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호

국회의원 이석기의 혁명 vs ‘부여 간첩’ 김동식의 혁명

같은 목표로 같은 공부(주체사상)한 두 혁명가의 다른 길

  • 이정훈 │편집위원 hoon@donga.com

    입력2013-10-23 09: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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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여 년 교육 받았어도 여전히 서툰 北 혁명가
    • 체계적 교육 안 받았어도 동원력 뛰어난 南 혁명가
    • 정부, 재벌, 시민으로부터 자금 받아내는 좌파
    • 남조선노동당은 민혁당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 군기 빠진 운동원, 생계형 혁명가…한국 혁명은 피곤하다
    • “탈북자를 북한 혁명의 기수로 만들어달라”
    국회의원 이석기의 혁명 vs ‘부여 간첩’ 김동식의 혁명

    9월 5일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수원지법으로 가는 이석기 의원(왼쪽). 오른쪽은 북한에서 체계적인 혁명가 교육을 받고 남파됐던 ‘부여 간첩’ 김동식 씨. 그는 지금의 얼굴을 드러내는 것을 거부했다.

    1995년 충남 부여에서 총격전 끝에 검거된 ‘부여 간첩’ 김동식의 수기 ‘아무도 나를 신고하지 않았다’를 읽으면서 RO(Revolutionary Organization)를 이끈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을 떠올렸다. 동갑(1962년생)인 두 사람은 전혀 다른 과정을 거쳐 주사파 혁명가가 됐다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김동식은 고등중학생 시절 특별 선발돼 금성정치군사대학을 다닌 뒤 혁명가가 됐다. 금성정치군사대학은 북한의 조선노동당이 운영하는 사관학교식 4년제(지금은 5년제) 대학이다. 우리 사관학교는 생도들에게 금연을 요구하지만 여학생은 입교시킨다. 반대로 이 학교는 학생들에게 담배를 제공하나 여학생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 대학의 맥은 강동정치학원에 닿아 있다. 조선노동당은 1949년 김일성이 이끄는 북조선노동당(북로당)과 박헌영을 대표로 한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이 합당해 만들어졌다. 1945년 광복이 되자 서울에서 조선공산당을 만들어 활동하던 박헌영은 이듬해 미군정에 쫓겨 북한으로 도주했다. 그리고 조선공산당을 북로당으로 개칭하고 남한 혁명을 주도할 요원을 양성하기 위해 1947년 평북 강동군에 강동정치학원을 만들었다.

    남한으로 침투한 이 학원 출신들은 산악지대에서 빨치산 무장투쟁을 벌였다. 이 학원 출신으로 가장 유명한 빨치산 대장이 소설 ‘남부군’(이태 저)과 동명의 영화(정지영 감독)에서 핵심 인물로 나온 이현상이다. 이현상은 6·25전쟁 중 가장 규모가 큰 빨치산 부대 ‘남부군’을 이끌다 사살됐다.

    강동학원은 1955년 박헌영이 처형되면서 사라지고, 북로당이 중심이 된 조선노동당이 만든 금강정치학원이 그 뒤를 이었다(1957). 금강정치학원은 금성정치군사대학이 됐다가 지금은 김정일정치군사대학으로 개칭됐다(북한에서 금성이나 샛별은 주로 김정일을 가리킨다).



    북한의 대남침투는 당(조선노동당)과 군(조선인민군)이 주도하는 것으로 대별된다. 금성정치군사대학은 당에서 운영하는 대남침투 요원 양성소였다. 군에서는 정찰총국이 요원을 양성하고 관리한다. 당은 남조선 혁명이라는 공산혁명을 위해, 군은 정보수집과 침투작전을 위해 요원을 남파시킨다.

    침투조 대학의 신세대 공작원

    당이 관리하는 대남침투 요원은 장기간 한국에 거주하며 공산혁명에 동조할 사람을 포섭하는 ‘공작원’과 한국군 방어망을 뚫고 공작원을 은밀히 침투시켰다가 복귀시키는 일을 하는 ‘침투조’로 양분된다. 금성정치군사대학은 침투조를 양성한다. 침투조는 한국군이 쫙 깔린 위험지역을 통과해야 하므로 특수부대원 이상의 강인한 체력과 사격술, 반잠수정 조종술 등을 갖춰야 한다. 이 때문에 젊은 남성들만 선발해 교육해왔다.

