대한 고마운 마음이 오롯이 담겨 있다.

    “시골 야간학교는 으레 그렇듯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서라기보다 고등학교 졸업장이라도 받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입니다. (중략) 낮에는 일을 하고 늦은 밤에 공부하다 보니 꾸벅꾸벅 졸다 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수업도 충실하게 될 리 없었습니다. 그런데 김진하 선생님은 조금 달랐습니다. 어쩌면 주간 학생들에게 하는 것보다 더 열정적으로 가르치셨고, 비록 대학에 가지 못하더라도 배울 수 있을 때 하나라도 더 배우라고 격려해주었습니다. 저 역시 먼 훗날 대학시험 공부를 하는 데 있어서 선생님의 가르침과 격려가 큰 힘이 되었습니다. (중략) 학창시절, 낮에는 장사하고 밤에는 공부하는 고단한 하루였지만 선생님의 사랑과 열정 덕에 고단한 줄 모르고 공부할 수 있었고, 지금도 먼 곳에서 지켜봐주시는 선생님이 계시기에 제 자신을 늘 반성하며 돌아보게 됩니다. (중략) 선생님에게 저는 수많은 제자 중의 하나이지만 선생님은 저에게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스승이십니다. 선생님은 저에게 오래된 일기장 같은 분입니다. 선생님 눈 속에는 거짓 없는 제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소심하고 내성적이던 어린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야생 들국화’



    이명박 당선자의 정신적 스승이라 할 김진하 선생으로부터 이 당선자에 대한 옛 이야기와 두 사람 간 사제의 정을 듣기 위해 경북 포항으로 향했다. 이 당선자가 졸업한 동지상고는 포항에 있고, 선생은 여전히 포항을 지키고 있었다. 선생은 이 당선자의 고교동창 두 명과 약속장소로 나왔다. 올해 여든인 선생은 나이에 비해 정정하고, 옛일도 비교적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1953년경부터 동지상고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주간과 야간을 함께 가르쳤죠. 명박 군의 형인 이상득 국회부의장은 동지상고 주간을 나왔는데 역시 제게 배웠어요. 1985년까지 근무하다 포항 유성여고 교장으로 옮겨 2년여를 더 근무하고 교편을 놓았습니다.”

    이명박 당선자가 싸이 홈피에 올린 글을 보여주자 그는 “명박 군은 공부를 열심히 했고 모범생이었다. 당시 영어교사였던 정수영 선생은 명박 군과 친구 동생(이 당선자 부인 김윤옥씨) 중매를 섰을 정도로 다들 명박 군을 아꼈다. 내가 특별히 그에게 잘해준 것도 없는데 고마울 뿐”이라며 계면쩍어했다.

    “3년 동안 명박 군에게 수학을 가르쳤고, 3학년 때는 담임을 맡았지요. 야간학교 특성상 밤늦게 수업이 끝나면 학생들이 서둘러 집에 가기 바빴어요. 낮에는 다들 생업에 종사해야 하니까 학교에 일찍 와서 상담을 받으라고 할 수도 없어서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별로 없었어요. 종례시간이나 수업시간에 틈틈이 제가 학생들에게 해준 어쭙잖은 한마디, 한마디가 이 당선자의 기억에 좋게 남아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저야 그저 어려운 형편에서 공부하는 아이들에게 하나라도 더 가르쳐주려 한 것밖에는 없었어요.”

    동지상고 은사 김진하  선생이 기억하는 ‘이명박 군’

    2005년 10월 청계천 새물맞이 행사 때 만난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과 김진하 선생.

    당시 주간 학생과 야간 학생을 다 가르쳤지만 야간 학생들에게 애정이 더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마음이라고 했다.

    “야간부 학생들은 다들 가정형편 때문에 스스로 돈을 벌어 학교에 다니는 고학생이었죠. 그래서 이런 말을 해주곤 했어요. ‘주간에 다니는 학생들이 온실에서 자란 국화라면 너희들은 야생 들국화다. 들국화는 국화보다 화려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지만 그 향기는 더 멀리 사방으로 퍼진다. 그러니 지금의 시련을 극복하고 더 향기로운 꽃을 피울 수 있도록 열심히 해라’라고요. 그렇게 희망을 심어주는 말을 틈나는 대로 해줬어요.”

