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4월호

실용성 콤플렉스 벗어나야 인문학이 산다

토론토大 홍성욱 교수의 창조적 인문학을 위한 대안

  • 홍성욱 토론토 대학 교수·과학사

    입력2006-11-09 14: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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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는 대학에서 인문학 교육의 핵심이 학생들에게 ‘인문학적 사유’를 교육·훈련하는 것임을 주장하려 한다. 또 ‘창조적인’ 인문학적 사유가 ‘실용적인’ 학문이나 사회활동에 필요한 창조성에도 적용될 수 있음을 보이려 한다. 즉 비판적이고 창조적인 인문학 연구와 교육의 실용적 가능성을 제시하려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1996년 9월 전국 인문대학 학장들은 “이성의 회복과 학문의 기반이 되는 인문학이 존폐의 갈림길에 서 있으며… 정부는 인문학 연구와 교육에 대해 정책적 배려와 지원을 다해야 한다”는 요지의 ‘제주선언’을 발표했다.

    다음해인 97년, 14개 대학 인문학 연구소는 공동 학술 심포지엄을 통해 인문학의 위기와 그 해결책을 다각도로 모색했고, 98년에는 대표적인 학술단체라고 할 수 있는 학술단체협의회에서 인문사회과학의 위기에 대한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이어 작년 4월부터 6월까지 신문지면에서 염무웅, 김성도, 복거일, 장정남, 김학수, 신명아, 박정신과 같은 인문·사회과학자들이 인문학의 위기에 대해 논쟁적인 의견을 개진했다.

    이러한 토론과 논쟁에서 인문학자들은 인문학에 위기를 불러일으킨 원인을 여러 가지로 진단했고, 그에 대응하는 처방을 제시했다. 전통과 단절이라는 질곡된 근대화의 문제, 세상의 모든 것을 돈과 효용으로 환원하는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논리로부터, 대학에 도입된 세계화 이데올로기와 경쟁력 지상주의, 교육부의 잘못된 대학 개혁 정책, 학부제의 급속한 도입, IMF, 대학의 팽창과 대학생의 질 저하에 이르기까지 포괄적이고 다양한 현상과 요인들이 위기의 원인으로 제시됐다.

    소수의 인문학자들은 이에 덧붙여 한국 인문학이 외국의 이론과 해석을 소개하는 데 급급했고, 이런 인문학의 ‘식민성’이 인문학 연구를 현실과 우리의 삶이라는 토양으로부터 분리시킴으로써 인문학에 위기를 가져왔다고 강조했다.

    왜 인문학의 위기를 재론하는가



    위기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원인만큼이나 다양한 처방이 제시됐다. 전통을 창조적으로 계승·복원하고, 신자유주의와 시장논리로부터 대학과 공공영역을 보호하고, 정부의 지원을 유도해서 ‘인문학연구소’를 만들어 적체된 인력을 활용하고, 학부제 도입을 늦추거나 대안을 모색하고, 세분된 전공의 벽을 넘어 문화연구·여성연구·지역연구와 같은 다양한 통합학문을 지향하고, 인문학이 정보화의 내용을 채워줄 수 있도록 인문학과 자연과학, 공학의 ‘절합’을 모색하고, 순수학문 중심의 학부와 응용학문 중심의 대학원을 효과적으로 연계하고, 연구교수제를 도입하고, ‘우리’ 학문을 하고, 현실과 밀접한 학문을 모색하고, 논문과 원전 중심의 글쓰기를 지양하는 것 등이 위기 극복을 위한 처방이었다.

    이러한 논의 대부분이 “인문학이 무엇을 하는 학문이며, 무엇을 위한 학문이어야 하는가”에 초점을 맞추었음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대응으로 인문학이 무엇인가를 다시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나는 여기서 인문학의 위기와 그 처방을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분석하려 한다. 인문학의 현재 위기와 미래에 대한 논의를 풀어가기 위해서는 “인문학이 학생들에게 무엇을 가르칠 수 있는가”라는 문제에 대한 반성적인 고찰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대학교수들의 연구와 교육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고, 따라서 인문학의 본령이 무엇인가라는 문제는 바람직한 인문학 교육을 생각할 때 무시할 수 없는 주제다. 그렇지만, 대학에서의 인문학 교육의 목표가 교수가 될 인문학자를 키워내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 역시 자명하다. 학생들 중에는 대학원에 진학하거나 유학을 가서 10년 가까이 더 공부하는 학생도 있지만, 대학교육의 초점을 이들에게, 즉 교수를 재생산하는 데 맞출 수는 없는 것이다.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지금까지의 논의는 인문학이 무엇을 하는 학문인가에 초점을 맞추었거나, 교육에 대해 얘기할 경우에도 교양교육과 인성교육만을 인문학이 제공하는 교육으로 국한했다는 문제가 있었다.