    공작원들은 한국에서 처음 만난 사람을 포섭해야 하니 머리가 좋고 임기응변 능력도 뛰어나야 한다. 그런 일은 젊은 남성보다는 중년 남성이나 여성이 더 잘할 수 있다. 공작원들은 유연하고 이념에 투철해야 하기에 규율화한 사관학교식 집체교육을 받지 않는다. 남녀와 연령을 불문하고 자질이 있어 보이는 사람을 뽑아 밀봉교육으로 길러낸다.

    밀봉교육은 과외선생을 입주시켜 일대 일로 가르치게 하는 것과 비슷하다. 교육 장소는 펜션과 비슷한 초대소. 우리의 펜션은 풍광 좋은 곳에 여러 채가 몰려 있지만, 초대소는 산속에 1~2km 떨어져 한 채씩 있다. 공작원들은 보통 초대소에서 2주간 기숙하다 주말에 가족을 만나러 외박하는 생활을 한다.

    초대소에는 여성 요리사와 도우미 노릇을 하는 여성 접대원이 상주한다. 요리사는 대개 남편과 헤어진 여성들이고 접대원은 미혼 여성이다. 남성 공작원과 접대원 사이에 애정이 싹트는 경우도 있으나 흔하진 않다고 한다. 이 얘기를 들려준 김동식 씨는 “북한 공작원들은 금욕할 것을 요구받는다”라며 “사망한 공작원을 화장하면 사리가 꽤 많이 나올 것”이라고 농담했다.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민족해방(NL, 주사파) 계열의 운동권도 처음에는 금욕을 강조했다. ‘존경받을 행동을 해야 혁명가가 될 수 있다’는 ‘품성론’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 이것을 무너뜨렸다. 혁명가의 길을 가기로 했다면 단결을 위해 남녀는 하나가 되고, 혁명을 위해선 거짓말을 해도 된다는 ‘혁명 지상주의’로 흐른 탓이다.

    김 씨가 대학에 들어간 1981년 무렵은 박헌영을 따라 월북한 남한 출신 공작원들이 나이가 많아져 대거 은퇴하던 때였다. 그러자 당은 서울과 비슷한 말을 쓰는 황해도와 강원도의 고등중학 출신을 선발해 공작원으로 키우는 방안을 택했다. 신세대 공작원을 양성해 세대교체에 들어간 것. 김 씨는 황해남도 용연 출신이다. 김정일은 새로 양성할 공작원들도 군사적인 능력을 갖춰야 한다고 지시했다. 그래서 이들도 이 대학에 입학해 침투조 후보생들과 똑같이 집체교육을 받게 됐다.

    국회의원 이석기의 혁명 vs ‘부여 간첩’ 김동식의 혁명

    김동식 씨는 1995년 2차침투 때 검거돼 전향했다. 전향 후 기자회견을 위해 나왔을 때의 사진이다.

    이 대학을 마쳤다고 해서 모두가 공작원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남한으로 잠입할 공작원을 관리하는 조선노동당 연락부(지금은 대외연락부)의 정밀한 면접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면접에서는 성적뿐 아니라 적지(한국)에서 잘 활동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는지 등을 종합 평가한다. 김 씨는 합격했고 조선노동당의 정당원이 됐다.

    그 후 초대소에 기숙하며 공작원 교육을 받게 됐는데, 그때부터는 문서에 사회성분을 ‘혁명가’로 적었다. 사회성분은 조선노동당에 입당할 때의 본인 직업을 묻는 것이다. 이로써 직업이 혁명가가 된 김 씨는 남한에서 혁명활동을 할 날을 기다렸다. 그런데 그 기간이 매우 길었다.

    ‘제대’가 무서운 생계형 혁명가

    김 씨는 1990년 처음 한국에 침투했으니 5년간 혁명가 교육을 받은 셈이다. 그때껏 공산주의와 주체사상에 대한 수업을 반복했기 때문에 혁명가보다는 ‘피교육생’에 더 가까웠는지도 모른다. 한국으로 침투했다가 돌아온 다음에도 이런 교육을 다시 받았으니 더욱 재미가없어진다. 그때부터 유일한 낙은 외박이 된다. 갑자기 외박을 불허하면 혁명가들은 폭발해버린다. 결혼한 혁명가들은 외박 불허에 특히 민감하다.

