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5월호

선관위 선거사무 허점투성이…“부정선거 논란 자초”

개표소의 불편한 진실

  • 배수강 기자│bsk@donga.com

    입력2012-04-19 10:19: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전자개표기 100% 정확”…선관위의 ‘이상한’ 맹신
    • 심사·집계부는 눈대중 심사, 위원은 힐끗 날인
    • 빈 개표함에 있던 투표지 1장 뒤늦게 참관인이 발견
    • 선관위 직원이 “대충 봐라” 절차 무시
    • 봉인·봉함 안 된 개표함 수두룩…‘법 따로 현실 따로’
    • 중앙선관위 “단순 실수, 부족한 인력 탓… 안일함 반성”
    선관위 선거사무 허점투성이…“부정선거 논란 자초”

    서울 청운동 경기상고에 마련된 종로구 개표소(위). 서울 대치동 학여울무역전시장에 마련된 강남을 개표소에서는 투표함 봉인·봉함 문제로 정동영 후보 측 지지자들은 개표 중단을 요구했다.

    대한민국 헌법 1조는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규정한다.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권력은 선거를 통해 구체화된다. 헌법 24조가 ‘모든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선거권을 가진다’고 규정한 것도, 헌법 114조가 ‘선거와 국민투표의 공정한 관리를 위해 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를 두도록 한다’는 것도, 국민 개개인이 투표를 통해 표출한 주권 행사를 적법절차에 따라 공정하고 정확하게 이뤄지도록 하기 위함이다. 1960년 3·15 부정선거에 대한 반성으로 선관위를 독립된 합의제 헌법기관으로 만든 것도 선거 부정을 방지해 민주정치 발전에 기여하라는 뜻이었다.

    선관위는 이를 위해 단 한 표라도 국민의 주권행사가 굴절되지 않도록 적법, 공정, 정확한 개표 사무관리를 해야 한다. 규칙과 절차를 정하고, 선거 관계자들이 이를 지키는 것은 그 시작이며, 민주주의의 근간이다. 기자도 그동안 그렇게 믿었다. 적어도 4·11 국회의원 총선거 전까지는.

    ‘신동아’는 4·11 총선에서 서울 종로구와 강남을구 개표 참관인으로 개표 전 과정을 현장에서 들여다봤다. 지난 선거 개표 현장을 담은 동영상을 입수해 국민의 주권행사가 굴절되지 않는지도 따져봤다. 그러나 ‘상식의 눈’으로 들여다본 개표과정은 헌법과 공직선거법 제정 취지와는 사뭇 달랐다. 투표함 바꿔치기 같은 과거의 부정선거는 아니지만, 개표의 절차를 규정한 개표관리매뉴얼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4월 11일 오후 서울 경기상고 체육관에 마련된 종로구 개표소에서는 한 개표참관인과 종로구선관위 직원 사이에 작은 실랑이가 벌어졌다.

    “투표지분류기는 100% 정확하다니까”



    한 참관인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개표 전날 전자개표기(투표지분류기)를 제어하는 컴퓨터 봉인을 요청했다는 말이 발단이 됐다. 종로에 출마한 두 후보(정통민주당 정흥진, 자유선진당 김성은)가 투표일 직전 사퇴한 만큼 표가 섞일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투표지분류기는 100% 정확합니다. 수천 번 넘게 테스트했어요.”(박철성 관리계장)

    “기계가 100% 정확할 수 있나요? 사퇴한 사람의 표를 특정 후보 표로 취합하도록 프로그래밍 할 수도 있잖아요. 어디까지나 완벽을 위한 요청인 거죠.”(참관인)

    “아 그럼, 우리는 기분 나쁘죠. (개표과정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투표지분류기(전자개표기)는 100% 정확합니다. 2002년부터 써왔는데요, 그러시면 안 되죠. 보는 눈이 얼마나 많은데 원칙대로 안 하면 가만있겠어요?”(최병호 사무국장)

    투·개표 절차는 100% 원칙대로 한다는 선관위 직원의 말은, 그러나 2시간이 채 안 돼 허언이 됐다. 투표 마감시간이 지나고 투표함이 속속 도착하자 참관인들은 투표함의 봉쇄(封鎖) 봉인(封印) 봉함(封緘) 유무를 확인했다. 그러나 철제 투표함인 재외국민투표함과 부재자투표함은 투입구가 봉인, 봉함돼 있지 않았고, 부암동 제3투표소 투표함 등 골판지 투표함 3분의 1 가량은 투표함 겉 뚜껑 봉함이 돼 있지 않았다. 자물쇠는 채웠는데, 투표함 모서리에 테이프를 붙이지 않은 것이다.