    내 글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먼저 나는 대학에서 제공하는 인문학 교육의 핵심이 학생들에게 ‘인문학적 사유’를 교육·훈련하는 것임을 주장하려 한다. 그리고 이러한 인문학적 사유가 인문학적 질문을 던지고 텍스트에 바탕해서 이를 해결하는 과정으로 구성되어 있고, 이는 훈련을 통해 개발할 수 있는 것임을 강조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창조적인’ 인문학적 사유가 ‘실용적인’ 학문이나 사회활동에 필요한 창조성에도 적용될 수 있음을 보이려 한다. 즉 비판적이고 창조적인 인문학 연구와 교육이 실용적일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려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독립적이고 비판적인 시민을 길러내는 학문

    내가 있는 캐나다에서도 인문학이 위기에 처했다고 염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1997년 온타리오주의 칼턴(Carleton) 대학에서 졸업생이 직장을 잡지 못한다는 이유로 고전(classics), 독문학, 국제언어와 같은 몇 개의 인문학과를 갑자기 폐쇄해서 수십 명의 교수가 직장을 잃고 강사로 전직하는 등 엄청난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일은 오히려 한국 같으면 더 일어나기 어려웠을 일이다.

    내가 몸담고 있는 토론토대학도 공과대학이 기업과 정부의 지원을 받아 급속하게 팽창하는 반면, 인문학은 제자리걸음이거나 예산이 축소되고 있다. 정부가 인문, 사회과학 연구를 지원했던 ‘사회과학과 인문학 연구 위원회(Social Sciences and Humanities Research Council)’의 연구비도 지난 몇 년간 대폭 삭감됐다. 게다가 최근 이 위원회는 인문학자들에게 자신의 연구가 세상 사람들의 삶에 어떤 바람직한 영향을 주는가를 구체적으로 명시하라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분석철학자들이 전세계에서 10명 정도의 전문가들만 이해할 수 있는 논문을 쓰기 위해 연구비를 타던 ‘순수 연구의 시대’는 이제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문학의 위기는 대학 기능의 변화와 관련이 있다. 19세기까지 서구사회에서 대학은 국가와 제국을 이끌어나갈 소수 엘리트를 키우는 곳이었고,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교육은 민족국가를 상징하는 문화에 대한 교육이었다. 문학, 역사, 철학과 같은 인문학이 이러한 ‘문화 대학’에 가장 적합한 교육이었음은 물론이다. 그렇지만 19세기를 통해 대학이 떠맡게 된 또 다른 임무가 있었는데, 그것은 산업 인력과 전문 인력의 양성이었다. 이런 필요에 의해 과학·기술 교육이 대학에 도입되었고, 이렇게 도입된 과학·기술 교육과 연구는 인문학을 밀어내고 대학의 중심으로 자리잡았다.

    이 과정은 대학의 양적 팽창과 그 궤적을 같이한다. 대학의 양적 팽창은 특히 20세기 후반부에 두드러졌다. 1950년에서 1980년 사이에 서구 산업국가에서 인구대비 대학생의 비율은 4~30%로 급속하게 성장했고, 한국의 경우 이는 더욱 뚜렷해서 95년 기준으로 18~21세 젊은이 56%가 대학에 진학했다. 대학이 팽창하면서 대학 졸업생의 위상도 변했다. 대학 졸업생 대부분이 ‘제국’을 이끌고 갈 엘리트가 아닌, 지식산업과 서비스산업에 종사하는 사무·지식노동자나 관료체계의 하위직 관료로 흡수됐다.

    한국의 경우에도 대학 졸업장을 받으면 ‘엘리트’ 또는 ‘지식인’ 얘기를 듣던 시절은 70년대 말에 끝났다고 볼 수 있다. 박사가 넘쳐나는 사회에서 대학 졸업생에게 돌아갈 ‘지식인’이란 ‘훈장’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대학에 다니는 학생 대부분이 졸업 후에 비판적이고 독립적인 시민으로 살아갈 사람들이다.

