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1월호

“나는 깡패를 보면 잠이 안 온다”

한국 최고 ‘주먹통’ 조승식 검사가 말하는 조폭과의 20년 전쟁

  • 조성식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airso2@donga.com

    입력2005-01-10 15: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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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임해가는 곳마다 조폭 토벌작전
    • ‘큰놈’잡을 때는 직접 현장에
    • 김태촌 잡기 전날 밤 정화수 떠놓고 기도
    • 우리 애들이 검사님 손보겠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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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0년 5월19일 오전 10시. 서울 동부이촌동에 있는 미주아파트 부근 제일사우나 앞에 3000cc짜리 고급승용차가 미끄러져 들어왔다. 승용차 뒷좌석에는 40대 초반의 남자가 혼자 타고 있었다. 근처에 숨어 있던 수사관들의 무전기가 숨가쁘게 울려댔다. 사내가 사우나탕에 들어가자 안에서 미리 대기중이던 수사관 한 명이 욕조까지 따라 들어가 동태를 감시했다. 사내가 목욕을 하는 동안 운전사는 세차를 했다.

    이윽고 목욕을 마친 사내가 사우나를 나서는 순간 수사관 4명이 한꺼번에 덮쳤다. 권총을 빼든 검사가 “꼼짝 말라”고 소리쳤다. 짐짓 태연한 척하던 사내는 이내 체념한 듯 순순히 수갑을 받았다. 경호원 노릇을 하던 운전사도 함께 끌려갔다.

    이날 체포된 사내가 바로 ‘대한민국 최고의 깡패’로 불리던 김태촌(당시 42세)씨다. 그때 구속된 김씨는 지금도 교도소에 갇혀 있다. 그렇다면 현장에서 권총을 겨눈 검사는? 그가 바로 ‘주먹 잡는 검사’로 주먹세계에서 악명 높은 조승식(당시 38세)검사다.

    “군산에서 깡패공부 다했다”



    현재 서울고검에 근무하는 조검사는 사시 19회 출신으로 1979년 서울지검에서 검사생활을 시작했다. 그가 주먹수사에 첫발을 내디딘 것은 1981년 전주지검 군산지청에 근무할 때다. 군산 깡패들을 소탕한 그는 이후 ‘조폭과의 전쟁’에 몸을 내던졌다. 가는 곳마다 잡아들였고 실패라곤 거의 없었다. 기자가 접촉한 몇몇 강력부 검사들은 한목소리로 그를 ‘최고의 주먹검사’로 꼽았다. 그의 수사사례는 오늘날 강력부 검사들에게 거의 교본으로 통하고 있다.

    주먹수사가 힘든 것은 범죄의 특성상 증거확보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여간해서는 범죄에 직접 개입하지 않는 두목급 수사는 더욱 어렵다. 게다가 주먹들은 주거지가 일정치 않아 소재지 파악이 쉽지 않다. 범죄혐의가 확인돼 잡으려 해도 어디 숨어 있는지 알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 만큼 제보와 정보, 탐문에 기대 추적할 수밖에 없다. 주먹수사에 남다른 집념과 끈기가 필요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또 체포과정엔 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부하들을 경호원으로 달고 다니거나 흉기를 소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보복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해야 한다.

    조검사는 “군산에서 깡패 공부를 다했다”고 말한다. 도박판 피해자의 제보가 그 계기가 됐다.

    “폭력배들이 도박장을 열어 지역 사람들을 끌어들인 후 높은 이자로 돈을 빌려주고 갚지 못할 경우 폭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농협 직원 한 명이 빚 독촉과 폭력에 견디지 못해 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면사무소 계장이 노름빚으로 퇴직금을 날리기도 했다. 수사해 보니 99% 사기도박이었다.”

    조검사는 사기도박에 관련된 폭력배를 모조리 잡아들였다. 당시 억대 도박판을 벌인 혐의로 구속된 오아무개씨 등은 1990년에 벌어진 ‘범죄와의 전쟁’ 때 범단(범죄단체) 수괴급으로 인정됐다. 도박판 수사에서 성공을 거둔 조검사는 여세를 몰아 본격적으로 폭력배 수사에 나섰다. 그때만 해도 범단으로 묶는 것이 쉽지 않았다. 법원이 관련법을 적용하는 데 매우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까닭이다. 그 탓에 조검사가 구속한 폭력배들도 주로 개인 차원의 범죄혐의로 기소됐다.