    선관위 규정에 따르면 투표함은 이중 봉인을 해야 한다. 투표가 끝나면 투표함 입구를 봉인하고, 여기에 다시 덮개를 씌워 자물쇠로 채워야 한다. 이때 조립식 투표함의 틈이 벌어질 것을 방지하기 위해 모서리 등에 종이테이프를 붙이고 날인을 한다. 과거에는 철로 제작된 투표함을 사용했으나, 무게를 가볍게 하기 위해 2006년부터 골판지로 조립해 만든 조립식 투표함을 사용했다.

    종로구선관위 직원은 “투표지 투입구와 겉 뚜껑은 봉함해야 하지만, 이미 투표관리관이 투표참관인으로 하여금 투표함 이상 유무를 확인해 문제 될 게 없다”는 반응이었다. 논란이 일자 선관위 측이 봉함 과정에 참여했다는 참관인을 데려왔지만, 그 역시 “투입구가 봉인됐는지 몰랐고, 이미 덮개로 씌워 봉쇄를 해 확인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투입구가 봉인돼 있지 않은 걸 대수롭지 않다고 보고, 오히려 이를 지적하는 참관인들의 ‘극성’을 나무라는 듯한 모습에 기자는 적잖이 의아했다. 그러나 이제 시작이었다.

    봉인·봉함 안 된 투표함

    개표가 시작되자 개표장은 부산스러워졌다. 개표사무원들은 개함부 6곳, 투표지분류기운영부 6곳, 심사·집계부 6곳 등 18곳의 개표 테이블에서 바쁘게 손을 놀렸다.

    ‘4·11 총선 개표관리매뉴얼’(이하 개표매뉴얼)에 따르면, 개표는 투표함 이상 유무를 확인한 뒤 △개함부에서 투표함을 열어 투표용지를 정리하고 △투표지분류기운영부는 투표용지를 투표지분류기를 이용해 분류한 뒤 개표상황표를 출력하고 △심사·집계부는 분류한 투표지를 심사하고 확인하는 식으로 진행된다. 이후 8인의 심사위원이 정당·후보자별 득표수와 무효투표수 등을 검열하고 개표상황표에 서명 날인한다.

    투표지분류기를 이용한 개표 방식은 투표지분류장치와 이를 직접 제어하는 컴퓨터가 연결돼 전산프로그램에 의해 쌍방통신을 하며 제어·구동하는 전자개표시스템으로 일명 전자개표기(이하 전자개표기)를 이용한다. 투표지를 같은 방향으로 간추려 전자개표기에 넣으면 제어용 컴퓨터에 내장된 운용프로그램에 따라 투표지분류장치를 통과하는 투표지를 스캔해서 그 이미지를 전산조직인 제어용 컴퓨터에 전송한다. 컴퓨터는 이를 판독해 후보자별 유효투표지와 분류하지 못한 표(미분류투표지)로 구분해 지정된 포켓(적재함)으로 보낸다. 그리고 이를 계수, 집계해 그 결과치인 개표상황표를 출력한다.

    미분류투표지는 심사·집계부에서 유·무효와 후보자별로 구분하고, 전자개표기에서 분류한 후보자별 유효투표수에 합산해 최종 개표상황표를 작성한다. 현행법상 수개표가 원칙이다. 개표 방식에 대한 논란은 기사 후반부에서 살펴보도록 하고 다시 종로구 개표소로 돌아가 보자.

