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겹눈으로 본 북한

‘빨치산 DNA’ 계승 3代째 요직 싹쓸이

北 ‘김씨 왕조’ 전위대 만경대혁명학원

  • 김옥자 │북한학 박사, 서울 압구정초등학교 교사 give1111@daum.net

‘빨치산 DNA’ 계승 3代째 요직 싹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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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특권계층 교육기관…北 정권과 운명공동체
  • ● 정치, 군사, 기술전문직 핵심 간부 양성
  • ● 김정은 “만경대혁명학원은 최고사령부 문전 보초병”
‘빨치산 DNA’ 계승 3代째 요직 싹쓸이

김정은 북한 노동당 제1비서(오른쪽에서 네 번째)가 2월 16일 북한 고위층 자녀 교육기관인 만경대혁명학원 앞에서 간부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김정일 사망 후 북한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김정은 정권이 권력 안정기에 접어들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리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김정일과는 달리 김정은은 후계자 수업을 충분히 거치지 않은 데다 나이도 어려 이런 분석은 꽤 설득력을 가졌다. 그러나 김정은 정권은 몇 차례의 크고 작은 이슈를 거치며 비교적 빠른 시간 내에 안정 궤도에 진입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김정은이 통치 능력을 충분히 검증받지 못했는데도 조기에 권력을 확보할 수 있었던 배경에 대해 학계에서는 다양한 추론을 내놓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좀 더 과학적이며 객관적인 접근이 이뤄져야 설득력 있는 논의가 가능하다고 본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과학적 분석의 틀 아래서 김정은 정권의 조기 정착 배경을 짚어보고자 한다.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북한 최고 권력을 분석하려면 그 충실한 핵심 간부들의 충원 과정을 논하는 것이 필수다. 김일성·김정일 체제의 절대적 지지자이던 김일성 친·인척 중심의 만경대 줄기, 항일 빨치산 세력 및 그들의 유자녀들로 이어진 백두산 줄기, 그리고 6·25전쟁 전사자·피살자 유자녀들이 그들로, 최고 권력은 혈연과 혁명적 동지애를 기초로 한 이 운명공동체에 세력 기반을 두었다.

만경대院, 김일성大보다 강력

2011년 북한의 지도급 인사를 중심으로 구성된 232명의 김정일 장의위원회 위원의 출신학교를 살펴보면 김일성종합대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러나 중등교육기관 출신으로 좁혀보면 상위 50위권 위원들 중 만경대혁명학원 출신이 13명이나 됐다. 2010년 제3차 당대표자회를 통해 선출된 당중앙위원회 위원 및 후보위원들 중에서도 만경대혁명학원 출신자가 김일성종합대학에서 배출한 당중앙위원회 위원과 숫자에서 큰 차이가 없었다. 북한의 주요 인물 대다수가 김일성종합대 출신인 것처럼 중등교육기관에서는 만경대혁명학원이 핵심 간부 양성기관임을 보여준다. 만경대혁명학원은 당과 인민무력부의 특별한 지원 아래 당·군·정의 수많은 핵심 간부를 배출하며 주요한 교육기관으로 발전해왔다.

1947년 ‘평양혁명자유가족학원’이라는 명칭으로 창립된 만경대혁명학원은 출범 초기에는 항일투쟁 과정에서 희생당한 항일 빨치산 대원의 자녀들을 위해 설립된 혁명 전사 자녀 양육기관으로서의 성격이 강했다. 북한 당국은 만경대혁명학원 창립을 위해 학원창립준비위원회를 조직해 중국 동북지역 등 국내외에 흩어져 있던 항일 빨치산 유자녀들을 직접 찾아가 모집하고, 정부 차원에서 학원 건물과 시설을 지으면서 교원을 선발, 배치하는 등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1947년 개원식 당시에는 최소한의 건물에 유자녀들을 수용했다가 추후 시설을 보완하는 식으로 건축을 계속해 모양새를 갖춰나갔다.

마침내 1948년 10월 24일 준공식을 했다. 준공식에서는 북한 최초의 김일성 동상 제막식도 함께 진행됐다. 학원 이름은 전쟁 중 ‘만경대혁명자유가족학원’으로 개칭됐고, 1962년까지 ‘만경대혁명가유자녀학원’과 ‘만경대혁명학원’등의 명칭으로 혼용되다가 1962년부터 만경대혁명학원으로 불리게 됐다. 소련, 중국 등 다른 사회주의 국가도 혁명 과정에서 발생한 유자녀들을 보호, 양육하기 위한 교육기관을 운영했으나 만경대혁명학원은 유자녀 양육이라는 기능적 측면 이외에 김일성 정권의 정통성과 김정일 후계체제의 정당성을 상징하는 정치·사회적 통합기제로서의 의미가 강했다.

당·군·정 핵심 간부로 중용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0월, 김일성은 만경대혁명학원을 졸업한 후 소련, 체코, 루마니아 등의 사회주의 국가에 유학을 다녀온 졸업생을 포함한 1~3기 졸업생을 모아 최고사령관의 친위중대를 조직했다. 이들은 김일성을 호위하는 임무를 맡았는데, 김일성은 실제로 이들을 전쟁 현장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이런 조치를 취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 친위중대원에는 연형묵, 리길송, 박송봉, 현철규, 현철해, 김시학, 김환, 홍성률, 우동측 등이 포함됐으며 향후 김정일 체제에서 주요 임무를 맡게 된다.

1953년 7월 정전협정 후 폐허가 된 도시와 파괴된 경제 재건을 위한 군사위원회 회의 결과 친위중대원 상당수가 소련 및 동유럽의 사회주의 국가로 유학을 가게 됐다. 모스크바대학의 연형묵 최영림 김국태 최상욱, 소련 군사아카데미의 김강환 김상호 김두남, 소련 프룬제아카데미의 오극렬 김영춘, 프라하 공대의 김병률, 루마니아 공대의 현철해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귀국 후 1960년대에 북한 각 분야의 기술전문직 분야에서 활약했고, 1980년대 김정일 후계 체제에서는 당중앙위원회 위원과 후보위원, 비서국과 정치국 위원, 당중앙위원회의 군사위원회 위원 등 당·군·정의 핵심 간부로 중용됐다.

만경대혁명학원은 창립 당시에는 주로 항일 빨치산 유자녀들에게 입학 자격을 주다가 6·25 후에는 전쟁 유자녀로 확대했다. 입학 연령에 해당하는 항일 빨치산 유자녀 수가 점차 줄어든 데다 전쟁으로 전사자와 피살자의 유자녀 수가 늘어 이들을 위한 양육기관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북한은 6·25전쟁 후 전사자, 피살자 유자녀들을 ‘애국열사유자녀’로 분류하고 그들 중 특별히 선별된 학생들은 만경대혁명학원에서 양육했다. 입학 자격은 전쟁 유자녀에 이어 대남(對南) 침투요원 유자녀에게도 주어졌는데, 이는 입학 후보 원천이 고갈돼던 만경대혁명학원에 새로운 충원 인력이 되어 항일 빨치산 세력이 그 세력을 확대할 수 있는 결과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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