    당은 사고친 혁명가를 해임하는데, 이를 북한에서는 ‘제대시킨다’고 한다. 혁명가들은 대학 입학 때부터 치면 10여 년 외길을 걸어왔기에 제대는 치명타가 된다. 당장 먹을거리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되기 때문이다. 경험 많은 공작원도 제대만은 당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래서 먹고살기 위한 ‘생계형 혁명가’가 된다. 달리 말하면 ‘봉급쟁이 혁명가’가 되는 것이다.

    이석기를 비롯한 주사파들은 김 씨처럼 커리큘럼화한 혁명가 교육을 받지 않았다. 대개는 대학에 입학해 ‘언더’라고 하는 운동권 서클에 들어가면서 그 세계를 처음 접했다. 그때 읽는 것이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 같은 운동권 서적이다. 다음 단계에선 ‘북한 원전’이라는 것을 읽고 토론한다. 북한 원전은 선배들이 북한 ‘구국의 소리’ 방송 등을 듣고 정리한 것이라, ‘프린트’의 약칭인 ‘피(P)’로 불리기도 했다.

    한국에는 혁명가에게 봉급을 주는 제도가 없다. 혁명가라는 직업도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학교를 떠난 뒤에도 혁명가의 길을 가려면 입에 풀칠하는 문제는 해결해놓아야 한다. RO 구성원들은 수원시, 하남시의 산하기관 책임자나 용역업체 대표를 하면서 생계를 해결하고 활동자금을 마련했다.

    이러한 조직은 대충 관리만 하고 있어도 돌아가니 열심히 일할 필요가 없다. 몸이 자유로우니 본업인 혁명에 집중할 수가 있다. 이들이 이런 조직을 맡게 된 것은 대부분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였다. 지자체도 넓은 의미에서는 정부에 속한다. 혁명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정부를 뒤집는 ‘전복(顚覆)’인데, 정부기구가 자신을 뒤엎으려는 조직에 자금을 제공해온 꼴이다.

    북한 혁명가와 달리 한국의 혁명 조직은 자생력이 있다. 이들은 한국 시스템에 기생(寄生)하는 데 성공했다. 문제는 이렇게 기생하는 좌파 단체를 공안기관이 다 밝혀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정체는 파악했지만 불법을 했다는 증거를 잡지 못해 방관하는 경우가 더 많다.

    RO도 국가정보원 경기지부가 증거를 잡기 위해 오랫동안 지켜봐오던 조직이다. 그러다 지난 5월 모임에서야 그들이 내란 음모에 해당하는 논의를 하는 것을 포착해, 이석기 등을 검거할 수 있었다.

    정부, 재벌이 좌파 자금원?

    좌파 단체 조직원들은 공안기관이 추적한다는 것을 잘 알기에 증거로 잡힐 만한 행동은 거의 하지 않는다. 그들은 사상의 자유가 보장된 대한민국에서 법의 보호를 받는다. 한국의 체제는 이를 뒤집으려는 혁명가들을 보호하게 된 셈이다.

    현재 안전행정부와 지자체는 각각 연간 150억 원 정도를 비영리 민간단체에 지원하고 있다. 공안기관은 이 지원을 받는 민간단체 가운데 좌파 단체가 적지 않다고 본다. 그러나 그들이 법을 어긴 구체적인 증거를 잡지 못해 지원을 중단시키지 못한다.

    기업도 만만찮게 좌파운동원을 지원한다. 직접 지원과 간접 지원이 있다. 재벌이 운영하는 재단을 통한 지원이 직접 지원이다. 재벌 재단은 왜 좌파 단체를 지원할까. 첫째 이유로는 좌파 단체가 문화예술단체로 위장하고 있는 것이 꼽힌다. 재벌 재단은 이런 사정을 알면서도 예술 발전을 명분으로 지원한다. 이 때문에 ‘재벌들이 보험을 든 게 아니냐’는 지적이 있다. “재벌기업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민주화에 동참하지 못했다는 정신적 부채를 갖고 있어 쉽게 지원을 결정한다”는 시각도 있다.

