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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대통합 위해 부안을 보듬어달라”

‘부안 사태’ 주역 김종규 군수의 호소

  • 이정훈 | 동아일보 출판국 전략기획팀 편집위원 hoon@donga.com

“국민 대통합 위해 부안을 보듬어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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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방폐장 유치하려다 ‘매향(賣鄕)군수’ 전락
  • ● 2014년 지방선거에서 8년 만에 군수 컴백
  • ● “국가 난제 해결 단초 제공한 부안 재평가해야”
“국민 대통합 위해 부안을 보듬어달라”

이정훈 기자

전북 군산에서 서해안고속도로를 빠져나왔다. 세계에서 가장 길다는 새만금 방조제(33.9km)를 달려보기 위해서였다. 군산시 비응도동에서 서해로 뻗은 이 방조제는 고군산군도의 신시도에서 꺾어져 부안군 변산면 대항리로 들어간다. 방조제 양끝은 전혀 다른 분위기다. 군산 쪽엔 건물과 공장이 제법 있지만 부안 쪽은 그렇지 못하다.

새만금 방조제 안엔 또 다른 방조제가 있다. 계화도를 잇는 계화 방조제다. 대일항쟁기인 1944년 착공한 이 방조제는 광복과 6·25전쟁으로 공사가 중단됐다가 1968년 완공됐다. 이 방조제로 생긴 땅이 부안군 계화면이고, 그곳에서 생산되는 쌀이 유명한 ‘계화미’다. 부안군 최북단이 계화면이고 남쪽 끝은 줄포면인데, 이곳은 하나같이 농산지다.




‘죽음’을 말하는 이들

농업 말고는 이렇다 할 산업이 없는 부안이 2003년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방사성 폐기물 처분장(방폐장) 유치를 놓고 벌어진 이른바 ‘부안 사태’ 때문. 김종규 부안군수가 방폐장을 유치한 게 사태의 발단이었다.

당시 정부는 방폐장 유치 지역에 3000억 원과 양성자가속기를 패키지로 주겠다고 했다. 김 군수는 이를 지역 발전의 기회로 봤다. ‘애국’도 생각했다. 그 이전에 정부는 굴업도와 안면도 등을 방폐장 후보지로 고려했으나, 그때마다 반대하는 단체들이 일어나 어려운 상황만 반복됐다. 이 때문에 방폐장은 최초 거론된 때로부터 17년이 지나도록 후보지를 정하지 못했다. 일본 후쿠시마 사태에서 알 수 있듯, 원전은 폭발(수소폭발)할 수 있어도 방폐장은 폭발할 수 없다.

방폐장의 안전성을 확신한 김 군수는 자신이 태어난 섬인 위도 주민들이 고민 끝에 동의하자 군의회 설득에 나섰다. 하지만 군의회는 동의하지 않았고 김 군수는 방폐장 유치를 신청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군의회 동의는 방폐장 유치 신청의 필요조건이 아니었다. 그는 주민들을 만나 지역 발전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런데 엄청난 반대세력이 몰려왔다. 온갖 시민단체와 반핵단체 사람들이 부안을 누볐다. 곳곳에 노란 깃발을 내건 그들은 확성기를 걸어놓고 ‘죽음’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 위협에 주민들이 동요했다. 김 군수는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국가에서 방폐장은 위험하지 않다고 했다. 그것을 유치해 지역을 발전시키자. 우리도 국가에 기여하는 게 있어야 국가도 우리 지역을 도와주지 않겠느냐”고 설득했다.

역부족이었다. ‘죽는다’는 위협에 적잖은 지역주민이 분연히 일어났다. 그의 뜻에 동조한 이들은 침묵했다. 정부도 침묵했다. 혼자서 전국을 상대로 싸워야 했다.

2003년 9월 초 그는 추석 인사차 천년 고찰 내소사의 혜산스님을 찾아갔다. 반핵을 선택한 주민들이 어떻게 알았는지 몰려왔다. 스님들은 “위험하니 뒷문으로 빠져나가라”고 했다. 그는 “매향노(賣鄕奴)도 아닌데 왜 뒷문으로 도망가느냐. 주민들께 설명하겠다”며 대중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말도 꺼내기 전에 돌팔매가 날아오더니 무수한 구타가 뒤따랐다.

두개골이 함몰되고 늑골이 부러지며 폐까지 상해 사경에 빠진 그는 전북대병원 중환자실로 옮겨져 대수술을 받은 후에야 겨우 깨어났다.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그는 ‘매향 군수’로 전락했다. 그를 거부한 사람들이 그에게 ‘매향’ 굴레를 씌운 것이다.

부안은 그렇게 몸서리쳤다. 찬핵이 반핵에, 반핵이 찬핵에, 국가가 지방에, 지방이 국가에, 공권력이 주민에게, 주민이 공권력에 폭력을 가했다. 불탄 것은 건물과 경찰 차량만이 아니었다. 부안을 잘살게 만들어야 한다는 부안 사랑도 타버렸다. 만인에 대한 적대감과 증오가 부안을 점령했다.

부안 사태는 반핵단체 주도로 주민투표를 해 방폐장 유치 거부를 결정하고 정부가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끝났다. 그때 김 군수의 진심을 알아준 이가 ‘무려’ 17%였다. 처절한 유혈 사태를 겪고도 투표자의 17%가 그를 지지했다. 그리고 반핵단체와 공권력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엄청난 공허가 밀려왔다. 그 공허를 ‘돌이킬 수 없는 억울함’이 채웠다. 감정적인 주민들은 그를 보면 참지 못하고 “매향노”라며 침을 뱉었다. 수십 년간 미움을 멀리하고 살아오던 농촌에 증오라는 독버섯이 자라났다.

그렇게 3년을 보내고 돌아온 지방선거에 재출마했으나 2등으로 낙선했다. 지지율은 36%. 부안 사태 주민투표 때보다 두 배 넘게 올랐다. 4년 뒤 다시 치른 지방선거에선 38% 지지를 얻고 또 낙선했다. 무서운 업(業)이었다. 그는 더 이상 전진하지 못했다. 반핵과 찬핵으로 갈려 싸운 과거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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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 동아일보 출판국 전략기획팀 편집위원 h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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