    나는 대학교육과 인문학의 위기를 이러한 현실 위에서 생각해야 한다고 본다. 대학생이 졸업을 하고 독립적이고 비판적인 시민으로 살아가는 아주 중요한 요소는 직장을 잡고, 자신의 생계를 책임지는 것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그 일에서 작지만 새로운 것을 만들고, 여가를 즐길 줄 알고,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 맞게 자신을 계속 충전할 줄 아는 것은 현대사회를 사는 시민의 기본이다. 학생들이 취직에 눈이 멀어 학과공부를 게을리한다는 한탄이나, 더 이상 사회와 민족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선배와 교수들의 불만이 자주 들리지만, 이들 선배나 교수들이 우리사회가 대학 졸업생들에게 직장을 골라 갈 수 있는 사치를 허용하는 사회가 아님을 모를 리 없다.

    학생들이 취직에만 몰두하는 사태를 안타까워하는 대학교수들은, 힘을 합쳐서 대졸자가 치르는 공무원 시험과 고시, 방송사·대기업·언론사와 같은 인기 직장의 입사시험을 대학에서의 공부와 더 밀접하게 바꾸는 데 힘을 쏟아야 한다. 학생들이 취직을 위해 대학의 전공과는 무관한 공부를 한다고 나무랄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취직할 때 치러야 하는 준비와 대학의 교육을 더 비슷하게 만들어서 학생들을 이중의 부담에서 덜어주어야 대학교육을 정상화할 수 있다.

    인문학의 위기와 관련이 있는 또 다른 변화는 지식기반산업의 부상을 중심으로 한 산업구조의 변화와 이에 따른 지식생산양식의 변화다. 기번스(M. Gibbons) 같은 서구의 몇몇 학자들은 지식기반사회가 대두하면서 지식생산양식이 변했음을 지적한다. 이들은 지식생산을 제1양식과 제2양식으로 나누고, 점차 지배적이 되어가는 제2양식의 특징으로 ①지식의 응용 ②학제간의 넘나듦 ③지식 생성 공간의 이종성(異種性)과 수평적 인간관계 ④사회적 책임 ⑤대중과 의뢰인에 의한 지식평가를 들고 있다.

    한국 역시 지식기반산업을 중심으로 한 산업구조로 빠르게 이행중이며, 이런 이행은 현 정권의 ‘재벌개혁 후 지식기반 구축’이라는 경제 정책과 ‘지식공동체’를 필두로 한 노사정책을 볼 때 더 빨라질 전망이다. 경제학자들은 2010년경 지식기반산업이 한국 GDP의 50%를 차지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유연적 생산 시기의 지식노동은, 한 분야에 대한 전문성보다는 분야와 분야를 넘나들 수 있는 능력을, 세분된 전문지식보다는 두 가지 이상의 다른 지식을 섞을 수 있는 유연한 사고를 필요로 한다. 세분된 학과에 근거한 전공제도는 70년대 생산업을 주로 한 산업구조에는 적합했을지 몰라도, 21세기 지식기반사회를 위한 것은 아니었다는 얘기다. 이런 외부의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더 정확하게는 외부 변화의 압력에 못 이겨) 대학은 90년대 중반 이후 ‘학부제’를 도입했는데, 학부제는 학생에게 학과와 전공을 선택할 자유만 부여해서 가뜩이나 인기가 없던 철학, 역사, 문학과 같은 인문학 분야를 ‘고사’ 상태로 몰아넣었다.

    대학생들은 철학과 같은 인문학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현재 대학에서 강의하는 인문학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 대학생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한 통계를 보면 한국 사회에서 철학의 몫을 키워야 한다는 데 동의하는 학생이 79.4%였음에 반해, 현재 철학 연구에 만족한다는 학생은 3.5%에 불과했다. 이런 현실은 인문학이 빠르게 변하는 상품생산과 지식생산의 구조 속에서 별로 유용하지 않은 지식이라는 인식으로 인해 악화되고 있다. 반면 대학 밖에서의 인문학 강좌는 인기를 끌고 있다. 이는 지금 대학에서 강의되고 연구되는 인문학의 위상이 몹시 불안정한 것임을 드러낸다.