    오후 7시, 개함부에서 정리한 표가 투표지분류기운영부로 넘어가면서 전자개표기가 운용되자 개표장은 더욱 부산해졌다. 일부 개표사무원들은 자신의 임무를 숙지하지 못해 당황했다. 종로 지역구에서는 자유선진당 김성은 후보와 정통민주당 정흥진 후보가 투표일 전에 사퇴했지만, 한 사무원은 그 사실을 모른 채 별도 분류하다가 제지를 받았고, 심사·집계부의 한 사무원은 전자개표기가 분류한 100장 표 묶음을 한 장씩 일일이 확인해야 하는지, 계수기에서 장수만 확인하는지를 묻는 등 개표 절차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개표매뉴얼에는 전자개표기가 분류한 표를 ‘전량 육안으로 심사·확인하고 2,3번 번갈아가며 정확하게 재확인·심사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전자개표기가 분류한 표 중에서 다른 정당·후보자의 투표지가 섞여 있지 않은지, 무효로 처리되어야 할 투표지가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한 당연한 절차였다. 한 개표참관인은 이미 개함한 빈 투표함 속에 투표지 1장이 남아 있는 것을 발견해 위원장에게 신고하기도 했다. 참관인의 감시가 없었다면, 종로구 주민 1명의 주권행사는 물거품이 될 뻔했다.

    빈 투표함에서 나온 투표지 1장

    개표에 앞서 종로구선관위 최 사무국장은 “전자개표기가 아무리 정확해도 심사·집계부에서는 한 장씩 확인해 투표지 효력을 심사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기자의 질문에 “투표지분류기(전자개표기)가 정확하니까 그동안(이전 개표)은 심사·집계부에서 ‘약식’으로 했다. 이번에는 두 후보가 혼전 양상을 보이니 일일이 다 (원칙대로) 검사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말한 ‘약식’은 투표지분류기가 100장 단위로 분류한 것을 빠르게 넘겨 눈대중으로 확인한다는 의미였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이날 개표장에서도 규정에도 없는 ‘약식 검사’가 눈에 띄었다. 전자개표기가 100% 정확하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선관위 직원이 말한 ‘100% 정확하다’는 전자개표기 역시 문제점을 드러냈다.

    전자개표기는 투표용지를 1분에 220여 장, 1시간에 1만3000~1만5000장의 속도로 판독할 수 있다. 투표용지 인식장치는 모든 투표지를 읽고 영상 파일로 저장하는 동시에 기표된 위치를 가려 ‘표’를 후보자나 정당별로 분류한다. 그러나 정확하게 기표된 투표용지가 해당 후보자 포켓으로 분류되지 않고, 미분류 포켓으로 분류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숭인1동 제2투표소 투표용지를 개표할 때는 투표용지 1369장 중 420장(31%)이 미분류투표지로 분류됐다. 기기가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것이다.

    이화동 제2투표소에서는 개표 결과 투표용지 교부수(1892표)보다 1장 많이 계산돼 전체를 재분류하는 일이 발생했다. 개표상황표를 확인해보니, 재개표 결과 이 지역 정세균 후보의 표는 첫 분류할 때보다 3표 적은 1057표로, 홍사덕 후보 표는 4표 많은 743표로 분류됐다. 그 표차가 현저하자 한 개표사무원의 입에서 “전자개표기를 너무 믿지 말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이러한 표 차이는 전자개표기가 제대로 읽지 못해 미분류투표지로 분류했거나, 다른 후보의 표로 분류했을 가능성이 높음을 뜻한다. 따라서 심사·집계부의 역할은 중요하다. 개표매뉴얼이 “심사·집계부는 정당·후보자의 투표지를 전량 육안으로 심사·확인하고, 특히 다른 후보자의 투표지가 혼입되었는지 중점 확인하라. 그것도 2,3회 번갈아가며 정확히 다시 심사하라”고 명시한 것도 그 중요성 때문이다.

