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2월호

考試 권하는 사회

  • 곽대중

    입력2005-05-06 1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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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새 내린 폭설로 세상이 하얗게 덮였다. 사람들이 이른바 ‘고시촌’이라 부르는 신림 9동으로 올라가는 10번 마을버스는 더 이상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화랑교에서 멈춰버렸다. 할 수 없이 걸어 올라갈 수밖에. 차라리 잘된 일이다. P씨와의 약속은 3시간이나 남아, 그 동안 천천히 걸어 올라가며 탐색전을 벌이기로 했다.

    신림 9동은 서울대 입구에서 신림사거리로 가는 도로를 입구로 하여 언덕으로 올라가며 이루어진 동네다. 먼저 저지대인 대로변은 고시학원으로 시작된다. ‘본원 출신 사법시험 전체수석, 행정고시 00명 합격’이라는 커다란 플래카드를 내건 학원들이 쭉 늘어서 있다. 그리고 이곳은 이른바 ‘다운타운’으로 술집, 당구장, 카페, 비디오방, PC방, 만화방이 가장 밀집한 곳이기도 하다. 언뜻 보면 이곳이 정말 우리나라 고시 합격생의 90% 이상이 거쳐간다는 그 고시촌인지 의아스러울 정도다.

    그러나 조금 위로 올라가 골목으로 들어가 보면 보이는 건 온통 고시원과 독서실뿐. 제자리에서 한 바퀴를 빙 둘러봐도 10여 개의 독서실이 눈에 들어온다. 하루에도 몇 개씩 생기고 없어지는 독서실이지만 대강 300개가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독서실과 독서실 사이는 ‘고시 전문’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식당과 분식점들이 다리를 놓는다. 거기에 간간이 보이는 빨래방과 공인중개사 사무실, 그리고 서점. 이런 풍경이 언덕 중간까지 이어진다. 다운타운과 중간지대는 하루종일 지나는 사람들로 분주하다. 대개는 20대 중반부터 30대 후반까지의 젊은이들. 노인들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가파른 언덕을 조금 더 올라가면, 고요함이 조금씩 더해간다. 다운타운과 중간지대가 공부와 잠, 먹는 곳을 따로 하는 신세대 고시생들의 구역이라면, 윗동네는 한방에서 공부하고, 잠자고, 주인 아줌마가 차려주는 밥을 먹는 일체형(一體型) 고시생들이 많이 사는 구역이다. 할아버지 몇 분이 모여앉아 떠들썩하게 정치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복덕방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예전엔 라면 먹어가며 고시공부해서 판검사 됐다는 이야기도 있었는데 요새는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아. 돈 있는 집 아이들은 더 좋은 환경에서 공부하는 거고, 집에서 받쳐주지 못하는 애들은 산 위에 있는 싼 집 알아보는 거고. 10여 년 전만 해도 고시원은 다 거기서 거기였는데 요즘 새로 짓는 고시원들을 보면 거의 호텔 수준이야. 그러니 이젠 고시공부도 돈 있어야 하는 거라고.”



    이곳에서 30년간 복덕방을 해왔다는 이모씨(52)는 ‘빈고부저(貧高富低)’라는 표현으로 신림동 고시촌의 배치를 설명했다. 처음 고시공부를 시작하여 아직까지는 집안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있거나 경제적으로 유복한 환경의 고시생은 다운타운의 신축 고시원에 머무르고, 네댓 번 낙방의 고배를 마시면서 집안의 원조가 끊겼거나 부유하지 못한 가정의 고시생들은 산 위의 방을 찾아 점점 언덕 위로 올라간다는 것이다. 딱 들어맞는 이야기는 아니겠지만 상당히 그럴듯한 설명이다.

    실제 이곳 고시촌의 방값은 천차만별이다. 잠만 자는 여관형인지, 숙식을 해결하는 일체형인지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방 하나를 칸막이만으로 막아놓은 10만원짜리부터 샤워시설을 갖춘 40만원짜리 원룸형 빌라까지 다양하다. 대체로 학원, 독서실과 가까운 저지대는 비싼 편이고 언덕 위로 올라갈수록 싼 방이 많다.