    많은 인문학자들이 인문학이 ‘삶의 문제’를 다루고, ‘의미있고 가치있는 삶과 올바른 가치체계’를 탐구하며, ‘사람다움의 당위와 실현을 추구’하는 인성교육임을 강조한다. 인문학이 삶의 바른 자세와 ‘도(道)’를 가르치는 학문이라는 주장은 학(學)과 실천의 합일을 강조했던 유학의 전통과도 닿아 있고, 따라서 우리의 ‘정서’와도 잘 들어맞는다. 그렇지만 이러한 담론이 인문학을 육성해야 하는 정당성만 제공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담론은 동양이나 서양의 전통사회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지배 엘리트들에게 불어넣었던 이데올로기와 일맥 상통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의 인문학 교육에 대해 얘기할 경우에도, (예를 들어) 윤리학을 배우는 것이 실제로 사람을 윤리적으로 만드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없지 않다. 나는 인문학 교육이 학생들에게 다양한 가치(value)를 접하게 하고, 이중 하나를 선택해보는 경험을 하게 함으로써, 이들이 실제 세상에서도 판단의 유연성과 문화적 다양성에 대한 안목을 가질 수 있다는 주장에는 동의할 수 있어도, 철학 문학 역사와 같은 인문학 교육이 바로 인성교육으로 이어진다는 주장에는 쉽게 동의할 수 없다. 이웃과 다른 사람을 위하는 마음과 실천은 윤리학을 배워서가 아니라, 혼자서 할 수 없는 일을 협동해서 이루어 봄으로써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연과학자들은 과학이 기술에 끼치는 영향을 들어 순수과학의 효용을 강조하듯이, 일부 인문학자들은 인문학과 실용적인 사회과학의 상호작용을 들어 인문학의 효용을 말한다. 인문학은 사회과학의 이론을 위한 구체적인 데이터를 제공하고, 동시에 사회과학에서 이루어지는 거대한 일반화에 도전한다는 것이다. 인문학과 사회과학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과 협력이 양자의 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문제는 사회과학도 어렵기는 매한가지라는 사실에 있다. 인문학보다 조금 나을지는 몰라도 사회과학은 그 실용성에서 공학이나 의학의 특권적 위치와는 거리가 멀다.

    최근 인문학과 과학기술의 관계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점점 커지고 있다. 인문학이 문명에 대한 균형감각을 제공하는 학문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과학기술 시대의 인문학이 적극적으로 과학기술과 결합하고 과학기술을 그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에 반대가 있을 수 없다. 또 문학, 문화, 예술과 같은 인문학의 주제들이 정보기술의 내용을 채워줌으로써 문화산업을 육성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할 수 있음도 분명하다.

    조금 더 구체적인 결합방식으로 과학사·과학철학·과학사회학과 같은 과학학 분야의 육성, 문화연구와 공학의 ‘절합’을 통한 ‘문화공학’과 같은 간학문(interdisciplinary programs)의 제도화, 인문학·공학·자연과학의 상호수렴 경향을 바탕으로 한 ‘인문적 통일과학’의 설립 등이 제시됐다.

    이와 같은 문제제기가 무척 중요하고, 이러한 노력이 과학기술과 정보화시대 인문학의 효용을 고양한다는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인문학과 과학기술이 생산적인 대화와 공동연구를 통해 얼마나 협력할 수 있을지는 의문으로 남는다. 무엇보다 과학기술자들이 이런 일에 발 벗고 나설 리 만무하다.

    그렇다면 인문학자들이 이런 ‘잡종교배’를 담당해야 하는데, 인문학과 과학기술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새로운 문제와 인식틀을 만들어내기에는 대다수 인문학자들이 지금까지 각각의 전공분야에만 너무 안주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이 둘을 매개해줄 수 있는 과학사·과학철학·과학사회학 같은 과학학 분야의 학문은 한국 대학의 엄격한 학제 때문에 설자리를 찾지 못한 채 헤매고 있는 실정이다.

    학자들의 반성, 번지수가 잘못됐다

    일군의 인문학자들은 이런 위기가 한국 인문학이 우리 것을 제대로 연구하거나 가르치지 못하고 서양의 학문에 각주를 다는 식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나는 이들의 주장이, 외국 학자들의 책이나 논문에서 이것저것 따와서 자기 연구를 대신하거나 자기 글의 권위를 높이려는 일부 상식 이하의 관행에 대한 비판이라면, 이에 동의한다.

    그렇지만, 일부가 제기하는 ‘우리 글쓰기’나 ‘새로운 진리’와 같은 개념이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대안이 될 수는 없다고 본다. 수준 낮은 연구와 교육에 대한 비판은 수준 높은 연구와 교육을 통해 이루어져야지, 그 실체가 모호한 ‘우리 것’에 대한 회귀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특히 전통과 우리 것에 대해 얘기하면서 종종 ‘정서’에 호소하거나 선문답 같은 담론으로는 인문학의 위기를 심화할 뿐이다. 인문학의 사유는 복잡한 수학 문제를 푸는 것과 같은 엄밀하고 분석적이며, 동시에 콘텍스트적이고 반성적인 사유를 할 줄 아는 능력을 개발하는 것이지, 날개를 달고 날아가는 식의 ‘꿈 같은 상상력’을 키우는 것이 아니다.

