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2월호

한국판 ‘노블레스 오블리제’ 실천하는 사람들

그들에게선 향기가 난다

  • 김현미 khmzip@donga.com 이형삼 hans@donga.com 김영신·자유기고가

    입력2005-05-06 14: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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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지도층’이란 말을 들으면 무슨 생각이 떠오르는가. 당장 얼굴부터 찌푸려지는가. 밥 먹다 말고 숟가락을 내려놓고 싶은가. 그럴만도 하다. 잊을 만하면 한번씩 떠들썩하게 언론을 장식하는 우리네 사회지도층은 정녕 진정한 ‘지도층’이었다. 탈세, 뇌물수수, 병역비리, 입시부정, 과소비, 고액과외, 투기…. 갖가지 범죄와 파렴치 행위를 선도하는 음지(陰地)의 리더들이었다. 신자유주의의 거센 파도 앞에서 부익부 빈익빈의 양극화는 어느 결에 ‘자연법칙’으로 굳어지고 있다. ‘80 대 20의 사회’는 돌이킬 수 없는 대세로 받아들여진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의 갈등에선 지난날의 교조적 이념갈등보다 더한 적대감이 묻어난다. 부족하고 메마르고 차가운 사회를 채워주고 적셔주고 데워줄 생명수가 절실하다. 가진 자, 힘있는 자들이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한다. 누군가는 부(富)를, 누군가는 소중한 정신 자산을, 또 누군가는 인품과 양식(良識)을 앞장서서 나누고 베풀고 보듬어야 한다. ‘지도층’의 미덕은 솔선과 수범에 있다.그들이 진심에서 우러나 노블레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를 다할 때 우리는 다시 희망의 꽃을 피울 수 있다. 여기에 그런 씨앗 같은 사람들이 있다. 》

    ▶박종규 KSS해운 회장

    무욕(無慾)의 정도 경영, ‘회사는 전문경영인에게, 주식은 종업원에게’

    KSS해운 박종규(朴鍾圭·66) 회장은 품속에 두 통의 유서를 넣고 다닌다. 하나는 재산에 대한 내용이고, 다른 하나는 ‘마지막 유산’인 몸에 대한 것이다. 박회장은 최근 두 번째 유서를 고쳐 쓰면서 장기와 시신을 서울대 병원에 기증한다는 내용을 덧붙였다.

    “의대 교수인 친구로부터 ‘앞으로 한국에서는 좋은 외과의사가 나오기 어렵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해부할 시체가 모자라 해부학을 제대로 공부할 수 없기 때문이랍니다. 시체도 수입한다는 말에 깜짝 놀랐습니다.”



    그 길로 박회장은 시신 기증을 결심했다. 평소 자식들에게 “사람은 무(無)에서 태어나 무(無)로 돌아가는 것이니 무덤도 만들지 말라”고 당부한 그인지라 장기와 시신 기증을 결심하는 데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이 얘기를 가족에게 알렸더니 아들이 “아버지는 사업한다고 술을 워낙 많이 드셔서 몸에 쓸 만한 게 별로 없을 텐데요”라고 해서 온 가족이 한바탕 웃었다. 그만큼 박회장은 물론 그의 가족도 무욕(無慾)의 삶에 익숙하다.

    “시신은 화장한 뒤 동해 바다에 뿌리라고 했어요. 무덤 만들어 놓고 번거롭게 때마다 산소에 찾아올 필요도 없다, 대신 제삿날 가족들이 모여 사진이나 보면서 얘기를 나누면 족하다고 했지요. 그것도 장남 집에서만 할 게 아니라 자식이 셋이니 돌아가면서 한 번씩 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5무(無) 기업

    KSS해운과 박회장의 이름이 알려진 것은 1999년 12월 창립 30주년을 기념해 펴낸 KSS해운의 사사(社史)가 화제를 일으키면서부터. 기업을 운영하면서 저지른, 남들에게 밝히기 어려운 위법행위와 부끄러운 실수까지 솔직하게 기술한 이 회사의 사사는 기업인들 사이에 두고두고 얘깃거리가 됐다. 박회장은 “이런 저런 것을 다 밝히면 혹시 세무조사를 받게 될지도 모른다”는 임원들의 만류에 고민하기도 했지만, “부끄러운 부분을 다 빼놓고 성공담만 늘어놓으면 회사의 진짜 역사가 아니다”며 편저자에게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쓸 것을 요구했다.

    이렇게 나온 사사(‘손해를 보더라도 원칙은 지킨다’)를 통해 박회장이 세 명의 아들을 두고도 95년 3월 전문경영인에게 사장 자리를 물려줬고, 회사 창립 이래 종업원 지주제를 실시하고 있으며, 99년에는 “내가 가진 주식이 너무 많아졌다”며 회사 전체 주식의 10%에 해당하는 자신의 지분을 우리사주조합 기금으로 내놓았다는 사실 등 범상치 않은 경영방식이 세상에 알려졌다.

    KSS해운은 99년 기준으로 총자산 1600억 원, 매출액이 740억 원, 보유 선박 10척, 직원 220여 명의 중견기업. 겉으로 봐서는 특별할 게 없어 보이지만, 벤젠 톨루엔 LPG 등 화학물질 수송업 부문에서 독보적인 기업이다. 95년부터 부산과 나진·선봉을 거쳐 중국 옌벤(延邊), 옌지(延吉)까지 연결하는 국내 유일의 남북한 정기 직항로 사업을 개척하기도 했다. 외환위기로 도산하는 기업이 속출하던 97년부터 3년 연속 흑자를 기록했고, 98년과 99년에 잇따라 새 선박을 도입하는 등 내실있는 경영으로 해운업계에서는 ‘스몰 자이언트’라고 불린다.

    박회장은 30년간 기업을 이끌면서 늘 창립 당시의 각오를 잊지 않았다고 한다. ‘남이 안 하는 부문을 개척한다’ ‘군살없는 조직을 유지한다’ ‘뒷거래를 일절 배격하고 최고의 도덕성을 발휘한다’ ‘밀수하지 않는 회사를 만든다’ ‘종업원지주제를 실천한다’ ‘족벌경영을 배격하고 전문경영인 체제를 확립한다’는 것 등이다.

    사시(社是)나 사훈 같은 것을 만들지 않은 것도 이채롭다. “도대체 형식적인 표어가 무슨 필요가 있단 말인가. 그냥 실천하면 되지”라는 실용주의가 깔려 있다. 거창한 어구를 동원해 만든 사시에 냉소적인 시선을 보내는 다른 회사 직원들을 보면서 마음먹은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30년을 일관해 사시·인맥·리베이트·밀수·회계장부조작이 없는 ‘5무(無)회사’를 일궜다.