    3만~5만명이 북적거리는 고시촌

    신림동 고시촌에는 올빼미족이 많다. 새벽까지 공부를 하다가 아침 9시경에 일어나는 사람들이다. 아침식사를 거르는 대신 11시부터 1시 사이에 ‘아점’(아침 겸 점심)을 치른다. 이곳에서 하루 이틀 사는 사람들이 아니니 손맛 좋은 식당은 널리 알려져 있다. 떠들썩한 식당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사법시험 원서 접수 기간이라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이야기는 올해 경쟁률과 출제경향에 대한 것들이다. 어젯밤 내린 눈을 걱정하며 휴대폰으로 고향의 부모님에게 전화를 거는 사람들도 눈에 띈다. 분주히 음식을 나르는 주인 아주머니는 “불경기라지만 이곳에선 별로 느끼지 못한다. 고시라는 제도가 없어지지 않는 한 신림동은 항상 수만 명의 고정 손님을 껴안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신림동의 고시생 수는 대략 3만 명에 이른다. 지방에서 방학 동안 올라오는 사람들이나 학원강의만 청취하는 사람들을 합하면 신림동 식구는 5만 명이 넘을 것이라고도 한다. 그럼 이들이 한 달 동안 쓰는 돈은 어느 정도일까. 지방에서 올라왔다는 여학생 세 명에게 물어보니 그들의 평균 생활비는 월 80만원선. 고시원비 30만원에 독서실비가 10만원, 학원수강료가 8만∼15만원, 밥값으로 15만원 정도가 든다. 여기에 책값, 기타 생활비를 합치면 80만원은 오히려 적은 액수다.

    여학생들은 그나마 술이나 유흥을 별로 즐기지 않아 생활비가 적게 들지만 남학생들의 경우는 더 들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래도 대략 80만원을 평균으로 했을 때, 3만 명이 이렇게 소비하면 월 240억원. 물론 이들이 줄곧 신림동에서만 소비할 리는 없지만, 그래도 신림동은 고시생들이 먹여 살리는 ‘고시 특구(特區)’라 할 만하다.

    물론 전국의 고시생들이 신림동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시야를 전국으로 넓혀보면 고시생들의 소비액수는 훨씬 커진다. 2000명을 뽑는 2000년 사법시험 1차 응시자 수는 2만3249명, 행정고시 응시자 수는 1만2556명이었다. 여기에 지난 한 해 기술고시, 법무사, 변리사, 공인회계사 시험에 응시한 인원인 5만5000여 명을 합치면, 우리나라에서 이른바 ‘고시’를 준비하는 사람들은 10만 명에 육박한다. 전국적으로 이들이 시험공부에 쏟아붓는 돈은 천문학적 액수에 이르리라는 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고시의 폐해는 이런 물적 낭비에만 있는 것일까. 미리 약속이 되어 있던 고시생 P씨를 만나보았다.

    P씨의 올해 나이는 서른둘. 고시 5수생이다. 고시생 하면 떠올리는 것은 부스스한 머리, 뿔테안경, 대강 깎은 수염, 칙칙한 검은색 코트…. 그러나 그건 80년대 중반쯤에 해당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신림동 고시촌의 젊은이들은 모두 말쑥한 차림으로, 외모만 보면 여느 젊은이들과 다를 바가 없다. P씨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요즘 유행하는 더플코트에 깔끔하게 빗어 넘긴 머리로 나타났다. 다짜고짜 무엇 때문에 그리 오랫동안 고시공부를 붙잡고 있느냐고 물어봤다.

    “처음에는 정말 청운의 꿈을 안고 시작합니다. 그러다 한두 해는 훌쩍 넘어가죠. 첫 시험은 한번 보자는 식으로, 두 번째 시험은 정리해보는 식으로 말입니다. 보통 세 번째 시험쯤엔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갖고 덤벼듭니다. 그러다 안 되면 뭔가 실수가 있었나 보다 생각하고 부족한 점을 보완해서 한 해, 거기서 또 한 해…. 이렇게 해서 강산이 바뀐다는 10년을 절반 꺾게 되는 것은 기본입니다.”