    간접적인 지원으로는 노동조합비가 꼽힌다. 주사파가 노조의 상근자가 되면 그는 일터에서 일할 때와 같은 급료를 받을 수 있다. 생계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다. 그리고 매달 노조원 급료에서 갹출하는 노조비를 노조 차원에서 집행한다. 시위를 준비할 때는 노조원들을 동원할 수도 있다. 따라서 노조는 좌파가 웅거할 수 있는 최고의 요지가 된다. 노조 상근요원의 급료와 노조비 갹출액도 기업에서 나오는 것이니, 기업은 좌파의 돈줄인 셈이다.

    주사파는 시민단체에도 다수 들어가 있다. 이 단체들은 명분 있는 모금을 해 상당액을 주사파 조직에 제공한다. 대표적인 것이 현재 유력 정치인으로 활동하는 B씨가 만든 재단이다. 이 재단은 좋은 일을 많이 한 것으로 알려져, 선남선녀들의 기부가 끊이지 않는다. 운동권은 예술단체에도 많이 들어가 있는데, 이들은 예술단체에 지원되는 문예기금을 활용할 수 있다.

    김 씨처럼 북한이 키워낸 혁명가들은 이러한 점을 따라갈 수가 없다. 적구화(敵區化·한국화) 교육을 아무리 많이 받아도 그들은 한국에서의 삶에 서툴 수밖에 없다.

    1992년 남조선노동당 사건이 불거졌다. 남조선노동당은 조선노동당이 10여 년 전에 침투시킨 할머니 공작원 이선실이 만든 것이었다. 10년 이상 암약한 할머니 공작원이 지하당을 만들었다는 사실에 많은 이가 깜짝 놀랐지만 성과만 놓고 본다면 남조선노동당은 이 땅에서 자생한 혁명조직을 따라가지 못했다.

    1990년대는 크고 작은 시위가 많았지만 남조선노동당은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 대신 서울대 출신의 주사파 김영환이 중심이 돼 만든 민혁당(민족민주혁명당)이 놀라운 동원력을 과시했다. 구국학생연맹으로 시작한 민혁당은 순식간에 전국 조직을 만들어 대학가와 노동계 시위를 주도했다. 이 때문에 북한은 남조선노동당을 거치지 안고 직접 민혁당과 연계를 시도했다(1991). 김영환은 이에 응해 강화도에서 반잠수정을 타고 북한에 가 김일성을 만나고 북한의 공산이론가들과 토론하고 돌아왔다.

    1992년 국정원 수사로 남조선노동당의 정체가 한순간에 드러나고 거의 뿌리가 뽑혔다. 하지만 민혁당의 하부 세력은 김영환이 전향해 줄기차게 와해 노력을 했음에도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1998년 발각된 영남위원회, 2006년 드러난 일심회, 2011년 밝혀진 왕재산, 그리고 올해 검거된 RO는 김영환이 와해시킨 민혁당 하부조직이 살아남아 이어져온 것이다.

    북한이 만든 혁명조직은 국정원의 수사가 시작되면 거의 와해되지만, 한국에서 자생한 좌파조직은 잘라도 계속 재생되는 문어다리처럼 생명력을 이어나간다. 그들은 유죄선고를 받아도 형을 마친 후 출소하면서 범법을 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활동을 지속한다. 그러고는 법망에 걸려든 적이 없는 숨은 인물을 전면에 내세운다. 때로는 이들이 대중으로부터 인기를 얻어 정치인이 되기도 한다.

    北 조직보다 강력한 南 주사파

    국회의원 이석기의 혁명 vs ‘부여 간첩’ 김동식의 혁명

    이석기 의원의 RO사건을 수사한 국정원을 규탄하는 통진당 시위대 앞에 한 보수단체 회원이 엎드려 반대 시위를 벌이고 있다(8월 31일). 지금 한국은 치열한 사상전을 겪고 있다.

    그다음부터는 공안기관과 숨바꼭질 을 한다. 그때마다 그들이 휘두르는 ‘전가의 보도’가 민주주의다. 공안기관이 좌파 단체의 행동을 지켜보는 것을 ‘사찰(査察)’이라고 한다. 공안기관의 감시가 강화되면 이들은 ‘사찰’ 대신 음침한 느낌이 드는 ‘공작’이라는 용어를 동원한다. ‘공안기관의 정치공작을 중단하라’고 외치는 것. 이렇게 되면 그들은 민주투사가 돼 선량한 국민의 지원도 받을 수 있다.