    “기업은 개인의 사유물이 아니라 사회의 공기(公器)다. 재산은 상속할 수도 있지만 경영권은 상속해선 안 된다”는 게 그의 기업관. “기업은 경영자와 종업원의 합동작품이지, 자식이 기업 발전에 무슨 공헌을 했느냐”는 말에서도 박회장이 경영권 세습에 반대하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기업 이전에 진정으로 가족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마음에서 나온 어려운 결심이기도 했다. 그는 ‘손해를 보더라도 원칙은 지킨다’의 서문에서 ‘한솥밥론’을 역설했다.

    “150달러만 보내주세요”

    “내게는 세 아들이 있다 이들은 우리 회사와 관련을 맺지 않고 독립해 자신의 삶을 개척하고 있다. 형제간이라도 한솥에서 밥을 먹으면 밥그릇 싸움을 하게 돼 있고, 그렇게 되면 가정의 화목은 깨진다. 귀여운 자식에게 가장 좋은 것을 물려주고 싶어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런데 요즘 부모들을 보면 자식에게 재산 물려주는 것을 가장 좋은 것으로 여기는 것 같다.

    그러나 자식을 위한 으뜸가는 유산은 독립심을 심어주는 것이다. 재산 상속은 가치가 낮은 것이고, 그보다 더 못한 것이 기업의 경영권 상속이다. 실력이 아니라 핏줄에 의한 경영권 세습은 부모의 가치관으로 자식을 옭아맴으로써 자식의 인간다운 삶을 방해하기 십상이다.”

    박회장이 자식들에게 말로만 독립을 강조한 게 아니라 이를 철저하게 실천에 옮겼다는 사실은 둘째 아들의 편지에 얽힌 일화에서도 잘 드러난다. 87년 1월 박회장이 도쿄에 출장 가 있을 때 갑자기 국세청 직원들이 집으로 들이닥쳤다. 집 안 곳곳을 수색하던 그들이 발견한 것은 비밀장부가 아니라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던 차남이 쓴 편지였다. 그 내용인즉 “이곳에서 생활하려면 방값 400달러, 식대 100달러, 자동차 기름값과 보험료 등 한 달에 최소한 750달러는 있어야 하는데, 보수가 제일 좋다는 피자집 아르바이트를 아무리 열심히 해도 제가 벌 수 있는 돈은 월 600달러가 못 됩니다. 제발 한 달에 150달러 정도만 보내주시면 안 될까요?”라는 하소연이었다.

    “미국에 유학만 보내주면 더 이상 아버지에게 의지하지 않겠다”고 큰소리 치며 떠난 아들에게 박회장은 정말로 단 한 푼도 보내주지 않았던 것이다. 피자 배달로 고학하던 아들의 간절한 편지에 감동한 국세청 직원들은 세무사찰을 중단하고 돌아갔다. 박회장은 그런 편지를 받고도 200달러씩 두어 달쯤 보내주고 말았다.

    바른 경제 만들기

    주위 사람들은 그런 박회장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특히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으려면 뭣하러 사업을 하느냐”는 핀잔을 많이 들었다고 한다. 지금은 세상을 떠난 아내의 불만도 컸다. 사업가의 아내로 회사가 부침을 겪을 때마다 마음고생만 하고 살았는데, 그처럼 어렵게 키운 회사를 자식이 아닌 남에게 물려준다는 게 섭섭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남편의 고집을 아는 아내는 섭섭함을 가슴에 묻고 별 내색을 하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귀에 못이 박이도록 ‘독립’이란 말을 들어온 아들들 역시 아버지 회사를 물려받겠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는 듯했다. 박회장은 회사 안팎에서 후임자를 물색했다. 누가 정말로 회사를 사랑하고 키워나갈 능력이 있는지 요모조모 뜯어보았다.

    “기업은 당연히 자식에게 물려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영자에게 인재가 눈에 띄겠습니까. 저야 그럴 생각이 없으니까 사람들을 꼼꼼하게 보게 되더군요. 그렇게 오랫동안 지켜보니까 무슨 일을 결정할 때 내 의견에 가장 반대를 많이 하던 직원이 애사심도 많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솔직히 처음에는 자꾸 딴지를 거니까 밉기도 했어요. 지금 KSS해운의 사장과 부사장은 모두 내 의견에 반대를 많이 했던 분들이에요.”

    그는 95년 회사의 경영권을 전문경영인에게 물려주고 회장으로 물러나 앉은 뒤 ‘바른경제동인회’ 일에 주력하고 있다. 93년 창립한 이 모임은 이윤만 추구하는 게 아니라 사회의 공기로서 기업의 소임과 기업인의 책임을 강조하고 실천하자는 취지를 갖고 있다. 박회장이 개인적으로 실천해온 정도 경영을 사회에 확산시키기 위한 일이다.

    또한 그는 지난해 11월, 경제인뿐 아니라 그와 뜻을 같이하는 사회지도층 인사 30여 명과 함께 ‘태평로 모임’을 만들고 ‘나라의 기본을 바로 세우자’는 캠페인을 펼치고 있다. 이 모임에 가입하려면 ‘세금을 꼬박꼬박 내고, 공사(公私)관계가 분명하며,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환경보호를 생활화하며, 청탁을 하지 않고, 사회를 위해 봉사한다’는 등 까다로운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손해를 보더라도 원칙은 지키자’는 그의 신념은 민들레 홑씨처럼 퍼져나가 뿌리를 내리면서 조금씩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되고 있다.

    김현미 khmzip@donga.com

    지구촌 분쟁지역 찾아 인술 펴는 한국판 국경 없는 의사회

    경기도 광명시 하안동에서 ‘광명내과’를 운영하는 박용준(朴容準·46) 원장은 걸핏하면 몇 주씩 원장실을 비우고 사라지는 불성실한(?) 의사다. 동네 환자들도 그런 사정을 잘 안다. 하지만 원장이 땡땡이 친다고 화내는 환자는 없다. “선생님 또 떠났수?” 하고 물어보고 그렇다고 하면 고개만 끄덕끄덕할 뿐이다. 원장이 없으면 부원장 혼자 환자를 볼 테니 좀 오래 기다리긴 해야겠지만, 그렇다고 좋은 일 하러 간 사람 원망할 순 없는 노릇 아닌가.