    처음에는 신선한 도전의식으로, 다음에는 연륜에 이른 자신감으로 덤벼들다가, 나중에는 그것이 집념으로, 그 다음에는 어쩔 수 없는 집착으로 계속 매달리게 된다는 것이다.

    “남들은 이상하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안 해본 사람은 우리 심정 모릅니다. 뭔가 될 듯하면서도 안 되는 게 사법시험입니다. 이렇게 몇 년을 공부하다 보면 서른을 넘기고, 이제는 원서를 받아줄 직장도 없을뿐더러 그 동안 투자한 시간이 아까워서라도 법전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미안하지만 그의 말을 듣다 보니 ‘고시병(考試病)’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그러나 P씨는 고시병이라는 말에 화를 벌컥 낸다.

    “고시병이라고 손가락질하기 전에 우리 사회를 되돌아보십시오. 어려서부터 너는 커서 판·검사가 되야 한다며 머리를 쓰다듬고, 10년을 매달렸어도 일단 합격만 하면 그 동안 쏟아부었던 시간적·금전적 대가를 어렵지 않게 되찾을 수 있는 사회풍토가 바뀌지 않는 한 유능한 인재들이 고시에 몰리는 것은 절대 막을 수 없습니다.”

    2000년 12월 현재 대한변호사협회에 등록된 변호사 수는 4232명. 인구 1만 명당 1명도 안 되는 꼴이다. 그리고 이들의 한 해 평균 수임건수는 50여 건으로, 현재 수임료가 1건당 300만원∼500만원이므로 변호사 1인이 한 해 벌어들이는 수익은 1억∼2억 원에 이른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러나 지난 몇 년 동안의 언론 보도는 다른 일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사법연수원 30기 연수생 679명 중 40∼90명이 갈 곳을 구하지 못해 사법연수원이 각 기업에 채용의뢰서를 보냈다거나, 많은 사법연수원생들이 수입이 불투명한 변호사보다는 판·검사 임용을 선호하면서 연수원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기 위해 다시 고시촌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보도다. 하지만 신림동의 고시생들은 이런 보도들을 부정한다.

    “일시적인 현상을 침소봉대(針小棒大)하는 것 뿐입니다. 사시 합격자가 실업자가 되었다는 말 들었습니까? 대기업으로 가거나, 경찰간부로 들어가거나, 행정직으로 옮기거나, 갈 곳은 많습니다. 어찌됐든 평생 일자리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독서실 총무를 하며 고시 공부를 하는 최모씨의 말이다. 그러면서 그는 사시에 합격한 친구들의 이야기를 사례로 들어가며 로펌(법률회사) 초임이 어떻게 되는지, 몇 년 정도면 고시에 투자한 비용을 회수할 수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일반적으로 ‘마흔살 이전에만 합격하면 된다’는 게 고시촌의 정설입니다. 그래서 끝까지 밀어붙이는 겁니다. 10년 공부, 3~4년이면 되찾을 수 있다는 거죠.”

    이야기가 여기에 이르면 고시공부가 도박같이 느껴진다.

    판·검사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위엄 있는 직업

    그러나 고시생들이 사시에 느끼는 매력은 이런 금전적인 이익만이 아니다. 유교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는 중국, 일본, 우리나라 같은 동아시아 나라들에서 죄를 벌하고 분쟁을 조정하는 판검사는 가장 위엄 있는 직업 중 하나다. 검찰의 수사지휘권이 강력한 우리나라는 특히 그렇다. 또한 일반 공무원들이 일생을 통해 한 단계씩 밟아 올라가는 사무관, 부이사관의 지위를 한번에 오를 수 있다는 사실은 권력에 대한 매력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16대 국회의원 273명 중 사시 출신이 39명, 행시 출신 12명이라는 사실도 고시 합격이 명예와 권력의 길로 나아가는 날개 구실을 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수치 중 하나다.

