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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은 있어도 장애인의 삶은 없는 나라

한국의 ‘오체불만족’ 윤봉근의 현장고발

장애인은 있어도 장애인의 삶은 없는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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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생각하고 싶지도 않지만 1992년 1월 마지막 날은 나뿐만 아니라 우리 가정의 꿈을 앗아가버린 최악의 날이었다. 아침부터 진눈깨비가 흩날리더니 날이 저물면서 기온이 떨어져 길은 빙판으로 변해 있었다.

퇴근길에 나는 구입한 지 한 달도 안된 트럭을 몰고 올림픽 대로를 달리고 있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일을 마치고 기분 좋게 한잔 한 상태였다. 그때 갑자기 뒤에서 차 한대가 추월을 하려고 튀어나왔다. 이 차를 피하려다 미끄러지면서 중앙분리대를 넘어가 운전석과 트럭 짐칸이 완전히 동강나는 대형사고가 벌어졌다. 나 역시 교통사고 피해자였지만 음주운전이었다는 이유로 아무런 보상도, 주위의 동정도 받지 못했다.

그 날부터 꼭 40일이 지나 나는 정신을 차렸다. 어디선가 아련하게 들려오는 아이 울음소리에 나는 ‘우리 애도 태어날 때가 됐는데…’라는 생각을 하며 퍼뜩 눈을 뜨고 보니 온몸에 쇠꼬챙이를 꽂고 지독한 소독약 냄새를 풍기며 병원 침대에 누워 있었다. “어머니, 내가 왜 여기에 있어요?”라는 질문에 대답하려는 듯 간호사가 얼른 주사를 놓았다. 어머니는 눈물을 글썽이며 “정말 아무 기억도 없느냐”고 되물으시면서 사고가 난 직후 나는 동인천 길병원으로 실려와 40일 동안 수술실과 병실을 오갔고 하루에 15차례 주사를 맞았다고 말씀하셨다. 그동안 상태가 호전됐을 때는 문병온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정도였다는데 내게는 그런 기억이 전혀 없었다. 어떻게 된 일일까?

그러나 무엇보다 궁금한 것은 사고 직전 만삭이었던 아내와 아이 소식이었다. 그때 아내는 못난 남편 때문에 서울 어느 병원에서 혼자 외롭게 딸을 낳고 있었다. 지금도 당시 혼미했던 나를 깨운 것은 분명 딸 지현이의 울음소리였다고 확신한다. 서울과 인천이라는 시공간을 넘어 아이의 울음이 나를 깨워준 것이다.

나는 서른 둘에 장가를 들었다. 부모님은 막내아들이 서른을 훌쩍 넘기고도 결혼할 생각은 안 하고 사업을 한답시고 일본 바닥을 헤매는 꼴이 못마땅하셨던지 불효를 내세워 귀국시켰다. 그렇게 한국으로 돌아와 결혼한 지 1년, 만삭의 아내를 두고 나는 뜻밖의 교통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되는 날벼락을 맞은 것이다.

9개월의 병원생활 끝에 더 이상 치료비를 감당할 수 없어 퇴원을 하긴 했지만 대소변 처리도 할 수 없던 나는 그래도 의지할 곳이라고는 입원했던 병원밖에 없다는 생각에 병원 바로 앞에 전셋집을 얻었다. 그때부터 나의 생활은 사투였다. 꿈 에는 걷고 뛰었지만 현실은 기댈 곳이 없으면 제대로 앉지도 못했다. 그리고 아무 때고 고약한 대소변 냄새를 풍기면서도 어쩔 수 없이 남의 도움만 기다려야 한다는 수치심이 견디기 어려웠다. 죽고만 싶었는데 방법을 몰랐다. 한 발짝도 집 밖으로 나갈 수 없는 나에게 집은 감옥 아닌 감옥이었다. 길가로 난 내 방 창 너머로 들려오는 사람들의 말소리 발소리가 왜 그리 그리웠던지.

그 와중에도 갓 백일이 되어 옹알이를 하는 딸을 안아보는 것이 나의 소원이었다. 가슴 아래가 마비되어 벽 모서리에 기대지 않고는 앉아 있기조차 어려운 내겐 딸을 품에 안는 것도 큰일이었다. 혹시라도 옆으로 쓰러지면서 아이를 떨어뜨리지는 않을까 불안해서 안을 수가 없었다.