    인문학적 사유의 효용은 지식생산양식의 변화와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전지구적인 네트워크 혁명이 경제·지식·인간관계·일상생활을 빠르게 변화시키는 지금, 인문학자들은 인문학이 가르칠 수 있는 인문학적 사유법(way of thinking)이 무엇이고, 이것이 어떻게 학생들에게 독립적이고 비판적인 시민이 갖춰야 할 유연하고, 강인하며, 동시에 적응력 있게 생각할 수 있는 힘을 부여할 수 있는가를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학의 커리큘럼을 실용적인 것으로 바꾸는 시도는 이를 위한 한 가지 방법이다. 철학과에서 윤리학만이 아니라 최근 사회문제로 대두하고 있는 생명윤리학(bioethics)을 개설한다든지, 역사학과에서 성(sex)의 역사를 개설하는 것과 같은 시도는 일단 상황을 개선하려는 일차적인 시도로 의미가 있다. 교육의 내용을 현실의 문제와 더 밀접히 관련시키는 것은, 학습 의욕을 증진시킬 뿐만 아니라 교육의 ‘유용성’을 어느 정도 증진시키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커리큘럼을 조금 바꾸는 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다. 정보기술과 그에 근거한 지식의 급속한 팽창, 그리고 이를 공유하는 전지구적인 정보 네트워크의 등장이 새로운 지식의 생산·소비 속도와 패턴을 빠르게 변화시키고 있는 실정에, 실용적인 과목을 한두 개 새로 개설하는 것으로는 이런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한다고 볼 수 없다.

    더 근본적인 것은, 정보를 취사선택하고 조합해서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 내고, 이 지식을 다시 정보로 바꾸어 세상에 내놓을 수 있는 안목과 능력을 키워주는 것이다. 지식기반 사회에서 대학 교육이 할 일은 지식을 전수하는 것이 아니라, 정보와 지식을 매개하는 나선형의 상호작용을 이해하고 이를 조작할 수 있는 학습 능력(learning capacity)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세상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은 어떻게 길러지나

    나는 내 수업을 듣는 학생들에게 기말 보고서를 내주면서 항상 다음과 같은 얘기를 한다.

    “중요한 것은 텍스트를 독창적이고 창조적으로 읽는 것이고, 같은 텍스트를 읽은 다른 사람들이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그 ‘무엇’을 발견하는 것이다. 새로운 문제의식을 가지고, 항상 질문을 던져가면서, 콘텍스트를 고려하고, 자신이 읽은 텍스트를 다른 텍스트와 비교하고 결합시키면서 읽고 생각하다 보면,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인문학의 연구는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이 읽었던 데카르트의 ‘방법서설’과 같이 고전적인 텍스트에서도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다는 가정에 근거하고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인간, 다른 유기체, 환경, 기계와 같은 무생물, 언어와 상징, 그리고 이것들의 활동과 순환, 그 네트워크를 맺어주는 복잡다단한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 이중 인문학의 대상은 주로 언어와 상징의 세상, 즉 씌어진 세상(inscribed world)이며, 인문학적 사유라는 것은 씌어진 세상을 구성하는 텍스트(text)를 읽고 이해하는 방법이다.

    텍스트에는 ‘방법서설’과 같은 고전에서부터, 우리가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책과 논문, 에세이, 신문과 잡지, 인터넷 자료들은 물론, 노래와 영화, 표정과 의상과 같은 문화까지 포함된다. 텍스트에 대한 이해가 중층적이고 창조적일수록 더 바람직하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텍스트를 대상으로 한 인문학적 사유는 고차원적인 정신 노동이다. 만지고 보는 차원을 뛰어넘는 인간의 이해는, 항상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답을 찾음으로써 이루어지는데, 이는 인문학적 사유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인문학적 사유는 주로 상징과 언어의 세상에서 발견되는 문제를 풀면서 훈련할 수 있다. 훈련된 사유가 지향하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새로운 문제를 찾아내고 이미지의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배양하는 것이다.

    따라서 텍스트의 내용을 그저 주입하거나 고전을 ‘성현의 말씀’과 같은 식으로 절대화하는 교육은, 학생들을 정보혁명 시기의 비판적인 시민으로 교육하는 데 적합하지 않다. 사실보다는 해석을, 암기보다는 비판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는 능력을, 지식 그 자체보다는 필요한 지식을 찾고 이용할 줄 아는 역량을, 텍스트의 요약보다는 그 속에서 남들이 보지 못하는 무엇을 찾아내는 안목을 키워주어야 한다.

