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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추적

“정상회담 합의 후 남측이 뒤통수쳤다”

임태희-김양건 싱가포르 비밀 접촉 전말

  • 송홍근 기자│carrot@donga.com

“정상회담 합의 후 남측이 뒤통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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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MB 평양 방문 시 납북자·국군포로 남측 귀환 합의
  • ● 정상회담·핵·이산가족 등 6개 항목 담긴 합의문에 서명
  • ● “회담장소 판문점 변경 요구에 北, 발끈… 협상 결렬”
“정상회담 합의 후 남측이 뒤통수쳤다”

김양건 북한 통일전선부장(왼쪽) 임태희 전 대통령실장(오른쪽)

대선에 북풍(北風)이 불어오고 있다. 북한도 주판알을 튕기며 한국 대선 판도를 주시하고 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햇볕정책은 핵(核) 외투를 벗기기는커녕 오히려 핵무기 수만 늘렸다. 이명박 정부의 압박정책도 북한을 길들이기는커녕 핵 폐기와 관련해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한 채 용도 폐기될 처지다. 햇볕정책, 압박정책이 공히 실패한 것이다. ‘대한민국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고 명시한 헌법 제3조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대통령의 통일정책, 대북정책은 한반도 미래와 직결해 있다. 북한을 올바르게 관리해 통일로 가는 초석을 놓을 후보는 과연 누구일까? 박근혜 문재인 안철수 세 후보 모두 불안정한 남북관계를 안정적으로 되돌려놓겠다면서 화해정책을 표방한다. 한국통인 에드 로이스 미국 하원의원은 “12월 대선에서 누가 이기든 대북정책이 불행한 U턴을 할 것이다. 이는 실패한 햇볕정책으로의 회귀를 의미한다”고 꼬집었다. 세 후보 대북정책의 공통점은 이명박 정부 방식으론 안 된다는 반성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이명박식 대북정책이 반면교사 대상이 된 까닭은 뭘까? 압박정책이 걸어온 길을 분석한 후 누가 대북정책을 이끌 적임자인지 살펴보자.

우선 시곗바늘을 2009년 가을로 되돌려보자. 압박정책의 운명을 가른 결정적 사건이 이때 일어났다.

2009년 10월 북한 고위인사 두 명이 싱가포르 샹그릴라호텔에 투숙했다. 두 사내는 왜 인도양 해변을 찾아왔을까?

두 사람이 싱가포르를 찾기 1개월여 전인 9월 5일 임진강에서 한국인 6명이 숨졌다. 북한이 황강댐 수문을 갑작스럽게 열어 강물이 임진강 하류로 쏟아져내려오면서 야영객들이 휩쓸린 것이다. 북한이 무단방류를 사실상 시인했는데도 통일부는 공식 사과 요구를 미루다 언론의 비판을 받았다. 9월 8일 현인택 당시 통일부 장관이 국무회의에 참석하고 돌아와서야 “책임 있는 당국의 추가설명 및 공식사과를 요구한다”고 밝혔다.

4박5일간 샹그릴라 투숙

남북관계에서 ‘원칙’을 강조하던 정부가 왜 ‘약하게’ 대응했을까? 북한의 태도도 수상했다. ‘리명박 역도와 그 패당’ 운운하며 막말을 퍼붓던 때가 면구스럽지도 않은지 10월 14일 “남측에서 뜻하지 않은 인명 피해가 발생한 데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면서 조의를 표명한 것. 정부는”사과로 인정한다”고 즉각 화답했다. 누가 보더라도 남북 간에 특별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이후 임태희 전 대통령실장이 김양건 북한 통일전선부 부장을 싱가포르에서 만나 연내 정상회담 개최를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그동안 정부는 이를 공식 부인해왔다. 임 전 실장은 올해 6월 19일 채널A 인터뷰에서 이 같은 사실을 처음으로 시인했다.

2009년 10월, 11월에 벌어진 일련의 일은 천안함 폭침(2010년 3월), 연평도 포격(2010년 11월)으로 이어진다. 임태희-김양건 면담에서 논의한 내용은 이제껏 베일에 싸여 있다. 10월 ‘어느 날’ 접촉이 이뤄졌는지조차 확인되지 않았다. 싱가포르에서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 남북 정상회담이 성사 직전까지 갔다는 것은 사실일까?

샹그릴라 호텔에 투숙한 북한 인사는 김양건 부장과 원동연 통일전선부 부부장. 이들은 4박5일간 싱가포르에 체류했다. 10월 15일 베이징에서 날아와 20일 베이징으로 되돌아갔다. 접촉 장소로 싱가포르를 선택한 이유는 북한 인사들이 일반 관광객처럼 무비자로 입국할 수 있어 보안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임 전 실장과 김 부장은 구면(舊面)이었다. 둘은 두 달 전(8월 21일) 서울 그랜드힐튼호텔에서 밤늦게까지 양주잔을 함께 기울였다. 임 전 실장은 안경과 모자로 변장하고 취재진 눈을 피해 김 부장이 묶던 방으로 올라갔다. 김 부장이 김대중 전 대통령 장례식 조문 사절로 서울을 찾았을 때 일이다. 지금껏 언론에 포착된 싱가포르에서의 논의 내용은 “임 전 실장과 김 부장이 양해각서에 서명했으며 핵심 내용은 북한이 국군포로와 납북자 일부를 송환하고 남한은 그 대가로 경제적 지원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는 게 전부다.

신동아 취재 결과, 두 사람이 서명한 문서는 양해각서가 아니라 합의문이다. 정상회담, 국군포로 및 납북자, 한반도 비핵화, 이산가족, 인도적 지원 문제 등 6개 항목을 논의했다.

