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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학계의 명문 ‘張在植 패밀리’

  • 윤영호 < 동아일보 주간동아 기자 > noname01@freechal.com

정·관·학계의 명문 ‘張在植 패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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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전 한전사장 장영식
  • ● 산자부장관 장재식
  • ● 여성개발원장 장하진
  • ● 고려대 교수 장하성
  • ● 케임브리지대 교수 장하준
  • 정계, 관계, 학계, 시민운동권에서 맹활약하고 있는 이들은 모두 한 집안 출신이다. 3대에 걸쳐 내로라하는 재목들을 잇따라 배출한 이 호남 명문가를 들여다본다.
“그런데 참, 장 교수는 작은할아버님이 왜 3대 의원 선거에 출마하시지 않았는지 아시는가?”

1999년 봄 대통령 비서실 주선으로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을 면담하기 위해 청와대를 방문한 장하성(張夏成·48) 고려대 교수(경영학부)는 김 대통령의 느닷없는 질문에 순간 당황했다. 김대중 정부의 경제개혁이 지지부진하다는 데 대해 쓴소리를 하려고 단단히 별렀던 장 교수는 허를 찔린 셈이었다.

독립운동 뛰어든 호남 명문가

“아버님이나 삼촌들도 모르는 일인데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장 교수는 이렇게 답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장 교수의 작은할아버지가 누구이기에 김 대통령이 그토록 관심을 갖고 있었을까. 장 교수의 작은할아버지는 김 대통령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는 왜 3대 의원 선거에 출마하지 않았을까.

장 교수의 작은할아버지는 독립운동가 장홍염(張洪琰·1910∼1990) 씨를 말한다. 장홍염 씨는 만석군의 아들로 태어나 일찍이 독립운동에 뛰어들었고, 광복 후에는 반독재 투쟁에 여생을 바쳤다. 전남 무안에서 제헌 국회의원과 2대 의원에 당선돼 반(反) 이승만 투쟁에 앞장섰던 그는 3대 국회의원 선거에도 출마하기만 하면 당선은 보장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는 게 가족들의 회고다. 김 대통령도 이를 기억해내고 장씨가 끝내 출마하지 않은 이유가 새삼 궁금했던 것이다.

가족들의 증언에 따르면 장씨는 3대 총선을 앞두고 자유당 정권이 그의 참모와 운동원을 감금, 협박, 폭행해 더 이상 출마를 고집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고 한다. 그래서 자신의 선거운동원 300여 명을 석방한다는 조건으로 “다시는 출마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는 것이다. 그는 4·19 직후 실시된 5대 총선에서는 서울로 지역구를 옮겨 사회대중당 후보로 나섰으나 의사당 진출에 실패했다.

그가 3대 의원 선거 출마 당시 관권 탄압의 표적이 된 것은 반 이승만 투쟁의 선봉에 섰기 때문. 그는 이승만과는 기질적으로 맞지 않았던 것 같다. 중국에서 단재 신채호와 우당 이회영의 노선을 좇아 무장 항일투쟁을 전개했던 그로서는 ‘외교적인 방법’으로 독립운동을 하던 이승만이 아무래도 미덥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제헌의원으로서 이승만의 헌법제정 개입에 앞장서 반대했다. 내각책임제 헌법을 주장하던 그는 대통령제를 주장하는 이승만을 겨냥해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소위 ‘맨더토리(Mandatory) 운동’을 벌여 한국 주권을 미국에 바치려 하다 쫓겨난 이승만이 또다시 독재로 나라를 망치려 한다”고 비난했다. 불행하게도 그의 예언은 적중했다.

장씨는 광복 후 목포지구와 전남지역 치안위원장을 맡아 권력 공백기의 혼란을 수습하고 건국에 앞장섰다. 김 대통령과는 이때 함께 일한 것으로 보인다. 가족들의 기억에 따르면 광복 후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했던 김 대통령은 치안위원장을 맡고 있던 장씨를 따르는 청년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는 것.