    이런 안목은 훈련을 통해서 키울 수 있다. 인문학 교육은 학생들에게 질문을 주고, 텍스트를 바탕으로 해서 이를 해결하게 하는 단계부터 시작해야 한다. 예를 들어, ‘과학과 사회’를 강의하는 교수가 학생들에게 “인터넷 혁명이 과학자들의 실험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라는 주제에 대해 보고서를 제출하라고 요구한 경우를 생각해 보자. 이를 위해 학생은 무엇보다 교수가 수업 시간에 얘기했을 인터넷 혁명의 성격과 과학자들의 실험 특성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이 각각의 주제와 이의 관련을 보여주는 참고문헌을 어떻게 찾는지 알아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도서관이나 인터넷의 자료를 능숙하게 이용할 줄 알아야 한다.

    참고문헌을 찾았으면 이를 자신의 역량에 맞게 추릴 수 있어야 한다. 짧은 보고서를 위해 논문 수백 편과 책 수십 권을 읽을 수 없는 것은 자명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논문이나 책을 훑어보고(어떤 때는 제목과 개요만 살펴보고), 어떤 것이 중요하고 자신의 과제와 직접 관련이 있고 어떤 것이 그렇지 않은가를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참고문헌이 많지 않을 때는 과학자들을 인터뷰하는 것 같은 비상계획을 빨리 세우는 것도 중요하다.

    이 질문에 답하는 데 필요한 능력은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가장 핵심적인 능력은, 찾은 책이나 논문을 읽고 정확하게 요점을 파악할 수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 서로 다른 주장들을 비교하고 각각의 타당성을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주장을 평가한 기반 위에서, 자신의 새로운 의견이나 결론을 만들어낼 줄 알아야 한다. 자기 주장을 설득력 있게 만들어줄 콘텍스트를 잘 구성해야 하며, 이렇게 만들어낸 자신의 의견에 대한 타당성과 그 의미를 반성적으로 생각할 줄도 알아야 한다.

    이를 바탕으로 보고서의 구조를 생각해야 한다. 서론에서 문제를 던지고, 본론의 논지를 매끄럽게 펼 수 있어야 하며, 결론으로 자신의 공부가 지니는 의미에 대해서 정리할 줄도 알아야 한다. 언제 어떻게 왜 인용해야 하는가를 알아야 하며, 참고문헌을 사용해서 각주나 미주를 적절한 위치에 달 줄도 알아야 한다. 이 모든 것을 위해 무엇이 표절이고 무엇이 표절이 아닌가도 알아야 한다. 모국어와 외국어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추는 것도 이 단계를 위해 필요한 일이다.

    이러한 훈련을 바탕으로 학생들은 ‘인터넷 혁명이 자연 과학자들의 실험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문제 자체를 스스로 찾아내고 이에 대해 좋은 연구를 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를 수 있다. 교수가 “인터넷 혁명에 대해 한 가지 주제를 잡아 논문을 써 오라”고 했을 때, “20세기 인터넷 혁명의 제반 특성에 대한 일반적 고찰”과 같이 뜬구름 잡는 주제가 아니라, “인터넷이 휴먼게놈 계획에 끼친 영향”과 같은 구체적이고, 다룰 만하고(manageable), 의미 있는 주제를 잡아내고, 이에 대해 좋은 연구를 수행해서 독창적인 결과를 내놓을 수 있다는 얘기다.

    자연과학에서도 주어진 문제를 잘 푸는 것과 스스로 중요한 문제를 찾아내는 것 사이에 질적인 차이가 있듯이, 인문학의 경우도 비슷하다. 스스로 중요한 질문을 던지기 위해서는 무엇이 중요하고 가치 있는 연구주제인가를 골라낼 수 있는 안목이 있어야 하며, 이를 위해 자신이 다루는 분야의 현 연구상태에 대한 개략적인 이해는 물론, 이들 중 중요하지만 아직 충분히 연구되어 있지 않은 분야나 주제가 무엇인가를 포착할 수 있는 비판적인 시각이 있어야 한다.

    이런 비판적인 시각에서 출발해, 큰 주제를 새로운 각도에서 조망해줄 수 있는 작은 연구주제를 찾아 이에 대해 독창적으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하고, 그 생각을 바탕으로 다시 큰 주제의 의미를 새로운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독창적인 해석에 대한 열정이 이런 공부와 연구를 관통해야 함은 물론이다.

