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4월호

‘민평련’과 새정치연합 사전 조율 ‘친노 견제’ 권노갑의 막후 중재

대선 판도 바꾼 ‘깜짝쇼’ 내막

  • 송국건 │영남일보 서울취재본부장 song@yeongnam.com

    입력2014-03-20 09: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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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주당 ‘수도권 약세’와 새정치연합 ‘인물난’ 공감
    • 안철수, 최선 대신 차선으로 대권 근접
    • 새누리당, 친박 핵심 5인이 신당 출범 대비
    ‘민평련’과 새정치연합 사전 조율 ‘친노 견제’ 권노갑의 막후 중재

    3월 5일 국회에서 열린 민주당과 새정치연합 양측 지도부의 첫 연석회의에서 김한길 민주당 대표가 안철수 새정치연합 중앙운영위원장에게 손을 잡자고 말하고 있다. 왼쪽부터 새정치연합 윤여준 의장, 민주당 신경민 최고위원, 안 위원장, 김 대표, 민주당 전병헌 원내대표, 새정치연합 박호군 공동위원장.

    3월 2일 일요일 오전 10시 국회 사랑재. 김한길 민주당 대표와 안철수 새정치연합 중앙운영위원장의 공동 기자회견이 열렸다. 두 사람은 “거짓의 정치를 심판하고 약속의 정치를 정초하기 위해 양측의 힘을 합쳐 신당을 창당하기로 했다”고 선언했다. 물론 기초단위 선거 무공천 계획도 밝혔지만 매머드급 신당 창당 발표에 묻혔다.

    6시간 30분 만의 전격 합의?

    현장에 있던 민주당 당직자는 “충격 받았다. 환영한다”고 했다. 새정치연합 측 인사는 “당혹스럽다”고 했다. 그만큼 김 대표와 안 위원장의 신당 창당 발표는 핵심 참모들조차 모르게 극비리에 추진됐다.

    2월 28일 오후 4시, 국회 본회의 도중 김 대표가 느닷없이 민주당 최고위원들을 여의도의 한 호텔로 불러 모았다. 그 자리에서 “2012년 대통령선거 때 문재인 후보가 약속한 대로 기초선거에서는 공천을 하지 않기로 하자”고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최고위원들도 반발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그 직후 김 대표는 안 위원장에게 전화를 걸어 새정치연합이 먼저 선언한 기초단위 선거 무공천에 민주당도 동참하겠다고 밝히고 회동을 제안했다.

    두 사람은 다음 날인 3월 1일 오전 만나 2시간 30분가량 이야기를 나눴다. 통합을 위한 일종의 탐색전이었다. 이어 같은 날 저녁 다시 만난 두 사람은 4시간가량의 숙의 끝에 2일 새벽 0시 40분쯤 ‘제3지대 신당’ 창당을 통한 두 세력의 통합에 전격 합의했다. 김 대표는 오전 9시 긴급최고위원회의를 소집해 신당 창당 안건을 상정해 만장일치로 의결했다. 그 시각 안 위원장은 극히 일부의 핵심 참모들에게만 김 대표와의 합의 내용을 알렸다. 두 사람은 한 시간 뒤 밝은 표정으로 사랑재에서 공동 기자회견을 열어 깜짝 발표를 했다.



    이 대목에서 여의도 정가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은 일제히 의문을 제기했다. 야권의 지형을 바꾸는 매우 중요한 일을 두 사람이 두 차례에 걸친 6시간 30분 동안의 만남에서 전격 결정했을까? 필자의 확인 요청에 두 사람의 핵심 측근들조차 “나도 기자회견 자리에서 들었다”거나 “들려줄 말이 없다”고 이구동성이었다.

    하지만 통합을 위한 막후 조율 과정은 분명히 있었다. 김 대표와 안 위원장이 불과 이틀 만에 의기투합해 전격적으로 합의를 이뤘다는 건 정치 현실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지금도 야합(野合) 논란이 있는 1990년 3당 합당은 민주당과 새정치연합의 통합을 보는 데 유효한 잣대를 제공한다. 일반 국민의 눈에 비친 3당 합당은 1990년 1월 22일 하루 종일 함박눈이 쏟아지는 가운데 민주정의당 총재인 노태우 대통령,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 김종필 신민주공화당 총재 세 사람이 청와대에 모여 거의 9시간 넘는 담판을 거쳐 극적 합의를 이룬 것으로 돼 있다.

    하지만 3당 합당의 실무 주역인 박철언 전 의원(당시 정무장관)의 회고록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에 따르면 3당 합당을 위한 본격적인 접촉과 지루한 밀고 당기기는 이미 1988년 여름부터 시작됐다. 즉 1년 반이 넘는 기간에 분위기를 조성하고 서로의 이해타산을 맞추며 통합이라는 최종 목표를 향해 거의 쉼 없이 움직였던 셈이다.

    취재 결과, 이번에도 야권 신당 창당 선언이 있기까지 김 대표와 안 위원장이 꽤 오래전부터 막후에서 통합 문제를 진지하게 논의해왔다는 정황이 속속 포착됐다. 연결고리는 6·4 지방선거였다.

