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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 국군정보사령관이 말하는 북파공작부대의 어제와 오늘

“독 오른 살쾡이의 눈빛… 훈련 참관하던 국회의원이 졸도했다”

  • 황일도│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hamora@donga.com│

前 국군정보사령관이 말하는 북파공작부대의 어제와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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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파공작부대. 그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게 됐지만, 정작 그 실체를 체계적으로 확인하는 작업은 여전히 안개 속이다. 북파공작원 문제가 첨예한 이슈로 떠올랐던 2000년대 중반 정보사령관으로 재직하며 관련 업무를 총괄했던 오항균 예비역 소장은 이를 꿰뚫어 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인물. 처참했던 과거를 청산하고 공개모집과 정식 부사관 임용을 통해 ‘특수부대 중의 특수부대’로 자리매김한 현재의 실체에 이르기까지, 베일에 싸인 정보사 산하 특수임무부대의 모든 것을 들여다보았다.
前 국군정보사령관이 말하는 북파공작부대의 어제와 오늘

1978년 서해 해안초소 폭파훈련을 하는 해군 북파공작부대.

1968년 11월의 어느 아침. 자줏빛 단풍으로 물든 산야가 아리도록 곱다. 아직 열여덟의 어린 나이, “동무, 살려달라”고 소리치던 북한군 병사를 향해 무참히 방아쇠를 당기던 손끝의 감촉이 수풀 속에 엎드린 그의 뇌리에서 접착제처럼 떨어지지 않는다.

북한군 막사 비포장 군사도로 언덕 위로 정치보위부 소대 병력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 순간이었다. 검은색 승용차에 탑승한 소련 군사고문관의 호위병력. 그는 크레모어 격발기의 안전핀을 풀고, 팀장의 신호에 맞춰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강원도 평강시 평강군 하진리 계곡에서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이 하늘을 찢었다.

아비규환 속에서 북한군 군관을 잡아채는 순간, 요란한 총성이 울리기 시작했다. 손등을 스치고 지나가는 방망이 수류탄의 파편. 피투성이가 된 손을 바라보며 숨을 몰아쉬는 동안 혀는 바싹 말라 입천장에 달라붙는다.

10시간 뒤, 그는 죽음의 고비를 넘고 넘어 우리군 GOP 통문에 다다랐다. 미리 당도해 있던 동료 팀원이 살아온 그를 보고 눈물을 쏟는다. ‘다시는 이런 목숨 거는 일을 하고 싶지 않다.’ 가슴속으로 되뇌임이 이어지지만, 쉽게 현실이 될 수 없음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부산이 고향인 홍남형(가명·60)씨가 인천에서 ‘물색관’에게 입대를 권유받은 것은 1966년 3월, 그의 나이 16세 때였다. 1968년 11월의 침투임무는 그가 수행한 마지막 작전이었다. 그러나 수백만 원의 돈을 주겠다는 애초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이후 30여 년 세월 동안, 그는 자신이 비무장지대 북방한계선을 넘나든 인물임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함께 작전하다 죽은 동료의 누이를 알고 있었지만, ‘비밀을 지켜야 한다’는 명령에 끝내 전사 소식을 전하지 못했다.

1953년 정전협정 체결 이후 한국군의 모든 부대는 전시를 ‘대비’하는 부대다. 현재 전쟁을 치르고 있지 않은 국가의 모든 부대가 마찬가지다. 유사시를 대비해 계획하고, 준비하며, 훈련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다. 그러나 예외가 있다. 공식적으로는 전쟁이 멈춘 이 나라에도 끊임없이 휴전선을 넘나들어야 하는 임무가 있었고, 이 임무를 수행하는 부대가 있었다. 다만 비공식적이었으므로 눈에 보이지 않았을 뿐. 북파공작원 문제를 수면으로 끌어올린 김성호 전 민주당 의원이 관련 책의 제목을 ‘우리가 지운 얼굴’이라고 붙인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2009년 현재, 북파공작부대에 관한 이야기는 이제 비밀의 영역을 완전히 벗어났다. 1999년부터 쏟아져 나온 전직 부대원 및 그 유가족의 증언은 이들의 존재와 역사적인 실체에 관해 다양한 정보를 세상 밖으로 꺼내놓았다. 2004년 영화 ‘실미도’로 대중의 관심은 폭발했고, 정부 역시 같은 해 관련법령을 제정하고 이들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총 1만3000명을 양성했고 그 가운데 무려 7726명이 임무수행이나 훈련과정에서 사망했다는 공식 보고였다. ‘군사기밀’이라는 네 글자에 가려 있던, 베트남전보다 많은 사망자의 사연이 비로소 빛을 보게 된 순간이었다.

그러나 퇴역 부대원들의 기억에 의존한 북파공작부대 이야기는 지나치게 파편적이거나 부정확한 정보를 담고 있기 일쑤였다. 반세기 동안 대한민국 정부가 운용해온 대북 첩보부대의 정확한 얼개와 흐름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 누구나 북파공작을 알지만 그 정확한 내역은 여전히 안개에 싸여 있는 형국이다.

2003년부터 2006년까지 국군정보사령관을 지낸 오항균 예비역 육군소장(육사 29기)은 이를 체계 있게 들여다본 거의 유일한 인물이다. 북파공작원 문제가 양지로 쏟아져 나오던 시점에서 정보사령관으로 재직했던 그는, 퇴역자나 유가족들과 만나 실태를 듣고, 정보사가 보관하고 있는 관련 기록을 뒤져가며 작전내용과 종사자, 전사자를 확인하는 한편, 보상 법률에 대한 시행령을 입안하는 작업까지 진행했다. 한마디로 북파공작 임무의 어제와 오늘을 꿰뚫고 있는 셈이다.

오 전 사령관의 회고와 경험담을 바탕으로 각 시기 전역자들의 증언과 자료를 취합해 북파공작부대의 극적인 역사와 그 맥을 잇는 정보사 특수임무 부대의 현재를 하나씩 정리했다.

“손에 쥔 건 자폭용 수류탄 뿐”

북파공작의 시작은 광복 직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법적으로는 1948년 건국 직후 창설된 육군본부 정보국을 연원으로 보지만, 이전부터 38선을 넘나들던 민간유격대나 미 극동군사령부 소속 첩보부대 KLO(Korea Liaison Office)까지 그 역사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만만찮다.

이후 창설된 육해공군 첩보부대는 6·25전쟁의 참화 속에서 눈부신 활약을 했다. 그 가운데는 군인으로서 명령에 따라 임무를 수행한 이들도 있었지만, 민간인 신분으로 북한 지역에 뛰어든 평범한 젊은이들도 있었다. 열여덟 여학생의 몸으로 첩보작전에 참여했던 김부전(74)씨의 회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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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일도│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hamo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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