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8월호

한국 민족주의와 민주주의, 그 향방은?

‘한민족 공동체주의와 행복추구 민주주의로…

  • 탁석산 철학자·‘한국의 정체성’ 저자 stonemt@naver.com

    입력2008-08-04 14: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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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민족주의와 민주주의, 그 향방은?

    촛불시위는 개인 민주주의의 한 단면이다. 7월5일 서울시청 앞의 촛불시위.

    민족적 민주주의, 민주적 민족주의라는 말은 낯설다. 아니 그 말이 성립되는지도 의심스럽다.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는 그 범주가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두 가지 모두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중요한 이념에 속하는 것은 틀림없다.

    이 두 가지 ‘주의’는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작동하고 있을까? 그것은 국가를 매개로 작동하고 있다. 즉, 민족주의적 국가라든지, 민주적 국가라는 개념은 자연스럽다. 민족은 국가와 관련이 있고 국가는 민주주의와 관련이 있는 것이다. 이런 관계로 민족과 민주주의는 어떤 연관성이 있어 보인다.

    따라서 민족주의와 민주주의가 어디로 가고 있느냐를 논하려면 반드시 국가를 중심으로 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건국, 즉 국가 세우기 60주년을 맞이하여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를 논하는 것은 적절해 보인다.

    우선 민족과 국가의 관계를 살펴보자. 한국에서 민족은 국가의 대체물로 탄생했고, 그 역할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즉 민족은 통일이 될 때까지 그 역할을 계속할 것이라는 말이다. 민족론은 조선이 일본에 국권을 빼앗길 무렵에 처음으로 등장했다. 즉 민족이란 말은 1900년 이후에 만들어지거나 일본에서 들어온 말로 생각되는데, 1896년부터 1899년 사이에 발행된 ‘독립신문’에도 민족이란 말은 등장하지 않는다. 당시 분위기로 보아 민족이란 말이 수없이 쓰였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이때는 조선이란 국체(國體)가 여전히 존재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1900년 이후 민족 개념 등장



    하지만 1905년 무렵, 즉 을사조약으로 국가가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민족이란 말이 쓰이기 시작한다. 1904년부터 1910년의 ‘대한매일신보’에서는 민족이란 단어를 177건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일본에 병탄된 후에는 민족이란 말이 일상용어로 자리 잡았다. 일제 강점기에는 국가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민족이 국가를 대신했다. 민족의 장래를 위해 실력도 기르고, 민족의 독립을 위해 투쟁도 하고, 심지어 이광수는 민족개조론을 쓰기도 했다. 하지만 광복이 찾아왔어도 민족이란 개념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직 국가 수립이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광복은 되었으나 건국이 이룩되지 않았기에 민족이 맹위를 떨쳤다. 국가 수립을 눈앞에 두고 있었으나 삼팔선에 의한 분단은 민족 개념을 더 뜨겁게 달구었다. 건국이 되었어도 민족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앞서 말한 대로 분단으로 인해 온전한 국가 수립이 좌절됐기 때문이었다. 분단 없이 국가 수립이 완료되었다면 아마도 민족이란 개념은 힘을 잃고 국가가 그 자리를 차지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한국은 국가 개념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지만 통일이 되지 않았기에 민족주의도 여전히 힘을 잃지 않고 있다.

    민족주의는 힘이 있지만 국가라는 현실적인 공동체 속에서 작동한다. 따라서 민족주의는 국가가 건국 후 어떤 단계를 거쳐 발전했느냐에 따라 성격을 달리했다. 몇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즉 ‘생존’ ‘생활’ ‘행복’ ‘의미’의 시대를 거쳤다. 생존의 시대는 조선의 몰락부터 1961년의 쿠데타까지라고 볼 수 있다. 크게 보자면 국가 세우기에 해당하는 시기인데 국가 세우기도 생존의 울타리로서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왕조의 몰락은 새로운 국가 설립을 절실하게 요구했지만 식민지, 분단, 전쟁 등으로 인해 좌절을 겪었다. 전쟁 후에 수립된 국가는 불행히도 무능했다. 국가적 과제를 처리할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인간의 삶에 가장 기본적인 의식주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결국 ‘못살겠다. 갈아보자’라는 구호가 이승만 정권의 마지막 선거에서 큰 호응을 얻게 된다. 국가 설립이 긴요한 과제였으나 국가가 설립된 후에 국민에게 가장 필수적인 것을 제공하는 데 실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생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각자가 알아서, 그야말로 요령껏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시기였다. 다 함께 잘살기보다는 나 먼저 살고 보기가 일반화된 시대였다.