    현실은 달랐다. 전자개표기가 미분류투표지로 구분한 표는 한 장씩 육안으로 다시 분류했지만, 대부분 1회에 그쳤고, 일부 개표사무원은 후보자별로 분류된 투표지 100장을 왼손으로 잡고 오른쪽 엄지손가락을 이용해 빠르게 넘겨가며 눈대중으로 본 뒤, 계수기를 통해 장수를 확인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앞서 선관위 직원이 말한 ‘약식’이었다. 할리우드 갱스터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가짜 돈이 섞여 있는지 돈다발 속을 살펴보는 장면과 흡사했다.

    강남을 개표소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경우 투표지 중간 부분이 찢겨 있거나 두 곳 이상 기표된 무효표를 찾아내기 어렵고, 다른 후보자의 투표지가 섞여 있을 수도 있다. 약식 개표는 심사할 표가 밀려 있거나 개표 시간이 늦어질수록 자주 눈에 띄었다. 심사·집계부의 한 개표사무원은 “왜 규정대로 하지 않느냐”는 기자의 지적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선관위 선거사무 허점투성이…“부정선거 논란 자초”


    눈대중으로 확인하는 ‘약식 개표’

    “기계가 정확하게 분류했으니 미분류된 표를 중점적으로 보고 분류된 표는 장수를 확인해 빨리 넘겨야 할 거 아닌가. 표가 계속 넘어오는데, 어떻게 꼼꼼히 보나. 규정(매뉴얼)은 잘 모르겠다.”

    신형 개표기를 운용한 투표지분류기운영부 6반 사무원들은 분류한 투표지가 포켓에 쌓이지 않아 개표 내내 진땀을 뺐다. 포켓으로 향하던 투표지가 공중으로 튀어 오르거나, 자주 ‘잼’을 일으켜 사무원 2명은 서서 개표를 했다. 6반 책임사무원은 선관위 직원에게 “6반 사무원의 수당을 2배로 올려줘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 개표기 측면에 부착된 ‘검수 (성능시험) 확인표’에는 선관위와 제작업체 직원의 서명만 있을 뿐, 성능시험 결과란에 ‘합격’ ‘불합격’ 표시가 누락돼 있었다. 전날 전자개표기를 수천 번 확인했다는 선관위 직원의 말이 떠올라 헛웃음이 났다.

    2010년 6·2 지방선거를 앞두고 도입된 신형 전자개표기는 최대길이 31.8㎝의 투표용지까지 인식할 수 있어, 4·11총선에서 비례대표 투표용지(31.2㎝)를 전담 분류했다. 종로구 개표소에 설치된 6대 중 2대는 신형 개표기였다.

    전자개표기를 지나 심사·집계를 마쳤다면 이젠 심사위원들이 나서야 한다. 정당 추천인 2명을 포함한 8명의 심사위원(장)은 심사·집계부로부터 인계받은 투표구의 정당 후보자별 득표수와 무효투표수 등을 검열한 뒤 개표상황표에 각자 서명날인해야 한다. ‘16개의 눈’으로 마지막 점검을 하는 절차이지만 이 역시 허술하긴 마찬가지였다.

    한 개표사무원은 무악동 제1투표소 개표상황표 유효투표수(1602표) 기입란에 무효표(21표)를 기록했지만, 심사위원들은 이를 확인하지 않고 개표상황표에 모두 날인을 했다. 기록·검토석에서 뒤늦게 이 사실을 확인한 직원이 이미 위원들이 최종 날인한 상황표를 들고 급히 담당자에게 가서 정정을 요청했고, 담당자는 사유란에 ‘단순 오기’로 적고 정정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위원 8명 모두 개표상황표의 득표수와 무효투표수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잡아낼 수 있는 오기였지만, 누구도 확인하지 못한 것. 개표 결과가 그대로 입력됐다면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아찔한 순간이었다. 기자가 “수정했느냐”고 묻자 직원은 “무효숫자를 모두 수정해 입력했다”고 답했다.

    이밖에도 개표사무원의 서명이 빠진 개표상황표에 위원들이 모두 날인을 해 이를 뒤늦게 발견한 직원이 또다시 상황표를 들고 서명을 받는 일도 있었다.

