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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건설노동자의 회한수기

“건축현장 20년, 화려한 날은 가고”

  • 배명호

“건축현장 20년, 화려한 날은 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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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업의 전부는 사람이며 사회를 움직이는 주체 또한 사람이다.
  •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식의 정책은 바위를 깨뜨려 모래알을 만드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이것은 정부나 사용자가 수용해야 하는 당면과제로서 이 사회가 존재하는 이유다. 정부는 노동자에게 사랑을 베풀어야 하며, 노동자는 책임감으로 이어지는 단단한 결속의 토양에서 풍요롭고 넉넉한 거목의 뿌리를 내려야 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고통받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차가운 날씨에 길거리로 내몰린 실직노동자 외에도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일터를 잃고 길거리를 방황하는 노동자들의 아픔보다 더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IMF 이후 100만 명이 넘는 실직자가 생겨났다. 경기회복으로 그 수가 줄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75만 명의 실직자가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그 가운데 무려 50만 명이 건설노동자라는 사실을 통해 건설산업의 몰락과 더불어 건설노동자의 삶도 고난의 질곡으로 빠져들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건설산업은 현장 중심의 노동집약적 생산활동을 전제로 발주자, 설계자, 시공자의 3자 관계가 다단계, 다기능화되어 있다. 시공 분야도 원도급과 하도급으로 분화되어 있다. 그리고 설비투자, 상시고용과 같은 요소는 대규모 자본이 필요한 제조업에 비해 소규모 자본으로 공사에 참여할 수 있게 해준다. 또한 위험부담이 분산되어 있다는 점에서 자본의 축적이 불충분했던 우리나라에서 풍부한 인적 자원을 기반으로 손쉽게 발달할 수 있는 분야였다. 특히 건설산업은 타 산업에 비해 생산, 고용, 부가가치 효과가 크기 때문에 국민경제 성장을 주도해왔다.

우리나라의 건설업은 광복 직후엔 주한미군 발주공사 위주의 가설, 수리 활동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미군이 공사대금을 순조롭게 지불하면서 발주물량이 폭주했고 황금기를 구가하게 됐다. 그러나 1946년 말부터 부실공사의 범람과 업체의 난립으로 조금씩 쇠퇴해 독립산업으로서 기반을 갖추지 못했다.

1958년 정부는 난립한 건설업체를 정비하고 도급한도제 도입과 건설업 면허를 제도화하기 위해 건설업법을 제정했다. 1961년엔 건설부가 신설돼 1400개에 이르던 건설업체를 524개로 정비했다.

호황 누리던 건설산업

정비기를 거친 건설업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과 함께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면서 국민경제에 주축으로 등장했다.

건설산업은 70년대 후반 주택시장의 활성화와 함께 이른바 황금어장이라 불릴 만큼 많은 돈을 벌어들였다. 주택 보급률이 높아진 지금에야 환경이나 지리적 여건, 학군 등을 따져 집을 구입하지만, 그 때만 해도 투기바람이 불어 거의 모든 사람이 주택구입을 재산증식 수단으로 삼았다. 한마디로 짓기만 하면 팔리던 시절이었다. 공사가 시작되기 전 모델하우스를 짓고 분양만 하면 몰려드는 인파로 분양사무실은 초만원을 이루고 웃돈까지 퍼붓는 그야말로 호황기였다.

나는 1982년 건설회사에 입사했다. 그때만 해도 건설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마치 지금 젊은이들이 벤처기업에 몰리는 것처럼 그때는 건설이 인기 직종이었다.

건설회사 사장은 현장을 순회할 때마다 직원들에게 회식비를 주었다. 회식비는 기분에 따라 손에 잡히는 대로 주었다. 어떤 날은 액수가 너무 커서 다 쓰지 못하고 돌아갈 정도로 많은 돈을 준 적도 있다.

서울 강남이 개발되면서 벼락부자들이 생겨났고 그들의 씀씀이가 커지면서 강남은 명동 못지않은 상권으로 등장했다. 호화 술집들이 생겨나고 고급백화점들이 들어섰다. 내 눈에 강남은 돈을 쓰기 위한 거리로 보였다.

그때만 해도 강남의 술집에 가서 건설회사 명함만 주면 외상 술을 먹을 수 있을 정도로 건설회사 직원들은 술집에서 인기 있는 고객이었다.

해외로 진출한 건설회사

건설현장이 개설되면 제일 먼저 찾아 오는 사람들이 술집 홍보자들이었을 정도로 건설회사 직원들은 술을 많이 먹는 사람들로 인식되었다.

국내 건설시장의 활성화와 함께 해외로 진출한 건설사도 많아졌다. 초기에는 중동지역에 집중되었지만 지금은 세계 모든 나라에서 한국의 기술을 인정받고 있다.

해외현장으로 발령 나면 국내 임금의 두 배를 주었다. 그래도 해외로 가려는 사람들은 별로 많지 않았다. 서로 가지 않으려고 버티는 사람들 때문에 의무적으로 한 번씩 다녀와야 하는 규칙을 만들기도 했다. 끝까지 해외를 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사람들은 결국 다른 회사로 옮겼다. 그때는 회사를 그만둬도 갈 곳이 얼마든지 있었다.

지금이야 국내든 해외든 일자리를 갖는다는 것이 행운으로 생각되지만 그때만 해도 돈 문제가 아니라 가족과 함께 살고 싶은 욕심이 컸던 것 같다.

어쩌다 해외로 발령이 나면 마치 전쟁터에 끌려가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남편이 해외에 나가 있는 동안 한눈 판 부인들도 있고, 어린 아이들이 제 아버지를 몰라보고 ‘아저씨’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러니 해외로 가려는 사람들이 적었던 건 당연한 일이다.

IMF 이후 건설노동자들이 앞다퉈 해외로 나가려 하는 것을 보면 격세지감을 느낀다.

건설업이 호황을 누리자 많은 기업이 건설업에 뛰어들었다. 1000여 개에 달하던 건설사는 7300여 개로 늘어났다. 물론 여기에는 이른바 ‘Paper Company’가 많았다. 즉 회사는 서류로만 존재하고 실제로 공사 현장에는 나타나지 않는 업체들이다.

그들은 공사를 수주하지만 직접 시공하지 않고 하청을 주는 방식으로 이윤을 챙겼다. 당시엔 인맥과 로비를 통해 쉽게 공사를 따낼 수 있었으니 건설회사에 몸담았던 사람들이나 건설 관련 관공서에 있던 사람이 직장을 그만두고 이런 방식으로 공사를 수주했다. 어떤 회사는 하청업체 대부분이 친척이나 친구들로 구성된 경우도 있었다.

대기업들이 건설업에 뛰어든 데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단시일에 많은 돈을 벌 수 있고 자체공사를 소화하며 비자금 조성이 용이하다는 점이 아니었을까 한다.

건설업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소규모 자본으로 시작할 수 있다. 호황을 누리던 시절에야 아파트만 지으면 팔렸으니 ‘흙파서 돈버는’ 사업이었던 셈이다.

또한 자신들의 건물이나 공장을 다른 건설회사에 맡기는 것보다 직접 시공하면 비용을 줄일 수 있기 때문에 경영측면에서도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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