    박원장은 세계의 분쟁지역과 재난지역을 찾아다니며 의료봉사를 하는 글로벌케어(Global Care)를 이끌고 있다. 틈만 나면 인터넷을 뒤지며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곳을 찾는다. 의료인력 지원이 절실한 곳을 발견하면 유엔 산하기구 등과 접촉해 현지 사정을 파악한 후 글로벌케어에 소속된 의료인력 가운데서 팀을 꾸려 떠난다. 글로벌케어는 잔혹한 전쟁이 할퀴고 간 코소보 지역, 대지진이 강타한 터키 등지에서 봉사활동을 펼쳤고, 국내에서도 무의탁 노인이나 불우한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건강관리사업을 벌여왔다.



    르완다의 충격

    박원장은 연세대 의대를 나와 연세암센터와 미국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다 1990년 광명내과를 열었다. 그러나 개업을 하고 병원에 들어앉긴 했지만 마음은 자꾸만 밖을 향했다. 그의 관심은 내 이웃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쏠렸고, 특히 나라 바깥의 ‘내 이웃’을 자주 떠올렸다. 이듬해인 91년, 의료선교단의 일원으로 마침내 네팔 땅을 밟았다.

    “1990년은 한국이 피원조국에서 원조국으로 돌아서는 전환점이었어요. 의료봉사도 그 전에는 주로 국내 무의촌을 찾아다녔는데, 90년 이후로는 밖으로도 눈을 돌렸습니다. 국가의 위상이 웬만한 수준까지 올라왔다면 그에 걸맞은 의무가 따른다고 본 것이죠.”

    당시 네팔의 인구는 2500만 명. 그러나 전국에 이비인후과 의사와 치과의사가 40명씩에 불과할 만큼 의료기반이 낙후했다. 천막으로 찾아오는 환자들은 대부분 난생 처음 서양의학으로 치료를 받아보는 이들이었다. 산악지대가 많은 나라다 보니 며칠씩 험한 산길을 걸어 치료를 받으러 오기도 했다. 의료진이 활동을 마치고 철수하던 길에 한 부자(父子)를 만났는데, 사흘 전 아버지의 손을 잡고 치료를 받으러 왔던 소년이었다. 사흘 밤낮을 걸어서도 아직 집에 돌아가지 못했던 것이다.

    “한 노인은 귓속에 귀지며 죽은 벌레, 고름 말라붙은 것들이 가득 차 있었어요. 그래서 이걸 깨끗이 파냈더니 깜짝 놀라면서 ‘들린다!’고 소리를 지르는 거예요. 자기는 그때껏 귀가 먹은 줄 알고 살았다는 겁니다. 우리에겐 아주 간단하고 쉽게 도와줄 수 있는 일이 다른 사람들에겐 일생일대의 변화를 가져다줄 수도 있습니다.”

    94년에는 아프리카 르완다에서 내전이 벌어져 수십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그는 주저없이 짐을 싸고 유엔 난민고등판무관실(UNHCR)의 도움을 얻어 르완다로 떠났다. 이곳에서 그는 ‘국경없는 의사회’를 비롯한 수많은 NGO가 열악한 여건에서도 헌신적으로 난민들을 돌보는 장면을 보고 감동을 넘어 충격을 받았다. 그런 일에 깊은 관심을 갖고 기꺼이 몸을 던지는 자세야말로 한 국가의 세계적 리더십을 좌우하는 요건이라고 생각했다.

    “노블레스 오블리제는 한 국가 안의 지도층뿐 아니라 국제사회의 선진국에도 부과되는 의무라고 봐요. 일본이 국제사회에서 국력만큼의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구호현장에 가보면 일본 NGO들이 간간이 눈에 띄긴 하지만 국력에 비해 아주 소규모거든요. 한국은 인적 자원이 풍부하기 때문에 누군가가 앞장서기만 하면 이 분야에서 큰 역량을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르완다에서 돌아온 박원장은 뜻을 함께 하는 이들과 3년간의 준비를 거쳐 97년, 한국판 국경없는 의사회라 할 ‘글로벌케어’를 설립했다. 마침 국경없는 의사회가 96년 서울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돼 회장단이 상을 받으러 방한했는데, 박원장은 이들에게 많은 조언을 얻을 수 있었다. 현재 글로벌케어는 의사 간호사 사회복지사 등의 전문인력과 일반 자원봉사자 등 1000여 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다.

    다채로운 ‘실전경험’

    글로벌케어는 97년 여름 이후 해마다 수해를 입은 경기도 북부지역에 대규모 의료진을 보냈고, 의료 사각지대에 있는 불법체류 조선족 동포와 외국인 노동자들에게도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또한 설립되던 해부터 매년 베트남을 방문, 농촌 어린이들에게 무료로 언청이 수술을 해주고 있다. 구호활동에 소요되는 비용은 평소 회원들이 내는 회비로 충당하며, 현장에 투입될 때는 제약회사와 대형 병원, 기저귀 회사, 대기업 등을 뛰어다니며 도움을 청하기도 한다.

    박원장은 99년 5월 총상전문 의료진을 조직해 무자비한 인종청소가 자행되고 있던 코소보 지역으로 떠났다. 총상을 입은 난민이 부지기수인데도 이들을 치료해줄 인력이 모자란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채비를 서둘렀던 것. 박원장 일행은 유고연방과 인접한 알바니아 국경도시 쿠케스 난민수용소에서 50일 남짓 난민들을 돌봤다. 총상을 입은 환자들은 말할 것도 없지만 참혹하기로는 고문 피해자들도 그에 못지않았다. 심하게 구타당해 온몸에 줄무늬가 선명하게 새겨지고 갈비뼈가 부러지거나 손가락이 짓이겨져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고 한다.

    글로벌케어는 비록 연륜은 짧지만 ‘실전경험’을 많이 쌓은 덕분에 빠른 시간에 전문성을 갖추면서 질적 성장을 기할 수 있었다. 99년 8월 터키 지진 때는 구호현장에 투입된 숱한 NGO 중에서도 글로벌케어의 활약이 단연 돋보였다. 다른 나라 의료요원들은 대개 일반의였지만, 글로벌케어 의사들은 거의 전문의였다. 글로벌케어는 지진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정신적 공황으로 고통스러워한다는 점을 고려해 정신과 전문의까지 파견하는 세심함을 보였다.

    가령 진료하는 중에 여진(餘震)이 오면 의료진은 잘 느끼지 못하는 데도 지진을 체험한 현지인들은 정신을 잃고 쓰러지거나 불면증에 시달린다는 것. 그 난리통에 환자들의 정신적 안정까지 챙겨주자 터키 사람들은 물론 다른 나라 구호팀들까지 탄성을 연발했다.