    “위원 날인이 다 돼 있는데 다시 수정을 하느냐”는 질문에 직원은 급히 자리를 피하면서 “제대로 못 본 것”이라고 짧게 말했다. 기자가 위원들의 검토·날인 시간을 점검한 결과 심사·집계부에서 인계받은 투표지가 밀려 있을 경우 위원 1명의 검토·날인 시간은 5~10초에 불과했다. ‘암산왕’이 아니고서는 각 후보자의 분류·미분류 표의 합계가 정확한지, 담당자 서명이 있는지 확인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다.

    위원 날인한 개표상황표 들고 수정하기도

    개표 문제점을 지적해야 할 참관인 역시 워치도그(watchdog·감시견) 역할보다는 전자개표기 모니터에 집계된 투표소별 득표수를 확인해 후보자에게 전하기에 급급한 모습이었다. 공직선거법 181조는 ‘개표참관인석은 개표내용을 식별할 수 있는 가까운 거리(1~2m)에서 참관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지만 종로구 개표소의 참관인석은 개표장과 멀리 떨어진 출입구 쪽에 마련돼 있어 ‘꼼꼼한 참관’이 어려웠다.

    서울 강남을 개표소는 투표함이 제대로 봉인, 봉함되지 않아 정동영 후보 측 참관인이 참관을 거부하고 개표부정 의혹을 제기했다. 이후 정 후보 측은 선거무효소송을 비롯한 법적 대응을 예고하고 있다. 강남을 개표소 역시 심사·집계부 사무원들이 한 장씩 표를 계산하지 않고 눈대중으로 본 뒤 계수기에 넣어 장수를 확인하는 모습이 자주 목격됐다. 개표 시간이 늦어지면서 이런 일은 더욱 잦아졌다.

    이런 상황을 종합해보면, 최악의 경우 전자개표기의 집계가 최종 투표 결과로 확정되는 상황도 배제할 수 없다.

    일부 사무원들의 실수를 본 기자의 ‘기우(杞憂)’로 치부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개표는 국민 개개인이 투표를 통해 표출한 주권행사를 집약하는 과정이다. 결과에 따라 유효투표의 다수를 얻은 자가 당선인으로 결정돼 임기 동안 국가권력을 행사하는 만큼 개표사무는 엄중해야 한다. 개표매뉴얼 첫 페이지에도 “개표는 신속성보다 정확성이 요구됩니다”라고 적혀 있다. 중앙선관위 관계자의 말이다.

    “개표사무원이 빨리 개표사무를 마치려고 눈대중으로 확인하거나, 급한 마음에 봉인·봉함을 제대로 하지 않거나, 심사위원이 제대로 확인도 않고 날인을 하는 것은 분명 잘못이다. 투·개표 사무원 교육을 시키지만 규정대로 하지 않았다. 구별 선관위마다 6~10명 정도 직원으로는 한계가 있지만, 솔직히 선관위의 기본 임무인 투·개표에 소홀했다는 반성도 한다. 부끄럽다.”

    개표를 참관하면서 기자가 가장 의아해한 것은 선관위 직원들의 전자개표기에 대한 맹신이었다. 이러한 맹신은 ‘신동아’가 입수한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 당시 중랑구선관위 개표소 동영상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투·개표 기본임무 소홀…“부끄럽다”

    당시 제7심사·집계부 개표사무원들이 개표가 시작되자 전자개표기가 분류한 투표지를 한 장씩 넘겨가며 그 투표지가 제대로 기표되었는지 여부를 규정대로 심사하려고 하자, 중랑구선관위 김철 사무국장이 이들에게 다가가 “기계는 100% 정확하다”면서 대충 확인해 빨리 넘기라고 재촉하는 모습이 나온다. 다음은 김 사무국장이 개표사무원에게 말하는 대목.

    “기계(전자개표기)는, 죄송하지만은 기계가 정확하잖아요. 100%. (전자개표기가 제대로 분류했으니) 그러면 (투표지 묶음을 한 손에 잡고 엄지손가락으로 빠르게 넘기며) ‘드르륵’ 해 가지고 이상 없다면 끝나는 거죠. 기계가 한 거는 100% 정확해서요. 그러니까 확인해봐도 이상 없잖아요. 그러니까 빨리빨리 넘기시라고요. 100%라니까. 100%. 여러분도 한 번 해보세요. 이렇게 많은 걸 갖다가 일일이 다 어떻게 확인해요. 그러니까 ‘드르륵’ 이게 빠르다니까. 그러면은 저쪽에서 있잖아요. 저쪽에 계수기 돌리는 사람이, 돌리면서 한 번 또 확인한다니까.”

