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포커스

‘헌금창구’로 자멸? ‘싱크탱크’로 부활?

영욕의 전경련, 안개 속 앞길

  • 소종섭 | 시사평론가 jongseop1@naver.com

‘헌금창구’로 자멸? ‘싱크탱크’로 부활?

1/3
  • ● 박정희 정권, ‘부정축재’ 경제인들에게 설립 요구
  • ● 일해재단, 세풍사건, 차떼기 등 정치헌금 관여
  • ● 공단 조성 등 기간산업 밑그림 제시하기도
  • ● ‘재계 대표 단체’ 위상 대한상의로 넘어갔다?
‘헌금창구’로 자멸? ‘싱크탱크’로 부활?

서울 여의도 전경련 회관.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를 해체하라는 목소리가 높다. 정치권에서는 야당을 중심으로 이런 주장이 나오고, 재계 일각에서도 동조하는 듯한 흐름이다. 정권 비선(秘線) 실세가 개입했다는 의혹이 불거진 미르·K스포츠재단이 설립되는 과정에 전경련이 대기업들의 돈을 모으는 창구 노릇을 한 일이 계기가 됐다. 산업화 과정에서 견인차 역할을 했다는 긍정적 평가는 자취를 감춘 듯하다. 20대 국회에서 논의되는 법인세 인상, 재벌 개혁 등 경제민주화에 맞서 목소리를 내야 할 전경련은 당장 생존에 급급한 신세다.

전경련은 1961년 출범 이후 여러 차례 위기를 맞았지만 이번의 위기는 성격이 달라 보인다. 존립 바탕 자체가 흔들리는 모양새다. 이미 공기업 등 일부 회원사들은 탈퇴를 선언했다. 전경련의 존재 의미가 무엇이냐는 근본적인 물음이 제기된 마당이다. 경제단체 대표로서의 위상에도 흠집이 났다.

전경련은 태생부터 정치권력과 맞닿았다. 1961년 5월 16일, 삼성그룹 창업자인 이병철 회장은 일본에 머물고 있었다. 오전 7시 골프를 치기 위해 도쿄의 한 호텔을 나선 그는 일본인 운전기사로부터 한국에서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다는 말을 들었다. 동행한 친지가 상황이 심상치 않으니 골프를 치지 말자고 했지만 이 회장은 일정을 그대로 진행했다.

5월 29일 군사정부는 경제인 11명을 부정축재 혐의로 구속했다. ‘부정축재 1호’로 지목된 이 회장은 당국으로부터 귀국을 종용받았다.



태생부터 정권과 밀접

차일피일 귀국을 미루던 이병철 회장은 6월 26일 귀국했다. 그리고 다음 날인 6월 27일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을 만났다. 이 자리에서 이병철은 “경제인들을 처벌하지 말고 경제 건설을 맡게 하는 것이 국가에 도움이 된다”고 역설했다. 6월 29일 아침, 구속됐던 경제인들은 모두 풀려났고 메트로호텔에 연금됐던 이병철도 풀려났다. 8월 12일 국가재건최고회의는 기업들에 부정축재에 대한 추징금 징수를 통고했다. 27개 기업주에게 378억800만 환이 부과됐는데, 이병철에게는 27%에 달하는 103억400만 환이 부과됐다. 부정축재 문제는 이것으로 일단락됐다.

이 사건이 이병철 회장이 전경련의 전신인 한국경제인협회 창립에 나서게 된 배경이다. 다시 말해 한국경제인협회는 부정축재자로 지목된 경제인들을 처벌하는 대신 그들로 하여금 경제 건설에 나서게 하기 위해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만들어졌다. 당시 경제인들은 서슬 퍼런 신권력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다. 세월이 흐른 후 이병철은 전경련 창립 20주년 기념 좌담에서 창립 배경과 관련해 이렇게 말했다.