    박원장은 “주변에서 ‘그런 위험한 곳엘 왜 자꾸 가느냐’고 걱정하지만, 우리는 ‘구호하러 간 사람이 오히려 도움을 받는 처지가 돼선 안 된다’는 원칙에 따라 안전지역 내에서 활동하므로 염려할 것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무리 안전지역이라 해도 현장은 결코 정상적인 곳이 아니다. 안전지역내 주민의 집을 임대해 숙소로 사용하는데, 가장 좋은 집을 고른다고 골라도 방 세 개에 화장실 한 개, 작은 부엌 하나 딸린 게 고작이다. 여기에서 15명 안팎의 의료진이 생활하는데, 방 하나에 5명이 새우잠을 자야 하고 화장실은 순번을 정해 다녀와야 한다. ‘도움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원칙 때문에 식사도 스스로 해결한다. 식수만 공수받을 뿐 다른 식료품은 모두 현지에서 구해 직접 조리해 먹는다. 반찬투정은 호사다.

    진정한 봉사는 이기적인 것

    경제적 손실도 감수해야 한다. 개업한 의사가 구호활동을 위해 단 일주일이라도 병원문을 닫으면 당장 수입이 줄어드는 것은 물론이고, 한번 헛걸음을 친 환자는 다시 그 병원을 찾지 않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이만저만 손해가 아니다.

    박원장은 이용훈 부원장(글로벌케어 실행위원)과 함께 진료하면서 구호활동에 참여할 때는 한 사람씩 번갈아 병원을 지키기 때문에 병원문을 닫지는 않는다. 하지만 광명내과는 의사가 두 명이나 있을 만큼 환자가 많은 병원이 아니다. 의사가 둘인 것은 진료에 가능한 한 지장을 덜 주면서도 글로벌케어 활동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다. 결국 한 사람이 벌 수 있는 수입을 두 사람이 벌어 나눠야 하니 속물스런 경제논리로는 그런 비효율이 없다.

    이에 대해 박원장은 ‘신성한 봉사를 그런 세속적인 가치로 평가할 수 있느냐’는 식으로 고상하게 점잔을 떨지 않았다. 그의 답은 이랬다.

    “말은 ‘봉사’라고 하지만 그건 절대로 일방적인 시혜나 희생이 아닙니다. 수입도 줄고 몸도 고달프지만 현장에 가서 얻어오는 재충전과 보람이라는 소득이 훨씬 커요. 다 죽어가던 사람이 툭툭 털고 자리에서 일어나고 미쳐가던 사람이 평안을 찾는 것을 볼 때의 희열은 느껴본 사람만이 압니다. 이런 경험이 인생을 풍요롭게 만들죠. 다녀오면 힘이 나서 일도 더 잘하게 되니 돈도 더 벌 수 있을 테고. 세상에 지친 사람들에게 꼭 한 번 그런 현장에 뛰어들어 체험해보길 권해요. 진정 헌신적인 봉사는 지극히 이기적인 동인에서 나오는 겁니다.”

    이형삼 hans@donga.com

    미혼모, 가정폭력 피해 여성들의 울타리

    서울 구기동 북한산 등산로 초입에는 유심히 살피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기 쉬운 수수한 4층 건물이 한 채 서 있다. 이곳은 국어국문학자인 숙명여대 이인복(李仁福·64) 교수와 서울대 심재기(沈在箕·63·국립국어연구원장) 교수 부부가 미혼모나 가정폭력에 희생된 여성들을 위한 쉼터로 마련한 공간이다. 1989년 이교수가 이 나자렛성가원을 설립한 뒤 노부부는 성가원에 함께 기거하며 고단한 삶에 지친 여성들을 보듬고 위로하면서 이들이 다시 사회로 돌아갈 힘을 북돋워주고 있다.

    성가원 건물 1층에 자리잡은 아담한 카페 ‘르샤’ 역시 쉼터를 찾는 여성들의 복지와 재활을 위해 그들 스스로 운영하고 종사하는 곳이라 했다.

    “1989년 11월18일, 제가 대한민국 문학상(평론부문)을 받았어요. 그 상금으로 무언가 비개인적인, 공익을 추구하는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10여 년 전부터 가정폭력 피해 여성을 돌보던 일을 사회에 공개하고,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함께 운영하는 기구를 만들고 싶어서 성가원을 만들게 됐어요.”



    모친의 유산, 남편의 외조

    이인복 교수의 말대로 이들 부부가 상처 입은 여성들을 거둬온 것은 꽤 오래 전 일이다. 사회적 지위와 명예를 누리면서 안락하게 살 수도 있었던 이들은 소외된 여성들에게 기꺼이 손을 내밀었다. 언제부터인가 이들 부부의 집에는 의지할 데 없는 딱한 여성들이 늘상 예닐곱 명씩 머물게 됐다. 특히 이교수는 6·25전쟁 직후 고생하면서 남을 도우며 살다 가신 어머니의 영향을, 이런 ‘나눔’ 정신 실천의 원동력으로 삼았다.

    “열네 살 때 전쟁이 터져 인천에서 사업을 하던 아버지가 납북되셨고, 오빠와 남동생도 실종됐습니다. 병든 어머니와 다섯 여동생을 부양해야 하는 무거운 책임이 지워졌죠. ‘월북자 가족’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사는 사람들은 신세가 몹시 고단하던 때라 9·28 서울수복 직후 집을 떠나 부평 백마장 미군부대 옆 마을로 들어가 숨어 살았습니다.

    생계가 막막했지만 학교에 가고 싶어서 연백성모원이라는 천주교회 고아원으로 동생들을 데리고 가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만 동생들의 숙식을 해결해 달라”고 사정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인천 박문여고를 졸업한 뒤 동생들을 데리고 고아원에서 나왔어요. 숙명여대에 다닐 때는 부평 기지촌 근처에 방을 얻어 가정교사를 하며 가족을 부양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매일 저 몰래 밥을 퍼다 인근 매춘여성들에게 먹이고 천주교 교리를 가르쳐 직업을 바꾸게 하거나 신앙을 갖게 하는 거예요. 그 가난한 ‘가정교사’가 벌어오는 눈물 젖은 밥을 말이죠. 어머니께선 당신이 부유한 사업가의 아내로 한때 안락하고 사치스럽게 산 것을 부끄럽게 여기셨어요. 그런 어머니로부터 평생 나누며 살아가야 한다는 삶의 방향을 배운 셈이지요.”