    심사·집계부는 개표기가 분류한 표를 육안으로 2,3회 재확인해야 하지만, 선관위 직원이 오히려 자신들이 정한 규칙을 위반할 것을 주문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개표기는 100% 정확한 걸까. 통계학적으로는 100% 신뢰도는 계산된 투표지 수를 무한 횟수 시험해야 해 사실상 불가능하다. 종로구 개표소의 사례처럼, 같은 양의 투표지를 넣어도 결과는 확연히 달랐다.

    실제 2003년 3월 27일에 실시된 16대 대통령선거 당선무효사건(대법원 2002수12호) 재검표 결과 노원구(69장), 서대문구(77장), 부평구(101장), 의정부시(35장), 안성시(25장) 등에서는 표가 섞인 ‘혼표’가 발견됐다. ‘쌍둥이 투표지’가 당시 노무현 후보의 표 묶음에서 다량 발견되기도 했다. 쌍둥이 투표지는 인쇄한 것처럼 위치와 방향이 동일하게 기표된 투표지를 말한다. 선거인이 투표소에서 투표용지 1장씩을 받아 직접 기표하면 그 위치와 방향까지 동일하게 기표될 수 없다. 당시 선관위는 가인기(일련번호 인쇄기)라는 기계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 기계는 선관위가 투표용지에 정당대리인 가인을 하는 용도로 사용했던 장비다. 이 기계에 특정후보란에 기표되도록 기표용구를 고정시켜놓고 작동하면 인쇄하듯이 빠른 속도로 다량의 쌍둥이 투표지를 찍어 낼 수 있다. 일부 시민단체는 이를 근거로 표 바꿔치기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 같은 전례에도 선관위의 전자개표기에 대한 맹신은 자신들이 만든 개표매뉴얼을 스스로 무용지물로 만들고 있었다.

    전자개표기와 관련해 한 가지 짚어야할 대목은 법적 근거가 미비하다는 점이다. 공직선거법 제278조(전산조직에 의한 투표·개표) 6항에는 ‘투표 및 개표 기타 선거사무관리의 전산화에 있어서 투·개표 절차와 방법, 전산전문가의 투표 및 개표사무원 위촉과 전산조직운영프로그램의 작성·검증 및 보관, 전자선거추진협의회의 구성·기능 및 운영 그 밖에 필요한 사항은 중앙선관위규칙으로 정한다’고 규정돼 있다. 부칙 제5조 2항에는 ‘전산조직을 이용하여 개표사무를 행하는 경우의 개표절차와 방법, 전산전문가의 투표 및 개표사무원 위촉과 전산조직운영프로그램의 작성·검증 및 보관 기타 필요한 사항은 중앙선관위규칙으로 정한다’고 돼 있다.

    중앙선관위가 전자개표 방식의 개표를 실시하려면 필요한 사항을 규칙으로 정해 그 절차를 따라야 한다. 전자개표 절차와 방법 등에 대한 규칙을 제정하지 않고 입법부작위 상태에서 전자개표기를 사용해 개표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는 이유다.

    특히 부칙 제5조(전산조직에 의한 개표) 1항에는 ‘이 법 시행 후 실시하는 보궐선거 등에 있어서는 전산조직에 의하여 개표사무를 행할 수 있다’고 제한하고 있어, 중앙선관위가 대통령선거, 국회의원 총선거, 전국동시지방선거 등 전국단위 선거에서 전자개표기를 사용해서 개표하는 데 대한 근거는 없다.