    조검사가 군산에서 수사한 사건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당시 한가락하는 주먹인 차아무개씨가 경쟁조직의 두목인 조아무개씨를 칼로 찌른 사건이다. 조검사는 각각 폭행, 공갈 혐의를 적용해 둘 다 구속해 버렸다. 차씨는 1990년대 초 빚쟁이 딸을 강간한 혐의로 서울지검 특수부에 의해 수배되자 미국으로 달아났다. 조씨는 ‘범죄와의 전쟁’ 때 군산그랜드파의 두목급으로 분류돼 전주지검에 의해 재구속됐다.

    폭력세계에는 은폐된 칼부림 사건이 많다. 말하자면 누가 찔렸다는 얘기만 있고 누가 찔렀는지는 알려지지 않은 사건들이다. 대부분 조직간 싸움이다. 조검사는 이미 잡힌 폭력배들을 고리로 삼아 과거 사건의 진상을 밝히고 범인들을 찾아냈다. 이런 식으로 그가 군산에서 잡아들인 폭력배가 수십명에 이르렀다. 그들 중 법원에서 무죄가 선고된 사람은 단 한명도 없다.

    “그때는 조무래기들이었는데 뒷날 보니 조직의 두목급들로 성장했더라. 하여간 싹수없고 건들거리는 놈들은 다 잡아넣었다. 그러다보니 군산을 떠난 후에도 나를 음해하는 얘기가 들려왔다. 폭력배들은 관계기관에 진정을 내 나를 골탕먹이기도 했다. ‘수사과정에 맞았다’거나 ‘깡패와 골프 치고 다닌다’ 따위의 내용이었다. 그런데 당시 나는 골프를 전혀 치지 못했다. 내가 골프를 배운 것은 뒷날 지청장을 하면서다. 나중에 들으니, 어떤 주먹 하나가 사석에서 ‘서울에 올라가 조검사와 골프나 한번 쳐볼까’ 하고 말한 것이 소문의 발단이 됐다는 것이다.”

    군산지청을 떠난 그는 독일국제형사법연구소 객원연구원, 법무부 근무 등으로 한때 수사일선을 떠났다. 그가 다시 ‘전공’을 살린 것은 1988년 서울지검 특수1부에 배속되면서부터다. 이후 부산지검 강력부에서 활약한 1991년까지 약 3년간이 그의 조폭수사 전성기다. 당시 서울지검 특수1부장은 심재륜 검사(현재 고검장)였다. ‘고집불통’ 심부장과 ‘대한민국 깡패들을 모조리 소탕하겠다’는 사명감에 불타던 조검사는 손발이 잘 맞았다.

    첫 ‘희생자’는 이육래씨였다. 전남 보성 출신의 이씨는 호남 주먹의 실세로 통하고 있었다. 그해 8월 이씨가 구속됐을 때 언론은 그를 ‘국내 3대 폭력조직의 대부’니 ‘OB파의 대부’니 하면서 요란을 떨었다. 실제로 그는 범서방파 두목 김태촌씨나 OB파 두목 이동재씨로부터 선배 대접을 받았다. 특히 이동재씨와 가까웠다.

    이육래씨의 혐의는 이권 갈취였다. 매립지 인가를 받은 부산의 사업가 송아무개씨를 납치, 서울 이태원의 한 오피스텔에 사흘 동안 감금해 시가 100억원대의 토지에 대한 양도각서를 강제로 받아낸 것이다. 그 과정에 송씨는 김씨에게 맞아 갈비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전국 규모의 우익단체인 호청련(호국청년연합회·총재 이승완) 간부이기도 한 그는 서울에서 몇몇 카바레와 나이트클럽 지분을 갖고 있으면서 ‘고급 건달’ 행세를 하고 있었다. 매립지 업자 납치·폭행사건에는 서아무개, 배아무개씨 등 호청련의 일부 간부가 가담한 것으로 드러났다. 조검사는 이씨를 비롯해 4명을 구속했다.

    이육래와 호남 출신 검사들

    조검사가 이씨를 수사하기 직전 이씨가 몇몇 호남 출신 검사와 친분이 깊다는 진정서가 청와대에 접수된 일이 있었다. 청와대는 이를 검찰에 넘겼는데, 조사를 벌인 검찰은 진정서에 이름이 거론된 검사들에게 특별한 문제가 없는 것으로 결론지었다. 하지만 검찰 안팎에선 이씨의 검찰 인맥에 대한 소문이 무성했다.

    처음엔 수사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이씨가 사전에 정보를 입수하고 행방을 감췄기 때문이다. 권력기관에 있는 사람들이 전화를 걸어와 이씨 수사 상황을 관심 있게 물어보기도 했다. 검찰 내부에서도 비슷한 내용의 전화가 몇 차례 걸려왔다. 무언의 압력이었지만 조검사는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려버렸다.