    ‘잘살아보세’

    식민지배, 동족상잔의 전쟁, 그리고 무능한 국가. 이런 시대를 살아오면서 민주주의를 꿈꿀 수 있었겠는가. 민주주의는 지켜야 할 사유재산이 형성된 후에나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끼닛거리를 걱정하면서 개인의 인권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생존의 문제가 해결된 것은 이후 생활의 시대에 이르러서였다.

    이 시대는 5·16군사정변 이후부터 문민정부 이전까지를 말하는데 산업화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기본적인 의식주를 해결하고 인간다운 생활을 누리기 시작한 시기다. 이 시기는 또한 격렬한 민주화 항쟁 시대로 독재에 맞서 한쪽에서 민주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정치인이나 지식인들은 독재 타도를 외치면서 목숨을 걸고 싸웠지만 대중은 3선(選) 개헌과 유신에 찬성표를 던졌다.

    사람들은 생존의 문제를 해결하고 여가를 누리는 생활을 맛보고 싶어했기 때문에 군부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지 않았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지는 군부는 경제를 앞세워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비켜갔다. ‘하면 된다’ ‘잘살아보세’ 등의 구호가 이 시기에 유독 호응을 얻은 것은 개인의 능력에 따라 사회적 신분 상승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민주주의보다는 여가를 즐기는 생활이 우선한다고 보았다. ‘마이 카’ 시대가 주는 기쁨을 민주주의로 대체하기는 어려웠던 것이다. 대중은 민주주의의 가치를 몰랐던 것이 아니라 유보시켰을 뿐이다.

    생존, 생활시대에 민족주의는 잠복했다. 먹고사는 문제에 바쁘고 재산 형성에 몰두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분단과 전쟁으로 인해 남과 북은 같은 민족이기보다는 적대 집단이 되었다. 즉 남북한 모두 체제경쟁에 몰두했다. 남한과 북한 중 어느 체제가 더 우월한지를 두고 치열한 경쟁관계에 놓이게 됨으로써 민족 개념은 쇠퇴했다. 민족보다 이데올로기가 우선하는 시대였지만 온전한 국가가 수립됐다는 의식은 여전히 없었기에 민족주의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잠복했을 뿐이었다. 통일이란 구호가 양쪽에서 모두 건재했다.

    민주주의의 싹

    행복시대는 김영삼, 김대중 정부를 말한다. 사람들은 지킬 만한 사유재산이 생기면 자신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정치적 권리를 요구하게 된다. 재산이 없을 때에는 정치적 자유나 인권보다는 생존에 우선순위를 두게 된다. 이것은 서양도 마찬가지였다. 서양에서도 사유재산이 형성된 후에야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는 민주주의가 싹을 틔웠던 것이다. 자신의 재산을 누구로부터 지키는가? 서양에서는 국왕으로부터 지키려 했다. 따라서 국왕을 견제하는 많은 법이 만들어졌고 점차 시민이 중심이 되는 제도가 정착됐다. 시민들은 자신의 재산과 자유를 지키기 위해 민주주의를 택한 것이다.

    한국도 상황은 비슷했다. 산업화를 통해 개인이 재산을 소유 내지 축적하게 되자 자신의 재산과 정치적 자유를 지키는 방법을 택하게 된다. 1960년 4·19혁명 때나 유신 독재 시절의 반정부 시위 때와는 달리 넥타이를 맨 일반 시민이 드디어 거리에 나섰다. 1987년 6월 민중항쟁이 그것이다. 고문 사건으로 촉발된 민주항쟁은 지식인이나 학생이 중심이 아니라 일반 시민이 다수를 차지했다는 점에서 한국에 민주화 시대가 왔다는 신호탄이었다.