    이교수가 어머니로부터 받은 정신적 유산으로 봉사와 베푸는 삶을 살았다면, 그런 그를 곁에서 격려하며 도운 이는 남편 심재기 교수였다. 두 사람은 인천 창영초등학교 ‘6학년 6반’ 동급생. 심교수는 고아원으로 이교수를 찾아와 “쓰러지지 말라”고 격려해준 유일한 친구였다. 그때 “다른 사람에게 시집가면 고아원 출신이라고 멸시할지 모르니 나한테 시집 와라”고 말해준 친구를, 이교수는 대학 졸업 후 평생의 동반자로 선택했다.

    “결혼 후 아이 셋을 낳고 공부를 계속하고 싶다고 해서 박사과정에 진학케 했고, 어려운 여성들을 돕고 싶다고 해서 그렇게 하라고 한 것밖에 없습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게 해준 것, 그게 외조라니 가당치 않아요.”

    심재기 교수는 한사코 찬사를 사양했다. 하지만 이교수는 “친척들, 직장 동료들, 심지어 교회 봉사자들에게서도 저의 특별한 소명을 이해받지 못하는 소외는 커다란 아픔이었어요. 그런 아픔을 극복할 수 있도록 유일하게 지지해준 이가 이 사람입니다. 제가 일하는 것을 보고, 전화 받는 것을 듣고, 제 글을 읽고, 제 강연을 들으며 지금도 공감하고 눈물을 흘려주는 소중한 격려자이자 가장 큰 힘이 되는 사람이지요”라고 했다.

    혼수비용으로 장애인 집 지어

    이들 부부는 네 딸을 키운 과정에서도 남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부부는 평소 딸들에게 “미혼모와 매춘여성, 뇌성마비 환자나 지체장애인을 돌보며 그들을 돕는다고 여기지 마라. 나 대신 그들이 그리 됐다고 알고, 빚을 갚는다고 생각하며 헌신해라”며 검약과 봉사를 당연하게 여기도록 가르쳤다.

    특히 딸들을 결혼시키며 사돈댁에 양해를 얻어 혼수를 전혀 하지 않았다. 큰딸의 혼수비용은 뇌성마비 환자의 집을 짓는 데, 둘째딸의 혼수비용은 장애인의 집을 짓는 데, 셋째딸의 혼수비용은 나자렛성가원에 바쳤다. 막내딸의 혼수비용도 성당 건축기금으로 내놓고, 피로연을 생략한 대신 부부의 수상집(‘막내딸의 혼인날’)과 이교수의 자전적 고백록을 하객들에게 돌렸다.

    더욱이 부부가 회갑을 맞던 1997년, 네 딸과 네 사위는 부모의 재산을 성가원에 바치는 일에 동의한다는 재산 포기각서를 날인해 회갑선물로 드렸다.

    “막내딸 우찬이가 고등학교 다닐 때였어요. 하루는 새벽에 상담전화가 걸려왔는데, 늘 잠이 모자라던 제가 무심코 ‘낮에 전화하시지 왜 이 밤중에…’라고 했던가봐요. 그랬더니 자는 줄 알았던 딸아이가 방문을 벌컥 열고 나와 ‘엄마, 그렇게 전화받으실 거면 성가원 운영하지 마세요’ 하면서 절 나무라는 겁니다. 전화를 건 쪽에서는 나름대로 어려운 사정이 있어 그 시간에 했을 텐데, 그걸 몰라준다면 성가원을 운영할 자격이 없다는 거였죠.”

    ‘미혼모들의 어머니’인 이교수는 어려서부터 속이 깊은 막내딸을 여간 대견해하는 눈치가 아니다. 그런 기대에 부응하듯 우찬씨는 어머니의 뒤를 이어 소외여성들을 위한 봉사의 길을 택했다. 그는 미국 뉴욕의 컬럼비아대학에서 사회복지학 석사학위를 받고 뉴욕 가정문제상담소에서 미혼모와 폭력에 시달리는 교포여성들을 돌봤으며, 남편도 같은 전공으로 같은 길을 걷고 있다.

    “아이들이 유학 가서도 장학금을 받으며 공부해 부모에게 학비 부담을 주지 않았어요. 막내는 지금 일리노이대학에서 사회복지학 박사논문을 준비중인데 그 마무리 자료를 조사하기 위해 며칠간 한국에 들어와 있습니다. 남편과 함께 여러 시설을 둘러보고는 성가원에 부족한 부분을 이것저것 지적해줬어요. 딸이 아니라 엄한 감독관이에요.”

    이교수는 자신에게 장학금을 줘 학교를 마칠 수 있게 해준 모교에 은혜를 갚기 위해 매년 인천 박문여고와 숙명여대에 장학금을 보낸다. 또한 자신과 남편의 월급, 강연료, 인세 등은 고스란히 나자렛성가원의 운영자금으로 들어간다. 카페 르샤의 수익금은 그곳에서 일하는 여성들의 몫이고, 성가원이 직영하는 출판사의 수익금도 전국 교도소 재소자들의 서신 상담에 응하면서 책을 보내주는 데 쓰인다.

    퇴직 후 직업은 ‘성가의숙’ 수위

    부부는 요즘 새로운 구상을 현실화할 생각에 가슴이 부풀어 있다. 정년퇴직 후 두 사람은 경기도 포천에 사둔 1500여 평의 땅에 ‘성가의숙’(가칭)이라는 교육기관 겸 쉼터를 세울 예정이다. 부부의 퇴직금으로 주추를 놓을 것이라 한다. 성가원을 운영하면서 2개월여의 짧은 보호기간으로는 정상적인 삶의 길을 비껴간 이들을 온전히 바로잡아주기에 한계를 느꼈기 때문에 좀더 장기적으로 교육할 수 있는 공간을 모색한 것.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부모조차 손을 든 부랑 가출 청소년들이나 미혼모들이 깨끗하고 정돈된 공간에서 공부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또한 이들 부부와 뜻을 같이해 설립기금에 기여하는 퇴직교수나 봉사자들이 쾌적하고 편안한 환경에서 노후를 보내며 교육과 봉사에 참여하는 생활 공동체를 만들겠다는 생각이다. 이교수의 말.

    “심교수는 정년퇴직 후엔 성가의숙의 수위이자 만년 교사가 되겠다고 말하곤 합니다. 성가의숙을 설립하는 데 많은 분들이 저희와 힘을 모았으면 합니다. 비싼 돈을 들여 실버타운에 들어가는 대신 그것과 다를 게 없는 생활여건이 보장되면서도 어려운 이들을 위해 가르치고 봉사하고 가진 것을 나누는 생명 나눔의 기회를 누리며 살자는 것이죠.”