서독은 냉전 시절 동독 반체제 인사 석방 사업을 벌였다. 3만3755명을 서독으로 데려온 대가로 34억6400만 마르크 상당의 현물을 동독에 건넸다. 서독은 이 프로젝트를 프라이카우프(Freikauf·자유를 산다는 뜻)라고 불렀다. 임 전 실장은 이 방식을 원용해 협상했다. 국군포로, 납북자, 이산가족과 관련한 북측의 조치에 상응해 식량이나 물품을 지원하기로 한 것. 합의문의 핵심조항은 다음과 같다.

‘잇속’챙기고 ‘신뢰’잃어

“이명박 대통령 평양 방문 시 전쟁시기와 그 후 소식을 알 수 없는 사람들 ○명의 고향방문을 실시한다.”

납북자, 국군포로의 한국 귀환이 정상회담 전제조건이었고 이를 북한이 받아들인 것이다. ‘전쟁 시기와 그 후 소식을 알 수 없는 사람들’은 납북자, 국군포로를 외교적 수사로 표기한 것으로 ○명은 1명부터 9명 사이를 의미한다. 합의한 내용대로 정상회담이 열렸다면 이 대통령은 평양에서 김정일을 만난 후 납북자, 국군포로 ○명과 함께 서울로 귀환했을 것이다. 고향방문 형식으로 귀환한 이들은 북한으로 돌아가지 않고 한국에 거주하는 방식이 고려된 것으로 전해진다. 임태희-김양건 면담 직전 나온 북한의 황강댐 방류 관련 유감 표명, 2009년 9월 26일~10월 1일 금강산에서 열린 이산가족 상봉 행사 역시 임태희-김양건 라인에서 만들어낸 것이다.

“정상회담 합의 후 남측이 뒤통수쳤다”

2010년 3월 26일 북한 어뢰를 맞아 침몰한 천안함.

임 전 실장은 남북정상회담 최종합의를 당국 간 공식라인으로 넘겼다. 2009년 11월 7일, 14일 개성에서 통일부와 통일전선부가 정상회담 조건을 놓고 대화했으나 협상이 결렬됐다. 통일부와 통일전선부의 회담에서 남측은 귀환하는 납북자, 국군포로 수를 수십 명 수준으로 올리고, 정상회담을 판문점에서 열자고 다시 제안하면서 싱가포르 합의 내용을 엎은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은 이산가족 상봉 행사와 관련해 관례대로 식량지원을 바랐다고 한다.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북한에 쌀을 주고 이산가족 상봉을 받아와 국내 정치에 활용했다. 북한은 상봉 행사와 쌀, 비료 지원을 항상 연계했다. 이명박 정부도 대가로 식량을 제공했을까? 남측은 노무현 정부 시절 합의했으나 남북관계 경색으로 지원이 미뤄진 옥수수 5만t의 전부 혹은 일부를 제공하는 것을 북측과 협의하다 접은 것으로 알려졌다. 북측은 당연히 옥수수를 받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무산됐다는 것이다. 2009년 추석 때 이산가족 상봉은 역사상 처음으로 식량지원 없이 이뤄졌다.

한국이 지금껏 서술한 일련의 과정에서 손해 본 것은 없다. 쌀 한 톨 내주지 않고 이산가족 상봉행사와 야영객 6명 사망 관련 사과를 받아냈다. 해마다 쌀을 수십 만t씩 퍼주고도 핵실험으로 뺨을 얻어맞은 과거 정부와 다르게 이문이 남는 장사를 한 것.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 동안 제대로 요구도 못한 납북자·국군포로의 한국행과 관련한 양보를 받아내는 전례를 남긴 것도 성과라면 성과다. 북한은 공식적으로 국군포로 및 납북자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다. 그러면 우리 정부가 잃은 것은 없었을까? 북한 권부(權府) 사정에 정통한 소식통은 이렇게 말했다.

“북한은 이명박 정부가 말로는 원칙을 지켜가면서 대화하자고 해놓고 결정적 순간에 거꾸로 약속을 지키지 않아 망신을 줬다고 생각한다. 잇속만 챙기고 합의를 뒤집었다는 것이다. 국군포로, 납북자를 남쪽으로 보내기로 한 것은 북한이 대단한 결심을 한 것이다. 통 큰 양보를 하면서 정상회담에 합의했는데 남측에 뒤통수를 맞았다고 여긴다.”

이명박 정부가 3년 전 가을 잃은 게 있다면 그것은 보수가 지켜야 하는 ‘신뢰’인지도 모른다. 남북 간 신뢰의 상실은 이듬해 3월 천안함 폭침 사건으로 이어졌으며 남북관계는 급랭해 지금껏 회복되지 않고 있다.

이명박 정부는 북한을 ‘길들여’ 남북관계를 바로잡은 뒤 대화하겠다는 원칙을 세웠다. 집권 첫해 20대 국정전략 및 100대 국정과제를 내놓았다. 남북관계는 20대 국정전략 중 열일곱 번째 항목에 담았다. ①북핵 폐기를 지속적으로 추진하겠다 ②비핵·개방·3000 구상(나들섬 구상 포함)을 추진하겠다 ③남북 간 인도적 문제를 해결하겠다 등 3가지다. 이 3가지 가운데 성과를 낸 것은 하나도 없다. 낙제를 면키 어려운 성적을 거둔 것. 압박이 대화로 가는 수단에서 목적으로 전도돼버렸다는 지적도 있다. MB정부 출범 초부터 대북정책에 관여한 당국자는 지난해 류우익 통일부 장관 취임(9월 19일) 직전 사석에서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어른(MB)은 남북관계를 잘 관리하겠다는 바람을 임기 초부터 가졌다. 엇박자가 이어지면서 남북관계가 어긋났다. 의도하지 않은 엇박자 탓에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남북관계가 떠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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