혼자서 휠체어를 탈 수 있게 되기까지 수없이 엎어지고 자빠진 끝에 드디어 첫나들이를 하게 됐다. 문 밖까지 휠체어를 밀고나오다 나는 쏟아지는 눈물을 참을 수 없어 그만 다시 방으로 들어와버렸다. 얼마나 손꼽아 기다린 첫 외출인데, 눈물 때문에 포기하다니! 그러나 제대로 안아주지도 못하고 걷지도 못하는 아빠지만 방긋방긋 웃으며 안겨오는 딸이 더 크기 전에 반드시 이 방을 탈출하리라 생각하니 용기가 솟았다.

겨우 휠체어를 타고 돌아다닐 수 있게 되자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혼자 힘으로 고향 남원에 가고 싶었다. 일단 그렇게 생각하자 고향 외에는 머리 속에서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대소변 처치를 위한 장비를 챙겨들고 택시를 타고 무작정 고속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터미널을 오가는 사람들은 마치 울타리 밖을 뛰쳐나온 원숭이 보듯 나를 쳐다보았다.

그래도 인정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버스표를 샀다. 하지만 매표원이 무심코 준 좌석번호는 맨끝자리였다. 도저히 거기까지 갈 수 없을 것 같아 망설이자 측은했던지 앞좌석 손님이 선뜻 자리를 양보해주었다. 전주행 버스에 동승한 승객들과 운전기사의 배려로 나의 첫 고향 나들이는 순조롭게 시작됐다.

전주에 도착해 다시 남원행 직행버스로 바꾸어 탔다. 아무 연락도 없이 불쑥 남원터미널에 나타난 나를 알아보는 이가 몇 명 있었다. 금세 친구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장애인이 된 나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황당해 하는 눈빛이었다. 그러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우리는 금방 어린 시절로 돌아갔다.

그때 비로소 나는 행운아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반신이 마비돼 정상적인 부부생활이 불가능해졌지만 그 전에 얻은 소중한 딸이 있고, 언제라도 나를 반겨주는 고향과 친구들이 있지 않은가.

휠체어와 가방

사고를 당한 후 잠시도 나와 떨어질 수 없는 물건이 휠체어와 가방이다. 휠체어는 내 발이요, 가방은 내 몸이다. 하반신마비 이후 외출시 대소변 처리가 늘 골칫거리인 나는 큼직하고 멋진 서류가방을 가지고 다닌다. 거기에 화장실 대용 꿀통과 소변 빼는 기구(넬락톤 세트), 휴대폰과 전화번호가 적힌 수첩, 그밖에 잡다한 살림살이를 챙겨넣고 다녔다.

무릎에 커다란 가방을 올려놓고 휠체어를 탄 나는 영락없는 잡상인이다. 그래서인지 큰 회사 빌딩에 들어갈 때마다 긴장된 표정으로 막아서는 경비와 승강이를 벌여야 했다.

한번은 어느 대기업 과장인 친구를 만나러 갔는데,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경비가 다가서더니 설명할 기회도 주지 않고 ‘그냥 조용히 나가라’고 했다. 평소라면 약속이 되어있으니 전화로 확인해 보면 될 것 아니냐고 조용히 말했겠지만, 그날 따라 새벽부터 이리저리 휠체어를 끌고다녀 이미 파김치가 된 상태였다. 내 입에서 좋은 말이 나올 리 없었다. 화가 치민 김에 평소 하고 싶은 말을 있는 대로 뱉어냈다.

“당신 몇 살이오? 군대 다녀왔소? 난 군대도 다녀오고 세금도 꼬박꼬박 내온 시민이오. 내가 내 친구 만나러 왔다는데 왜 못 들어가게 해? 이보시오, 이렇게 해야 대기업 위신이 선답디까?”

한참 후 흥분을 가라앉힌 나는 ○○팀 과장을 만나러 왔다고 솔직히 이야기했다. 그런데도 내 가방을 힐끔힐끔 보는 그들의 시선에서 의심이 사라지지 않은 것 같아 아예 “이 자리에서 물건 좀 팔게 이리 와 보시오” 하면서 큰 가방을 열었다. 모두들 궁금했던지 내 휠체어를 중심으로 둥그렇게 모여들었다.

소변통과 휴대폰, 몇 가지 서류뿐인 가방 속을 들여다보고서야 그들은 커피 한 잔을 주면서 사과를 했다. 나는 또 속도 없이 그것을 받아들고 홀짝거렸다.

앞으로 장애인이 오면 이런 식으로 업신여기며 내좇지는 말아달라고 부탁하는 것외에 할 말이 없었다. 장애인이 회사를 방문하면 ‘어디를 가시느냐’ 상냥하게 묻고 쉽게 엘리베이터를 탈 수 있도록 잡아주는 배려는 나의 지나친 기대일까.