    부부는 “한 번 태어나 한 번 죽는 사람의 인생에서 ‘장수(長壽)’란 물리적 신체가 몇 년을 사느냐는 문제가 아니다”며 “내가 세상에 남기고 가는 아름다운 추억, 내가 죽은 뒤에도 나를 기억해주는 사람들의 나이를 합한 것이 내 나이”라고 말한다. 두 사람은 진정한 나눔의 기쁨과 그 의미를 체득한 분들이었다.

    김영신

    현직(現職) 16개 종횡무진, 봉사의 마당발

    자녀 안심하고 학교 보내기 운동 국민재단 이사, 전국 학교운영위원회 총연합회장, 서울 YMCA 이사, 영등포문화원장, 고운빛 여성합창단장, 한국보이스카우트 서울남부연맹장, 남부 소년선도재단 이사장, 기독교방송 후원회장….

    정진원(鄭鎭元·64) 원풍실업 회장은 무려 16개의 직함을 갖고 있다. 어느 한 자리도 이름만 덜렁 올려놓은 곳은 없다. 정회장은 “다 돈 쓰는 자리”라며 웃었지만, 더 정확하게는 돈, 시간, 관심을 모두 쏟아야 하는 자리다. 그러니 ‘본업’인 원풍실업(약품 무역업) 회장 자리에 앉아 있는 시간보다 밖에서 쓰는 시간이 더 많다.

    정회장이 1999년부터 지난해까지 총재를 맡았던 국제로타리클럽 3640지구는 99년 터키와 대만의 지진 피해지역에 위문금을 보내고 노숙자들에게 방한복을 제공하는 등 각종 봉사활동을 펴왔는데, 2년간 7억 원이 넘는 돈을 기부해 전세계 로타리클럽 528개 지구 중 재단 기부실적 1위에 올랐다. 그가 앞장서서 기부금을 쏟아붓고, 2300여 명의 회원들을 밤낮없이 1 대 1로 만나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설득한 결과다. 돈, 시간, 관심 중 어느 하나가 없어도 얻을 수 없는 성과였다.

    그는 자녀 안심하고 학교 보내기 운동 국민재단(이사장·김수환 추기경)에서도 기금 조성은 물론, 학교폭력 예방정책을 수립하기 위한 심포지엄을 마련하는 등 사업 프로그램까지 신경을 쓰고 있다. 또한 명절이면 국내에 체류하는 조선족 동포를 초청, 조상에게 차례를 지내게 하고 선물을 전한다.

    영등포문화원에서는 노인과 주부의 여가 선용을 위한 강좌를 만드는 한편, 힙합댄스대회를 열어 청소년들의 지친 심신을 달래주기도 한다. 국비와 지자체 보조금이 지원되긴 하지만, 가장 규모가 큰 국비 지원금이라야 연 200만∼300만 원에 불과하다. 그나마 목적경비 조건으로 지원된다. 원장이 주머니를 털지 않으면 운영이 어렵다.



    남을 위해 써야 할 돈

    정회장은 어렵게 성장했다. 인사(人事) 업무에 종사했던 부친은 철저한 원리원칙주의자였다. 청탁은 거들떠 보지도 않았으니 박봉으로 생계 꾸려가기가 팍팍했다. 평양신학교를 나온 모친이 삯바느질까지 해서 자식들을 공부시켰다. 중앙대 약학대학에 진학한 그는 방학이면 기관차를 수리하는 철도청 공작창에서 아르바이트를 했고, 밤에는 가정교사 노릇을 해서 학비를 벌었다.

    “그때 가르쳤던 중학생 제자의 아버지가 주류업체 사장이었어요. 그분이 어느날 밤 술이 거나하게 취해 귀가해서는 아들을 앉혀놓고 이러는 거예요. ‘내가 공부는 얼마든지 시켜주겠지만 절대로 아버지 재산 거저 물려받을 생각은 하지 마라’고. 그 철없는 꼬마한테 말이죠. 그걸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 일이 제 인생관에도 영향을 준 듯합니다. 후에 그 회사가 유수의 재벌그룹으로 성장하는 걸 보고 역시 저런 사람이 기업을 키우는구나 싶었어요.”

    정회장은 60년대 중반, 역시 약사인 부인(박기열·63)과 서울 도림동의 좁은 골목에 약국을 열었다. 교통도 불편하고 눈에 잘 띄지도 않는 위치라 도저히 손님이 찾지 않을 것 같았는데, 그야말로 기적이 일어났다. 약국은 개업하자마자 발 디딜 틈이 없을 만큼 붐볐다. 특히 관절염과 신경통 환자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었다. 아침 8시에 문을 열면 50명쯤 되는 사람들이 가마니나 신문지를 깔고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자기들끼리 순번표를 만들어 순서대로 기다렸다. 대개 지방에서 전날 밤 야간열차를 타고 올라온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약국을 찾는 사람들이 하루 400명을 넘었다.

    “별다른 처방도 아니었어요. 아주 교과서적인 처방에 약도 비교적 약하게 지어줬는데 그게 그렇게 잘 낫는다니 저도 그 까닭을 몰랐어요. 다른 약사들도 처방전을 보더니 고개를 갸우뚱했으니까. 환자의 90%는 지방 사람들이었는데 제주도며 신안에서도 올라왔어요. 아마 믿음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그 집 약만 먹으면 낫는다’는 믿음이 워낙 확고하다 보니 효험도 좋았겠죠. 그렇게 입소문이 번지면서 몇 년 동안 돈도 엄청나게 벌었습니다. 특별한 노력도 없이 많은 돈을 벌었으니 그처럼 은혜 입은 돈은 값지게 써야 한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농어촌에서 올라온 형편이 어려운 환자들에겐 약값을 받지 않았다. 그 인연으로 정회장에겐 지금도 고마움을 잊지 않은 환자들이 고추며 깻잎, 깨, 찹쌀, 참기름을 보내주곤 한다.

    ‘사회적 자본’

    처음엔 ‘10을 벌면 1은 남을 위해 쓰겠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다 보니 여기저기에서 일을 맡겨왔고, 그 일들을 위해 뛰어다니다 보니 ‘10 중 1’로는 턱없이 모자랐다. 더러는 배보다 배꼽이 크기도 했지만 사명으로 받아들였다. 돈만 가지고는 안 되는 일은 기꺼이 몸으로 때웠다. 지역사회와 국가가 제대로 성장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사회적 자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언젠가 미국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일요일에 교회에서 예배를 보고 나오는데, 교회 게시판 앞에 사람들이 잔뜩 몰려들어 뭔가를 열심히 메모하고 있더군요. 처음엔 목사의 설교 제목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가서 보니까 자원봉사 일정표였습니다. 언제 어디로 가면 어떤 자원봉사를 할 수 있다는 스케줄이 적혀 있었어요. 아, 바로 이거로구나 싶었어요. 일견 무질서하게 보이는 미국이 일류국가로 성장한 힘의 원천은 바로 그런 ‘사회적 자본’이라고 봤어요.