    96년부터 정부는 한 해 300명 정도이던 사법시험 합격자 수를 매년 100명씩 늘려갔다. 전문법조인력 부족현상을 타개하고 기형적인 사시 열풍도 가라앉히겠다는 의도였다. 그러나 정부의 이런 대책은 고시 열풍을 더욱 부추기는 꼴이 됐다. 먼저, 법대 출신의 전유물로 인식되던 사법시험에 너도 나도 달려드는 현상을 낳았다. 예전부터 법대 출신이 아닌 사람들이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화제가 된 적은 많았지만 사시 합격자 중 비(非)법대생의 비율은 점점 커지는 추세다. 사법연수원 30기 중 21.6%, 31기의 22.2%는 비법학 전공자들이다.

    이들의 직업도 다양하다. 정부기관 사무관, 은행원, 약사, 광고회사 직원, 전직 의사도 있다. 2000년 5월 서울대가 발표한 99학년도 졸업생 취업현황을 보면 서울대 졸업자 중 30%가 미취업자였으며, 이중 3분의 1은 고시를 준비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여기에는 사회대, 인문대뿐만 아니라 공대, 생활과학대 학생들도 있다.

    뜻이 있어 법조인이 되겠다는 것은 막을 수 없지만 이는 대학교육의 파행으로 직결되고 있다. 전공과목은 필수과목만 듣고 선택과목은 대부분 법대 과목을 청강하는 대학생들이 늘어나는 것이다. 특히 교육개혁 차원에서 각 대학이 학생들의 전공필수 학점을 크게 줄이고 복수전공제를 폭넓게 실시하면서 법대 수업은 학점관리와 고시공부를 함께 할 수 있는 일석이조의 인기과목이 되었다. 고려대 학생생활연구소의 자료에 따르면 신입생 중 34.3%가 고시를 희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각 대학의 고시생들에 대한 지원도 고시열풍을 부추기는 원인 중 하나다. 대학마다 고시특강을 설치하고 고시 준비 학생에 대한 장학금 지원, 최종합격자에 대한 등록금 면제는 물론이고, 아예 고시생 전용 기숙사를 설치한 대학, ‘국가고시준비위원회’를 꾸린 대학도 있다. 기초학문의 붕괴를 우려하면서, 한편으로는 한 명이라도 더 고시합격자를 늘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이다. 지방 C대의 한 교수는 “고시합격자를 몇 명 배출했느냐가 그 학교의 수준을 가늠하는 중요한 척도 중 하나가 되다 보니 다른 학교에서 실시하는 정책을 우리만 명분을 내세우며 뒷짐지고 바라볼 수 없다”며 현실의 어려움을 이야기한다.

    대학들의 ‘고시 투자’가 본격화되면서 재학생들의 고시합격률도 꾸준히 높아지고 있다. 2000년 실시된 42회 사법시험에 최종 합격한 802명 중 재학생은 199명으로 24.8%를 차지한다. 97년의 16.7%, 98년 21.1%, 99년 22.3%로 꾸준히 높아지는 추세다. 예전에는 3학년 때 진로를 고민하고 4학년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취업과 시험을 준비하던 반면, 이젠 1학년 때부터 고시 스터디 그룹을 준비하는 경우가 쉽게 눈에 띈다.

    “대학 4학년을 死학년이라고 하잖아요. 가장 안정적인 취업통로로 당연히 공무원을 선망할 수밖에 없고, 사법시험은 일단 목표를 크게 잡는다는 취지에서 택하는 방법 중 하나입니다. ‘양다리 걸치기’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일단 사법시험 준비하다 안 되면 행정고시로 바꿀 수 있고, 그것도 안 되면 7급으로 낮출 수도 있잖아요.”

    S대 법학부 2학년인 김모양의 이야기다. 2000년 3월 서울대 법대신문 ‘두루저널’이 신입생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1, 2학년 때부터 사법시험을 준비하겠다는 응답자가 전체의 78%에 달했다.

    고시의 매력 중 하나는 실력만 있으면 면접에서 떨어지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것. 그래서 운동권 경력이 있는 고시생들도 눈에 띈다. 지방 C대학 총학생회장 출신인 노모씨도 2년째 신림동에 거처를 잡고 사법시험을 준비중이다.

