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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기고

미국·북한 핵 대결의 뿌리는 6·25전쟁

한반도 핵 위협 분석

  •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

미국·북한 핵 대결의 뿌리는 6·25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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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6·25전쟁 때 미국 핵 위협이 북 핵 개발 자극
  • ● 핵에 대한 트루먼의 방심과 스탈린의 오만으로 전쟁 발발
  • ● 美 개전 초부터 핵무기 사용 검토
  • ● 핵 위협으로 ‘코리아 아마겟돈’ 위험 상존
미국·북한 핵 대결의 뿌리는 6·25전쟁

6·25전쟁 당시의 낙하산 부대.

“1950년대부터 오바마 행정부에 이르기까지, 미국은 반복적으로 북한에 대해 핵무기 사용을 고려해왔고, 계획해왔으며, 위협해왔다.”

친북좌파의 주장처럼 들리겠지만 미국 AP통신이 비밀 해제된 미국 문서를 분석해 내린 결론이다. 그 여파는 무엇인가. 일본 외무성에서 핵군축 및 대북정책을 담당했던 미네 요시키가 이 통신을 통해 한 말에서 짐작해볼 수 있다. “미국의 핵 위협은 북한에 핵무기를 개발·보유할 구실을 주고 있다. 북한은 이러한 기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불편한 진실’일 수 있다. 그러나 이를 인정하지 않는 한, 사활적인 이해가 걸린 북핵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긴 어렵다.

그래서 다시 6·25전쟁에 주목한다. 북핵의 ‘뿌리’가 바로 이 전쟁과 그 유산에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개전 초기부터 정전협정 체결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총성이 멈춘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북한에 핵 위협을 가해왔다. 이는 당시 미 육군부 차관보와 차관으로 있었던 벤데트센(Karl R. Bendetsen)이 “개전 초기부터 미국은 핵무기 사용을 검토했고, 이와 관련된 암호명(code name)도 있었다”고 말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6·25전쟁과 핵무기의 관계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6·25전쟁과 핵무기 사이의 관계를 밝히는 작업은 북한의 핵 무장과 미국의 핵 우산 정책이 맞서 있는 오늘날의 한반도 핵문제에도 중대한 함의를 준다. 북한의 대미 위협 인식의 뿌리는 미국의 핵 사용 위협을 비롯한 6·25전쟁 당시의 경험이 크게 작용하고 있고, 미국이 6·25전쟁 이후 60년 넘게 대북 선제 핵 공격 전략을 고수하는 것 역시 6·25전쟁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6·25전쟁이 ‘세계 전쟁’이었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이 전쟁의 발발, 전개과정, 정전협정 체결, 그리고 정전체제에서 핵무기가 어떤 역할을 했느냐를 이해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6·25전쟁과 핵무기의 관계에 관련해 여러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6·25전쟁 당시 미국의 핵 위협은 실제로 있었을까? 미국이 역사상 처음으로 ‘이길 수 없는 전쟁’에 직면하고도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은(혹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미국이 애치슨 라인(1950년 미국 국무장관 애치슨이 선언한 미국 극동방위선)에서 한국을 제외한 배경에는 핵 독점에 대한 자신감이 깔려 있었던 것은 아닌가? 반대로 스탈린이 입장을 바꿔 김일성의 요구를 들어준 데에는 자신의 핵 무장이 미국의 개입을 억제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미국이 38선을 넘어 북진(北進)을 감행한 데에는 자국의 핵 위협이 중국의 개입을 차단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거꾸로 마오쩌둥이 미국으로부터 핵 보복을 당할 우려가 있었음에도 참전을 강행한 이유는 무엇일까? 미국의 주장대로 자국의 핵 위협이 공산군의 전쟁 의지를 꺾어 휴전협정에 도달할 수 있었던 힘이었을까? 미국의 핵 공격 움직임에 대해 남한의 이승만과 북한의 김일성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6·25전쟁을 거치면서 미국의 핵전략에는 어떤 변화가 일어났고, 이것이 한반도를 비롯한 지구 지정학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물론 이 글에 이러한 질문에 대한 모든 대답을 담을 수는 없다. 그러나 최근 비밀 해제된 미국 문서들을 추적하고 외국 연구자들의 연구 성과를 분석해본 결과, 6·25전쟁과 핵무기의 관계는 상당히 밀착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6·25전쟁, ‘핵 시대’의 첫 전쟁

6·25전쟁은 핵무기라는 ‘절대 무기’를 보유한 두 ‘슈퍼 파워’의 대결이었다는 점에서 이전 전쟁들과는 질적으로 그 성격을 달리한다. 소련의 핵 실험 성공으로 미국 핵 독점 시대가 막을 내린 시점에 터진 6·25전쟁은 핵에 의한 승전의 유혹과 상호간 절멸의 공포가 교차하는 지점에 있었다. 전쟁 개시 당시 미국은 약 300개의 핵폭탄과 이를 운반할 수 있는 260여 기의 전폭기를 갖고 있었고, 유사시 소련에 집중적으로 사용한다는 계획도 갖고 있었다. 전쟁 발발 10개월 전에 핵실험에 성공한 소련도 20개 정도의 원자폭탄을 보유하고 있었다. 미국의 군 역사학자인 스펜서 터커가 “냉전시대의 첫 실전인 동시에 핵 시대의 첫 제한적 전쟁이었다”고 6·25전쟁의 성격을 규정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아래에 인용한 미국의 역사학자 존 루이스 가디스의 가상 에세이는 ‘글로벌 아마겟돈’의 위험을 안고 있었던 6·25전쟁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1950년 12월 2일, 맥아더는 트루먼의 위임에 따라 미 공군에 한반도로 진군하는 중국군을 향해 5발의 핵폭탄 투하를 지시했다. 핵폭탄이 뿜어낸 섬광과 폭발은 중국군의 공격을 멈추게 했다. 약 15만 명의 중국군이 사망했고, 미군과 한국군 포로 상당수도 목숨을 잃었다. 나토 회원국들은 사전 상의 없이 핵무기를 사용한 미국을 강력히 비난했고, 6개월 전 한국 방어를 위해 채택된 유엔 안보리 결의안을 무효화하기 위한 결의안을 제출했지만, 미국의 거부권 행사로 무산됐다.

핵 보복에 나서달라는 중국의 압력에 따라 소련은 미국에 한반도에서 모든 군사행동을 중지하든, ‘가장 심각한 결과’를 감수하든 48시간 안에 결정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12월 4일, 48시간이 지나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륙한 2기의 소련 전폭기는 부산과 인천에 핵폭탄을 투하했다. 이 두 곳은 유엔군 지원의 핵심 거점이었다. 맥아더는 소련의 핵 공격이 자신이 행한 것보다 2배 이상의 사망자를 내자, 주일 미공군에 블라디보스토크와 중국의 선양 및 하얼빈에 핵폭탄을 투하하라고 지시했다. 이러한 소식은 소련 공군기의 작전 범위에 있는 일본과 유럽 국가들의 격렬한 반미 시위를 야기했고, 영국·프랑스·베네룩스 3국은 나토에서 탈퇴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이미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와 함부르크에 소련의 핵폭탄이 떨어진 뒤였다.”

미국·북한 핵 대결의 뿌리는 6·25전쟁

유엔 안보리 전문가 보고서에 수록된 영변 핵시설 위성사진. 미국 주간지 ‘위클리스탠더드’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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