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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현장

아이비리그 꿈꾸는 외국어고 공부벌레들

  • 곽대중

아이비리그 꿈꾸는 외국어고 공부벌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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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내신제 폐지는 당사자인 외고는 물론 대학에도 고민거리를 안겨줬다. 가령 97년 서울대에 입학한 신입생 중 과학고 출신이 530명, 외국어고 출신이 383명으로 과학고와 외고 출신이 전체 신입생의 20%에 이르렀다. 이런 형편이니 우수한 특목고 학생들을 내신 때문에 다른 대학에 뺏기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생각해낸 방법이 내신성적을 평어로 반영하는 것이었다. 즉 석차백분율로 내신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수우미양가 등으로 묶어서 평가하는 것. 이는 내신 부풀리기를 조장한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현재 서울대를 제외한 거의 모든 대학이 특목고 학생에 대해 이렇게 사실상의 비교내신제 및 평어 반영을 실시하고 있다. 그 결과 이제 검정고시를 준비하기 위한 자퇴 행렬은 거의 사라졌다. “굳이 서울대를 고집하지 않고 연·고대 가는 것으로 만족한다면 교육환경이 좋은 외고에서 공부하는 것이 낫다”는 게 요즘 부모들의 생각이다.

내신이 불리한데도 외고가 꾸준히 인기를 얻고 있는 것은 일반계 고등학교의 교실붕괴 현상에서도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이화외고 장덕희 교감의 말이다.

“예전엔 명문대에 얼마나 보내느냐는 것을 학교 선택의 기준으로 삼는 학부모가 많았지만, 요즘은 자녀를 안심하고 맡길 수 있느냐가 중요한 기준이 됐다. 내신에서 불리할 것을 감수하면서도 공부할 여건과 분위기가 갖춰진 학교로 자녀를 보내겠다는 부모들이 많다.”

잘 알려진 대로 최근의 교실붕괴현상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수업중에 대놓고 엎드려 자는 학생들이 수두룩하다. 이런 아이들을 내버려두자니 다른 아이들에게 나쁜 영향을 끼치고, 그렇다고 일일이 깨우자니 진도를 나갈 수가 없다는 것. 경기도의 한 여고 1학년 담임교사는 이렇게 ‘현장상황’을 전한다.



“강제적인 야간 자율학습과 보충수업이 폐지되면서 아이들은 오후 3시면 교문을 나선다. 취지야 좋지만 아이들이 도대체 어디로 가겠는가. 갈 곳도 만들어주지 않고 그냥 자율적으로 하라는 것은 이들을 길바닥에 내팽개치는 것과 마찬가지디. 방과후에 다양한 특기적성 교육을 하라는데, 이것을 담당할 교원인력이 충분한 것도 아니고 학생들도 관심이 없다. 결국 학부모는 자녀를 학원에 보내는 수밖에 없는데, 이건 사교육비를 줄이겠다는 교육정책을 무색케 한다.

상위권 학생들은 수능이 너무 쉬워 공부할 의욕이 나지 않는다고 하고, 하위권 아이들은 아예 포기하고 엎드려 잔다. 지난 몇년간 전인적인 학생지도를 실시한다고 생활기록부를 세분했는데, 50명이 넘는 한 반 아이들의 생활기록부를 한 명 한 명 상담하면서 기록한다는 게 말이 되는 얘기인가?”

하지만 외고에서는 이런 현상을 찾아보기 어렵다고 한다. 쉬는 시간에 공부한다고 왕따당할 일도 없다. 학생들의 수준이 높기 때문에 교사들이 수업을 준비하거나 진행하는 데 어려움이 많을 것 같지만, 외고 교사들은 일반계 고교에 있을 때보다 오히려 가르치기가 수월하다고 말한다.

수준이 천차만별인 학생들이 모여 있는 교실에서는 대개 중간에서 약간 높은 정도의 수준으로 수업을 진행한다. 실력있는 학생들이 따분해 하지 않을 정도로 하되, 진도를 따라오지 못하는 학생들을 위해 너무 빠르거나 깊게 들어갈 수도 없다. 그러나 외고의 경우 웬만큼 상향 평준화된 아이들이 모여 있어 학습수준을 쉽게 정할 수 있고 심화학습도 제대로 할 수 있어 마음이 편하다는 것.

