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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기획|세계 석학들이 보는 새 밀레니엄

세계가 기대하는 ‘젊은 피’ 한국

  • 기 소르망

세계가 기대하는 ‘젊은 피’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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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속기획 ‘세계 석학들이 보는 새 밀레니엄’의 두 번째 필자는 프랑스의 대표적 지성인 기 소르망(Guy Sorman)이다. 칼럼니스트·저술가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고 있는 그는 ‘신동아’에 기고한 이 글을 통해서 21세기 세계의 전망과 함께 한국의 장래에 대해서도 통찰력있는 시선을 드리우고 있다. 지구 반대편 유럽에 사는 한 지성이 전하는 메시지가 독자들의 시야를 넓혀줄 것으로 기대한다.<편집자>》
21세기는 20세기와 전혀 다를 것이고 그래서 더 좋을 것입니다. 돌이켜보면, 인간적으로 말해서, 지난 세기의 대차대조표는 끔찍합니다. 인류는 가장 살인적인 이데올로기들과 가장 파괴적인 무기들, 가장 사악한 거짓말들을 만들어냈습니다. 특히 20세기는 기술의 진보와 도덕의 진보, 그리고 행복 사이에 모종의 관련이 있다고 믿었던 커다란 환상을 앗아가버렸습니다. 사실 이미 밝혀졌듯이, 그 세 가지 개념은 서로 아무 관계도 없습니다.

따라서 다가오는 시대는 과거의 교훈을 해석하고, 그로부터 몇 가지 가르침을 이끌어내는 우리의 능력에 달려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일어났던 일들로부터 가르침을 이끌어내려면 빨리 인류가 합리적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류는 전혀 합리적이지 못합니다.

사람들도 국가처럼 이성적이면서 동시에 정열적이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우리 내면에서 합리적인 부분은 비교적 제어할 수 있고 심지어 예측할 수도 있습니다. 그와 반대로 정열적인 측면, 다시 말해 우리 내면의 광적인 측면은 본질적으로 통제할 수 없으며 전혀 짐작할 수도 없습니다.

시티즌에서 네티즌으로

미래학자들은 보통 이성의 진보를 알리는 데 만족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쉬우면서도 대중적인 인기를 얻을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여러 가지 사실은 그들이 전반적으로 틀렸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죽은 후에는 그들도 조롱과 처벌을 피할 수 있습니다.

그런 직업적인 낙천가들과는 반대로, 내게는 미래를 탐구하는 모험을 감행한다는 것은 이성이 우리에게 약속해주는 것과 끊임없이 대결한다는 조건에서만 적합한 것 같고, 그런 점에서 정열이 우리를 유혹하는 것 같습니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미래도 분명히 그 두 실타래의 교차에 의해서 짜일 것입니다.

합리적이고 예측 가능한 측면에서는, 각 개인은 20세기 말엽에 윤곽이 잡힌 경향들을 따라가는 데 동의합니다. 그래서 시장경제가 번영과 혁신을 향한 상승의 흐름을 계속해 나가리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유전적인 조작에 의한 건강, 그리고 웹(인터넷)이나 그것을 뒤이을 기술발전 단계에 의한 통신은 진보를 향한 흐름의 가장 뚜렷한 징후들일 것입니다.

또한, 현재로서는 힘의 균형이 수정되리라고 예언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음도 명백합니다. 부유한 자들은 더 부유해질 것이고, 부유하지 못한 자들은 뒤떨어진 것을 따라잡기가 쉽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의 경우, 대중 빈곤으로부터 빠져 나오는 것이 기술적으로는 가능할 것입니다. 하지만 부자들의 이기주의는 더 심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구 전 지역이 개발 국가들에 대한 집단의식으로부터 빠져 나오는 것 같습니다.

개인주의적인 그런 굴곡은 기술 혁신에 의해 심지어 더욱 강화될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경제 사회에서 각 경제 생산자는 국민적 집단이나 국제적 집단과 관련해 점점 더 자립하게 될 것입니다. 위치를 측정할 수 없고 세금을 부과할 수 없는 네티즌이 시민(시티즌)을 대체할 것입니다. 지리적으로 위치가 정해지지 않는 전자우편 주소를 통해서만 네티즌과 접촉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 네티즌은 자기가 선택한 동류 공동체 속에서 자신을 발견할 것이고, 커다란 집단적인 원인들에 대해서는 아주 무관심할 것입니다.