    이후 대중은 김영삼, 김대중이라는 민주화 기수를 대통령으로 택함으로써 자신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분명히 보여주었다. 이 시기는 산업화 시대에 비해 경제성장이 더디고 사회 갈등이 표출되기 시작했지만 이미 대중은 사적 재산을 어느 정도 축적하였기에 큰 요동 없이 지탱될 수 있었다.

    행복이 화두가 된 시대

    여가를 즐길 만한 경제적 지위가 되면 사람들은 정치적 권리도 요구하지만 동시에 행복도 생각하게 된다. 민주화 시대에 사람들은 행복해지고 싶었다. 개인의 행복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당연한 가치는 아니었다. 현재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개인의 행복 추구는 사실은 얼마 되지 않은 낯선 개념이다. 생존의 시대에도 생활의 시대에도 개인의 행복은 우선하는 가치가 아니었다.

    하지만 생활이 안정되고 정치적 자유가 보장되면서 행복이 서서히 삶의 중심에 들어서게 됐다. 동네마다 문화센터와 구민회관이 들어서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더 이상 백화점에 물건만 사러 가지는 않게 되었다. 부모는 자식에게 행복하게 살라고 충고했지만 자식들은 이미 자신의 행복을 우선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 행복의 기준이 사람마다 다르긴 해도 행복하지 못한 사람은 자신을 패배자로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행복이 화두가 되면서 비로소 정신적인 면이 광복 후 처음으로 전면에 등장했다. 행복이란 단순히 외적 조건의 문제가 아니라 내면의 정신적 문제임을 실감하게 되었던 것이다. 전에는 돈만 있으면, 집만 있으면, 출세만 하면 행복할 것이라고 여겼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 증명됐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이 시대에 남북한의 체제 대결은 남한의 완승으로 결판이 났다. 체제 대결이 더 이상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되자 다시 민족이 전면에 등장했다. 남북한 화해 무드가 그것이다. 남북한을 잇는 유일한 끈은 민족이었기에 온전한 국가 수립에의 염원이 다시 표면으로 떠오른 것이다. 민족의 이름으로 하나가 되자는 구호가 빈번히 나왔고, 한반도기(旗)도 등장했다. 이산가족 상봉, 금강산 관광 등으로 민족이 매우 친숙한 개념으로 자리를 잡았다.

    한국 민족주의와 민주주의, 그 향방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민주화운동의 기폭제가 됐다. 1987년 연세대에서 열린 박종철 열사 추모제.

    민족국가 수립이라는 염원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민족이란 상상의 공동체이며 오히려 개인을 억압하는 기제라는 주장도 심도 있게 제기됐다. 민족과 국가의 관계가 전과는 다른 차원에서 논의됐다. 즉 하나의 민족이 반드시 하나의 국가를 성립해야 하는가? 하나의 민족이 두 개의 국가로 지내는 것이 과연 좋지 않은가? 북한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이런 문제들이 공개적으로 토론되면서 민족과 국가의 관계를 따져보게 됐다.

    이즈음 한 여론 조사는 설문에서 약 50%만 통일에 찬성했다고 보고했다. 광복 후의 상황과는 전혀 다른 시대가 된 것이다. 민족주의가 여전히 힘을 유지하고는 있지만 국가가 확립되어 안정을 유지하면서 민족주의의 힘은 그만큼 반감됐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민족주의는 노무현 정부의 탄생에는 큰 힘이 되었지만 그 다음 선거에서는 별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쇠퇴의 기미를 보였다. 노무현 정부 탄생에 민족주의가 힘이 된 것은 한국이 의미의 시대에 돌입했음을 말해준다.

    ‘행복해도 뭔가 부족’

    의미시대는 노무현 정부부터 현재까지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행복만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즉 의미를 모색하기 시작한 것이다. 행복한 삶이 물론 좋지만 행복하면서도 의미 있는 삶이 더 좋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생존이나 생활문제 해결만을 말하지 않는다. 배부르고 등 따습고 마음에는 행복이 느껴지지만 뭔가 부족한 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의미다.