    “단순히 입신양명을 바라고 공부를 시작한 것은 아닙니다. 학생운동을 통해 사회를 개혁하려고 했던 것이나 법조인이 되어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나 본질은 다를 것이 없다고 봅니다. 열정만으로 평가받으려던 과거에서 벗어나 이제는 실력으로 인정받고 싶습니다.”

    실제 몇 해 전 사법시험에는 80년대 학생운동에 참여했던 386세대 고시생들이 다수 합격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럼 이렇게 모여든 사람들이 모두 다 열심히 공부하는 것일까.

    “고시촌이라고 하니까 엄숙하게 공부만 하는 동네일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관악경찰서 관내에서 가장 사건 사고가 많은 곳이 신림 9동입니다. 녹두거리가 있어서 서울대생들이나 고등학생들이 술 먹고 행패 부리는 일도 있지만, 고시생들이 관련된 사고가 대다수입니다. 여러 지역에서 사람들이 모이다 보니 서로 시비가 붙어 싸움이 나는 경우가 많고, 고시의 중압감을 술에 의지해 풀려는 사람들을 자주 목격합니다. 아까운 인재들이 이렇게 썩어가는구나 생각하면 한숨이 절로 나오죠.”

    신림 9동 파출소 박정길 순경의 말이다. 10여 년간 헌책방을 운영해온 장모씨는 “절반 이상은 마음을 다잡지 못한 채 거대한 고시행렬에 얹혀 흘러가고 있다고 보면 될 것”이라고 잘라 말한다.

    “물론 정말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도 많지만, 밤늦도록 불야성을 이루는 술집들을 보면 부모가 피땀 흘려 보내주었을 돈이 저렇게 날아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장씨는 ‘노는’ 고시생들을 세 부류로 나누어 재미있게 이야기한다. 첫째는 유유자적(悠悠自適)형. 한두 번 낙방의 고배를 마시다 보니 적응이 되어 세월이 가든 말든 한량처럼 대책없이 사는 고시생을 이른다. 둘째는 허장성세(虛張聲勢)형. 몇 년 고시공부하다 보니 법지식은 많이 늘어 걸핏하면 법조문을 들먹이고, ‘헌법 공부는 이렇게 해야 돼’ 하는 식으로 허풍을 떠는 스타일이다. 그리고 셋째로는 좌충우돌(左衝右突)형. 며칠간 공부를 잘 하다가도 초조함과 불안감에 술집, 혹은 PC방, 만화방에서 다시 며칠을 탕진하는 스타일이다.

    몇 해를 고시공부에 매달리다 병원을 찾는 경우도 많다. 신림 9동 한복판에 자리잡은 연세복음병원 서성배 원장은 “다른 병원에 비해 요통 환자가 상대적으로 많은 것은 확실하다”고 이야기한다. 50분 공부하고 10분 쉬는 것이 몸에 좋다는 것은 상식인데 한번 집중하면 좀처럼 그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하다 보니 고시생 중 요통 환자가 많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많은 것은 스트레스성 질환으로 두통이나 위궤양, 그리고 정신질환이다. 서원장은 ‘물러설 줄 아는 자세’를 강조한다.

    “몇 년 공부를 하다가 이건 내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되면 과감히 떨쳐버려야 하는데, 여러 이유로 그 전환점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을 자주 상담하게 됩니다. 그 동안 투자한 시간과 노력이 있더라도 미래를 생각하며 다른 길을 찾아나설 것을 권합니다.”

    서울 명문대 출신인 K씨의 경우 지방에서 고등학교를 나왔다. 그 동안 그는 한번도 일등을 놓치지 않았고, 부모의 권유로 법대에 진학했다. 그리고 당연한 코스로 신림동에 자리잡았다. 하지만 인생에서 한번도 ‘실패’, ‘탈락’이라는 단어를 접해보지 못했던 그에게 연이은 사시 낙방은 다른 이들보다 훨씬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결국 몸도 마음도 황폐해져 상담 치료를 받는 중이다.