인성교육에 신경

외고의 또다른 장점 가운데 하나는 외국어를 원어민 교사로부터 직접 배울 수 있다는 것. 97년 외환위기 이후 많은 일반계 고등학교가 원어민 교사를 내보내야 했던 반면 외고는 오히려 원어민 교사를 더 늘려가고 있다. 외국어는 외국인과 직접 부딪쳐서 배우지 않으면 실력이 느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게 외고 관계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대부분의 외국어고는 학과별로 어학실을 갖추고 있고, 외국어 수업시간에는 한 반을 둘로 나누어 20여 명씩 대화, 토론하는 방식으로 수업을 진행한다. 자연히 학습밀도가 높아질 수밖에 없다.

외고는 수업시간의 40% 정도를 이렇게 외국어 교육에 할애하는 대신 예체능 수업시간이 다른 학교에 비해 적다. 졸업을 앞둔 한 외고 여학생은 “가정시간이 없어 뜨개질도 못해봤다”면서 “수능이 끝난 요즘은 십자수를 배우는 아이들도 있다”고 수줍게 웃었다.

외고가 공부벌레들을 모아놓고 공부만 시키는 곳은 아니다. 학교측은 인성교육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대원외고는 현관 게시판에 명심보감 구절을 붙여놓았다. 명심보감은 이 학교 학생들의 필수과목. 학생들은 매주 주어지는 구절을 암송한다. 한영외고는 다채로운 서클활동으로 학생들의 자율성을 배양한다. 백일장과 사생대회를 정기적으로 열고, 음악반 조각반 풍물반 등 동아리 활동도 활발하다. 이화외고는 매주 예배시간을 갖는 등 기독교 교육을 실시한다. 이 밖에도 많은 학교가 방과후 전공에 맞는 특기적성교육, 전공예술제, 세계 문화의 날, 모의 유엔총회, 각종 국제회의 봉사활동 등을 통해 인성교육의 장을 마련한다.

최근 몇 년 사이에는 외고 학생들의 해외유학붐이 관심을 모으고 있다. 외고들마다 해외유학반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는데, 대원외고의 SAP(Study Abroad Plan) 프로그램과 한영외고의 해외유학반 등은 졸업과 동시에 현지에서의 어학연수과정 없이 곧바로 외국 대학에 입학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해외유학반 학생들이 가장 선호하는 학교는 하버드대 예일대 프린스턴대 컬럼비아대 코넬대 펜실베이니아대 브라운대 다트머스대 등 이른바 ‘아이비리그’로 불리는 미국 동부 유명대학들. 이런 대학에 입학하려면 기본적으로 토플과 SAT(Schol-astic Aptitude Test)를 공부해야 한다. SAT는 미국의 대입 수능시험. SATⅠ은 언어와 수리영역의 수학능력을 측정하고, SATⅡ는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분야의 수학능력을 측정한다.

아이브리그를 꿈꾸는 아이들

문제는 우리나라에 이런 학생들을 가르칠 만한 교사들이 드물다는 것. 해외유학반을 가장 먼저 설치했던 대원외고도 운영 초기에 이 문제로 애를 먹었다. 미국에서 오랫동안 거주하면서 미국인의 사고방식, 생활풍습, 사회체계 등을 두루 익힌 교사요원을 확보한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예컨대 수학문제 하나도 영어로 원리를 설명하며 가르칠 수 있어야 하는데, 국내에 이런 요건을 충족시킬 만큼 전문적 자질을 갖춘 교사가 흔할 리 없다. 그래서 대원외고의 경우 유능한 외국인 교사가, 한영외고에서는 해외거주 경험이 있는 교사가 이들을 지도하고 있다.

대원외고 SAP반 1기생으로 미국 컬럼비아대에 진학한 이우진군(19)은 ‘나는 조기유학 없이 아이비리그로 간다’는 책에서 유학준비 초기상황을 이렇게 떠올렸다.