“혁명 직후 중앙정보부에서 불러서 갔더니 여러 경제 얘기를 하면서 의견을 묻다가 ‘경제단체 같은 것을 만들어 경제인들이 국가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의했고 경제인들이 이를 받아들여 한국경제인협회가 출범했다.”

한국경제인협회는 1961년 8월 16일 창립총회를 열었다. 이병철이 초대 회장을 맡아 1년간 재임했다. 그가 생전에 맡은 유일한 ‘공직’이었다. “경제인 및 경제 각 부문 간 연결을 도모하여 주요 산업의 개발과 국제 경제 교류를 촉진함으로써 건전한 한국 경제의 발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는 것이 정관에 나와 있는 한국경제인협회의 설립 목적이었다.



경제인협회+경제협회

창립 회원은 13명으로, 대개 5·16 직후 부정축재로 구속된 기업인들이었다. 이들은 원래 ‘경제재건촉진회’라는 단체를 만들었으나 한 달 만에 간판을 한국경제인협회로 바꾸면서 이병철을 전면에 내세웠다.

한국경제인협회 창립 회원은 이병철, 조성철, 남궁련, 이정림, 설경동, 박흥식, 홍재선, 최태섭, 정재호, 김지태, 이한원, 이양구, 함창희. 창립 직후 송대순, 박선기, 김종희, 구인회, 우창순, 서정익, 김용성 등 7명이 추가 가입했고, 그해 11월 다시 20여 명이 더 가입했다.

한국경제인협회는 이 과정에서 ‘대규모 공업단지 조성’을 정부에 건의했다. 물금, 삼천포, 울산 등 세 곳의 후보지를 정밀 실사한 뒤 울산이 최적지라는 결론을 내리고 1961년 12월 울산공업단지 계획을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제출했다. 이듬해인 1962년 2월 3일 울산공업단지 기공식이 열렸다. 국가 기간산업 발전 전략의 밑그림을 제시하고 공업화의 토대를 마련하는 데 일정한 역할을 한 것이다.

한국경제인협회 출범 과정에서 소외된 기업인 90여 명이 1961년 10월 한국경제협회 창립을 주도하면서 재계 갈등이 노출됐다. 1961년 10월 28일자 ‘동아일보’는 ‘한국경제협회 난항’이라는 제목으로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 한국경제협회의 발기인총회를 앞두고 경제계는 분열을 점차 표면화하고 있다. (…) 한국경제인협회 측에서 한국경제협회 측이 발기함에 있어서 전연 아는 바가 없으며 준비위원으로서 한국경제인협회 회장단이 발표됐으나 사전 교섭이나 연락을 받은 바 없으며 응낙한 바도 없다고 밝혔다. 원만한 타결책이 강구되지 않는 한 경제계는 혼란이 격화될 가능성이 엿보이고 있다.’

결국 두 단체는 한국경제인협회로 합치기로 하고 1968년 3월 28일 전국경제인연합회로 이름을 바꿨다. 전경련은 3대 회장까지는 투표로 회장을 뽑았으나 4대 회장인 김용완 경방 회장을 회원들의 추대로 선출하면서 이때부터 추대로 회장을 뽑는 것이 전통이 됐다.

권력과의 관계에서 출범했기에 전경련의 주요 역할 중 하나는 ‘정치헌금’이었다. 전경련은 1963년 민정 이양에 따른 총선 때부터 분기별로 정치헌금을 하기도 했고, 1968년 7월 23일에는 아예 정식 헌금 기구인 ‘정경간담회’를 만들기도 했다. 반도호텔에서 발족한 정경간담회에는 윤치영 공화당 의장서리, 정일형·이재형 신민당 부총재 등과 재계의 주요 경제단체장들이 참석해 정치자금 양성화 등 재계와 정계의 협조 강화 및 풍토 개선에 노력할 것을 다짐했다. 지금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그때는 그런 시절이었다.


1/3
소종섭 | 시사평론가 jongseop1@naver.com
목록 닫기

‘헌금창구’로 자멸? ‘싱크탱크’로 부활?

댓글 창 닫기

2018/11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