장홍염 씨는 장영식(張榮植·69) 전 한국전력 사장과 장재식(張在植·66) 산업자원부 장관 형제에게는 작은아버지가 된다. 장 전사장 집안은 현 정부 들어 갑작스레 유명해진 듯하지만 사실은 선대부터 호남의 명문가였다. 그들의 선대 형제들은 각기 나름의 방법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을 뿐 아니라 광복 후에는 모두 한민당에서 중추적인 구실을 맡아 전남 지방의 정치 지형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DJ에게 정신적 영향

장홍염 씨는 아버지 장진섭(張鎭燮) 씨와 어머니 하동 정씨 사이에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위 형제들은 차례로 병준(柄俊·1893∼1972), 병상(柄祥·1899∼1958), 홍재(洪載) 씨다. 셋째 홍재 씨는 광주학생운동에 참가했다가 일경에 체포돼 모진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타계했기 때문에 후손도 없다. 집안에서는 장영식 전사장을 홍재 씨의 아들로 입적해 제사를 모시도록 했지만 장 전사장도 1958년 미국으로 갔기 때문에 제사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

장진섭 씨는 근방에서 손꼽히는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상당한 재산을 물려받았다고 한다. 그는 김 대통령의 고향인 인근 하의도에도 땅이 있을 정도였다는 것. 그랬기에 아들들을 서울은 물론 일본과 중국까지 유학 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장남 병준 씨는 일본에 유학해 일본대 법과를 졸업했으며, 병상 씨는 서울 중동중과 보성전문을 졸업한 후 일본에 유학해 메이지대학 법학과를 졸업했다. 홍염 씨는 목포 연안보통학교를 거쳐 서울 휘문학교에 입학한 후 베이징 국민대학을 졸업했다.

이들의 고향인 전남 무안군(현재는 신안군) 장산도와 김대중 대통령의 고향 하의도는 뱃길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어서 양쪽 섬 사람들의 통혼이 많았다고 한다. 김 대통령의 어머니 장씨가 바로 장진섭 씨의 사촌이었다. 이런 인연 때문인지 김 대통령은 병준 씨 형제들을 깍듯이 형님으로 모셨다는 것. 그들이 김 대통령의 정치적 성장과정에 정신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쳤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런 사연에도 불구하고 병상 씨의 넷째 아들인 장재식 장관과 김 대통령의 정치적 인연은 훨씬 후에 맺어졌다. 1992년 14대 총선 당시 전국구를 받아 비로소 정계에 입문한 것이다. 그는 정계 진출은 늦었지만 정계 입문과 동시에 김 대통령의 직할부대로 활동해왔다. 동교동계 출신이 아니었음에도 ‘김대중 사단’의 대표적인 경제통으로 인정받아 온 것.

장 장관은 호남 출신으로는 드물게 국세청 차장과 국책은행 시절의 주택은행장을 역임한 경력이 말해주듯 조세와 금융 전문가다. 이런 경력을 바탕으로 1992년 대선에서도 섀도 캐비닛 멤버 1순위로 지목됐으며, 1997년 대선 직후에는 김용환 당시 자민련 부총재가 이끌던 ‘12인 비상경제대책위’ 멤버로 전면에 등장해 김대중 정부의 경제정책 방향 설정과 환란 대응에 참여했다.

이런 커리어 때문에 현 정부 출범 당시 초대 재정경제부 장관 물망에 올랐으나 재경부 장관이 자민련 몫으로 결정돼 입각이 좌절됐다. 당시 장 장관은 재경부 장관에 자신이 적합하다는 적극적인 의사를 내비치기도 했으나 “대통령의 뜻이라면 뜻을 접는 게 당연하다”고 물러섰다. 결국 장 장관은 그가 자민련으로 당적을 바꿔 ‘DJP 공조’가 복원된 후에야 입각할 수 있었다.

장 장관의 정계 입문이 늦어진 것은 작은아버지 장홍염 씨의 영향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장씨는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하기 얼마 전에 ‘전남일보’와 가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제헌 때는 한민당으로, 2대 때는 무소속으로 당선됐고, 5대 때는 사회대중당으로 출마해 낙선했는데, 너무 많은 시련을 겪어 가족 중에 누가 정치한다면 극구 반대합니다. 재식이가 정치한다고 했다가 혼이 났지요.”