    이러한 인문학적 사유는 인문학 강의를 통해 더욱 날카롭게 계발하고 연마할 수 있다. 무엇보다 교수의 강의는 질문을 던지고 이를 해결하는 모범을 보여주어야 한다. 한 학기 강의를 통해 생각해볼 큰 질문 몇 개를 수업 초기에 던져주고, 강의가 진행되면서 그 문제들이 어떻게 해결되는가를 보여주어야 한다. 개별 강의에서도 이번 강의에서 다룰 중요한 문제 한두 개를 제시하고, 교수의 강의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수업이 끝날 무렵이면 학생들이 스스로 유도할 수 있도록 학생들의 사고를 도와주고 인도해 주는 식이 돼야 한다. 교수가 학생에게 던지는 질문만이 아니라 강의를 통해 학생의 질문을 적극적으로 유도해야 함은 물론이다.

    강의는 토론과 연구지도로 보충할 수 있다. 학생들은 매 강좌 요약 차원을 뛰어넘는 보고서를 작성하고 그에 대한 전문가(교수)의 제대로 된 비판과 평가를 받아야 하며, 독서와 토론을 통해 텍스트를 읽고, 질문을 던지고, 이에 답을 제시해 보고, 자신의 견해에 대한 다른 사람의 견해를 청취할 기회를 가져야 한다. 텍스트에 대한 토론이 진행될 때 교수가 할 일은 학생들이 텍스트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한 새로운 문제와 질문을 찾아내는 모범을 보이는 것이고, 이런 질문들이 어떻게 텍스트를 한 단계 높은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게 하는가 보여주어야 한다.

    이런 훈련을 거치면서 학생들은, 지금까지 무심코 보았던 텍스트에서 새롭고 의미있는 문제를 찾아내고 이를 바탕으로 텍스트를 다시 해석해 내듯이, 지금까지 무심코 보았던 세상을 어떻게 새롭게 보고 이해할 수 있는가를 깨달을 수 있다. 새롭고 독창적인 것에 가치를 두고, 주변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차이에 주목하고, 그럴 듯한 헛소리와 의미있는 주장을 구별하는 것과 같은 인문학적 감수성은 이런 훈련을 통해서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이런 훈련을 받은 학생들은 사회의 어떤 분야로 진출해도 그 분야의 실무를 익히면 인문학적 사유를 적용해서 창조적인 결과를 낼 수 있다. 현대적 경영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에 대해 오펜하이머사의 회장이었던 아더 오펜하이머(Arthur Oppenheimer)가 한 다음과 같은 얘기를 들어보자.

    “오늘날의 경영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독립적이고 창조적으로 생각할 줄 알고, 불완전하고 변화하고 모호한 환경에서 기능할 줄 알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데이터가 충분하지 않을 때 결정을 내릴 줄 알고, 협상하고 타협하며, 위험을 무릅쓸 줄도 알아야 하고, 정량적인 데이터에만 의존하지 않으며, 단기 목표와 장기 계획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하고, 누구에게나 명백한 것과 그저 주관적인 것을 거부할 수 있어야 하고, 동료와 효과적인 작업 관계를 맺을 줄 알아야 하며, 사람을 고무하고 갈등을 해결할 줄 알아야 하고, 정보 네트워크를 잘 만들 줄 아는 능력이다. 이것은 모두 인문교육에서 육성되는 능력들이다.”

    1985년 당시 제너럴 모터스의 회장이었던 로저 스미스(Roger Smith)도 인문학 교육의 예찬론자였다. 그는 인문학 교육이,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다양한 시각을 제공하고, 혁신의 기본 요소인 창조성을 높이 평가하는 안목을 키워주며, 인간을 폭넓게 이해하게 함으로써 대인관계에 도움이 되고, 질적으로 우수한 것에 대한 존경심을 키워준다고 지적했다. 특히 그는 “전혀 다른 것들 사이의 관계를 볼 줄 알고, 이렇게 서로 연관성 없어 보이는 것들을 결합해 새로운 배열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이 예술과 문학, 역사와 같은 인문학에서 배양하는 능력이며, 바로 이것이 ‘성공에의 공식’이 존재하지 않는 요즘과 같은 기업 경영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능력”이라고 역설했다.

    나는 인문학자들이 이런 주장을 포함해서 인문학의 ‘실용성’에 대해 적극적으로 생각하고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인문학의 위기를 맞아서 선언적인 시도는 자주 볼 수 있었지만, 선언만 가지고는 부족하다. 퀀텀 펀드(Quantum Fund)의 조지 소로스(George Soros)가 칼 포퍼(Karl Popper)의 제자였기 때문에 철학이 실용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심정적인 위안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위기를 극복하는 실제적인 힘이 되기는 힘들다. 정말로 필요한 것은 그가 포퍼의 철학에서 무엇을 배웠고, (실제로 그런 것이 있다면) 이 지식이 어떻게 사용됐는가에 대한 적극적인 구명이다.