    옆에 있던 이 당선자의 동창 김진호씨가 거들었다.

    “당시 선생님의 마음 씀씀이는 명박이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느꼈어요. 가령 그때 학교 교실에 난로는 있어도 땔감이 없어 겨울에 불을 땔 수가 없었어요. 그러자 선생님이 댁에서 땔감을 가져와 불을 때주면서 학생들이 공부할 수 있게 해 주셨죠. 그런 선생님의 제자사랑을 명박이도 고맙게 느끼고 존경했을 겁니다.”

    엇갈린 기억

    이명박 당선자는 김진하 선생에 대한 회상 글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30년 만인 1996년 다시 만났다고 했다.

    “저는 가난이 너무 지긋지긋해서, 대학진학은 꿈도 꿀 수 없는 제 자신이 너무 초라해서 도망치듯 서울로 상경했고, 선생님도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3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1996년 저는 초선의원으로 정치 1번지라는 종로에서 국회의원 선거를 치르게 되었습니다. 종로 한복판에서 유세를 하던 중이었는데 어디선가 낯익은 분이 뛰어나오시더니 아스팔트 바닥에 엎드려 유권자들을 향해 큰절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라 일으켜보니 선생님, 바로 선생님이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제 손을 꼭 잡으시고는 ‘이 사람이 저의 제자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라고 소리치셨습니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제가, 종로에서만 다섯 번째 도전인 이종찬 의원, 청문회 스타인 노무현 의원과 함께 출마해 어려움을 겪는 것이 안쓰러우셨던지 멀리 포항에서 소식도 없이 찾아오신 것이었습니다. 선생님의 격려는 저에게 마치 천군만마를 얻은 것과 같았고, 소식도 없는 제자를 위해 먼 걸음을 하신 선생님께 그저 죄송한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김진하 선생의 기억은 달랐다. 이명박 당선자가 현대건설 사장이던 1980년대 중반에 이 당선자와 부인 김윤옥씨를 중매한 정수영 선생과 함께 찾아가는 등 몇 차례 만났다는 것. 그 후 이 당선자는 해마다 스승의 날이면 꽃을 보냈다고 한다.

    “명박 군이 현대건설 회장이 되어 해외 언론에도 많이 나오는 걸 보고 제가 그랬어요. ‘자네는 이제 내 제자를 넘어 세계적인 인물이다. 앞으로는 예우를 갖추겠다’고요. 그러자 웃으면서 ‘저는 이대로 선생님의 제자인 게 좋다’며 그러지 말라고 하더군요.”

    선생이 1996년 총선 때 유세장을 찾은 상황도 설명이 좀 다르다.

    “명박 군이 국회의원선거에 출마한다고 하니까 서울에 사는 동지상고 동창들이 격려방문을 하러 간다고 해서 저도 서울로 올라갔어요. 마침 유세가 있다고 해서 그곳으로 갔죠. 뒤에 서서 구경을 하는데, 명박 군이 나와 어릴 때 고생한 얘기, 고학한 얘기를 하다가 언제 저를 봤는지 ‘저 뒤에 저를 가르치신 선생님이 와 계십니다’하는 거예요. 그만큼 눈썰미가 있는 친구였어요. 저를 지목하는데 제가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앞으로 나가 인사를 하고 내려왔죠.”

    동지상고 은사 김진하  선생이 기억하는 ‘이명박 군’

    동지상고 야간학부 1960년 졸업 사진. 앞줄 왼쪽 세 번째가 김진하 선생, 그 뒷줄 오른쪽 네 번째가 이명박 당선자.

    그가 마지막으로 이 당선자를 만난 것은 2005년 10월1일, 청계천 새물맞이 행사를 앞두고였다. 초청장을 받은 그는 전국 8도의 물을 모아 청계천에 합류시킨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 시장 고향의 물도 합류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포항 형산강의 물을 떠다 정수를 해서 가져갔다고 한다.

