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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준과 불화? 이렇게 거짓말해도 되는 거요?”

도중하차 박세직 전월드컵조직위원장의 항변

  • 육성철·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정몽준과 불화? 이렇게 거짓말해도 되는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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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세직 2002한·일공동월드컵조직위원장. 그는 98년 5월 27일 자민련 김종필 국무총리서리의 추천으로 조직위원장에 취임했다. 99년 12월까지 이동찬 전임위원장의 잔여 임기를 채운 박위원장은 2000년 1월18일 조직위 총회에서 만장일치로 재신임을 받아 2002년 12월까지 조직위원장을 맡게 돼 있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6개월여. 박위원장은 도중하차했다. 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과 박세직 조직위원장의 힘겨루기는 의외로 싱겁게 끝났다. 무슨 곡절이 있었던 것일까.》
7월 28일 오후. 기자는 서울 광화문 미국대사관 뒤편 이마빌딩 8층에 있는 월드컵조직위원장실을 찾았다. 박세직 위원장은 하루 전날인 27일 “대승적 차원에서 사임을 결심했다. 8월 8일까지 대통령의 뜻을 기다린 뒤 답변이 없으면 물러나겠다”는 입장을 정리한 직후에 기자를 맞았다. 대형 유리창을 통해 청와대가, 오른쪽엔 문화관광부가 보였다. 사진기자의 요청에 따라 창밖을 내다보는 박위원장의 표정은 줄곧 상기돼 있었다. 그의 목소리도 평소보다 훨씬 거칠었다. 목이 컬컬하다며 냉수를 시킨 박위원장은 “다른 사람들처럼 문화관광부 보도자료를 쓸 일이지 뭐하러 나를 취재하느냐”는 말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어제 저녁 그동안의 입장을 바꾸어서 사퇴 의사를 밝히셨습니다. 심경에 변화라도 있으셨는지요.

“문광부 장관이 전혀 사실과 다른 얘기를 언론에 발표하고 그것을 기자들이 그대로 쓰는 걸 보고 법적 대응을 하려고 변호사와 명예훼손 문제에 관한 검토까지 했습니다. 끝까지 싸울 생각도 해봤습니다. 그런데 파월장병들이 문광부로 쳐들어가서 점거농성을 하겠다는 겁니다. 만약 그러다가 지난번 사태처럼 큰 싸움이라도 벌어지면 내가 다 시켰다고 할 거 아닙니까. 나라가 시끄러워지는 것을 막고 싶어서 마지막으로 대통령의 뜻을 기다리기로 한 겁니다. 사퇴 의사를 표명했을 뿐이지, 아직은 사퇴한 게 아닙니다”

“세상에 이런 억지가 어디 있어”

박위원장은 ‘허위사실’이라는 말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이것은 7월25일 박지원 장관이 언론사 체육부장단 기자간담회에서 직접 배포한 보도자료를 두고 한 말이다. ‘월드컵조직위원회 위원장 교체와 관련하여’라는 제목의 보도자료는 ‘박세직 위원장을 사퇴시킬 수밖에 없다’는 문광부의 입장을 잘 보여주고 있다.

문광부와 박세직 위원장의 의견은 여러 지점에서 부딪친다. 먼저 1월18일 열린 조직위 총회의 성격이다. 문화관광부는 당시 박세직 조직위원장을 교체하려 했으나 박위원장이 “총선 때까지 연기해달라”고 강력히 요구해서 그 시기를 늦췄다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 박세직 위원장은 “말도 되지 않는 억지”라고 반박했다.

“정말 교활한 거짓말쟁이야. 세상에 어떻게 그런 거짓말로 나를 자리나 구걸하는 졸장부로 만들어. 당시에 나도 문화관광부가 나의 재신임 여부를 검토중이라는 얘기를 들었어. 총회를 며칠 앞두고 박지원 장관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아무 대답이 없어. 아, 뭔가 있구나, 직감이 가더라고. 그래서 총회가 열리던 날 아침에 박장관을 직접 찾아가서 물어봤어. 그랬더니 박장관이 뭐라고 했는지 알아. ‘불화설이 있기는 하지만 대단한 문제가 아니다. 남자 세계에서 해결 못할 일이 뭐 있느냐. 정몽준 회장하고 셋이 모여 저녁이나 함께 하면 끝나는 거다’라고 했어. 만일 박장관의 말대로 내가 일을 잘못했으면, 그때 나를 선출하지 말았어야지. 그랬으면 나도 털고 나와서 총선에 출마했을 거 아냐. 만장일치로 뽑아놓고 이제 와서 그때 다 결정된 일이니까 물러나라고. 이런 억지가 어딨어.”

박위원장은 박장관이 배포한 보도자료에 관해 물을 때마다 언성을 높였다.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랐고 말투도 반말조로 바뀌었다.