김만제·이종찬과의 인연

장 장관이 일찍 정치에 입문할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주택은행장으로 있던 그는 친형 장영식 전 사장을 따라 동교동으로 가서 김 대통령에게 정식으로 인사했다. 미국 뉴욕주립대에서 교편을 잡다 귀국해 1975년 한국개발연구원(KDI) 초빙 연구원으로 와 있던 장영식 전사장은 그보다 전에 이미 김 대통령을 찾아가 에너지 문제에 대해 자문해주고 있었다. 김 대통령이 이들 형제를 반갑게 맞았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1980년 5·17은 김 대통령뿐 아니라 장 장관 형제에게도 좌절을 안겨줬다. 장 장관은 이 일로 주택은행장에서 해직되는 아픔을 맛봐야 했고, 장영식 전사장은 급거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도피하는 처지가 됐다. 그런 상황에도 두 사람을 배려해준 이들이 있었는데, 두 사람은 지금도 이들에게 고마워하고 있다. 장영식 전사장에게는 김만제(金滿堤) 당시 KDI 원장(현 한나라당 의원)이 있었고, 장재식 장관에게는 이종찬(李鍾贊) 당시 안기부 기조실장(김대중 정부 출범 후 초대 국정원장 역임)이 있었다.

장 장관은 5·17 이후 공무원 숙정 바람이 불 때 이종찬 안기부 기조실장의 도움을 받았지만 끝내 살아남지는 못했다. 이종찬 실장은 숙정자 명단에 국책은행장이던 장 장관의 이름이 올라 있자 전두환(全斗煥) 장군에게 “아까운 인재이니 구제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는 뜻을 밝혔다. 이실장은 부인 윤장순 여사로부터 이미 장 장관의 사람됨에 대해 듣고 있었다. 윤 여사는 장 장관의 부인인 최우숙 여사와 경기여고 동기생.

그러나 신군부는 이미 장 장관의 꼬투리를 잡고 있었다. 전두환 장군은 이종찬 실장에게 호통을 치더니 부관에게 “테이프 가져와!”라고 했다. 가져온 녹음테이프에는 놀랍게도 동교동에서 오간 얘기가 모두 담겨 있었다. 장 장관의 목소리를 들은 이 실장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장 장관은 나중에 이 사실을 전해 듣고 이종찬 실장에게 호감을 갖게 됐고, 1997년 대선을 앞두고 이종찬 씨가 국민회의에 입당하자 장 장관이 유별나게 그를 챙겼다고 한다.

한편 장영식 전사장은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 직후 황급히 일본으로 출국해 신군부의 손아귀에서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 그가 일본에서 김만제 KDI 원장에게 전화를 걸어 “일본에 와 있다”고 전하자 김 원장은 “몸도 안 좋으시고 하니 미국에 가 계시지요. 나머지는 제가 다 알아서 하겠으니 국내 일은 염려하지 마세요”라면서 귀국하지 말 것을 암시했다.

장 전사장은 그 길로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에 온 지 얼마 후에 서울에서 장 전사장의 짐이 부쳐 왔고, 퇴직금 명목으로 상당한 금액의 돈도 송금됐다. 김만제 원장의 배려였다. 장 전사장이 현 정부 들어 한전 사장으로 부임한 이후 김만제 씨를 한전 상임고문으로 영입한 것도 이런 인연 때문이다.

장 전사장은 과거의 배려에 대해 보은하겠다는 의미도 있었지만, 김씨의 경험을 활용하려는 의도가 더 컸다. 그가 경제부총리를 지낸데다 포스코 회장까지 역임했기 때문에 그의 국제적인 안목이나 인맥을 충분히 활용해야 한다고 본 것. 또한 경제전문가인 그를 여권 주변에 붙들어두면 여권의 인재 풀을 넓힐 수 있다는 나름의 정치적 고려도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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