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8월호

난민 되기 어려운 나라, 대한민국

“I?m not an animal. I?m a human- being”

  • 이혜민│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behappy@donga.com│

    입력2009-07-30 14: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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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민 되기 어려운 나라, 대한민국
    # 화성 외국인보호소

    7월6일, 서울지하철 1호선 금정역에 내려 330번 버스를 타고 한 시간여 달리니 표지판이 보인다. 화성 외국인보호소. 아프리카인, 중앙아시아인, 동남아시아인을 뒤로하고 면회신청서를 제출하자, 5분도 지나지 않아 관리인이 내 이름을 부른다. 녹색 반바지에 반팔 상의 차림의 흑인이 방에 들어와 기자를 보고 의아해한다. 플라스틱창을 사이로 전화수화기를 들고 서툰 영어로 대화를 나눴다.

    “내가 누구인지 모를 것이다. 난민인권센터 미스터 김성인 소개로 온 기자다. 동그란 안경을 쓴 김종철 변호사도 안다. 난민 관련 기사를 쓰려고 하는데, 당신처럼 일하다 잡혀온 난민신청자들을 인터뷰하고 싶다.”

    11개월째 갇혀 있다는 그는 못미더워하면서도 입을 열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을까.

    “내가 법정에서 쓰러졌다. 출입국관리소 직원이 6월24일에 병원에 데리고 갔다. 난 사람 죽인 범죄자도 아닌데 수갑을 차고 진찰을 받았다. X레이를 찍었다. 의사가 내 심장이 너무 크다(고혈압)고 했다. 그래서 한 달 넘게 약을 먹으라고 했다. 그런데 나는 이틀만 약을 먹었다. 지금도 말을 하면 머리가 어지럽다. 밥과 빵도 소화시킬 수 없다. 교회에서 보내주는 돈으로 주스와 우유를 사먹고 있다. 늘 먹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이대로 어떤 조치도 받지 못하고 죽게 될까 겁난다. 난 동물이 아니다. 사람(human-being)이다. 내게는 의사를 다시 만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검은 얼굴 때문에 유난히 하얗게 빛나는 그의 눈에 뻘건 실핏줄이 생겼다.

    “그 많은 나라 중에서 왜 한국에 왔나.”

    “오고 싶어서 온 게 아니다. 한국은 알지도 못했다. 콩고가 정치적으로 위험해 탈출했다. 마침 비즈니스로 한국을 자주 찾는 나이지리아 여성이 도와줘 한국 관광비자를 받았다. 한국에 온 뒤 2004년 난민신청을 했다. 1차 심사, 2차 심사에서 난민인정을 못 받았다. 그래서 재판을 진행 중이었다. 나 같은 신청자는 일을 할 수 없다. 그래도 아르바이트를 하며 살았는데 이번에 건축현장에서 일하다 잡혔다. 11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나를 잡으러 왔다.”

    # 백운역 다세대주택

    7월7일, 인천 부평구에 있는 백운역으로 갔다. 기자를 마중 나온 중동인은 한 손으로 아들을 안고 있었다. 머리에 두른 천이 등까지 닿아서일까, 아니면 오랫동안 안 깎은 수염 때문일까. 진한 땀내가 났다. 아이는 웃지 않았다. 창백한 얼굴을 찌푸렸다. 다세대주택 3층집에 들어서자 숨을 훅 들이마실 수밖에 없었다. 숨쉬기가 거북할 정도로 짙은 땀내가 났다. 말로만 듣던 구더기 냄새가 이럴까. 그의 아내와 두 딸은 검은 천으로 온몸을 가리고 있어 눈만 빠꼼하게 드러났다. 어설픈 영어 대화가 이어졌다.

    “사진 촬영해도 되나.”

    “얼마든지 해도 상관없다. 난 우리가 얼마나 끔찍하게 살고 있는지 한국 정부에 보여주고 싶다. 나는 일을 할 수 없고, 집도 없고, 먹을 것도 없다. 우리는 11개월째 이 방 안에만 있다. 처음에 사원에서 도움을 줘서 자리를 잡았지만 더 이상 누구도 우리를 도와주지 않는다. 유엔난민기구(UNHCR)와 난민인권센터에서 얼마간의 생활비는 줬지만 더 줄 수 없다고 한다. 우리보고 죽으라는 것이다. 아무것도 안 주면서 일마저 못하게 하면 죽으라는 것 아니냐. 11개월이 지났지만 1차 심사조차 받지 못했다.”

