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8월호

친이-친박 충돌 뇌관, 중·대선거구제 개편

명분은 지역구도 완화, 속셈은 친이계 권력연장

  • 송국건| 영남일보 서울취재본부장 song@yeongnam.com |

    입력2010-07-29 14:27: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세종시 수정안 표결을 계기로 한나라당 내 친이, 친박 진영의 세력분포가 확연히 드러났다. 수정안 찬성으로 결집한 친이계가 100여 명, 반대표를 던진 친박계가 50명으로 집계됐다. ‘2대 1’의 세력분포가 확인된 한나라당은 당분간 ‘불안정한 평화’가 유지될 것으로 전망된다.
    • 그러나 친이·친박계 충돌을 야기할 만한 민감한 뇌관 하나가 잠복해 있다. 바로 ‘국회의원 선거구제 개편’ 논의다.
    친이-친박 충돌 뇌관, 중·대선거구제 개편
    대통령 직속 사회통합위원회(위원장 고건·이하 사통위)는 6월8일 지역갈등 해소를 명분으로 현행 국회의원 소선거구제를 중·대선거구제로 전환하는 선거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이명박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중·대선거구제는 한 선거구에서 한 명을 선출하는 현행 소선거구제와 달리 한 지역에서 2명 이상을 뽑는 제도다. 이렇게 되면 호남에서는 한나라당, 영남에서는 민주당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생긴다. 중·대선거구제는 소선거구제에 비해 사표(死票)를 방지하고 인물 선택의 범위가 넓어지는 장점이 있다. 그렇지만 군소 정당이 난립할 우려가 있고 재·보선이 어렵다는 단점도 있다.

    고건 위원장은 이 대통령 주재로 청와대에서 열린 이날 보고회에서 “지역주의 정치구조가 사회통합을 저해하는 가장 큰 요인인데, 현행 소선거구제는 지역별 일당 독점체제 강화의 주요 원인이므로 이에 대한 개선책이 필요하다”고 건의했다. 고 위원장은 “현행 소선거구제가 다른 당을 지지한 표를 사표로 만들어 국민 표심을 왜곡하는 결과도 낳는다”고 덧붙였다.

    사통위는 한국정당학회 및 선거 전문가들과 중·대선거구제와 소선거구제의 장단점, 정당투표와 인물투표의 비율, 의원정수, 유권자 투표 횟수와 종류 등에 대해 검토하고 있다. 올해 하반기에 결론을 내 공론화할 계획이다. 사통위의 이 같은 제안에 대해 정가에서는 당초 이 대통령이 하반기에 단행하려던 개헌 및 선거구제 개편, 행정구역 통·폐합의 신호탄을 쏘아올린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오기도 했다.

    MB, “선거제도 반드시 개혁해야”

    이 대통령도 보고회에서 “우리 사회의 내부 갈등을 줄이는 문제는 매우 중요한 과제”라며 “사통위가 이러한 갈등을 치유하는 데 기여해달라”고 당부했다. 또 “지역주의 문제를 극복하고 정치발전과 선진화를 이룰 수 있도록 현 정부에서 선거제도를 반드시 개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당시 청와대 박선규 대변인은 “이 대통령의 평소 신념이 영남에서 민주당이, 호남에서 한나라당이 당선되는 선거가 돼야 한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대통령은 현행 소선거구제의 문제점을 깊이 인식하고 있다. 지난해 9월15일 연합뉴스와 일본 교도통신 공동 인터뷰에서 “소선거구제로는 동서 간 화합이 이뤄질 수 없는 만큼 소선거구제와 중선거구제를 결합한 선거구제나, 권역별 비례대표제를 도입하는 부분을 정치권이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했다.