    이 땅에서 생긴 혁명조직은 한국의 상황을 이용해 자생력과 동원력을 갖춰나간 데 반해 북한이 파견한 혁명가들은 위축된 모습을 보였다. 김동식 씨는 1990년 1차 침투 때 이선실을 만나 같이 지내다 대동 복귀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이 과정에서 ‘전설의 공작원’을 지켜볼 수 있었는데 매우 실망스러웠다고 한다.

    “이선실은 장기간 한국에 있었다는 것이 거의 유일한 가치였다. 혁명보다는 지하당을 유지하는 데만 집중하는 편협함을 보였다. 자기 사람에 대해서는 무조건 좋은 평가를 하려는 것이 대표적인 증상이다. 이는 오랫동안 활동한 북한 공작원들에게서 보편적으로 드러나는 증세다. 혁명은 제쳐놓고 자신의 성과만 유지하고 그것으로만 평가받으려는 공작원이 많았던 것이 남조선 혁명 공작 실패를 초래했다.”

    이런 사정 때문에 북한은 자생력과 동원력을 갖춘 한국의 혁명가 조직을 끌어들이려 한다. 민혁당을 만든 김영환을 1991년 북한으로 초청한 것이 그런 사례다. 그런데 한국의 공안기관과 군 정보기관은 눈에 불을 켜고 북한의 움직임을 살피고 있어 한국의 혁명가를 잘못 접촉했다간 북한 공작원은 물론 한국 혁명가까지 국가보안법에 걸려들게 된다. 한국의 자칭 혁명가들도 이런 점을 잘 알고 있어 북한이 보낸 공작원과 연결되는 것을 꺼린다.

    북한도 북한대로 고민이 있다. 북한은 20대 혁명가는 믿지 않는다. 경험이 적은 사람은 호된 일을 당하면 금방 변절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검거돼 유죄선고를 받았음에도 석방 후 한길을 가는 사람은 그래도 믿을 만하다고 본다. 이러한 사람은 공안 사건이 일어날 때 언론에 보도되므로 북한은 그에 대한 신원을 쉽게 파악할 수 있어 포섭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 그러나 그는 한국 공안기관의 상시 감시를 받고있어 접촉이 용이치 않다.

    김동식 씨는 1, 2차 침투 때 자기 신분을 밝히고 이러한 혁명가들을 만났다. 그러나 그들은 김 씨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김 씨를 국정원 끄나풀로 의심했을 수도 있고 북한 조직과의 회합을 금지한 국가보안법 위반을 피하려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은 북한에서 왔다고 한 김 씨를 신고하지도 않았다. 공안기관이 활동하는 한국이라는 공간이 양쪽 조직원 사이를 불편하게 만든 것으로 보인다.

    3국에서 연계

    이 때문에 양측은 한국 공안기관이 추적하기 어려운 3국에서 연계를 시도한다. 이는 일심회 사건 이후 계속 발견되는 현상인데, 3국은 주로 중국이다. 인천공항에서 베이징 서우두 공항까지 가는 시간은 서울 김포공항에서 부산 김해공항으로 가는 시간과 비슷하다. 전화와 인터넷 등 통신수단의 발달로 3국을 경유한 대화를 할 수 있으니, 접속 장소를 잡는 것은 일도 아니다.

    그때부터 본격화한 것이 남한 혁명이다. 6·25전쟁을 통해 북한은 군사력으로는 남한을 흡수할 수 없음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군사적인 침공으로 통일을 시도하는 것은 유엔이 금지하는 침략전쟁이라 금방 국제적인 반격을 당하게 된다. 미국이 한국을 지원하는 정도의 반격이 아니라, 유엔이 인정한 반격을 받게 돼 북한이 무너질 수도 있다. 1990년 쿠웨이트를 점령한 이라크는 유엔이 승인한 다국적군의 공격을 받고 패퇴했다.

    따라서 북한에 가능한 현실적 통일안은, 먼저 한국에서 봉기를 일으켜 한국 정부를 전복하고 새로운 정부를 세우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게 새로 들어선 정부가 북한과의 합병을 선언하면 외견상 침략전쟁을 치르지 않고 한국 국민이 자발적으로 선택한 것이기에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개입하기 어려워진다.