    “왜 한국에 왔나.”

    “난 시아파다. 반대파의 비밀을 폭로했다는 이유로 몇년째 쫓기고 있다. 죽이겠다는 협박이 계속되다 어느 날 내가 안고 있던 아들이 그들이 쏜 총에 맞아 죽었다. (그 사건이 알려진 신문기사를 여러 건 보여주며) 사회 이슈로 부각되기도 했지만 그곳에서 사는 게 너무 위험했다. 그래서 무작정 한국에 들어왔다. 나는 태권도 물품을 수입하는 일을 했기 때문에 한국에 여러 번 왔었다. 다른 나라에 가고 싶었지만 한국 비자만 있었다.”

    “아이들을 학교에 안 보내나?”

    “보내고 싶지만 보낼 수 없다. 나에겐 돈이 한푼도 없다. 보낼 수만 있다면 보내겠다.”

    (국제아동법상 초등학교의 경우 교장 재량으로 난민에게 교육을 허가할 수 있다. 그러나 학적에 오르는 것은 아니어서 학력으로 인정되지 않아, 중학교에 갈 수는 없다. 난민신청자 자녀 상당수가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상황이다.)

    난민 되기 어려운 나라, 대한민국

    난민신청자는 법적으로 노동 허가를 받지 못해 굶주려야 한다.

    “불법으로 일하면 어떤가.”

    “그러다 적발되면 감옥에 갇히는데, 그럼 내 가족은 누가 책임지나. 추방당하면 우리가 어디로 갈 수 있겠나.”

    “그럼 어떻게 할 생각인가.”

    “내가 죽으면 이 모든 게 끝날까 싶기도 하다. 그럼 반대파도 더 이상 나를 쫓지 않을 것이고, 가족들도 안전해질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죽어야 누군가 우리 아이들을 잘 보살펴준다면 죽음도 불사하겠다.”

    치석 가득 낀 이를 드러내며 말을 이어간 그가 며칠 뒤 e-메일을 보내왔다.

    I & my family know now after cut electric & Gas already cut & water also very slow & my wife serious breath problem so we have no way so we now wait our death time so i just request if Korea government want i die so kill me no problem i agree but as a husband & father i want safe my wife & kids life & want they live happy & peacefully so please safe my wife & kids life & gave to them happy life & kill me only & not kill my family.(이미 전기와 가스가 끊겼습니다. 물도 거의 안 나옵니다. 임신한 아내는 숨쉬는 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죽음을 기다리는 것뿐입니다. 한국 정부가 원한다면 나는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남편과 아버지로서 나는 아내와 아이들에게 행복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게 하고 싶습니다. 나만 죽이고 내 가족은 죽이지 마십시오.)

    # 동대문역 패스트푸드점

    7월7일 오후 4시 서울지하철 동대문역, 만나기로 약속한 이라크인이 선글라스를 낀 말끔한 차림으로 나타났다. 패스트푸드점으로 들어가 어떤 음료수를 마실 거냐 물으니, “Anything is OK”를 연발한다. 어깨를 들썩이곤 미안해하며, 영어로 상황을 설명해나갔다.

    “매형이 전 총리의 가족이란 이유로 살해 위협을 느꼈다. 바그다드가 붕괴된 2003년부터 사람들이 우리를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그래서 가족들은 모두 이라크를 떠났다. 나는 요르단에 1년, 두바이에 2년, 시리아에 3년 있다가 시리아 정부가 더 이상 비자를 줄 수 없다고 해서 캐나다로 가려고 했다. 다른 가족들은 전부 캐나다에 살고 있다. 나도 위조여권을 가지고 중간기착지인 한국을 거쳐 캐나다로 들어가려다 공항 검색요원에게 걸렸다. 아랍인이라 검사한 것 같다. 두 달간 공항에 있는 감옥에서 하루 세 번 치킨버거와 콜라만 먹고 갇혀 있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끔찍한 시간이었다.”

    “왜 두 달이 지나 풀렸나?”

    “그건 나도 모르겠다. 나오기 전에 몸이 아파 병원에 갔고, 난민신청을 했다. 난 가족들이 있는 캐나다에 갈 수도 없고, 여권도 없는 상태다.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그것뿐이다.”

    “가족들은 어떻게 사나?”