    앞서 그해 8·15 경축사에선 선거 시기를 일치시키기 위한 개헌과 중·대선거구제 도입을 촉구하며 이를 위한 행정구역 통·폐합 추진을 선언했다. 이 대통령은 “현행 선거제도로는 지역주의를 벗어나지 못한다”며 “여기에 100년 전에 마련된 낡은 행정구역이 지역주의를 심화시키고 효율적인 지역 발전을 가로막는 벽이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행정구역 통·폐합을 통한 중·대선거구제 도입 필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이 대통령의 핵심 측근으로 전남도지사 선거에 출마했던 김대식 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사무처장은 “한나라당의 전국정당화를 위해 탈지역주의를 반드시 실현해야 한다”며 “지역주의 극복과 전국정당화를 위해 중·대선거구제로 선거법을 개정하는 것도 고려해봐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전국정당화만이 19대 총선 승리는 물론 정권재창출의 지름길이라는 데 모두가 동의할 것이기 때문에 한나라당 내에서 전국정당을 하자는 데 반대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친이계 유력 정치인은 조금 다른 측면에서 중·대선거구제를 선호했다. 그는 “요즘 국회에서 대화가 사라지고 극한 대치가 일어나는 것은 한 선거구에서 한 명만 뽑는 소선거구제 때문이기도 하다. 2명씩을 선출한 12대 국회까지는 이러지 않았다”고 말했다. 영·호남에서 여야 의원들이 고루 나오면 물밑에서라도 대화가 될 텐데, ‘영남=한나라당’ ‘호남=민주당’ 구도가 되니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민주당도 선거구제 개편 논의 환영

    친이-친박 충돌 뇌관, 중·대선거구제 개편

    선거구제 개편 문제로 친이·친박 갈등이 재현될지 주목된다. 사진은 세종시 수정안 표결 결과.

    민주당에서도 선거구제 개편 필요성에 동의하는 목소리가 많다. 지난해 이 대통령이 8·15 경축사에서 선거구제 개편 의사를 밝혔을 당시 조선일보가 국회의원 183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중·대선거구제 도입에 찬성하는 의견을 내놓은 의원이 94명(51.3%)인 것으로 집계됐다. 특히 정당별로 보면 한나라당 소속은 123명의 응답자 중 58명(47.2%)만 찬성한 반면, 민주당 소속은 응답자 41명의 70.7%인 29명이 찬성했다. 당시 경향신문과 한국사회여론연구소가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소선거구제 유지가 53.4%, 중·대선거구제 전환이 23.6%로 나온 결과와 비교된다.

    민주당 우상호 대변인은 사통위의 제안이 나왔을 때 “민주당은 오랫동안 권역별 비례대표제, 석패율제, 중·대선거구제 도입 등 지역주의 극복을 위한 정치제도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당론을 계속 견지해왔다”며 환영의 뜻을 밝혔다. 실제로 민주당은 집권여당 시절 특정정당의 특정지역 ‘싹쓸이’를 막기 위한 여러 가지 선거제도를 제안했다. 권역별 비례대표제는 전국을 지역별로 6개 안팎의 권역으로 나누고 인구비율에 따라 비례대표 의석을 배분한 뒤, 현재 실시 중인 정당투표의 득표율에 따라 정당별로 당선자를 배출하는 방식이다. 또 석패율 제도는 한 후보자가 지역구와 비례대표에 동시에 출마하는 것을 허용하고 중복 출마자 중에서 가장 높은 득표율로 낙선한 후보를 비례대표로 뽑는 제도다.

    사통위의 제안이 나오자 민주당 원혜영 의원은 당 대변인의 논평에서 한발 더 나아가 “소선거구제를 중·대선거구제로 전환해야 한다는 사통위의 제안에 전적으로 동의한다”며 “국회에 학계·종교계·시민사회 인사 등이 참여하는 선거제도개편특위를 설치하자”고 제안했다. 원 의원은 8월20일 국회 입법조사처와 공동으로 세미나를 열어 △중·대선거구제 △일본식 선거구제 △독일식 선거구제 등 3가지 방식을 놓고 토론을 벌일 예정이다.

    원 의원은 “국민 통합적인 관점에서 소선거구제 폐해를 보완할 수 있는 권역별 비례대표제와 석패율제 도입 등 서로 공감할 수 있는 사안부터 시작해 중·대선거구제 도입에 관해서도 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불필요한 논쟁이나 소모적 공방으로 실기한다면 지역주의 극복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면서 “지방선거를 마친 지금 바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원 의원 측은 “여야 모두 지도부 교체기에 있기 때문에 논의가 진전되지 못했지만 민주당 의원 대다수는 선거구제 개편 필요성에 동의하고 있다”며 “세미나에서 지역주의 구도를 타파할 수 있는 다양한 형태의 선거구제 개편 방안이 모색될 것”이라고 밝혔다.

