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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천역 김정일 암살 시도 “폭발 때 맹원 8명 사망”

제3국 망명 反北조직 조선민주통일구국전선

  • 송홍근 기자 | carrot@donga.com

용천역 김정일 암살 시도 “폭발 때 맹원 8명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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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김정일 ‘용천을 다 날려버려라’ 명령”
  • ● 국정원, 美 CIA 등과 연계해 공작활동
  • ● 北 고위인사 20여 명 미국 망명시켜
  • ● 러시아 거주권 얻으려 체첸 전쟁 참전
용천역 김정일 암살 시도 “폭발 때 맹원 8명 사망”

북한 용천역 폭발 대참사. 노동신문

2004년 4월 22일 오후 1시께 평안북도 용천군 용천역에서 폭발사고가 일어났다. 김정일이 열차를 타고 중국에서 돌아오던 때다. 폭약을 실은 열차에 전기 자극이 전해지면서 연쇄 폭발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중앙통신은 “1t짜리 폭탄 100여 개가 동시에 한 지점에 떨어진 것과 같은 위력”이라면서 “강한 폭음과 폭풍으로 실명하거나 귀가 먹은 사람이 많고, 폭발 지점 1㎞ 주변은 폐허가 됐다”고 밝혔다. 김정일의 동선(動線)에 어떻게 폭발물이 설치될 수 있었을까.

2011년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바에 따르면, 김정일은 용천역 폭발사건을 암살 시도로 믿었다. 이 같은 사실은 2009년 2월 26일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캐슬린 스티븐스 당시 주한 미국대사를 만나 김정일과의 대화 내용을 설명한 자리에서 밝혀졌다.

조선민주통일구국전선 간부 A씨에 따르면 용천역에서 폭발사고가 났을 때 조선민주통일구국전선 맹원(盟員) 8명도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러시아 망명인사 중심 결성


조선민주통일구국전선(이하 구국전선)의 활약상을 살펴보기 전에 이 조직의 역사를 알아보자.

1992년 구국전선에 참여하는 음악가 정추(1923~2013)는 1957년 10월 17일 모스크바대 광장에 서 있었다. “북한에 김일성 숭배가 있다는 게 사실 아닌가. 소련에서도 스탈린을 격하한다. 독재는 마르크스 사회주의를 배반하는 것이다.” 청년 정추의 외침이 쩌렁쩌렁했다. 광주 출신인 그는 1946년 사회주의혁명 분위기가 고조되던 북한으로 올라갔다. 북한은 이 천재 음악가를 버렸다. 그는 1958년 카자흐스탄에서 망명생활을 시작해 2013년 알마티에서 사망했다.

정추는 말년에 북한 독재정권을 타도하겠다고 나섰다. 박갑동, 이상조, 허진 등과 구국전선을 결성한 것. 박갑동은 남로당 출신으로 박헌영의 측근이다. 6·25전쟁 때 북한으로 넘어가 요직을 맡았으나 1953년 남로당 계열 숙청 때 박헌영 일당으로 분류됐다. 사형집행 대기 중 1956년 석방됐으며 이듬해 탈출해 일본 도쿄에 정착했다. 이상조는 소련 주재 북한대사로 일하다 1957년 소련에 망명했다. 휴전회담 때 북측 대표였다.

이들 외에 장학봉(전 북한 군관학교 부교장), 박영빈(전 노동당 조직위원회 위원), 심수철(소련군 출신), 정상진(전 북한 문화성 부상), 이춘백(전 북한군 장성) 등 제3국에 망명한 인사들이 망명정부를 구성해 북한 정권을 타도하려 했다. 구국전선은 한국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와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지원도 받았다. 제3국에 망명한 북한 인사들은 B씨를 매개로 황장엽(1923~2010) 전 북한 노동당 비서와도 연결됐다. 황씨는 망명정부를 세운 뒤 김정일을 제거하려 했다. 김정일을 제거하고 망명정부 인사들이 북한에 들어가 정권을 잡은 후 남북통일을 추진한다는 구상이었다.

구국전선의 상층부를 형성한 망명인사는 20명가량이다. 다음은 정추의 생전 증언이다.

“광복 전 소련에 있다가 북한으로 들어간 사람이 500명쯤 된다. 북한이 공화국을 세울 때 주축이 된 사람들이다. 소련에서 지시한 대로 스탈린주의 북한을 만든 장본인들이다. 북한에 들어가서도 소련 국적을 버리지 않은 사람들은 소련계 숙청 때 죽지 않고 망명할 수 있었다.”

“안기부 공작금으로 학교 세워”


1957년 모스크바대 반(反)김일성 시위는 소련으로 망명한 인사들과 정추 같은 유학생들이 힘을 합쳐 일으킨 것이다. 소련 주재 북한대사이던 이상조는 허진과 함께 1992년 결성된 구국전선에서 핵심 역할을 했다. 이상조는 1956년 이른바 8월 종파사건 때 소련의 도움을 받아 김일성을 수상 자리에서 내려오게 하려다 실패한 인물이다.

허진은 1989년 서울을 방문해 노태우 당시 대통령을 만나기도 했다. 복수의 구국전선 인사에 따르면 허진은 안기부가 공작비로 준 돈으로 신문사를 인수하는가 하면 작은 대학을 세우기도 했다.

한 인사는 “공작비로 준 돈을 횡령한 셈”이라고 말했다. C씨는 “구국전선에 준 게 아니라 허진에게 준 것이라고 했다. 허진이 그 돈으로 알마티에 있는 신문사를 샀다. 신문사를 1년쯤 하다가 말고 모스크바에 학교를 세웠다”고 설명했다. 사실이라면 한국 정부가 북한 혁명에 사용하라고 지원한 돈의 일부가 허투로 쓰인 셈이다. 복수의 구국전선 인사는 허진은 안기부, 박갑동은 CIA의 지원을 받았다고 한다. 박갑동은 박정희 대통령과도 수차례 만났으며, 2005년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 취임식에도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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