    우리나라 나환자촌에서 일하는 자원봉사자들을 보세요. 많은 수가 벽안의 외국인들입니다. 한창 나이의 서양 처녀들이 진물 흐르는 환자들 목욕시켜 주고 있어요. 이들이야말로 소중한 사회적 자본입니다.”

    정회장이 활용한 봉사의 도구 중에는 경영마인드도 들어 있다. 그는 교회 장로라는 인연으로 96년 대한기독교서회 사장으로 선출됐다. 출판계 전체가 불황이기도 했지만, 그가 취임했을 때 기독교서회는 50억 원의 적자에 허덕이고 있었다. 그는 비용절감에 초점을 맞췄다.

    사장인 자신부터 솔선했다. 사장 사택은 임대를 줬고, 승용차는 용달차로 바꿔 책 수송하는 데 사용하게 했다. 승용차 운전기사는 창고 관리직으로 보냈다. 봉급은 한푼도 받지 않았고, 사재를 털어 판공비로 썼다.

    매출이 50억 원밖에 안 되는 회사에 직원이 80명이나 돼서 30명을 감원했다. 그렇다고 대책없이 쫓아내진 않았다. 기독교서회 소유 건물에 입주한 회사들에게 취업을 의뢰해 모두 재취업시켰다. 이렇게 일찌감치 구조조정을 끝내자 회사는 곧 흑자로 돌아섰고 외환위기도 거뜬히 이겨낼 수 있었다.

    그는 “능력이든 시간이든 내가 가진 것을 줄 수 있는 곳엔 어디든지 달려간다는 자세로 살아왔다”고 한다. “가진 것 없는 내가 여기까지 온 것은 나를 사랑하고 도와준 이들 덕분이다. 그러니 앞으로는 베풀고 갚으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 빚 갚는 심정으로 ‘사회적 자본’을 자처하고 나서면 아까울 것도, 힘들 것도 없다는 게 그의 체험 ‘봉사 철학’이다.

    이형삼 hans@donga.com

    젊은 예술인도 돕고, 실험정신도 배우고

    토털 패션잡화 브랜드로 잘 알려진 (주)레더데코 쌈지의 천호균(千浩均·52) 사장은 첫인상부터 ‘의외’라는 느낌을 갖게 하는 사람이다. 목덜미께까지 내려온 더부룩한 머리칼, ‘패션’과는 좀 거리가 먼 듯한 시골 농부처럼 수더분한 인상, 50대 초반이라곤 믿어지지 않는 ‘기이하게’ 젊은 분위기 때문이다. 그가 신세대들의 감성을 공략해 한 해 1000억 원의 매출을 올리는 ‘잘 나가는’ 패션회사 사장이란 걸 짐작해볼 수 있는 구석은, 동년배에 견주어 다소 튀는 옷차림 정도랄까.

    그간 천사장이 펼쳐온 일도 여느 ‘사장님’들의 궤적과는 다르다. 그는 단순히 돈을 잘 버는 법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재미있고 의미있게 사업을 해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인 것 같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1993년 ‘쌈지’ 브랜드를 출범하면서부터 그는 설치미술가 이불씨 등 젊은 작가들을 간헐적으로 후원해왔다. ‘쌈지 아트페이지’로 불리는 광고가 그 하나. 돈을 주고 산 광고 지면에 회사 제품사진 대신 화가들의 작품을 싣는 것이다. 임옥상씨, 조덕현씨 같은 실험적인 작가들이 이 지면을 거쳐갔다. ‘쌈지’라는 글자는 지면 하단에 겨우 눈에 띌 만하게 들어갔다.

    또한 김원숙씨, 엄정순씨 등 여성미술인 6명의 신작 판화를 상품과 함께 판매했고, 패션쇼와 첨단 비디오 예술작업을 결합한 ‘쌈지 아트쇼’를 수차례 개최하기도 했다. 생소한 예술작업을 대중에게 소개한 이런 일련의 작업은 신선하게 받아들여지며 조금씩 호응을 얻었다.



    신인·실험작가 지원

    그러다가 IMF 한파가 닥쳤다. 대기업조차 너나없이 문화·예술부문 지원을 잇따라 축소하거나 취소하던 1998년에 천사장은 오히려 ‘쌈지 아트 프로젝트’라는 이름을 내걸고 젊은 미술인 지원에 적극 뛰어들었다. 첫해 예산은 그 어려운 시절의 중소기업으로선 적지 않은 액수인 1억 원.

    쌈지 아트 프로젝트는 비록 규모는 작지만 내용은 웬만한 문화재단이나 미술관 못지않게 충실하게 전개됐다. 전문가들의 심사를 거쳐 운영위원회가 해마다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작가나 실험정신을 인정받는 전업 중진작가 10∼15명을 선발, 작가당 300만∼1000만 원씩 지원했다. 지원방법은 작품 구입, 국내외 전시회 개최나 도록제작 지원, 스튜디오 제공 등 다양하다. 프로젝트 실시 첫해부터 아예 서울 암사동 회사 사옥을 비워 ‘쌈지 아트스튜디오’를 만들고 작가들이 입주해 1년 동안 부담없이 작품을 제작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줬다.

    “브랜드를 출범시키면서 그 특성을 무엇으로 잡을 것인가 고민했죠. 그 결과 ‘디자인’을 배경으로 하자고 정했습니다. ‘쌈지’ 하면 디자인을 떠올리게 하고, 디자인의 코드는 예술로 삼기로 한 것이죠. 일종의 차별화 전략이랄까요. 바깥에서는 우리가 가난한 예술가들을 지원한다고 칭찬하는데, 사실 그것은 회사의 성격이라고 보는 게 맞습니다. 예술에서 디자인 테마를 찾고, 거기에서 나온 상품을 예술을 통해 마케팅하는 것이죠. 저희로선 예술가들로부터 디자인 역량과 고객과의 커뮤니케이션 통로를 제공받는 셈이니 오히려 고마운 일입니다.”