    베트남과 독일이 이런 식으로 통일한 대표적 사례다. 베트남에서는 베트콩이 무장봉기를 일으켜 남베트남(월남) 정부를 전복하고 새 정부를 만들어 북베트남과 합병했다. 독일에선 동독 주민들이 시위를 일으켜 동독 공산정부를 붕괴시킨 후 민주정부를 만들었다가 이 정부가 서독과 통합을 결의해 평화통일을 이뤘다. 북한은 물론 한국의 혁명단체들도 한국이 이런 식으로 통일하기를 원한다.

    그런데 한국에서 동독과 같은 민주화 시위는 일어나기 어려우니, 남베트남의 베트콩처럼 무장봉기를 일으켜야 한다는 의견으로 기울어졌다. 무장봉기로 한국의 중요시설을 파괴해야 정부 전복을 앞당길 수 있다. 무장을 해야 시위의 효과도 커지고 반대세력들은 목소리를 높이지 못하게 된다. 무장봉기 강조는 왕재산 사건 이후 뚜렷해지고 있다.

    인천을 무대로 한 왕재산은 유사시 인천을 혁명투쟁의 전략적 거점으로 만들기 위해 인천시청, 남동방송국, 남인천방송국, 서해방송국, 인천항, 포탄을 생산하는 (주)한화 인천공장, 육군 17사단, 육군 9공수여단과 경찰서 등을 타격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한화 인천공장을 예로 들면, 왕재산 조직원인 이모 씨와 황모 씨를 2012년까지 안착시켜(직원으로 침투시켜 근로자를 포섭 장악한다는 뜻인 듯) 결정적인 시기에 폭파하기로 했다.

    지난 4월 북한은 무수단 미사일 발사 트럭을 끌고 다니면서 전쟁 위기를 고조시켰다. 그후 일본의 요미우리신문은 3월 25일 허종만 조총련 의장이 간부회의에서 “전면전쟁에 돌입할 것을 명령했다. 조국방위를 위해 투쟁을 준비하라”는 김정은의 지시를 전달했다고 보도했다. 이는 북한이 조총련에 전쟁 지시를 내렸다는 의미다.

    군기 빠진 RO

    국정원은 이런 지시가 RO에까지 내려갔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북한이 전쟁 분위기를 조성한 직후 RO가 무장투쟁을 논의한 것은 분명하다고 전한다. 국정원은 5월 12일 RO 회원들이 서울 마포구 합정동 마리스타교육수사회 강당에서 가진 모임에서 그러한 논의를 하는 것을 비밀리에 촬영했다.

    그런데 이 모임은, 이틀 전인 5월 10일 모임 후 다시 연 것이었다. 이석기는 5월 8일 RO 조직원들에게, “5월 10일 밤 경기도 광주시의 곤지암청소년수련원에서 모임을 갖는다”고 지시했다. 그리하여 5월 10일 130여 명이 모였는데, 주요 간부인 이 씨는 선약을 이유로 늦게 오고, 다른 간부인 김 씨는 술 냄새를 풍기며 나타났다. 여성 회원은 아이를 데리고 왔다. 그러자 이석기는 김 씨에게 “자네 뭐하는 거야, 지금!”이라고 소리쳤고, 아이를 데리고 온 여성을 향해선 “전쟁터에 아이를 데리고 가는 사람은 없으니 다음에는 아이도 안고 오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흥분한 듯 “또 내가…, 소집령이 떨어지면… 정말 바람처럼 순식간에 오시라”고 강조한 후, 12일 합정동에서 다시 모인다면서 이날 모임을 해산시켰다. 이 때문에 12일의 합정동 모임은 긴장된 가운데 열려 유류저장고와 철도, 통신시설 등을 타격하는 것과 사제폭탄 제조 등에 대해 논의했다. 이 땅의 혁명가들도 이석기를 화나게 할 만큼 나태해지고 있는 것이다.

    김동식 씨는 이렇게 말했다.

    “북한은 SKY(서울대 고려대 연세대)라는 명문대 소속 운동권 학생을 포섭하지 않는다. 그들은 경험이 일천해 공안당국에 검거되면 얼마든지 배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신 투옥 경험이 있는 중년의 운동권을 포섭하려고 하는데 그들은 한국 공안당국의 감시를 받고 있다. 그리하여 나온 결론이 ‘총성 없는 혁명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무장봉기를 해야 혁명을 이룰 수 있기에 무장투쟁에 대한 논의가 늘어났다.