1월18일이면 정치권이 온통 총선 분위기에 젖어 있던 무렵이다. 박세직 위원장 역시 자신의 지역구인 경북 구미에 출마할 것인가를 놓고 저울질을 계속하고 있었다. 당시 구미는 갑,을로 나뉘어 있던 2개 선거구가 통합되느냐의 여부로 관심을 끌었다. 통합될 경우 박위원장은 한나라당의 김윤환 의원 또는 제3의 후보와 맞붙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자민련 관계자에 따르면 박위원장은 당시 선거구 협상을 벌이던 사람들에게 “구미 지역을 잘 부탁한다”는 말을 건넸다고 한다. 지역구의 여론도 수시로 보고받고 있었다. 결국 박위원장은 지역구 출마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박위원장의 바람과는 달리 구미지역 선거구는 통합됐고, 한나라당은 공천과정에서 김윤환 의원을 탈락시켰다. 박위원장으로서는 3파전을 벌여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로부터 한 달 뒤 박위원장은 총선 출마를 포기하게 된다.

“내가 직접 해보니까 국회의원과 조직위원장을 겸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습니다. 지역구에 관심을 가졌던 건 사실이지만, 그보다는 월드컵이라는 국가 대사에 힘쓰고 싶었습니다. 그런 내가 정치생명 운운하며 자리를 구걸했다는 겁니까. 그렇게 모략할 수 있는 겁니까”

“월드컵 때문에 총선 포기했다”

―당시 박위원장은 “지금 조직위원장을 바꾸면 총선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는 말을 했다면서요. 그건 총선과 조직위원장 자리를 연계시킨 듯한 인상을 강하게 풍깁니다.

“그 비슷한 얘기는 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선거를 치르는 마당에 경상도 출신이고 자민련 소속인 내가 물러나면 DJP 공조도 쉽지 않고 그렇게 되면 영남표를 얻는 데도 지장이 많지 않겠습니까. 그런 뜻으로 했던 말이지, 총선때까지 연기해달라고 말한 적은 없습니다. 그건 완전히 다른 얘기 아닙니까.”

―사실상 총선에서는 승산이 없었던 것 아닙니까. 당시 여론조사 결과로도 한나라당의 김윤환 의원이 훨씬 앞서고 있었는데.

“우리가 자체적으로 조사한 자료에서는 내가 앞섰어요. 또 우리 지역구는 외지 사람이 많아서 인물 중심으로 투표하기 때문에 이길 자신이 있었어요. 그런데 아주 혼탁하게 선거판이 진행됐어요. 정말 정치판에 대해 회의가 들었어요.”

문광부 보도자료에서 가장 논란이 됐던 부분이 바로 박위원장과 정회장의 불화설이다. 박장관은 박위원장과 정회장을 화해시키기 위해 저녁 식사 자리를 주선한 적이 4번 있다. 하지만 두사람의 스케줄이 맞지 않아 3인의 만찬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두 사람은 문광부의 주장처럼 정말 의식적으로 자리를 피했던 것일까.

“정말 교활해. 정확하게 말을 해야지. 장관이 제의한 술자리는 세 번이고, 한 번은 내가 제의한 거야. 총회를 앞두고 박장관이 처음 제안해서 1월27일로 날짜가 잡혔어. 그때 정회장이 해외출장을 가는 바람에 2월 1일로 미뤄졌어. 그런데 이번엔 박장관이 바쁘다는 거야. 세 번째 약속은 2월16일인데, 그 다음날이 바로 내가 출마 포기를 선언하는 날이잖아. 지역구 유지들도 만나야 하고 정신이 없어서 내가 양해를 구했지. 그 다음엔 내가 박장관과 정회장을 따로 만나서 술자리를 제안했는데 성사되지 않았어. 이렇게 자초지종을 설명해야지, 마치 밥 먹는 자리에 두 사람이 불화가 있어서 같이 안 나타난 것처럼 말하면 어떡해. 이렇게 거짓말을 해도 되는 거야.”

“불화설은 조작된 루머”

박위원장과 정회장의 불화설이 흘러나온 건 오래 전이다. 박위원장이 취임하던 직후부터 두사람이 월드컵의 주도권을 놓고 신경전을 펼친다는 얘기가 축구계에 나돌았다. 정회장이 FIFA(국제축구연맹)의 정보를 독점한다는 소문에서부터, 박위원장이 정몽준 회장을 무시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실제로 정회장은 박위원장 체제가 출범한 이후 여러 측면에서 달라졌다. 이홍구, 이동찬 위원장 시절엔 조직위원회 회의에 꼬박꼬박 참석해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했지만, 박세직 위원장이 들어온 뒤엔 회의에 불참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렇다면 두 사람 사이엔 실제로 이상기류가 있었던 걸까.

“정부로부터 처음 월드컵조직위원장을 맡아달라는 요청이 있었을 때 내가 먼저 정몽준 회장과 상의하고 결정했습니다. 그때 정회장이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어려운 시기니 맡아주는 것이 좋겠다’고 합디다. 그래서 이 사람과 함께 일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조직위와 축구협회가 일하는 과정에 이견을 보인 적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업무에 관한 부분이지, 그걸 가지고 두사람이 불화를 겪는다고 말하는 건 웃기는 일입니다.”