그런 발전은 네티즌들에게는, 서비스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비용이 드는 것처럼 보이는 민족·국가들을 약화시킬 것입니다. 예측할 수 있는 기술의 발전 속에 들어가 있는 국가의 그러한 약화에 대한 보상으로, 네티즌이 서비스를 구매하는 새로운 초국가적인 민간기구들이 세계 시장에 등장하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런 민간 대리점들은 가입자의 안전을 보장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전 지구와 인터넷 시민의 공용어는 영미어가 되리라는 것도 확실합니다. 그들은 또 몇 가지 집단적인 기술 표준들과 어떤 통일된 정보 언어를 자유로이 이용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새로운 엘리트는 전지구 인구의 10%나 15% 이상을 넘지 않을 것입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후쿠야마·헌팅턴은 전적으로 틀렸다

기술과 개인주의가 강자의 이데올로기가 된다고 해서, 정열이, 즉 기술의 거부가 자기 영토와 전통에 뿌리박은 사람들의 피난처가 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정열은 어떤 형태를 취하게 될까요? 그것이 반드시 민족적인 형태를 띠지는 않을 것입니다. 나이나 성별 혹은 종교간의 연대처럼, 그것들도 공동의 이해를 통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정열들이 반드시 폭력적이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정반대로 비폭력을 키울 수도 있습니다. 중국의 파룬궁이나 혹은 인도나 다른 곳에서 발견되는 마하트마 간디의 보편적 사상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말입니다. 새로운 예언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그런 운동들은 새로운 집단을 형성하게 될 것입니다. 그 집단들 역시 초국가적일 수 있고, 권력과 결정의 새로운 중심들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거기서도 국가는 그 효용이 한계를 넘어갔음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게 확실해 보이는 유일한 예상은, 20세기 말에 인기를 끌었던 엄청난 예언들이 부정확했다는 것이 판명되리라는 것입니다. 예컨대 모든 국가들이 자유민주주의에 다시 가담하리라는 프란시스 후쿠야마의 생각은, 그것을 추구하지 않고 더욱 정열적인 대안들을 구할 사람들의 실망을 고려하지 않고 있습니다. 비록 그 대안들이 자유민주주의보다 덜 합리적이고 덜 효율적일지라도 말입니다.

더욱이 인류가 자유민주주의 이외에는 다른 어떤 이데올로기도 만들어내지 않으리라고 믿는 것은 지식인의 풍부한 상상력을 모르는 말입니다. 비록 지식인들이 광적일지라도 말입니다. 더불어, 새뮤얼 헌팅턴이라는 형편없는 미국의 사상가처럼, 문명들이 미래에 대해서 한 가지 집단적인 지향만을 가질 것이라고 믿게 내버려두는 것은, 백미러에 비친 미래를 바라보는 것이고, 인터넷을 중심으로 구성되는 잠재적인 새로운 공동체들에 대해 전혀 모르는 것이며, 미국적인 이데올로기를 인간 본성과 혼동하는 것입니다. 그런 예상은 아마도 미국의 문화적 열정의 위력으로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반향이 없었을 것입니다.

중국과 일본, 그리고 한국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문화의 중요성입니다. 문화라는 용어의 의의에 대해서 동의하기만 한다면, 문화는 미래에 점점 더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입니다. 현대 문화는 과거에 반복되어온 작품들의 묘지가 아닙니다. 반대로 그것은 창조적 역량이거나 그런 역량의 부재입니다. 새로운 기호와 소리를 만들어낼 능력이 있는 문화의 숫자는 줄어들고 있으며, 걱정스러운 것은, 구어(口語)의 수가 앞으로 더욱 줄어들 것이라는 점입니다.

21세기의 발랄한 문화 창조자들은 대다수 사람들의 유행과 생활과 사고의 양식들을 강제하는 행동규범들을 강요할 것입니다. 따라서 공산주의 중국이 하는 것처럼 창조자를 억압하는 정부는 나머지 세계에 가져다줄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국민을 정신적·경제적 빈곤에 빠뜨립니다. 그와는 반대로, 문화적 창조가 개화하는 곳에서는 국가가 번영을 누릴 것입니다. 왜냐하면 국가는 단지 물건들이나 서비스만을 거래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국가간의 거래는 사람들간의 거래처럼 항상 문화적·정신적·심미적 가치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그 물건들은 단지 포장일 뿐입니다.

이런 전체적인 그림에서 한국에는 어떤 자리가 돌아갈까요? 정교하게 완성된 훌륭한 문명 중에서 한국은 중국이나 일본에 비교할 수 있는 보편적인 준거 표시로 인정받는 데까지는 아직 도달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것은 뜻밖의 일입니다.