    “제 손에 들려 있던 물을 보더니 곧바로 비서에게 주면서 검사한 후에 합류시키라고 하더군요. 그만큼 철저한 친구였어요.”

    백지 답안지

    선생에 따르면 동지상고 주간학생 중에는 더러 서울대나 연세대, 고려대 등 명문대에 진학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야간에서는 이명박 당선자가 처음이었다고 한다. 장학금으로 학교에 다니기 위해 야간상고에 진학한 것이라 해도 대단한 노력이 뒤따랐을 것이다.

    “당시 주간 3개 학급, 야간 1개 학급이었어요. 1, 2학년 때까지는 반 석차만 매겼는데 당연히 야간에선 이명박이 1등이었죠. 3학년 때는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들을 위해 주·야간을 합쳐 전교등수를 매겼는데, 전체에서도 1등이더라고요.”

    동지상고는 성적이 평균 90점 이상이면 장학금을 줬다고 한다. 이명박 당선자는 이 성적장학금으로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그런데 그가 장학금을 못 받게 될 뻔한 일이 생겼다고 한다.

    “야간부 학생 중에 경북도 대표 배구선수가 있었는데, 그 친구가 경기를 치르는 날 시험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그 친구가 ‘나는 시험을 볼 수 없다. 그러니 다 같이 백지 답안지를 내자’고 바람을 잡았어요. 그런데 명박 군은 백지 답안지를 내면 평균 90점이 안 돼 장학금을 받을 수가 없기 때문에 학업을 중단해야 할 상황이었죠. 제가 ‘학교를 계속 다녀야 하니 너 혼자라도 시험을 보라’고 설득했는데 결국 동참하더군요. ‘다 같이 하는 일에 나만 빠질 수 없다’는 것이었어요.”

    선생은 “다행히 재시험을 보는 것으로 일단락되어 가슴을 쓸어내렸다”며 웃었다.

    이명박 당선자의 동창 강원구씨는 “명박이는 수업 중에 학과공부하는 걸 별로 보지 못했다. 책을 들고 있기는 한데, 대부분 사회 상식에 관련된 책이나 영어성경이었다”고 기억했다.

    “신기한 건, 다른 책을 보고 있으면서도 선생님이 교단에서 말하는 게 다 이해가 되나 봐요. 난해한 질문을 해서 선생님들을 당황케 하곤 했어요.”

    선생도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들이 ‘명박이 때문에 미리 충분히 연구를 해서 수업에 들어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명박 군을 가르치기가 힘들다’고 할 정도였어요. 제가 한번은 시험문제를 내면서 일부러 가르친 범위 밖에 있는 문제를 하나 냈어요. 이건 못 풀겠지 싶었는데, 명박 군은 그걸 풀고 100점을 맞더라고요.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싶어 명박 군의 아버지를 만났을 때 물어봤어요. 밤을 새워 공부한다고 하더군요. 새벽에 장사할 준비를 해야 했으니 거의 자는 시간 없이 공부 한 셈이죠.”

    대왕골 주인

    이명박 당선자는 학창시절을 회고하면서 “가난한 집안형편 때문에 열등감이 있었고 리더십도 부족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동기들은 리더십이 있는 친구였다고 기억했다. 강원구 씨는 “명박이는 자그마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강인함이 있고 말도 조리 있게 잘해서 동기들이 그의 말을 잘 따랐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속이 깊었어요. 사춘기 시절이라 집안 환경이며 주어진 현실에 짜증을 낼 법도 한데 내색도 안 했어요. 처음 입학했을 때 그가 그렇게 어려운 형편이란 걸 아무도 몰랐을 정도예요. 저랑은 가까운 편이었는데도 속내를 털어놓는 법이 없었죠.”

    이야기를 마칠 때쯤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당시 동지상고가 용흥동에 있었는데, 흔히 옛 지명인 ‘대왕(大王)골’로 불렸어요. 옛날에 임금이 민정 시찰을 나서면 그 골짜기에서 꼭 하룻밤을 묵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라고 하더군요. 명박이가 대통령에 나온다고 하니까 제일 먼저 대왕골의 주인이 지금 나타났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전설은 이렇게 만들어지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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