    김 대표는 야권이 갈라지면 서울시장, 인천시장, 경기도지사선거를 비롯한 수도권에서 새누리당을 이기기 어렵다는 판단을 했다. 민주당이 참패할 경우 ‘책임론’이 일어 당의 주도권을 다시 ‘친노(친노무현)’ 세력에게 내줘야 한다는 절박감도 생겼다.

    안 위원장은 지방선거에 내세울 마땅한 인물들을 찾지 못해 고심 중이었다. ‘새 정치’를 표방하며 세력화를 시도했지만 현실적 한계를 절감했다. 차라리 호랑이굴에 들어가 호랑이를 몰아내고 기존의 정치 인프라를 활용해 새 정치를 실천하면 된다는 생각을 했다.

    두 사람의 이해관계는 맞아떨어졌다. 문제는 안 위원장에게 줄 명분이었다. ‘새 정치’가 존재의 이유인 안 위원장이 아무런 명분도 없이 민주당과 통합하면 ‘구태 정치’ ‘정치 야합’이란 비판을 받을 게 뻔한 까닭이다. 그런데 명분을 찾았다. 기초선거 정당공천 배제였다.

    안 위원장은 공동 기자회견에서 신당 창당 배경에 대해 “민주당이 지향하는 혁신안을 수용했다”는 취지로 말했다. 그는 “김 대표께서 정치적 불리함을 감수하고 무공천이라는 결단을 내렸다. 이는 약속을 지키는 정치를 실제로 국민에게 보여준 커다란 첫걸음이다. 이번을 계기로 신당에서는 계속적인 정치혁신, 국민을 위한 통합정치를 하겠다는 약속”이라고 했다.

    권노갑 상임고문의 개입

    김 대표의 비서실장인 김관영 의원도 필자와의 통화에서 “통합의 가장 큰 계기는 기초선거 공천 배제였다”고 밝혔다. 김 의원과의 문답이다.

    ▼ 통합을 위한 논의가 그전부터 진행됐나요.

    “‘민평련’에 계신 분들이 안철수 위원장, (새정치연합 소통위원장인) 송호창 의원과 만나 얘기를 나누는 등 숙성 기간이 있었죠. 그전부터 안 위원장 쪽에서 사인이 왔고, 여러 채널을 통해 교감이 이뤄졌어요.”

    민평련(민주평화국민연대)은 고(故) 김근태 상임고문을 따르는 민주당 의원 모임이다. 최규성 의원이 회장이고 우원식 최고위원, 설훈 의원 등 20여 명이 활동한다. 이들이 지난해 12월 새정치연합의 안 위원장과 송 의원을 만나 ‘통합’ 얘기를 처음 꺼낸 것으로 알려진다.

    ▼ 그 사이 김 대표와 안 위원장을 연결하는 별도의 메신저가 있었나요.

    “주로 우원식 최고위원이 송 의원과 접촉했고, 김 대표가 안 위원장을 직접 만나기도 했지요. 최종 결정은 두 분이 직접 하셨어요.”

    ▼ 3월 2일 통합이 전격 발표된 배경은 무엇인가요.

    “2월 28일 최고위원회의에서 기초선거 무공천을 결정한 뒤 김 대표께서 통합을 위한 분위기가 어느 정도 무르익었다고 판단하신 거죠. 명분이 생긴 겁니다.”

    양측 사이에 통합을 이루기 위한 물밑 접촉이 3개월가량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한동안 논의가 진전되지 않았다. 서로 셈법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 사이 안 위원장 측은 독자 창당 쪽으로 가닥을 잡아갔다. 이때 거중조정자가 나타난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핵심 측근이던 정치 원로 권노갑 민주당 상임고문이다.

    ‘민평련’과 새정치연합 사전 조율 ‘친노 견제’ 권노갑의 막후 중재

    민주당과 새정치연합의 신당 창당 합의 발표 이틀째인 3월 3일 국회에서 열린 새누리당 최고위원회의.

    친노 그룹 견제의 필요성

    권 고문은 2월 13일 서울 여의도 한 식당에서 안 위원장과 만났다고 한다. 이 자리서 민주당과 50대 50으로 지분을 나눠 갖는 형식으로 통합신당을 만들 것을 훈수했다. 권 고문은 또 안 위원장 측 한상진 서울대 명예교수 등을 상대로 신당 창당을 설득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권 고문은 왜 야권 통합신당 창당에 팔을 걷어붙였을까. 아마도 민주당의 원래 주인이라 할 수 있는 동교동계의 처지를 감안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민주당은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외연을 넓히려고 친노 그룹인 ‘혁신과 통합’과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통합했으나 오히려 안방을 내주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나마 2013년 5·4 전당대회에서 김한길 의원을 대표로 끌어올리면서 당권을 어느 정도 회복했으나 당내 친노 구주류의 비협조와 견제에 시달렸다. 황태순 정치평론가의 분석이다.