    “누나와 남동생이 난민이 된 후 어머니를 초청했고, 어머니는 아버지를 초청했다. 그런데 나는 노인도 아니고 미성년자도 아니어서 비자가 나오질 않았다. 동생은 캐나다에 가서 그래픽 엔지니어링을 전공해서 현재는 비행기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다. 아홉 명의 가족 중 둘만 일하지만 아이들과 부모님들을 위한 국가보조금이 나와 그럭저럭 산다.”

    “불법이라도 일을 하는 게 어떤가.”

    “법을 어기다 걸리면 난 끝이다.”

    그는 애써 웃으며, 이태원에 있는 이라크식당에 가면 친구들을 사귈 수 있다고 말했다. 지금까지는 쉼터에 머물며 숙식을 제공받았지만 그만 나가라고 해서, 다음달부터는 어디서 어떻게 살지 모르겠다고 했다.

    우리나라는 1994년 국제난민협약에 가입했다. 난민협약은 국제협약으로 국내법과 동일한 효력이 있으므로, 한국 정부는 난민에 대한 보호 의무가 있다. 그러나 난민협약이 세부사항을 규정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를 지키지 않아도 문제가 되지 않는 게 사실이다. 특히 난민의 범위에 대해 명확한 규정이 없다. UNHCR 한국대표부는 “국제법상 난민의 법적 정의에 의해 인정된 난민이 아니더라도, 보충적 국제적 보호가 필요한 대상으로 인정된 자에게도 인정난민에게 제공되는 권리와 혜택을 동등하게, 혹은 상당부분 제공해야 한다고 규정돼 있다”고 지적하지만, 이것이 한국 현실에 적용되고 있지는 않다.

    올 6월20일부터 시행된 출입국관리법은 ‘난민신청자도 일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 혜택을 받은 난민신청자는 지금까지 단 한 명도 없다. 출입국관리법 시행령에 이런 조항이 있기 때문이다. ‘이 영(令) 시행 전에 난민신청을 한 사람에 대해서는 제88조의9제4항의 개정규정의 기간은 이 영 시행일부터 기산한다’(부칙 제2조)

    이 계산법에 따르면, 난민신청을 한 지 3, 4년이 지난 사람도 현재는 일할 수 없다. 다시 6월20일을 기준으로 1년을 기다려야 일할 수 있게 된다.

    노동허가서를 호락호락 주는 것도 아니다. 근로계약서를 먼저 가져가야 노동허가서를 준다는 것. 서울대 법학과 정인섭 교수는 “불법체류자들이 악용할 가능성이 있어 관리 차원에서 이런 조치를 취한 측면이 있다”고 말했지만 법무법인 소명의 김종철 변호사는 “그렇지 않아도 G-1비자가 특이해 고용주가 고용을 꺼리는데, 고용주에게 일단은 불법으로 계약하고 나중에 허가를 받으라는 것은 논리상 앞뒤가 맞지 않다”고 비판했다.

    1년을 기다린다고 해서 무조건 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1년이 지났지만 1차 심사에서 불허 판정을 받으면 2차 심사에서 판정을 받기 전까지는 일할 수 없다. 근로계약서를 가져와도 노동허가를 해주지 않는다는 뜻이다.

    현재 난민신청자의 평균 심사 대기기간은 2년이다. 몇 달 만에 심사가 끝나는 사람과 3,4년 동안 인터뷰도 받지 못한 사람을 평균 낸 수치다.

    난민신청자는 정부에서 어떤 지원도 받지 못하고, 일을 할 수도 없다. 거렁뱅이가 되거나 죽거나, 난민신청자의 처지다.

    # 4호선 미아삼거리역

    7월8일 오후 4시, 서울지하철 4호선 미아삼거리역에 노란 머리의 장신 남자가 서있다. 취재 약속한 사람인지 긴가민가해서 전화를 거니 옆에 있던 그가 받는다. 그가 충청도 말투로 한국말을 이어갔다.

    “난 이란 사람이에요. 혼자 여기 온 지 13년 됐어요. 한국에 오려고 해서 온 게 아니라 비자를 받을 수 있는 곳이 여기밖에 없었어요. 이란에서 일하는 한국 직원이 도와줘서 관광비자를 받았어요. 나는 하나님 믿는 사람이거든요. 그런데 이란에서는 그러면 죽이겠다고 협박하는 사람 많아요. 98%가 무슬림이거든요. 이란이 이라크전 할 때 바시지라고 하는 민간인 부대가 있었는데, 그 사람들이 과격한 행동을 해도 정부가 어떻게 하질 못해요.”

    “종교가 아무리 중요해도 가족보다 소중한 건 아니지 않나요?”