    법적 근거 미비한 전자개표기

    이에 대해 중앙선관위는 ‘투표지의 구분, 계산에 기계장치 또는 전산조직을 이용할 수 있다’고 규정한 공직선거관리규칙 제99조 제3항이 전자개표기를 사용하는 법적 근거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규칙조항은 임의규정에 불과해, 전자개표기 사용을 강제할 법적 근거는 될 수 없다. 또한 위임규정이어서 그 이해당사자인 정당, 후보자와 유권자에 대한 법적 구속력도 없다. 현행법으로는 전자개표기를 사용하지 않아도 아무 문제가 없다.

    ‘신동아’가 국회 회의록과 국정감사 속기록 등을 확인한 결과, 2002 회계연도 중앙선관위 예비심사보고서와 2004년 보고서에서 전자개표기 예산 지출 근거는 현재의 주장과 다른 공직선거법 제278조 6항이었다. ‘투표 및 개표 기타 선거사무관리의 전산화에 있어서 투표 및 개표절차와 방법, 전산전문가의 투표 및 개표사무원 위촉과 전산조직운영프로그램의 작성·검증 및 보관, 전자선거추진협의회의 구성·기능 및 운영 그 밖에 필요한 사항은 중앙선관위 규칙으로 정한다’는 규정이다.

    2002년 처음 도입했을 때부터 선관위가 명명한 전자개표기는 2005년 하반기부터는 슬그머니 투표지분류기로 바뀐다. 2006년 3월에는 6개 일간신문에 7200여만 원을 들여 ‘투표지분류기는 전자개표기가 아니라, 투표지를 단순히 후보자별로 구분하는 기계’라고 광고를 했다. 이듬해에는 전자개표기를 투표지분류기라고 하라는 공문서를 작성해 하급선관위에 시달했고, 현재까지 공식적으로 투표지분류기라고 명명한다.

    전자개표기와 투표지분류기는 큰 차이가 있다. 전자적 장치에 의해 개표할 경우 공직선거법에서는 전산조직에 의한 개표가 된다. 앞서 지적했듯, 전산조직을 이용했을 때는 보궐선거 등으로 사용이 제한되는가 하면 중앙선관위가 국회 교섭단체 정당과 협의해 결정해야 한다. 처음 도입할 때에는 전자개표기라고 하다가 이런 규정을 미처 확인하지 못해 뒤늦게 이름을 바꾼 것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전자개표기라고 하면 전자적으로 개표를 한다는 뜻이 돼 부칙 5조 1항에도 위배된다. 투표지분류기는 (투표지를) 분류만 하는 기기인데, 선관위가 분류기 도입 초기에 명칭을 잘못 정했다. 분류기의 도입 근거인 ‘투표지의 구분, 계산에 기계장치 또는 전산조직을 이용할 수 있다’는 공직선거관리규칙 제99조 3항 역시 임의 규정이고 자칫 오해를 일으킬 수 있는 만큼 법 개정은 필요하다고 본다. 현재 터치스크린 방식의 투표 도입을 앞두고 있는데 확실히 정해지기 전까지 (법 개정을 하기에는) 어정쩡한 상황이다. (법 개정이 미뤄지는 것은) 전자투표로 넘어가는 과도기이기 때문으로 봐달라.”

    “임의 규정인 만큼 법 개정 필요”

    그러면서도 대법원 확정 판결을 받은 만큼 사용에는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중앙선관위가 말하는 판결은 대법원 2003수26호 대통령선거무효사건. 당시 재판부는 2004년 5월 31일 선고한 판결에서 “이 사건 개표기는 기표된 투표지를 분류하는 기계장치인 본체와 후보자별 투표지를 인식하는 프로그램, 후보자별 유효투표지를 자동적으로 ‘집계’하는 프로그램이 장착된 개표기 제어용 컴퓨터, 그리고 개표상황표를 출력하는 프린터로 구성되었다. 개표기 제어용 컴퓨터는 ADSL망으로 중앙서버와 연결되어 선거인수와 후보자 자료를 다운받는 자료 수신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인정했다. 그럼에도 대법원은 “심사·집계부의 육안에 의한 확인·심사를 보조하기 위해 투표지를 이미지로 인식해 후보자별로 분류하는 기계장치에 불과하다”고 판시했다. 기계장치일 경우, 전산조직을 이용할 때 따라야 하는 각종 위원회 의결과 각종 규칙 제정에 따른 법률 논란은 피할 수 있다.