실상 우리가 중국을 들여다보면, 생기없는 별 같은 이 나라는 이제 과거의 빛에 대한 기억만을 선전하고 있다는 것이 확연해집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엘리트들을 몰살하면서 중국 민족의 문화적 활력을 죽여버렸습니다. 중국은 단지 제국의 변두리에만, 특히 대만에, 잔존할 뿐입니다. 21세기에는 십중팔구 세계가 그 속임수를 찾아낼 것이고, 아쉽게도 위대한 중국이란 경제적인 신화만큼이나 문화적인 신화라는 것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한편 일본은 모호한 상황을 제시합니다. 거기서는 사람들이 고미술과 세련됨을 찬양하고 있지만, 주목할 만한 별다른 것이 생산되지 않고 있습니다. 마치 경제적 열의가 문화적인 창조성을 흡수해버린 것처럼 모든 일이 일어납니다. 하지만 그런 창조성의 빈곤에 허덕이게 되자, 이제 상상력의 부족으로 다시 빈혈에 빠지게 된 것은 바로 경제입니다. 이런 곤경에서 단순한 경제적 조치가 아닌 신속한 해결책은 내게 보이지 않습니다. 새로운 메이지 유신이 없다면, 일본은 점점 더 지친 국가로 보일 것입니다.

21세기 새로운 피

그러므로 이 지역에서는 이웃 나라들과는 대조적으로 젊고 활기에 차 보이는 한국이 남게 됩니다. 조형예술, 영화, 패션, 무용 등에서 한국 예술가들의 창조는 억누르기 힘든 그런 활력을 입증합니다. 한국에서는 경제적인 열정이 예술적인 열의를 집어삼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민주주의는 권위주의 체제가 싹을 품고 있던 문화적 무감각을 단절시켰습니다. 남은 일은 그런 창조적인 열의를 나머지 세계에 알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한국의 정신이 발전하고 있다는 것을 절감합니다. 그리고 몇 년 후에는 한국이 그 이미지를 더욱 잘 수출할 수 있으리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에게처럼 한국인의 머리 위에도 북한의 그림자는 하나의 위협으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나는 몇 년 전부터 북한의 급속한 붕괴보다는 일정한 안정을 말하던 이들의 편에 서 있습니다. 그런 예측에 힘입어, 내게는 또한 북한이 10년이나 지속되지는 않으리라는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북한은 인접국들과 미국의 암묵적이고 약간은 수치스러운 동의에 의해서만 생존하고 있습니다. 연착륙이나 기대하면서 말입니다. 더 개연성이 있는 것은, 북한 내부의 혁명이 지나치게 잘 계산된 그 시나리오를 중단시키리라는 것입니다. 북한 민중에게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할 권리를 무한정 금지시킬 수는 없습니다. 내가 아는 북한 내부 사정으로 보건대 북한은 정상적인 나라가 아니라 공포정치 국가입니다. 그것은 종말이 있을 것이며, 무한정 연장될 수는 없습니다.

북한이 남한으로 넘어가는 날 남쪽의 생활수준이 영향을 받을 수 있지만, 그것이 일시적인 불편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한국인 전체는 결국 통일에서 공동의 큰 계획을 재빨리 찾아내게 될 것이고, 또한 인구 증가의 효과는 한국을 더 이상 어중간한 강국으로서가 아니라 일류의 강국으로서 위상을 정립하는 데 기여할 것입니다.

나의 제안들과 내기들은 아무에게나 기쁨을 주기 위해서 마련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내가 객관적이라고 생각하는 관찰들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것들은 서양인의 영혼에 내재하는 일종의 필연성에 의해 자양분을 얻고 있습니다. 유럽과 미국에서 우리는, 우리의 경제에도 불구하고, 아니면 바로 그 경제 때문에, 일종의 우울증과 환멸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세계화는 정녕 우리를 깨어있게 하지만 우리를 매료시키기에는 충분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계에 대한 매혹을 다시 기대하는 것은 다른 곳에서입니다. 특히, 20세기에 결정적인 구실을 하지 못한 문명들로부터 도래하는 것 말입니다. 그런 문명들은 21세기에 우리가 필요로 하는 새로운 피를 가져다줄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특히 극동에서는 한국, 남아시아에서는 인도,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아르헨티나를 생각합니다. 그곳에는 아직 미처 이용되지 않은 보편적 사상의 위대한 자원들이 있습니다. (번역·김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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