    어사화 꽂고 금의환향하는 날

    정부는 2003년부터 지금의 암기 위주 사법시험을 대학수학능력시험와 비슷한 ‘공직 적격성 테스트(PSAT)’로 전환할 방침이다. 그리고 영어시험을 폐지하는 대신 국가가 공인하는 TEPS, TOEIC, TOFLE 점수로 대체하고 1차 시험 합격 자수를 10배로 늘려 사시 과열을 줄여나갈 계획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들이 얼마나 실효를 거둘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역사적으로 볼 때 고시의 전신(前身)은 과거(科擧)라 할 수 있다. ‘과거’라는 이름이 처음 쓰인 것은 고려 광종 때부터. 각 과목마다 사람을 선발한다 하여 과거(科擧)라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1392년 건국부터 갑오경장으로 폐지된 1894년까지 502년간 848회의 과거 시험을 통해 1만5137명의 대과 합격자를 배출했다. 조선조 500년 동안 그 숱한 양반들 중 고작 1만5000여 명이라면 얼마나 경쟁이 치열했을지 알 만하다.

    같은 양반이라도 몇 대째 과거 합격자가 나오지 않으면 양반으로 취급해주지 않았고 몰락하기까지 했으니 온 집안이 자식의 과거 합격에 얼마나 기대를 걸었을지 쉽게 짐작이 된다. 대과에 합격하여 어사화를 머리에 얹고 백마에 올라 풍악대를 앞장세우며 유가(遊街)하는 것은 가문의 영광일 뿐만 아니라 그 고을의 영광이기도 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세상이 바뀌어도 이러한 사람살이는 변함이 없는 것 같다. 어쩌면 신림동 고시촌은 이런 장원급제의 꿈을 아직도 이어가는 곳인지 모른다.

    올해 사법시험은 2월18일에 1차 시험을 치른다. 코앞에 다가온 시험 때문에 요즘 신림동 분위기는 긴장감이 감돈다. 밤 11시. 학원 강의가 끝나자 골목마다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신림동의 하루는 여기서 다시 시작한다. 딱 맥주 한 잔만 하자며 P씨를 근처 호프집으로 억지로 끌고 들어갔다. 시험이 목전에 있어 손님이 별로 없을 줄 알았는데 빈 테이블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이번에 떨어지면 벌써 다섯 번째입니다. 1차라도 한번 붙어봤으면 좋겠는데, 이젠 부모님께 돈 달란 말도 못 하겠습니다. 모두 나를 보며 수군거리는 것 같아 매년 명절 때면 집에 내려가기가 두렵습니다. 올해도 설날은 신림동에서 보내게 될 것 같습니다. 차라리 그게 낫습니다.”

    혹시 이번에도 떨어지면 어떻게 할 거냐는 질문에 “이젠 뭔가 결단을 내릴 것”이라고 대답하면서도 왠지 모를 여운을 남긴다. 그도 노장파로 자리를 굳힐 셈인가.

    그는 끝내 술을 입에도 대지 않은 채 술집을 나섰다. 거리에는 여전히 사람들로 활기가 넘치고 PC방, 비디오방, 만화방의 네온사인이 현란하다. 요란한 음악과 함께 인형뽑기에 열중한 사람들도 눈에 띈다.

    기회의 균등이라는 조건만 충족된다면, ‘시험’이라는 제도는 혈통과 신분을 따지지 않고 능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하는 대단히 합리적이며 근대화된 제도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제도가 사람을 옥죄고 황폐하게 만드는 사슬이 되어버리는 것이 문제다. 다시 독서실로 향하는 P씨의 뒷모습을 보며 “파이팅”이라도 힘차게 외쳐주고 싶었지만 “좋은 결과가 있길 바란다”는 상투적인 인사로 대신했다. 오늘밤 꿈에서 그는 어사화 꽂고 백마에 올라탄 채 고향집에 들어서고 있을지 모른다. 그 꿈을 같이 나누는 3만 명을 뒤로 한 채 신림동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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