    하지만 전산조직은 ‘특정 목적을 위해 전자회로를 이용해 계산을 하는 데 사용하는 기계를 모아서 이룬 체계 있는 집단’을 뜻한다. 윤봉규 국방대 교수(산업공학 전공)의 설명이다.

    “단순히 칩이나 버튼을 이용해 기기를 돌린다면 단순 기계장치라고 할 수 있지만, 전자개표기같이 집계 프로그램이 장착된 컴퓨터와 개표상황표를 출력하는 프린터가 연결돼 있다면 전산조직으로 봐야 한다.”

    이 사건의 재판장은 제16대 대선 당시 서울시선관위원장을 지낸 고현철 전 대법관이었다. 피고는 중앙선관위 위원장직을 겸하고 있던 유지담 전 대법관이었고, 피고 소송대리인은 중앙선관위원장직과 대법관직을 겸하다가 2000년 7월 퇴임한 이용훈 변호사였다. 이용훈 변호사는 2005년 노무현 정부에서 대법원장에 임명돼 2011년 9월 퇴직했다. 이런 이유로 시민단체에서는 판결의 부당성을 주장하고 있다.

    그건 그렇다고 쳐도 ‘심사집계부의 육안에 의한 확인·심사를 보조하기 위한 기계장치에 불과하다’는 재판부의 시각은 개표 현장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선관위 직원부터 전자개표기를 맹신하는 상황에서 심사·집계부 사무원은 오히려 전자개표기를 보조한다는 표현이 적절하다. 이와 관련해 경기도선거관리위원회 직원 박모 씨 등 3명은 “전자개표기 사용을 강제할 법적 근거가 없다”며 전자개표기 불법사용 등 확인 소송을 서울중앙지법에 내고 법적 판단을 기다리고 있다.

    전자개표기 도입 당시 중앙선관위는 개표사무의 신속, 정확을 기하고 개표사무원 수를 줄여 예산을 절감하기 위해 전자개표기를 사용한다고 했다. 수개표를 한 1997년 제15대 대통령선거의 경우 개표사무원은 2만8359명이었으나, 전자개표를 한 2007년 제17대 대통령선거 때는 3만2125명으로 오히려 3766명이 늘었다. 4·11 총선 개표사무원은 4만2000여 명으로 선관위는 추산한다. 당초 도입 취지와도 맞지 않다.

    개표사무원은 오히려 늘어

    중앙선관위는 “투표지분류기 숫자가 증가하면서 투표지분류기운영부 사무원을 증원했고, 신속한 개표를 위해 인력을 더 늘린 결과”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만큼 사무원 수당과 전자개표기 운송 설비비 등이 늘게 돼 예산 절감 약속도 지키기 어렵다. 현재 선관위가 보유한 전자개표기는 1861대다.

    소송 결과와 관계없이, 전자개표기를 도입하면서 면밀한 법적 검토를 하지 않고, 전자개표기에서 투표지분류기로 이름을 바꿔 혼란을 야기하고, 선거 때마다 공정성 논란에 휩싸이는 것은 결국 선관위의 부주의 탓이라는 목소리가 높다.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다. 선관위는 ‘민주주의의 꽃, 선거’를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워 선거를 독려한다. 꽃을 피우기 위해 적당한 햇빛과 수분을 공급해주고, 바람과 해충을 막는 역할은 선관위와 사무원들의 몫이다. 그러나 그 역할이 공정성 논란을 빚거나, 스스로 규정한 역할을 지키지 않는다면 개화(開花)는 요원하다.

    서울 강남을 선거구 정동영 후보의 개표부정 의혹 제기 역시 선관위의 안일함이 화를 자초한 측면이 크다. 극소수의 단순 실수, 부족한 인력 탓에 앞서 선관위는 스스로 투·개표 사무의 안일함이 어떤 오해와 유·무형의 피해를 불러왔는지, 민주주의의 근간을 훼손하지는 않았는지 먼저 따져봐야 할 때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