    자식을 예로 들어보자. 자식이 건강하게만 자라길 바란다. 즉 생존의 시대다. 다음으로는 공부를 잘해줬으면 바란다. 생활의 문제다. 그런데 자식이 건강하게 자라 좋은 직장을 얻었다. 그렇다면 자식이 행복하길 바란다. 자식이 결혼해 행복하게 사는 것 같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자식이 나에게 무엇인가? 그리고 자식에게 인생은 어떤 의미일까? 이렇게 자문하면서 스스로 답을 찾는 것이 의미의 시대다. 미국에 대해서도 ‘미국이 우리에게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대통령에 의해 공개적으로 제기됐다. ‘반미 하면 안 됩니까?’ 이런 발언이 공식적으로 나오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의미의 시대에 민족주의는 자존심과 연결되었다. 즉 과거의 민족주의는 민족의 통일에 초점을 두어 통일국가 수립에 기반을 제공했다. 하지만 의미의 시대에 접어들어서는 한반도의 자존심을 세우는 바탕으로 작용했다. 미국에 대한 태도에 변화가 온 것이다. 즉 미국이 우방이기는 하지만 우리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면 격렬한 저항을 하게 됐다.

    여기에서 ‘우리’라는 말에 주목해보자. 즉 우리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라기보다 한민족이라는 민족을 가리킨다. 미국과 한국의 문제가 아니라 미국과 한민족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런 의식이 과거에는 별로 없었다. 반미집회에 거의 언제나 민족이 등장했다. 국가가 수립되고 안정기에 접어들었지만 외국이 아닌 외세에 저항하는 개념으로서의 민족이 다시 등장한 것이다. 외국이 아닌 외세에 저항한다는 것은 구한말 국권(國權)상실 위기 상황과 흡사하다. 국가가 확립된 후에 외세라는 말과 함께 민족이 사용된다는 것은 국가의 자존심을 민족의 자존심으로 혼동하는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분단으로 인해 온전한 국가를 수립하지 못한 좌절감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다. 민족은 통일이라는 한반도 내부를 떠나 외세라는 한반도 밖을 겨냥하기 시작했다.

    촛불 집회 vs 미 쇠고기 구입

    민주주의는 의미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근본적인 틀이 변하기 시작했다. 즉 체제나 제도의 민주화가 아니라 개인 민주주의가 시작된 것이다. 예전에는 유신 독재체제 타도나 대통령 직선제, 안기부법 등 체제를 민주주의적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면 의미의 시대에는 개인의 이익이나 의미를 추구하거나 관철시키려 한다. 왜냐하면 의미의 시대에서 의미는 개인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공감대를 이루는 여론이나 큰 흐름이 존재했다. 민주화를 외치면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설명하지 않아도 알았다. 그리고 시위에 직접 참여하지 않아도 응원을 보냈다.

    한국 민족주의와 민주주의, 그 향방은?

    2007년 5월 광주여대에서 열린 다문화가정 여성들의 패션쇼.

    하지만 지금은 개인이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행위한다. 한쪽에서는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하지 말라고 연일 촛불시위를 하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미국산 쇠고기 가게 앞에 줄을 서서 사 먹는다. 그리고 여유 있게 인터뷰에 응해 값싸고 맛있다고 말한다. 다 각자 자신의 생각대로 사는 것이다. 체제에 관계되는 큰 문제는 해결됐다고 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검증의 한 척도인 선거를 보아도 한국에 민주주의가 안착했음을 알 수 있다. 부정 선거, 관권 선거, 금품 선거는 이제 거의 없다. 그리고 촛불 집회에 나가면 안 될 것 같은 불안감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시위, 집회, 결사, 언론의 자유가 충분히 보장되어 있는 것이다. 이제 이런 제도적 장치 속에서 국민은 각자의 의미와 이익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개인 민주주의 시대는 1인 1표가 강력히 작동한다. 예전에는 선거에 ‘바람’이라는 것이 있었다. 이른바 깃발만 꽂으면 당선됐다. 하지만 개인 민주주의 시대에 그런 바람은 거의 없다. 부산에서도 민주당 후보가 당선된다. 개인은 따지고, 행위한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제1조 문구가 시위 전면에 나오는 것도 이런 점에서 보면 자연스럽다. 여기에서 국민은 추상적인 집단으로서의 국민이 아니다. 구체적인 개인이다. 즉 모든 권력은 개인으로부터 나온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1인 1표가 강조되는 민주주의 시대는 겉보기에는 혼란스럽다. 하지만 잘 들여다보면 민주주의 체제를 벗어나지는 않는다. 쿠데타, 화염병, 최루가스는 생각하기 어렵고 체제전복이나 혁명도 꿈꾸기 힘들다. 격렬하게 시위를 하는 것 같지만 정해진 지역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새벽이 되면 다들 집에 간다. 법 테두리 내에서 자신을 주장하는 것이다. 물론 가끔씩 물리적 충돌이나 폭력이 등장하지만 곧바로 비폭력으로 전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개인 민주주의는 강하다. 민주체제에서 한 사람 한 사람 모두를 누를 국가 권력은 없다.