    난민 되기 어려운 나라, 대한민국

    영토 내 분쟁으로 난민이 되기도 한다.

    “어떤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 없어요. 하나님을 믿는데 무의미하게 살 수 없었어요. 그분을 닮고 싶었어요.”

    “난민신청을 왜 늦게 했어요?”

    “2003년에 했어요. 원래는 난민이 되려는 생각이 없었어요. 갑자기 이란에서 크리스천 5명이 살해됐거든요. 이란 정부는 자살이라고도 하지만 살해라고 봐요. 그리고 코란에서 다른 종교 믿는 사람은 죽어야 한다고 했는데, 그걸 아예 나라 법으로 만들어놨어요. 그런 이란에 어떻게 들어가겠어요. 제가 확대 해석했다고 하지만 법을 보여줄 수 있어요.”

    (사건을 맡았던 김종철 변호사는 “법원에서는 ‘이란에는 종교에 의한 박해가 아닌 차별이 존재’한다고 봤지만 유엔난민기구 사실조회와 이란법 등을 보면 박해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인도적 지위자가 됐다면서요.”

    “인도적 지위자라는 게 난민은 아니에요. 난민으로 인정하기도 그렇고 안 할 수도 없는 애매한 경우 인도적 지위자로 두는 거죠. 난민신청자처럼 똑같이 G-1비자 갖는데요 뭐. F-2-2비자를 받는 난민인정자들은 난민여행증명서가 있어서 해외로 나갔다 올 수 있는데, 나는 못 나가요. 나는 이란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부모님을 보려고 해도 갈 수가 없어요. 인정자가 되면 가족결합의 원칙이 적용돼서 내 가족들도 난민이 될 수 있는데 전 못하죠. 부모님 정말 보고 싶어요. 나도 사람인데, 안 그렇겠어요. 그렇지만, 전 법무부에서도 난민 인정 못 받고, 재판해서도 인도적 지위자만 됐어요. 영영 나갈 수 없게 된 거죠. 한국으로 들어오려고 해도 가족들은 비자가 안 나와요. 요즘엔 그래도 인터넷으로 연락하고 지내지만 보고 싶죠, 많이….”

    치료는 못 받아요

    “난민인정자는 지위를 인정받으러 6개월마다 출입국관리소에 가야 한다면서요?”

    “그때만 되면 가슴이 떨려요. 출입국관리소에 대한 기억이 별로 좋질 않거든요. 인터뷰를 세 번 했는데, 그때마다 ‘너 왜 이렇게 늦게 신청했냐, 너 불법체류자 아니냐’면서 ‘거짓말하지 말라’고 소리치고 반말하고 그랬어요. 제 옆 사람은 거짓말했다고 ‘2주 내에 추방한다’는 말도 들었고. 무섭죠. 어딜 가나 반말로 소리치는데…. 6개월마다 도장 찍으러 가는 일이 무섭죠, 추방당하면 어디로 가야 하나 싶어 떨려요. 어떤 직원이 그랬어요. ‘한국이란 나라가 얼마나 작은데, 그냥 다른 나라에 가서 살아!’”

    법무부 국적난민과 관계자는 6개월마다 인도적 지위자의 지위를 갱신하는 것은 관리차원이라면서 “인도적 지위자를 추방한 적은 없다”고 밝혔지만 “불가피한 사정이 생기면 추방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이 이란인은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도 했다. 한국여자와 사는 친구들이 무시당하는 경우를 봤기 때문이다. 한국인이 아닌 여자와 결혼할 경우 아이가 이 나라에서 자신처럼 어떤 혜택도 받지 못할까 두렵기도 하다. 혈통주의를 따르는 한국이기 때문에 무국적자와 무국적의 외국인이 결혼하는 경우 아이도 무국적자가 된다.

    (법무부 출입국관리소 차규근 국적난민과장은 “인도적 지위자 중 가족과 생이별을 하는 경우에 대해 미처 몰랐다”며 “인도적으로 시정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이 이란인은 얼굴을 공개해 시정을 요청하려고 했으나, 이란 정치상황을 고려해 끝내 공개하지 않았다.)

    지난해 어머니가 죽었는데도 고향에 갈 수 없었다는 한 나이지리아인. 그도 앞서 말한 이란인과 마찬가지로 인도적 지위자다. 의료보험 등 공적 부조를 받지 못하는 그는 의료비를 감당할 수 없어 병원에 가지 않는다. 흥분한 그는 울분을 터뜨렸다.