    천사장은 ‘지원’이라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고 몇 번이나 강조했다. 일방적인 도와주기가 아니라 그것이 회사의 존재기반이라는 얘기였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이 당장 직접적이고 가시적인 효과를 거두기 어려운 예술분야에 적잖은 비용을 댄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그는 이에 대해서도 “분수에 맞게 하려면 많은 돈을 쏟아부을 순 없어요. 이거, 그렇게 돈 많이 들지 않아요”라고 딴전을 피운다.

    “스타를 동원해 광고 마케팅을 하면 한꺼번에 큰 효과를 거둘 수 있겠죠. 하지만 이런 아트 마케팅에서 중요한 것은 처음부터 효과를 ‘길게 천천히’ 보겠다고 미리 선을 그어놓고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오래 할 수 있지요. 신인 작가나 실험적인 작가를 대상으로 삼은 것도 상대적으로 적은 비용을 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뭐, 그러다 보니 ‘쌈지’라고 하면 뭔지 모르지만 젊은 예술인들과 관련이 있다는 인식이 퍼졌고, ‘쌈지 컬처’ 하면 청년문화, 신인문화라는 식의 이미지가 풍겨 저희가 덕을 보기도 했어요.”

    쌈지 아트 프로젝트의 ‘새로움’ 혹은 ‘실험성’에 대한 애정은 미술뿐 아니라 음악으로도 넓어졌다. 99년에는 언더그라운드 밴드인 ‘황신혜밴드’의 음반 ‘특별시 소년소녀’ 제작을 후원했다. 또한 전국의 쌈지 매장을 통해 음반을 배급하는가 하면, 라이브공연도 열고 단편영화까지 제작, 상영했다. 그해 가을에는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무명의 언더그라운드 밴드만으로 쌈지 사운드 페스티벌을 열기도 했다. 지금도 현재진행형인 이른바 ‘쌈지 팝 프로젝트’의 시작이었다.

    “음악이 미술보다 소통도 빠르고 교감도 쉽잖습니까. 고객의 감각을 같이 호흡하고 공유하기 위해 음악을 매개체로 사용하자는 것이었죠. 고전음악도 있고 요즘 유행하는 대중음악도 있지만, 가능하면 새로운 음악을 찾자는 생각에서 언더 아티스트들을 만나게 됐습니다.”

    이 대목에서 약간 궁금증이 생긴다. 이런 전위적이고 덜 대중적인 예술분야만을 꼭 집어 후원하는 걸 보면 천사장 자신의 취향도 그런 쪽이 아닐까 하는. 하지만 그는 싱긋 웃으며 손사래를 친다.

    인사동 가게터 사들여 보존

    “아뇨, 저는 아주 일반적이고 대중적이고 서민적인 걸 좋아합니다. 이런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건 취향이 아니라 의지 때문이죠. 물론 언더밴드 공연 같은 건 재미있어요. 그래서 너무 깊이 몰입하지 않도록 조심하죠. 저는 경영인이지 아티스트는 아니잖습니까. 뭐 이런 저런 새로운 것을 접하고 자유롭게 하다 보니 남들은 제가 이쪽으로 굉장히 수준 있는가보다 오해하기도 하지만….”

    그는 공연이나 프로젝트 설명회 같은 걸 자주 기획하고 열다 보니 “가끔은 ‘빽’ 장수가 아니라 아트집단인가 스스로 헷갈릴 때도 있다”며 웃는다.

    그럴 법도 하다. 지난해에는 암사동 시기를 마감하고 홍익대 앞에 새 건물을 얻어 복합문화공간 ‘쌈지 스페이스’를 연 것이다. 쌈지 스페이스는 연건평 460여 평의 7층 건물로, 3개의 전시장, 이벤트홀, 미디어 시어터, 작가 스튜디오, 자료실 등이 들어섰다.

    4∼6층에 자리잡은 작가 스튜디오에는 올해 3기 작가들이 입주한다. 창작공간을 1년간 무료로 제공받는 대신 1년의 작업이 끝나면 전시와 함께 작품을 한 점씩 기증하는 방식이다. 올해에는 외국 작가들에게도 4개월씩 문호를 개방해 3명의 오스트레일리아 작가가 입주하게 된다.

    천사장은 지난해 철거위기에 놓인 인사동 열두 가게를 살린 주인공이기도 하다. 한 건설회사가 문방사우, 표구, 도자기 판매점 등이 늘어선 열두 가게 터 440여 평을 사들이고 고층빌딩을 짓겠다며 가게를 비우도록 요구했던 것. 이에 문화예술인들과 시민들이 ‘인사동을 지키자’며 서명운동에 나선 끝에 서울시가 건물신축 규제조치를 내렸다.

    이에 따라 개발이익이 보장되지 않자 건설회사는 땅을 내놓았고, 천사장은 수익성이 별로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 땅을 사들여 내쫓긴 두 가게까지 돌아오게 했다. 천사장은 가게들이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할 수 있도록 수리하고, 지하에는 한국의 과거, 현재, 미래를 대표하는 디자인 상품 전시 판매장을 만들겠다고 밝혔다.

    예술과 기업의 ‘파트너십’

    “구해준 거라고 보는 건 오햅니다. 인사동이 과거의 것을 모아놓은 데라면, 거기에다 우리가 개발하고 디자인한 현재와 미래의 디자인 상품을 보태겠다는 발상인 거죠. 장사를 같이 하려는 것뿐입니다.”

    “그래도 기업이익의 사회환원 성격이 있는 게 아니냐”고 ‘억지’를 써봤지만, 그는 여전히 그런 찬사가 불편한 눈치다.

    “쌈지의 경영방법은 약간 촌스럽지만 ‘늘 같이 하는 것’입니다. 그게 유리하다고 보기도 하고요. 자기를 비우면 남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자기 것으로만 너무 꽉 차 있으면 그게 어렵죠. 쌈지 자체는 작은 기업에 불과하지만, 이런 저런 무형의 재산들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는 것뿐입니다.”

    천사장은 “우리는 회사의 이윤을 예술가들로부터 얻는다”고 말한다. 예술가들과 자신들이 서로 돕는 파트너십이라는 것이다. 그는 “젊음에의 양보는 자연적 명령이다” “젊음의 수용은 끊임없는 자기 포기다”는 표현을 즐겨 쓴다. “옛날의 최고보다는 지금의 최하가 낫다”는 말도 자주 한다. 신인정신과 함께 늘 노력하는 자세가 중요하다는 얘기다. 아마 그런 ‘살아있는’ 생각이 오늘의 그와, 그의 사업과, 그 숱한 ‘뜻있는 파트너십’을 이루게 한 원동력이 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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