    “깡패 수사는 집요하게 달라붙어야 성공할 수 있다. 한번 외압에 흔들리면 그 다음부터는 수사하기 힘들다. 나는 늘 하늘이 무너져도 잡아넣겠다는 각오로 임했다. 이육래를 잡아넣을 때 여기저기서 전화가 걸려 왔다. 외압이라는 건 수사검사가 흔들릴 때나 해당되는 말이다. 부담을 느끼긴 해도 압력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외압이란 건 있을 수 없다. 또 수사검사에게 직접적인 압력을 넣는 경우는 드물다. ‘어떻게 돼가냐’고 물어보는 정도다. 나는 애초 압력이라는 걸 받아들일 생각이 없기 때문에 액면 그대로만 받아들였다.”

    이씨를 잡은 것은 치밀한 정보수집과 오랜 잠복근무 덕분이었다. 이씨의 재산을 샅샅이 뒤진 수사팀은 그가 서울 시내 모처에 빌라 형태의 별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때부터 별장 주변에 숨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그가 잡힌 것은 수사 착수 한 달 만이었다.

    조검사는 이씨로부터 100장에 이르는 자술서를 받아냈다. 거물급 주먹으로부터 그토록 방대한 양의 자술서를 받아낸 것 자체가 기록적인 일이라 검찰 내에서 화제가 됐다. 이씨는 자술서에 성장과정과 주먹세계에서 살아온 얘기를 자세히 털어놓았다. 그것을 통해 자연스럽게 주먹계 세력판도가 파악됐다. 검찰 고위층은 이씨의 자술서를 강력부 검사들에게 ‘교재용’으로 돌렸다.

    그런데 조검사는 이 자술서 때문에 곤욕을 치렀다. 이씨가 자술서에 자신이 아는 몇몇 검사의 이름을 적어놓았기 때문이다. 대부분 호남 출신인 그들은 조검사의 선배들이다. 당사자들은 크게 분개했고 그 일로 조검사는 두고두고 부담을 안게 됐다. 이씨는 이듬해 2월 1심에서 5년형을 선고받았다.

    1990년 1월 검찰은 서울지검에 민생특수부를 설치했다. 민생특수부는 검사5명, 경찰관15명, 검찰수사관 24명으로 편성돼 조직폭력 인신매매 음란퇴폐사범 등을 전담했는데 그해 5월 강력부로 이름을 바꿨다. 심재륜 특수1부장이 민생특수부장을 겸임했다. 심부장을 따라 조검사도 민생특수부로 옮겼다.

    김태촌의 허리춤을 붙들다

    민생특수부는 ‘이름값’을 하기 위해 대형 주먹수사를 기획했다. 1987년 통일민주당 지구당창당 방해사건의 배후 혐의를 받아온 호청련 회장 이승완씨와 당시 국내 최대폭력조직인 범서방파를 이끌던 김태촌씨가 표적이었다. 이씨는 함승희 검사(현재 민주당 의원)가, 김씨는 조검사가 맡았다. 그런데 민생특수부 발족 이전에 이미 김씨는 검찰 수사대상에 오른 상태였다. 이육래씨 수사가 한창이던 1989년 8월 대검에 김씨의 비위사실을 알리는 진정서가 접수된 것이 그 출발이었다. 대검으로부터 진정서를 넘겨받은 서울지검 특수1부는 비밀리에 김씨 수사를 준비했다.

    “민생특수부가 발족하면서 전시상태에 돌입했다. ‘범죄와의 전쟁’이 선포된 것은 1990년 10월이지만, 실제로는 1989년 여름 이육래를 수사하면서 조폭과의 전쟁이 시작된 셈이다. 공식 선전포고가 늦었을 뿐이다. ‘범죄와의 전쟁’이 선포될 무렵 검찰은 이미 상당한 전과를 올린 상태였다.”

    1987년 인천 뉴송도호텔사장 황아무개씨를 칼로 찌른 혐의로 구속됐던 김태촌씨는 1989년 1월 폐암판정을 받아 형집행정지로 풀려난 후 신우회라는 조직을 결성한 상태였다. 기독교 친목모임을 표방했는데, 검찰은 이를 범단으로 규정했다. 출소후 순복음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김씨는 조용기 목사라는 든든한 후원자를 등에 업고 있었다. 그가 ‘회개’했다고 믿은 조목사는 그를 종교집회에 데리고 다녔다.