    박근혜, ‘대통령제下 소선거구제 적합’

    이처럼 이 대통령과 민주당이 선거구제 개편에 적극성을 보이는 데 반해 박근혜 전 대표는 부정적이다. 박 전 대표는 사통위의 중·대선거구제 전환 제안이 나왔을 때 친박계 의원들과 만난 자리에서 “정치학자들에게 들어보니, ‘대통령책임제 아래서는 소선거구제가 적합하다’고 하더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모임에 나갔던 친박계 한 의원은 “대통령제에서는 소선거구제, 내각제에서는 중·대선거구제가 맞다는 데 참석자들의 의견이 모아졌다”며 “이는 권력독점(대통령제-소선거구제)이냐, 권력균점(내각제-중·대선거구제)이냐의 문제”라고 말했다.

    박 전 대표는 평소에도 ‘소선거구제 유지론’을 피력해왔다. 야당인 한나라당을 이끌던 2005년 7월18일 취임 1주년 기자회견에서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주장했던 중·대선거구제로 개편하는 방안에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박 전 대표는 “대통령제에서 중·대선거구제로 가는 것은 맞지 않다”며 “선거구제 개편으로 지역구도를 타파한다는 것은 얼토당토않은 얘기”라고 일축했다. 앞서 2004년 9월7일 의원총회와 9월15일 방송기자클럽 초청토론회에서도 “우리는 대통령제인 만큼 소선거구제가 실정에 맞고 당리당략을 떠나 그쪽으로 가야 한다. 중·대선거구제 도입에 대해 당의 유·불리를 따지지 말고 어느 것이 나라를 위해 바람직한지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렇게 보면 세종시 수정 논란 당시 한나라당 친이계에 맞서 한나라당 친박계와 민주당이 공동보조를 맞춘 반면, 선거구제 개편 논의에서는 한나라당 친이계와 민주당의 입장이 일치하고 한나라당 친박계가 다른 목소리를 낼 것으로 보인다. 친이계와 야당이 합치면 선거구제 개편을 위한 법 개정이 가능하다.

    친이-친박 충돌 뇌관, 중·대선거구제 개편

    대통령 직속 사회통합위원회는 6월8일 이명박 대통령에게 지역갈등 해소를 위해 선거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건의했다.

    특히 수도권에 지역구를 둔 한나라당 의원들이 중·대선거구제로 전환하는 데 적극성을 보일 것이란 관측이 많다. 6·2지방선거를 통해 수도권의 민심이 이명박 정부에서 이반되는 현상을 확인했기 때문에 2명 이상을 뽑는 중·대선거구제로 바뀌면 한나라당과 민주당 후보가 동반 당선될 수 있어 여의도 재입성이 수월해지는 까닭이다. 수도권의 한나라당 의원들 가운데는 친이계가 압도적으로 우위를 점하고 있다.

    그러나 친박계 핵심 의원은 선거구제 개편 문제로 양 계파가 다시 충돌할 가능성을 낮게 봤다. 그는 “본격적으로 논의가 시작되면 박 전 대표는 국민여론과 여야 합의 결과에 따를 것”이라고 말했다. 원칙과 소신의 문제인 세종시와 달리 선거제도에 대해선 국민의 생각과 정치권의 공감대 형성이 우선이므로 극한 대치로 가지는 않을 것이란 의미다.

    “선거구제 개편, 영남 실익 없을 것”

    실제로 선거구 개편 문제는 각 정당이나 계파별, 지역 출신별로는 물론, 국회의원 개개인도 이해관계가 다른 만큼 계파 사이에 힘겨루기가 벌어질 소지가 적다. 영남 출신의 친박계 의원은 “중·대선거구제로 전환할 경우 호남은 몰라도 영남은 실익이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한 선거구에서 2명을 뽑을 경우 영남에서야 민주당 후보 몇 명이 한나라당 후보와 동반 당선되겠지만, 호남에서는 비(非)여당 후보들이 두 석을 나눠 가질 것이란 지레짐작이다. 그는 “중·대선거구제가 도입돼도 한나라당은 여전히 호남 진출이 어려운 상태에서 민주당에 영남 교두보 확보의 길만 열어주는 결과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나라당의 7·14 전당대회에서 당 대표 자리를 놓고 맞붙은 안상수 대표와 홍준표 최고위원도 선거구제 개편 문제를 놓고 서로 견해가 달랐다. 당권을 잡은 안 대표는 현행 소선거구제 유지론자, 2위에 머문 홍준표 최고위원은 선거구제 개편론자다.