“미국 유학의 원대한 꿈을 품고 날갯짓을 시작한 SAP 유학반. 그러나 한국의 고등학교에서 미국 명문대학에 학생을 직접 입학시킨 예는 극히 드물었다. 아니, 거의 전무했다. 그런 까닭에 학교도 우리도 방향을 잡지 못해 갈팡질팡했다. 어쨌거나 카운슬러도 없고 가이드도 없는 상태에서 무작정 유학 준비가 시작됐다. 전례없는 모험에 뛰어든 만큼, 우리는 항상 정보의 가뭄에 시달려야 했다. 여기저기서 닥치는대로 정보를 수집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늘어나는 것은 ‘정보에 대한 갈증’뿐이었다. 프로그램을 포기하는 학생들이 하나둘씩 나오기 시작했다.”

이들은 3년동안 거의 모든 것을 독학으로 해결해야 했다. 몸은 한국에 있지만 생각하는 것, 생활하는 것 모두를 미국식으로 만들어갔다. 리포트도 미국 고등학교식으로 작성했고 대화도 영어로만 했다. 먹는 것까지 미국화하려 했다. 학생들의 표현대로 ‘서울대 가는 것보다 몇 배 어려운’ 과정이었다. 결국 SAP 1기 9명이 전원 아이비리그 대학에 합격하는 쾌거를 낳았다. 지금도 학년별로 10여 명의 학생들이 해외유학반에 편성돼 있다.

명문고 기준이 달라진다

대원외고에서는 3교시가 끝난 11시30분부터 점심시간이 시작된다. 학생들의 요구로 한 시간을 앞당겼다고 한다. 여느 학교와 다를 바 없이 학생들은 10여 분만에 게눈 감추듯 식사를 마치고 운동장으로 뛰어나가거나 옹기종기 모여 수다를 떠느라 바쁘다. 스피커로는 흥겨운 팝송이 계속 흘러나온다. 그 시끌벅적한 중에도 책에서 눈을 떼지 않는 학생이 있었다. SAP 3기 L양이었다. 아이비리그에서 비즈니스나 언론학을 공부하고 싶다는 L양은 “SATⅠ은 가르칠 선생님이 계시지만 SATⅡ는 교재를 보고 독학해야 한다. 어차피 우리나라에서 처음 시도하는 것인 만큼 우리가 길을 개척해야 한다”고 다부지게 말했다. 손등에는 영어 단어와 문장이 깨알처럼 쓰여 있었다.

외고들이 해외유학반을 운영하는 데 대한 비판 또한 만만치 않다. 한 교사는 “한참 국가와 민족에 대한 애정을 키워야 할 학생들이 오로지 미국 유학만 생각하며 청소년기를 보내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나아가 우수한 인력을 해외로 내보내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그러나 대원외고 남봉철 교장은 “앞으로는 얼마나 많은 학생들을 외국 대학에 입학시키느냐는 것이 외고의 경쟁력이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대원외고는 2002년에 20명 이상의 학생을 아이비리그 대학으로, 25명 이상을 미국의 주립대 등으로 유학보낼 계획을 세웠다. 현재 100여명의 이 학교 졸업생들이 세계 각지에서 공부하면서 해외 동문회를 구성하고 있다고 한다.

“이제 서울대 많이 보냈다고 명문고라고 부르던 시대는 지났다. 서울대 학생들의 실력이나 시설, 규모가 세계 50위권에도 못든다고 걱정하지 않는가. 우수한 학생들을 많이 외국으로 내보내야 한다. 그들은 외국에서 배운 지식을 한국에 돌아와서 활용할 수도 있고, 현지에서 살더라도 결국은 한국을 위해 봉사할 것이다.

가령 미국과 자동차 무역협상을 한다고 할 때 하버드 출신의 우리 학생이 같은 하버드 출신의 미국 대표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협상에 임할 수도 있다. 이때 대학 동창이라는 인맥이 프리미엄으로 작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 시야를 넓혀야 한다. 국내에서 우리끼리만 경쟁하던 시대는 지났다.”

신동아 2001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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