    그러나 한국 좌파 단체의 힘만으론 무장봉기가 어렵다고 결론을 내린 것으로 안다. 남조선 혁명을 이루려면 5·16을 일으킨 박정희처럼 군대를 끌고 나와야 한다고 보게 된 것이다. 그런데 북한은 한국군 간부들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다. 한국군 간부들은 장성이 된 다음에야 언론에 이름이 노출된다. 북한은 정보가 없어 미래의 한국군 지도자를 일찌감치 포섭하는 시도를 하지 못하고 있다.”

    김 씨의 말을 정리하면 북한은 한국 혁명가들이 떠드는 무장봉기로는 남조선 혁명을 이룰 수 없고, 한국 군부가 쿠데타 같은 봉기를 일으켜야 가능하다고 보는데, 아직 한국 군부에는 뚫고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군 침투 못하는 북한

    그런 가운데 국정원을 비롯한 공안기관이 운동권 조직을 파고들어가고 있다. RO 사건을 수사한 것은 국정원 본청이 아니라 경기지부였다. 경기지부의 수사력은 본청에 비할 바가 아닌데도 RO 조직원을 포섭해 동영상 촬영을 했다.

    이는 한국 혁명조직들이 허점투성이임을 보여준다. 국정원이 본청이 아닌 경기지부 차원에서 RO를 추적한 것은 본청은 더욱 큰 다른 조직을 상시 감시하고 있다는 뜻이다. 국정원의 다른 지부와 경찰청 보안팀, 기무사 대공팀들도 본청과 지부별로 하나씩 맡아 상시적인 추적을 한다. 이런 대공 수사력 때문에 광우병 촛불시위 때처럼 국민적인 참여가 따르지 않으면 좌파들은 운동력을 잃고 만다. 북한과 한국의 혁명조직은 이 벽을 넘지 못해 고민하고 있다.

    이러한 벽을 넘어 한국 혁명을 이룰 경우 이들이 만들고자 하는 사회는 어떤 것일까. 북한을 규율하는 것은 조선노동강 강령인데, 남로당과 북로당을 통합해 조선로동당을 만든 1949년 8월 29일 제정된 이래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이 강령은 ‘민주주의 조선’ ‘자주독립국가’ ‘인민공화국’ 건설을 강조한다. 민주주의는 왕정을 유지하는 나라도 주장하는 것이니 어떤 민주주의인지 따져볼 필요가 없다.

    조선노동당 강령은 인민공화국 건설을 강조하고 있으니 북한이 지향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인정하는 인민민주주의다.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이 ‘자주’다. 이석기가 속한 통합진보당도 강령을 갖고 있는데 이 강령은 ‘자주적 민주정부’를 세울 것을 강조한다. 다음은 김동식 씨의 말이다.

    “남북한은 모두 민주주의 사회를 만들겠다고 하는데 양쪽이 말하는 민주주의는 차이가 있다. 북한의 민주주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허용하는 인민민주주의이고, 한국의 민주주의는 시장경제를 인정하는 자유민주주의다. 이는 계획경제를 하자는 것과 자본주의 경제를 하자는 차이인데, 어느 쪽이 부유하고 인권을 더 보장하게 됐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다음으로 주목할 것은 ‘자주’다. 북한에서 말하는 자주는 ‘미군 나가라’다. 통진당의 자주도 유사한 의미로 본다. 통진당 등 주사파가 한국 혁명에 성공하면 제일 먼저 주한미군을 내보내고 한미동맹을 해체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북한과 통일을 모색할 가능성이 높다.”

    간첩을 직파해 한국 혁명을 주도할 지하당을 만드는 북한의 전통적인 공작은 힘을 잃은 것으로 보인다. 대신 한국에서 생겨난 혁명조직을 이용하고 그 조직을 통제해 ‘편승’하려고 한다. 남이 만들어준 잔치에서 주인공 노릇을 하겠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한국에서는 드러나거나 드러나지 않은 자생적 혁명조직과 국정원 대공수사팀 등 공안 조직이 싸우는 양상이 벌어지고 있다. 대한민국은 심각한 사상(思想)전쟁, 내전 상태에 있는 것이다.