    “동교동계 처지에서 친노 세력은 그야말로 계륵(鷄肋)과 같다. 멀리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함께하자니 사사건건 동교동계를 숙주(宿主)로 삼아 자신들의 정치적 이득만 챙기는 친노 그룹을 견제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자면 친노에 대응할 새로운 세력, 강력한 차기 대권주자를 끌어들여야 했다. 안철수 진영에서도 세력 확장성의 현실적 한계와 정치 현실의 엄중함을 실감하고 당초 구상했던 최선의 길이 아니라 차선의 대안을 선택함으로써 보다 효과적으로 2017년 대권의 길로 접근하려는 생각을 했음이 분명하다.”

    권 고문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통합 논의에 다시 탄력이 붙었다. 이 과정에서 김 대표와 안 위원장 외에 주도적 역할을 한 인물로는 민주당에선 우원식 최고위원, 새정치연합에선 송호창 의원을 꼽을 수 있다. 여기다 안 위원장 측 곽수종 새정치연합 총무팀장이 통합을 결정한 3월 1일 심야 회동에 배석한 것으로 밝혀지면서 ‘막후 조력자’로 지목되기도 했다. 덩달아 박경철 안동신세계연합클리닉 원장도 언론이 주목했다. 청춘콘서트를 진행하면서 ‘안철수 현상’을 일으켰던 안 원장이 곽 팀장과 가깝다는 이유에서다.

    안철수 진영 메신저는 강인철?

    이보다는 안철수 진영의 ‘변호사 3인방’이 통합 협상에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는 말이 더 설득력 있게 들린다. 새정치연합 강인철 조직1팀장, 금태섭 대변인, 조광희 인재영입팀장이다. 강 팀장은 3인방 가운데 가장 먼저 안철수 캠프에 참여했다. 금 대변인은 안 위원장이 대선주자로 떠오르면서 상대방의 공격에 어려움을 겪을 때 페이스북에 ‘진실의 친구들’을 개설해 적극 옹호했다. 조 팀장은 2012년 대선 당시 안 위원장의 비서실장을 지냈다.

    김관영 의원은 “그전부터 안 위원장 쪽에서 (통합 협상을 위한) 사인들이 왔다”고 했다. 그러나 새정치연합 측에선 김한길 대표를 주축으로 하는 비노(非盧)연합 세력이 당권을 언제든 친노에 다시 뺏길 수 있다고 보고 안 위원장 측에 꾸준히 소극적 연대 메시지를 보내다가 지방선거가 다가오면서 기초선거 무공천을 명분으로 적극적 통합을 제안했다고 주장한다.

    처음에 안 위원장은 귀담아듣지 않았다고 한다. 민주당에 대한 불신이 워낙 깊은 까닭이다. 또 실제로 민주당을 움직이는 세력은 친노 그룹인데 비노 세력인 현 지도부와 통합 논의를 하는 게 온당한지에 대해서도 회의적이었다는 전언이다.

    그러자 권노갑 고문이 움직였다. 분위기가 호전되자 김 대표가 안 위원장에게 명분을 주기 위해 기초선거 무공천을 선언하면서 쇄신 의지를 보였다. 안 위원장이 김 대표가 던진 전혀 예상 밖의 승부수에 마음이 흔들리는 기미를 보이면서 변호사 3인방이 전격적으로 일을 진행시켰다고 한다.

    3인방 중에서도 특히 김한길 대표와 친분이 두터운 강 팀장이 사실상의 메신저 구실을 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민주당 당직자는 “물밑 협상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강인철’ 이름이 자주 들렸다. 강 팀장이 사실상의 메신저였던 것 같다”고 귀띔했다.

    강 팀장에게 어떤 역할을 했는지 확인하려고 전화를 걸었지만 “지금은 통합이 진행되는 과정이다. 그 이전의 협상 과정에 대해선 일절 취재에 응하지 않겠다”고 했다.

    민주당의 우원식 최고위원을 비롯한 민평련 의원들과 새정치연합의 송호창 의원, 변호사 3인방이 자주 접촉하는 것을 감지한 새누리당 지도부도 제3지대 야권 신당 창당 가능성에 주목했다고 한다. 만일 민주당과 새정치연합이 합쳐 지방선거 후보를 내면 특히 수도권에서 여당이 필패할 것으로 판단하고 은밀하게 대책 마련에 들어갔다는 전언이다.

    여의도 정가 주변에선 새누리당의 최경환 원내대표, 홍문종 사무총장, 윤상현 원내수석 부대표, 김재원 전략기획본부장과 청와대 이정현 홍보수석 등 친박 핵심 5인이 야권 신당 출범에 대비해 지방선거 구도를 짰다는 말이 들린다. 핵심은 중진 차출이다.

    여권 핵심들이 염두에 둔 중진들은 하나같이 처음에는 선거 출마를 꺼렸다. 그러나 “당이 어려움에 처할 지경인데 몸을 사리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는 압박이 이어졌다. 6·4 지방선거에서 차출된 중진 정치인의 측근은 “이번에 당명에 따르지 않으면 다음 총선에서 공천을 보장할 수 없다는 위협을 받았다”고 말했다.

    실제로 출마 여부가 불투명하던 중진들이 야권 신당 창당 선언 후 줄줄이 출마 의사를 밝힌 것도 여권의 그런 기류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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