    개인 민주주의가 앞으로 민주주의의 흐름을 이끌 것으로 생각한다. 즉 개인 간의 이해관계 충돌을 어떻게 조정하고 조화를 이룰 수 있느냐가 관건이 될 것이다. 나는 비교적 낙관적으로 보고 있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다시 한 번 다수결의 원칙 존중과 선거 결과 승복을 통해 점차 평화를 찾을 것이다. 한쪽에서는 촛불시위를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미국산 쇠고기를 사 먹는 사회에서 선거를 통한 정리 외에 다른 방법은 점차 외면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자신이 다수에 속할지라도 다음에는 얼마든지 소수가 될 수 있으므로 다수결의 원칙을 존중하는 것이 이익임을 체험을 통해 깨달을 수밖에 없다.

    전세계 한민족 공동체 개념

    민족주의는 역시 국가가 놓인 상황에 따라 변할 것이다. 민족주의는 한반도를 벗어나 세계를 상대로 한민족 공동체 개념으로 진화할 것으로 본다. 즉 그동안의 민족주의가 외세로부터 한민족을 지킨다는 수세적(守勢的) 민족주의 내지 우리 민족이 우월하다는 배타적 민족주의 성향을 보였다면 앞으로는 화교나 유대인처럼 세계에 진출한 한국인은 국적과 관계없이 한민족 공동체를 이룰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한국이 이미 세계화의 한복판에 서 있기 때문이다.

    자본시장 개방으로 상징되는 세계화는 이제 돌이킬 수 없는 흐름이다. 이미 농촌에선 10쌍 결혼 중 한 쌍이 외국인과의 결혼이라고 한다. 외국인과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민족주의가 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책은 세계화를 이용해 한민족의 외연을 넓히는 것이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세계화시대에 한민족이 살고 있는 곳이라면 어느 국가든 같은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발붙이기가 쉽다는 것이다. 한반도에 밀려오는 외세를 막아내고 독립을 쟁취하려는 민족주의가 아니라 세계에 진출하는 데 필요한 실용적 도구로서의 민족주의가 될 것이다.

    한국 민족주의와 민주주의, 그 향방은?
    탁석산

    1958년 서울 출생

    서울대 중퇴, 한국외국어대 영어과 졸업, 철학박사

    KBS1 TV ‘TV, 책을 말하다’ 진행

    現 한국과학기술원 인문사회 과학부 교수

    저서: ‘한국의 정체성’ ‘한국의 주체성’ ‘대한민국 50대의 힘’ ‘탁석산의 한국의 민족주의를 말한다’ 등


    하나의 국가가 세계화라는 거대한 흐름에 맞서 싸우기는 힘들다. 강대국이 아닌 한국은 더욱 그렇다. 이런 경우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는 민족은 효율적인 네트워크가 될 수 있다. 국경을 뛰어넘어 공동체를 이루어 상호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다. 따라서 앞으로 민족주의는, 국가 수립이 거의 마무리되어가는 단계이기 때문에 국내에서는 점차 힘이 소멸될 것이나 세계적인 한민족 공동체 구성에는 원동력이 될 것이므로 종래와는 다른 유용성을 발휘할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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