사랑의 집에 날아온 천사 은철이

‘해처럼 달처럼 사회복지회’를 운영하면서 늘 안타까운 것은 전국 곳곳에서 도움요청이 쇄도하지만 버려진 장애인이나 병든 노숙자들이 몸이라도 편히 뉠 곳을 찾아주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국가가 운영하는 시설은 늘 만원인 데다 민간시설이면서도 꽃동네처럼 중증장애인을 받아주는 곳은 1년 넘게 기다려야 입소할 수 있는 형편이다. 이처럼 장애인들이 갈 곳이 마땅치 않아 우리 ‘해처럼 달처럼 사회복지회’ 가족이라도 모여살 수 있는 곳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황익상 목사 부부를 만나 드디어 그 소원을 이뤘다.

황목사는 20년 넘게 소외된 사람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목회활동을 하는 데다 교회 성금이나 독지가의 후원금에 의존하지 않고 장터에 나가 돈을 벌어 그것으로 불우한 사람들을 돕는 훌륭한 분이다. 나는 황목사의 그런 정신을 높이 평가했고 지난해 9월 드디어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쉼터 ‘해처럼 달처럼 사랑의 집’을 만들었다.

사실 사랑의 집은 전적으로 황목사 부부의 희생으로 만들어졌다. 안양시 석수동에 있는 황목사의 교회와 사택을 개조해 쉼터로 만들었던 것이다. 대신 목사님댁 4남매는 전세방을 얻어 나갔고, 대신 12명의 오갈 데 없는 노인과 장애인, 노숙자를 새가족으로 맞이했다. 황목사의 공식직함은 ‘해처럼 달처럼 사랑의 집’ 대표이고, 연명자 사모가 원장이다. 나는 쌀이며 부식을 조달하고 운영비를 마련하는 사무국장이 됐다.

이렇게 사랑의 집을 개소한 지 한 달도 안돼 은철이를 맞이했다. K시 사회과에서 버려진 아이가 있다며 사랑의 집으로 데려왔다. 아이는 첫눈에도 상태가 나빴다. 보지도 듣지도 못하고 운동기능이 전혀 없는 아이는 파랗게 질린 채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도대체 어느 병원으로 데려가야 할지 막막했다. 그 와중에도 또렷한 코와 입매, 힘겹게나마 해맑게 웃는 모습이 첫눈에 우리 가족을 사로잡았다. 자세히 보니 희미하지만 형태를 알아볼 정도의 시력도 있는 것 같아 빨리 정밀진단을 받아보는 게 좋겠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다음 문제는 호적. 아이는 호적이 있어야 생활보호대상자로 지정받을 수 있고 병원진료도 자유롭다. 아이를 처음 데려온 K시에서는 우선 행려자로 처리해 카드를 만들고 최대한 지원하겠다고 약속했지만 법원에 가서 절차를 밟아 호적을 만들고 생활보호대상자로 선정되기까지는 두 달 이상 기다려야 했다.

두 달 동안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고, 목사님 부부는 아이에게 은철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밤낮으로 아이를 돌봤다. 상태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MRI촬영도 여러번 했다. 병명은 선천성 뇌졸중. 뇌에 물이 차서 계속 뽑아내주지 않으면 곧 죽게 되기 때문에 머리에 가는 호스를 박아 심장쪽으로 보내야 했다. 은철이 부모는 아이를 포기하기까지 살리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던 것 같다. 머리에 가득한 수술자국이 그것을 말해주었다. 그런데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그 부모의 심정을 생각하면 더욱 이 아이를 살리고 싶었다.

병원에서는 어차피 사춘기까지 살면 오래 사는 것이니 포기하라고 충고했다. 그러나 이후 은철이는 목사님 부부의 사랑으로 확실히 달라졌다. 때때로 은철이가 숨이 막혀 새파래지면 따라죽고 싶다는 두 분이니 그 사랑이야 설명이 필요가 없다. 아예 은철이를 입양한 두 분은 하루에 세 차례 운동을 시키고 다섯 가지 과일과 곡식으로 만든 유동식으로 아이의 체력을 길러주었다.

처음 사랑의 집에 올 때 허옇게 흰자위를 드러낸 채 풀려 있던 눈은 어느덧 제자리를 찾아 초롱초롱해졌고, 운동신경도 살아난 듯 손벽을 치고 혼자 앉을 정도가 됐다. 진짜 나이는 모르지만 은철이는 호적상으로 올해 네 살이 됐다.

“우리 은철이 머리에 물이 마르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는 연명자 원장님. 은철이가 완치하면 대학도 보내고 대학원 공부까지 시켜서 세상에 사랑을 전하는 선교사로 만들겠다는 목사님. 그 꿈이 반드시 이뤄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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