    홍 최고위원은 이번 지도부 경선 때도 “당 대표가 되면 권역별 비례대표제 도입을 내용으로 하는 국회의원 선거구제 개편을 적극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영남에선 한나라당이, 호남에서는 민주당이 싹쓸이하는 독점적 정당구조로는 지역갈등만 증폭되고 국가 발전을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반면 안 대표는 원내대표 시절 이 대통령이 8·15 경축사에서 밝힌 선거구제 개편에 대해 “중·대선거구제를 의식해서 말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당 지도부에서 중·대선거구제 도입을 결정해 밀어붙일 생각은 전혀 없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특히 일본이 중·대선거구제를 택했다가 소선거구제로 전환한 사례를 들며 “중·대선거구제가 국민통합에 도움이 되느냐는 부분에서는 회의적”이라고 덧붙였다.

    박 전 대표가 소선거구제 유지론을 펼치고 있지만 친박계 한 중진 의원은 “지금은 중·대선거구제로 전환할 수 있는 적기”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그는 “6·2지방선거를 통해 영남사람들은 호남(민주당)에, 호남사람들은 영남(한나라당)에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했음이 확인됐다”며 “따라서 조속히 중·대선거구제로 바꾸면 고질적인 지역구도 해소에 도움이 크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의 말대로 6·2지방선거를 통해 영남에서는 민주당, 호남에서는 한나라당이 과거 선거에 비해 약진했다. 정당투표제로 진행된 광역의회 비례대표선거에서 민주당은 부산에서 27.81%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이는 4년 전 여당이던 열린우리당(민주당 전신)이 부산에서 얻은 19.7%를 크게 앞서는 수치다. 경남과 대구·경북은 4년 전과 비슷했다. 하지만 호남에서는 마음의 문을 더 활짝 열었다. 광주는 8.32%(2006년 4.7%), 전남은 8.51%(2006년 5.6%), 전북은 12.63%(2006년 7.7%)가 ‘한나라당’에 기표했다.

    광역자치단체장 선거에선 표심의 변화가 더 컸다. 6·2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의 득표율은 광주시장 선거 14.2%(정용화 후보), 전남도지사 선거 13.4%(김대식), 전북도지사 선거 18.2%(정운천)를 기록했다. 4년 전 지방선거에선 광주시장 선거 4.0%(한영), 전남도지사 선거 5.9%(박재순), 전북도지사 선거 7.8%(문용주)였다. 호남 3곳에서 한나라당 후보들이 4년 전에 비해 10% 포인트가량씩 지지율을 높인 것이다.

    영남지역의 경우 부산시장 선거에서 민주당 김정길 후보가 44.6%를 얻어 현역시장인 한나라당 허남식 후보(55.4%)를 바짝 긴장시켰다. 4년 전 부산시장 선거에선 열린우리당 오거돈 후보가 24.1%를 득표하는 데 그쳤다. 경남도지사 선거에선 노무현 대통령 시절 행정자치부 장관을 지낸 무소속 김두관 후보가 53.5%의 지지를 받아 한나라당 이달곤 후보(46.5%)를 꺾고 당선되는 기염을 토했다.

    이처럼 영남과 호남 사이의 벽이 무너질 조짐을 보이자, “이번 기회에 2012년 19대 총선 때부터 중·대선거구제를 도입해 영남과 호남에서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의석을 고루 나눠 갖자”는 선거구제 개편론이 탄력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물론 중·대선거구제가 지역주의 해소에 도움이 안 될 것이란 회의적인 시각도 많다. 한나라당의 한 중진 의원은 “지역 일꾼을 뽑는 지방선거와 나라 일꾼을 뽑는 총선에 대한 유권자의 시각은 다르다”며 “총선 때는 다시 지역성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한 선거구에서 2명을 뽑는 중선거구제를 실시하더라도 영남에서 한나라당이, 호남에서 민주당이 두 명을 나란히 공천하면 특정 정당의 독식 형태가 되풀이될 것이란 설명이다. 복수공천을 금지하는 조항을 만들더라도 가령 영남의 경우 한나라당 후보와 한나라당 성향의 무소속 후보가 동반 당선되는 사례가 속출할 수 있다.