    “세 살 난 아이와 열일곱 살 난 아이가 있는데, 아플 때가 많죠. 그렇다고 무작정 병원 가면 돈이 많이 들어요. 우리는 디스카운트가 하나도 안 되거든요. 감기만 걸려도 4만~5만원이 드는데, 어떻게 갈 수 있겠어요. 아파도 약만 사지 치료는 안 받아요.”

    “왜 난민을 신청했습니까.”

    “나이지리아 동쪽에 있는 이부에서 왔는데, 나이지리아 정부가 이부와 싸운 뒤로는 이부 사람들을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그래서 저는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1991년에 필리핀으로 갔죠. 그렇게 옮겨 다니다 한국에 오게 됐습니다.”

    “한국에서는 왜 난민인정을 못 받았다고 생각합니까.”

    “한국 정부는 영국 문서를 보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는 우리 얘기가 안 나오는데….”

    “일은 하고 있습니까.”

    “못하고 있습니다. 올해 6월20일부터 인도적 지위자는 일할 수 있게 됐어요. 그 전에는 아무런 법적 근거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법무부가 근로계약서를 먼저 가져와야 노동허가서를 준다고 하대요, 사장님들에게 찾아가 부탁했지만, 불안해서 안 써주겠대요.”

    난민? 불법체류자?

    한국에서 난민이 되는 일은 녹록지 않다. 2009년 4월 현재, 우리나라 누적 난민신청자는 2262명이고, 그중 난민인정자는 107명이다. 그 안에는 법무부에서 인정한 난민 52명과, 법무부에서는 인정받지 못했지만 법원 판결로 난민 인정을 받은 19명, 가족결합의 원칙으로 난민이 된 36명이 있다. 확률로 따지면 5%도 되지 않는 수치다.

    한국에서 난민이 되려면 우선 출입국관리소에 가서 난민신청을 해야 한다. 한두 번의 인터뷰를 거쳐 1차 심사를 받는다. 1차 심사의 경우 법무부 출입국관리소 국적난민과 직원들이 담당한다. 그래도 불인정 판정을 받을 경우 이의 신청을 통해 2차 심사인 ‘난민인정협의회 심사’를 받을 수 있다. 난민인정협의회는 정부위원 4명, 민간위원 4명, 대법관 1명, 법무부 차관 1명으로 구성된다. 그 안에 UNHCR은 없다. 다른 나라에서 UNHCR이 옵저버(관찰자)나 위원으로 참여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UNHCR 한국대표부는 “UNHCR이 한국대표부를 두고 운영하는 목적 자체가 한국 정부의 제도 운영 및 이행을 돕는 것인 만큼 어떤 방식이든 이에 유용하다면, UNHCR은 협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2차 심사에서도 중요하게 작용하는 건 1차적으로 작성된 인터뷰 자료다. 이 인터뷰에 대해서도 비판이 많다. 국적난민과 직원이 통역을 제대로 했는지, 기록은 제대로 했는지 알 길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난민신청자가 인터뷰 기록문서를 확인해 사인하기는 하지만 그 문서는 대부분 한글로 작성돼 있다. 서울대 정인섭 교수는 “1차 심사를 국적난민과에서 하고 2차 심사를 난민인정협의회에서 하지만, 처음에 작성한 자료를 재차 활용하다보니, 선입관이 끼어드는 걸 배제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인터뷰에 동석한 적이 있는 김종철 변호사는 “말하는 내용의 10분의 1만 적고, 직원의 영어 수준도 낮고, 한창 과거 얘기를 하다 말을 끊고 최근 얘기를 하는 식으로 질문해 난민신청자가 일관되게 진술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고 말했다.

    심사시간이 짧다는 지적도 있다. 2009년 4월29일에 개최된 난민인정협의회의 경우 2시간 동안 신청자 114명을 심사해 112명을 기각시키고 2명에 대한 결정을 연기시켰다. 1명의 사례를 심사하는 데 채 2분도 걸리지 않은 것이다.

    출입국관리소 차규근 국적난민과장은 “위원들이 2주 전에 난민신청자 서류를 받아보고, 충분히 숙지하고 판단하기 때문에 1,2분 안에 졸속 처리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이에 대해 한 시민단체 활동가는 “기계적인 합의인 다수결의 원칙에만 따를 게 아니라 토의가 이루어져야 한다”면서 “2차 심사 때 다시 인터뷰하거나, 준사법기관이 심사하는 나라도 있다”고 지적했다.