    이는 인문학이 자본의 논리 앞에 굴복하는 것도, 신자유주의에 항복하는 것도 아니다. 인문학의 ‘실용성’을 밝히고 이를 교육에 적극 도입하는 것은 사실 우리의 복잡한 세상을 조금 더 깊게 이해하는 과정이고, 이는 바로 인문학의 본령과 붙어있다.

    인문학은 ‘실용성’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야

    인문학자들은 기술이 시장지향적이며, 몰가치적이고, 피상적임에 반해, 인문학은 인간적이고, 가치지향적이며, 근본적이라는 식으로 양분하는데, 나는 인문학과 기술을 각각 ‘순수’와 ‘응용’으로 나누고, 인문학은 응용학문에서 추구하는 ‘실용’과 무관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인문학의 위기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모든 지식이 직·간접적으로 연관돼 있고, 지식과 문화가 산업의 핵심으로 자리잡은 지금 순수와 응용의 경직된 구분은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잘못된 것이고, 학문의 건강을 해치기 때문이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대학의 커리큘럼을 실용적인 것으로 바꾸는 것은 이를 위한 한 가지 방법이다. 그렇지만 더 근원적인 것은 인문학이 실용적인 연구를 조금 끌어안고, 인문학 교육이 한두 과목 실용적인 과목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인문학적 사유 자체가 그 근본에서 ‘실용적’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모색하여, 이를 교육하고 이런 효용을 세상에 설득하는 것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 사회에는 상징과 언어가 있고, 인문학은 상징과 언어로 이루어진 세상에서 우리가 맞닥뜨리는 수많은 수수께끼를 푸는 매우 강력한 방법을 제공한다. 따라서 대학에서 4년 동안 인문학을 전공하거나 부전공한 학생들은 이 언어와 상징의 세상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다른 학생들보다 더 잘 다룰 수 있는 훈련을 받아야 하며, 이를 위해 기존 주장이나 해석을 비판적으로 검토할 수 있는 기본 소양을 갖춰야 한다. 또 다른 사람의 주장을 비판적으로 보듯이, 자신의 주장도 비판적으로 볼 수도 있어야 한다.

    이들은 세상을 새롭게 볼 수 있어야 하고, 새로운 것을 높이 평가하고, 새로운 것이 필요할 때는 이를 만들 수도 있어야 한다. 세상을 설명하는 성급한 이론이나 단순한 공식에 만족하기보다, 서로 다른 견해가 나타나는 원인에 대해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차이에서 동질성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하며, 하나라고 믿어온 것을 차이로 특징지을 수 있는 상이한 개체나 그룹으로 쪼갤 줄도 알아야 한다. 중심의 목소리를 의심할 줄 알아야 하며, 주변의 낮은 목소리에 힘을 실어줄 수도 있어야 한다. 보편적인 이론을 해체할 줄도 알아야 하고, 개개인의 경험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지닌 보편성을 발견할 수도 있어야 한다.

    인문학을 공부한 학생들은 세상을 흑과 백, 정답과 오답, 진보와 퇴보의 극과 극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이런 양분법의 중간영역에 존재하는 회색지대와 ‘잡종적 존재’의 창조적인 가능성을 감지할 수 있어야 한다. 세상을 이렇게 보고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은 새로운 사고·조직·인간관계·상품을 만들어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가장 실용적인 힘이다. 이러한 인문학적 사유는 지식과 정보가 나선형으로 변환하면서 생산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잡는 지식생산양식의 핵심적 변화 과정과 유사할 뿐만 아니라, 맞물려 있기까지 하다.

    나는 인문학적 사유가 질문을 던지고, 텍스트를 읽고, 질문에 대한 설명과 답을 끈질기게 찾아보는 수많은 훈련과정을 통해서 키워지는 것임을 주장했다. 그렇지만 인문학자들의 연구에 대해서는 별로 얘기하지 않았다. 처음에 언급했듯이, 이 글의 주제는 인문학의 위기를 대학교육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한 가지 예측할 수 있는 것은, 창조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훈련받은 학생 중에 더욱 창조적인 학생들이 인문학 연구에 평생을 바치겠다는 생각으로 학문을 택할 때, 한국 인문학의 ‘식민성’이나 ‘열등감’ 운운하는 얘기는 자연히 사라질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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