    국면전환 위한 정략 주장도

    우리나라에서는 유신체제와 5공화국 시기에 선거구마다 2명의 후보를 뽑는 중선거구제를 채택한 바 있다. 이때 권위주의 집권당은 호남을 포함한 전국의 거의 모든 지역구에서 국회의원을 배출할 수 있었다. 반면, 야당은 몇 개로 나뉘어 나머지 절반의 지역구 의원을 차지하기 위해 다퉈야 했다. 그 때문에 집권당은 과반 의석을 쉽게 획득할 수 있었다.

    그런 전례를 의식해서인지 민주당 내부에서도 “섣불리 중·대선거구제로 전환했다가는 여당의 과반 의석 확보를 고착화시킬 수 있다”는 경계심도 나온다. 중·대선거구제 도입이 보수 정권의 장기집권을 위한 장치를 마련하려는 목적에서 제기된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이다. 우리나라의 유신체제와 5공화국에서만이 아니라 일본도 자민당이 중·대선거구제로 장기집권을 해오다가 1994년 중의원 선거에 소선거구제를 도입한 뒤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지난해 54년 만의 정권교체가 이뤄졌다.

    아울러 현 시점에 사통위와 이 대통령이 선거구제 개편 문제를 들고 나온 것 자체가 국면전환을 위한 정략이란 주장도 민주당에서 제기된다. 우상호 대변인은 “여권이 이번 지방선거에서 드러난 국민의 마음을 어떻게 수렴할 것인지를 한창 논의하고 있는 마당에 혹시 새로운 정치이슈로 지방선거 민심을 반영하는 노력을 전환하려는 목표가 있다면 이것은 또 다른 정략”이라고 지적했다.

    이번뿐만 아니라 선거구제 개편은 역대 정권에서 매번 뜨거운 감자였다. 노무현 정부 시절에도 노 대통령이 지역주의를 없애기 위해선 기존의 소선거구제에서 중·대선거구제로 가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당시 야당이던 한나라당은 노 대통령이 여당인 열린우리당의 의석수를 늘리기 위해 제도를 개편하려는 것이라며 일축했다. 앞서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는 특정 정당이 서울·부산·대구 등 광역선거구에서 3분의 2 이상의 의석을 확보하지 못하도록 제한하는 ‘지역 상한선제’가 정치권과 학계에서 논의됐다. 하지만 이 역시 유권자의 선택권을 제한할 수 있다는 논란이 일어나는 바람에 흐지부지됐다.

    이번에도 2012년 19대 총선 전에 선거구제가 개편될 가능성은 그다지 높지 않다. 논의만 하다가 추후과제로 미뤄질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특히 이 대통령이 강조한 지역주의 극복을 위한 선거제도 개선 및 행정구역 개편의 경우 헌법 개정 사항과 직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포괄적인 의미에서 개헌론과 연결되는 까닭에 정치권에서 지루한 공방전을 벌이느라 시간을 허비할 것으로 예상된다. 선거법 개정사항인 중·대선거구제 및 권역별 비례대표제 도입과 지방행정체제특별법 형태로 거론되는 행정구역 개편안이 본격적으로 공론화되면 개헌논의가 수반될 수밖에 없다. 그러면 문제가 더 복잡해진다.

    여기다 이 대통령의 임기가 반환점을 돌면서 추동력이 떨어진 점도 선거구제 개편을 어렵게 만든다. 정치평론가 황태순씨는 “개헌이나 선거구제 전환, 행정구역 개편 같은 사안은 집권자가 강력한 리더십을 보유하고 있을 때 가능한 일”이라며 “지금은 이 대통령이 집권 후반기에 접어든 데다, 내부의 권력암투마저 불거진 상황이라서 결코 쉽지 않은 작업”이라고 내다봤다. 다만 그는 “역설적으로 이 대통령이 리더십을 되찾기 위해 그런 문제들을 건드릴 수는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해외 주요국의 선거제도

    ●일본 | 1996년 이후부터 중의원선거를 소선거구제와 비례대표제로 치르고 있다. 이전에는 한 선거구에서 3~5명을 뽑는 중선거구제를 시행했다. 중선거구제가 실시될 때는 자민당을 중심으로 한 파벌, 금권정치가 비판의 대상이 됐다. 임기 4년의 중의원 정원은 480명이다. 지역구에서 300명, 11개 권역의 비례대표 선거구에서 180명을 뽑는다. 소선거구에서는 최다 득표자가 당선된다. 비례대표 선거구는 전국을 11개 권역으로 나눈다. 권역별 정수는 6~29명이며 각 당의 득표율에 따라 의석을 배분한다. 의석 배분이 확정되면 각 당이 미리 제출한 명부에 따라 상위부터 순서대로 당선자를 결정한다. 상원 격인 참의원선거는 소선거구제와 중·대선거구제가 혼합된 형태다. 참의원의 의석수는 242석이고 임기는 6년이다. 현재 지역구 의석은 146석, 비례대표는 96석이다. 선거는 3년마다 치러져 지역구 및 비례대표의 절반을 선출한다. 참의원선거의 지역구 의석 73석은 해당 선거구의 인구에 따라 1~5위 득표자에게 배정된다.