    난민인권센터 최원근 간사는 “법무부가 외신과 정부문서 등 표면정보만 보는 한계가 있다”면서 구체적 사례를 제시하기도 했다.

    “얼마 전 인터뷰한 한 아프리카 여성은 부족 간 싸움으로 가족들이 살해됐다. 그 와중에 가까스로 탈출해 한국으로 오게 됐다. 한국에서 난민으로 인정받지 못했으나 국제앰네스티 자료가 나중에 발견되면서 인도적 지위자가 됐다.”

    법무법인 공감의 정정훈 변호사는 “현재 법무부의 난민인정절차는 난민협약의 정신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귀찮은 사람들을 걸러내는 작업”이라고 요약했다.

    출입국관리소의 1차 심사와 2차 심사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은 행정재판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지난 10년간 사법부 판결로 난민이 된 사람은 단 19명뿐이다. 재판부에서 난민인정을 많이 하지 않는 이유는 뭘까.

    초창기 난민 관련 재판을 맡았던 서울중앙지법 김성수 판사는 “법원의 경우 그 분야에 전문성이 있는 행정청의 입장을 존중한다. 행정소송의 내용을 취소하면서까지 하는 것이라면 적극적인 근거 제시가 필요한데,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고 설명한다.

    그래서 일각에선 난민 문제의 가장 큰 쟁점은 ‘well-founded fear’라고 말한다. 난민협약은 ‘박해를 받게 될 것이라는 충분한 근거가 있는 공포(well-founded fear of being persecuted)’ 때문에 국적국으로 귀환하지 못하는 사람을 보호의 대상으로 삼는다.

    “한국에서는 well-founded fear를 ‘충분히 근거 있는 공포’라고 해석한다. 공포를 설명하려면 근거를 명확하게 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어로 정리된 것을 보면 ‘합리적인 공포’라고 해석할 수 있다. 실제로 미국에서도 well-founded fear라고 적고 있지만 합리적인 공포라는 맥락으로 해석한다. ‘정황으로 봤을 때 공포를 느낄 만한 상황’이면 난민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유일한 근거물인 인터뷰 자료에 사소한 잘못이 몇 가지 있다고 해서, 명확한 근거물이 없다고 해서 ‘근거’가 부족해 난민이 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판단이다.”(김종철 변호사)

    김성수 판사는 판사들이 이 부분을 중시하면 좋겠다며 자신의 논문‘(협약상 난민의 요건과 출입국관리법상 난민인정에 관한 고찰’)의 한 구절에 밑줄을 그었다.

    ‘객관적으로 알려진 사실에 의하여 신청인에 대한 박해가능성이 충분히 예상되는데도 이를 도외시한 채 신청인이 주장한 사실관계의 미세한 부분에 집착하여, 거기에서 모순점을 찾아 신청인의 신빙성을 탄핵하는 데 주력하는 것은 난민인정을 담당하는 행정청이나 법원이 취할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난민신청한 지 2년 지났지만 아직까지 인터뷰도 받지 못했다는 한 네팔인이 물었다.

    “모든 난민신청자를 받아줘야 한다는 건 아닙니다. 아닌 사람도 분명 있겠지요. 그렇다면 심사 절차를 빠르고 철저하게 진행해야 합니다. 지금처럼 몇 년씩 끌고 대충 인터뷰하면서, 일할 기회도 주지 않고 살라고 하면, 우리 인생은 뭐가 됩니까.”

    대한민국 난민 인정 현황
    연도 94 95 96 97 98 99 00 01 02 03 04 05 06 07 08 09.4 총계
    난민신청자 5 2 4 12 26 4 43 37 34 84 148 410 278 717 364 94 2,262
    난민인정자 합 계 0 0 0 0 0 0 0 1 1 12 18 9 11 13 36 6 107
    법무부 난민 - - - - - - - 1 1 12 14 9 7 1 6 1 52
    사법부 판결 - - - - - - - - - - - - 1 1 16 1 19
    가족결합 - - - - - - - - - - 4 - 3 11 14 4 36
    인도적 지위 0 0 0 0 0 0 0 0 8 5 1 14 16 9 22 0 71
    불허 34 1 3 7 2 6 76 109 86 79 114 529
    철회 8 1 11 14 7 10 31 46 67 109 50 341
    진행 중 1,214(2009.4 기준)/ 이의신청(7), 1차 심사(1,207) 1,214
    *출처 : 정보공개청구 결과(국적난민팀-3659, 2009.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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