    “뱀 대가리를 잡아야”

    이 싸움에서 공안당국은 조금씩 우세해지고 있다. 그러나 싸움의 무대가 한국이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선의의 피해자를 만들 수 있다. 그런 피해자가 발생하면 좌파 단체들은 민주주의가 침해당했다며 새로운 싸움을 일으켜 본질을 흐리고 문제를 희석시킨다.

    이러한 악순환을 끊어내려면 싸움의 성격과 무대를 바꿔야 한다. 쉽게 말하면 혁명의 본산지부터 부수는 것이다. 뱀을 잡으려면 뱀 몸통을 때리고 찌를 게 아니라 뱀 대가리를 잡아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다시 김동식 씨의 말이다.

    “북한과 좌파 단체의 한국 혁명을 막는 데만 매진할 것이 아니라 북한 혁명을 일으키는 데 더 집중해야 한다. 역으로 북한에서 자유민주주의 혁명이 일어나게 하자는 것이다. 동독 주민들이 서독 TV를 볼 수 있고 서독에 있는 친척도 방문할 수 있었기에 서독은 평화통일을 이뤘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이들은, 북한 주민이 한국 TV를 못 보고 한국 친척도 방문할 수 없어 한국은 평화통일을 하기 어렵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

    이러한 판단은 북한을 독일식, 한국식으로만 보기에 나오는 것이다. 북한은 북한식으로 봐야 허점이 제대로 보인다. 북한의 허점은 우리 같은 새터민들이 가장 잘 안다. 남북한 간의 대결이 첨예하던 시절 북한은 박헌영을 따라 월북한 남로당원들을 교육시켜 한국으로 침투시켰다. 그러한 남로당원과 같은 처지에 있는 게 나와 같은 탈북자들이다. 우리는 북한에서 속아 산 것에 대한 울분이 있다. 북한에 있는 가족과 친지들을 해방시키려는 의지도 있다.”

    민간기금으로 北 혁명 시도

    김 씨는 “왜 한국은 탈북자들에게 정착만 요구하고, 통일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통일에 기여할 수 있는 기회를 주면 탈북자들은 잘할 수 있는 일을 하게 되므로 한국 사회 부적응 문제도 크게 줄어들 것이라고도 지적했다. 북한에서 탈북자가 나오는 것은, 거꾸로 말하면 북한으로 침투할 수 있는 루트가 많다는 뜻인데, 그 길을 통해 북한에 들어가 비교적 자유롭게 움직이며 동조자를 포섭할 수 있는 것은 탈북자라고 강조했다. 그는 북한 혁명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내놓았다.

    “한국은 정권이 바뀌면 국정원의 정책 방향도 바뀌지 않느냐. 그런 상황에서는 국정원이 일관성 있는 대북정책을 펼치기 어렵다. 국정원의 정책 기조가 바뀌더라도 북한 혁명을 위한 시도가 일관성을 가지려면 독립된 조직이 있어야 한다. 조직을 움직이는 것은 결국 돈이므로 북한을 민주화할 기금을 만들어야 한다. 이 기금은 북한 인권과 민주화를 위한 것이므로 시민은 물론 재벌들도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기금이 마련되면 북한을 민주화할 민간기구를 만들고, 탈북자들이 선봉에 선다. 탈북자들은 북한을 잘 알므로 한국 주사파들이 자생력을 갖춰 활동하듯 탈북자들도 북한 안에서 자생하는 혁명조직을 만들 수 있다. 정부 정책에 영향을 받지 않는 민간기구를 만들어 북한 혁명을 완수하는 것이 이 땅의 혁명조직도 한꺼번에 무너뜨리는 길이다.”

    10월 14일 열린 이석기 의원 공판정 밖에서는 통진당과 RO 관계자, 보수단체 인사들이 모여 각자의 주장을 외쳤다. 이 의원은 재판을 통해서도 그가 생각하는 혁명을 전파하려 할지 모른다.

    김동식 씨의 주장처럼 그에 대응해 북한 혁명을 시도해보는 것이 어떨까. 한국 혁명이라는 같은 목표를 갖고 같은 주사 이론을 공부한 두 혁명가는 가는 방향이 180도 달라졌다. 혁명을 먼저 완수하는 것은 어느 쪽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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