    ●독일 | 각 지역 유권자의 민의를 직접 반영할 수 있는 소선거구제와 정당지지율에 비례해 의석을 배정하는 정당명부식 주별 비례대표제를 채택하고 있다. 하원의 의석 정수는 지역구 299석, 비례대표 299석을 합쳐 598석이다. 유권자는 지역구 의원을 뽑는 ‘제1투표’와 선호 정당을 선택하는 ‘제2투표’를 동시에 한다. 지역구 당선자를 내지 못하는 군소 정당이라도 제2투표 득표율에 따라 수십 석의 의석을 배정받을 수 있다. 독일식 선거제도는 소선거구제의 약점인 사표를 방지하고 각 정당이 득표율에 걸맞은 의석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에서 민의를 더욱 충실히 반영하게 된다. 아울러 각 정당이 지역감정이나 인맥에 의존한 선거운동을 하지 않고 전국적 차원의 정책 선거를 할 수 있는 토양이 된다. 전문가 집단의 원내 진출도 용이하다.

    ●영국 | 데이비드 캐머런 연립정부가 하원의원 수를 줄이고 ‘선호투표제(Alternative Vote)’를 도입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선거제도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 개혁안에 따르면, 현재 650개인 선거구가 600개로 줄어든다. 또 선거구마다 최다 득표자 1명이 선출되는 단순다수투표제가, 선호하는 후보의 선호도를 매겨 표에 반영하는 선호투표제로 바뀐다. 이 제도가 도입되면 유권자가 지지후보 1명만을 찍는 것이 아니라 출마한 후보 모두에게 순서를 매겨 투표한다. 개표시 과반수 득표한 후보가 없으면 표를 가장 적게 얻은 후보의 표를 다른 후보들에게 배분한다. 이때 해당후보에 투표한 사람들이 2순위로 선택한 후보들에게 표를 나눠준다. 이런 과정을 과반수 득표를 하는 후보가 나올 때까지 되풀이한다. 선호투표제는 현재 호주에서 시행되고 있다. 영국은 오랫동안 단순다수득표자 1명을 뽑는 선거제도를 채택해왔지만 불합리성이 꾸준히 지적돼왔다. 자유민주당은 지난 총선에서 23.3%를 득표했으나 의석 수는 650개 가운데 57석에 그쳐 보수당과 연립정부 구성에 합의하면서 선거제도 개혁을 전제조건으로 내걸었다.

    ●프랑스 | 니콜라 사르코지 정부가 지방자치단체의 효율성을 제고하고 예산을 절감하기 위한 방안으로 행정체제와 선거구제도의 개편을 추진하고 있다. 지방자치단체를 광역화함으로써 권역을 간소화해 지자체의 국제경쟁력을 높이고 행정 낭비도 줄인다는 목표를 잡고 있다. 행정체제 개편과 함께 명부식 비례대표제를 통해 광역도의원과 도의원을 동시에 선출하고 지방의원의 수를 줄이기 위해 선거구제도의 개편도 추진되고 있다.

    ●벨기에 | 1899년에 세계 최초로 비례대표제를 도입했다. 4년마다 실시되는 연방의회선거, 5년마다 치르는 지방의회선거에 18세 이상의 유권자가 참여한다. 선거는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 방식이다. 각 정당은 선거구마다 비례대표 후보 명단을 공시하고 유권자는 지지정당의 후보 명단을 그대로 인정해 지지정당에 투표하거나, 정당은 지지하되 후보 명단이 마음에 안 들 때는 그 가운데 선호하는 후보(1인 이상)에게 직접 투표할 수 있다. 총 150명의 하원 의석이 인구에 비례해 선거구마다 안배되며 각 선거구에서 5% 이상 득표하지 못하는 정당은 당선자를 내지 못한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