―올 초에 조직위원장의 판공비를 100% 인상하는 문제로 정회장이 이견을 제시한 일도 있지 않았습니까.

“정회장이 워낙 바쁘다 보니 결재과정에서 자세한 내용을 보고받지 못해서 생긴 오해입니다. 내가 알기로 정회장은 나의 판공비를 문제삼은 것이 아니라 예산의 효율적인 집행을 지적한 겁니다. 정회장이 문제를 삼아서 나는 그 자리에서 바로 소위원회를 구성해 재검토하라고 지시했고, 결국 원안대로 통과됐어요. 그게 무슨 문제입니까. 이견이 있어서 바로잡은 것인데.”

―지난해에는 박위원장이 후배를 조직위 직원으로 채용하려다 정회장과 부딪친 일도 있었다는데요.

“전문위원을 한 사람 두려고 했던 일이 있습니다. 내가 그래도 조직위원장인데 나를 측근에서 보좌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어서야 말이 됩니까. 그 정도는 내가 알아서 하도록 해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것도 못하면 위원장더러 뭘 하라는 겁니까”

박위원장의 거취 문제는 5월말부터 다시 수면 위로 부상했다. 문광부의 주장에 따르면 거듭 자진사퇴를 요구했지만 박위원장이 거부해 더 이상 안되겠다는 판단을 내렸던 셈이고, 박위원장의 의견으로는 5월25일 갑자기 닥쳐온 일이다. 박위원장에 따르면 5월25일 이홍석 문화관광부 차관보가 찾아와 “정치적으로 왔으니 정치적으로 가달라”는 의견을 전달하고 돌아갔다는 것이다.

―정말 5월25일 이전에는 문화관광부로부터 사퇴에 대한 어떠한 메시지도 받지 못했습니까.

“도대체 무슨 얘기를 들었다는 거요. 박장관이 뿌린 보도자료에는 별 얘기가 다 있지만, 나는 모르는 일입니다. 박장관이 나보고 물러나라고 했으면, 내가 뭐하러 이 자리에 앉아 있겠어요. 5월25일에 이홍석이가 뜬금없이 나보고 자리를 양보하라고 하는데, 정말 기가 막힐 노릇이야. 아니 생각을 해보라구. 1월에 다 결정된 일이면, 뭐하려고 장관이 저녁 자리를 주선하려고 했겠어.”

문화관광부의 보도자료에 따르면 박지원 장관은 박세직 위원장을 사퇴시키기에 앞서 자민련 고위층의 비서실장을 만난 것으로 돼 있다. 이 자리에서 박장관은 사퇴의 불가피성을 설명했고 자민련측 관계자도 “박장관의 입장을 이해한다”는 말을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 자민련 관계자는 “사실무근”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자민련의 이수영 총재비서실장은 “박위원장 문제로 박장관을 만난 일이 없다”고 해명한 뒤 “여러 얘기가 들려오기에 박위원장을 만나서 ‘정회장과 잘 지내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을 한 기억은 있다”고 덧붙였다.

―박위원장은 자민련 소속 당직자입니다. 거취문제를 자민련측과 협의했습니까.

“5월26일이었을 겁니다. 자민련 이수영 실장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박장관을 만났더니 나를 사퇴시킬 수밖에 없다는 말을 했다는 거예요. 박장관이 이실장보고 그랬대요. ‘FIFA 부회장을 사퇴시킬 수는 없고, 박위원장이 물러나는 것이 좋겠다. 이 문제를 공조와 연결시키지 않았으면 한다. JP에게 잘 설명해달라.’ 그래서 이 실장이 JP에게 보고했더니 JP가 ‘무슨 소리냐’며 화를 내더라는 겁니다. 절차적으로 맞지도 않고, 사퇴할 이유도 없는데 내가 왜 물러섭니까. 그래서 나도 ‘이대로 그만둘 수는 없다’는 입장을 정리한 겁니다”

박장관을 만나지 않았다는 이실장. 이실장과 박장관이 나눈 얘기를 직접 전해들었다는 박위원장. 이실장은 기자와의 전화인터뷰에서 “JP에게 그런 얘기를 보고하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여기서 서로의 주장이 맞지 않는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이 대목에 또 한가지 미스터리가 있다. 자민련은 박위원장이 사퇴압력을 받는 와중에도 소극적인 반응을 보였다. 김학원 대변인이 짤막한 입장발표를 했을 뿐 당 차원의 대응은 없었다. 이와 관련, 김대변인은 의미있는 말을 남겼다. “교섭단체 문제로 민주당과 공조가 필요한 시기였다. 한 개인의 문제에 당력을 집중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6월5일. 박위원장에 따르면 이날 박장관으로부터 처음 사퇴하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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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성철·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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