    검찰은 먼저 김씨의 출소 이후 행적을 면밀히 조사했다. 그 결과 그가 제주도 서귀포 KAL호텔과 광주 신양파크호텔 파친코 운영권 강탈사건에 관여한 사실을 확인했다. 이제 문제는 그를 어떻게 잡느냐는 것이다. 당시 김씨의 주거는 경기도 파주군의 오산리기도원에 제한돼 있었다. 규정에 따르면 주거지를 연속 30일 이상 벗어나면 형집행정지가 취소된다. 이를 피하기 위해 김씨는 한 달에 며칠 정도 기도원에 머물렀는데 진짜 은신처는 확인되지 않고 있었다.

    수사팀은 김씨 주변 사람들의 전화통화를 추적하고 끈질기게 탐문수사를 벌인 끝에 그가 서울 동부이촌동의 미주아파트에 숨어 지낸다는 것을 알아냈다. 체포하기 한 달 전쯤 일이었다. 조검사는 서두르지 않았다. 아파트 근처에 수사관을 잠복시켜 김씨의 행동 반경을 정확히 파악했다. 김씨는 거의 매일 밤 늦게 집에 돌아왔고 오전 10시쯤이면 늘 아파트 부근의 제일사우나로 향했다.

    남은 문제는 수사기밀 유지였다. 김씨는 거물답게 경찰은 물론 검찰을 비롯한 권력기관 곳곳에 비호세력을 두고 있었다. 김씨의 ‘정보원’들은 수시로 수사팀의 움직임을 염탐했다. 이들 중 일부는 김씨 수사가 극비리에 진행되자 “도대체 김태촌을 수사하기는 하는 거냐” 하며 수사팀을 자극해 정보를 캐내려 했다. 몇몇 사회지도급 인사는 직접 전화를 걸어 수사방향에 관심을 나타내기도 했다.

    수사팀이 김씨의 은신처를 알아내고도 곧바로 검거에 나서지 않은 이유는 한마디로 완벽하게 체포하기 위해서였다. 김씨는 외출할 때 늘 20명 이상의 부하와 동행했다. 이들이 있는 한 물리적 충돌이 불가피했다. 수사팀은 꾀를 냈다. 수사정보를 캐러 검사실에 들르거나 전화하는 사람들에게 “김태촌이 부하들과 떼지어 다니는데, 계속 그러면 형집행정지를 취소할 수 있다”고 은근히 ‘역정보’를 흘린 것이다.

    김씨의 정보력은 과연 대단했다. 곧바로 경호원 수를 한 명으로 줄인 것이다. 그 한 명은 운전기사 겸 경호원이었다. 김씨를 속이는 데 성공한 수사팀은 D데이를 5월19일로 잡고 몇 차례 예행연습까지 마쳤다. 체포장소는 사우나탕으로 결정했다.

    드디어 검거 당일, 조검사를 비롯해 총 6명이 출동했다. 조검사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실탄이 장전된 권총을 허리에 찼다. 김씨가 나타나기 전 수사관 한 명이 미리 사우나에 들어갔고, 나머지 4명은 조검사와 함께 밖에 대기했다. 당시 조검사는 두렵지 않았을까.

    “내가 직접 김태촌의 허리춤을 잡았는데 저항을 포기한 듯 허리에 힘이 느껴지지 않았다. 김태촌의 경호원이기도 한 운전사는 체격이 엄청 좋은 칼잡이 ‘꼬마’였는데, 두목이 고분고분 잡히자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했다. 내사하는 데 6개월, 잠복·감시하는 데 1개월이 걸렸다. 이런 얘기는 처음 하는 건데, 체포 전날 밤 집에서 정화수 떠놓고 일이 잘 되길 기도했다. 그날 밤 김태촌 꿈까지 꾸었다. 체포 직후 심재륜 부장에게 보고한 후 김태촌을 차에 태우고 검찰청사로 오는데, 온몸에 힘이 쫙 빠지는 것을 느꼈다.”

    김씨를 잡아들인 조검사는 곧바로 이아무개씨 수사에 나섰다. 김씨와 절친한 친구 사이로 범서방파의 방계조직을 이끌던 이씨는 김씨가 구속된 직후 마카오로 달아났다. 이씨가 검찰 수사망에 걸려든 것은 김씨가 검거될 때 갖고 있었던 1억원짜리 당좌수표 2장 때문이었다. 수사팀은 김씨를 추궁해 그 수표가 이씨로부터 나온 것임을 밝혀냈다. 게다가 소문에 실려온 이씨의 발언이 조검사를 자극했다.

    “해외에 나가 있는 이씨가 자기의 아픈 친구를 잡아넣었다며 ‘조승식 이 새끼, 가만 안 둔다’고 말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당시 이씨는 위장 철강회사를 세우고 홍콩에 본사가 있는 것처럼 꾸며 외화 300만달러를 밀반출한 혐의를 받고 있었다. 일찍이 마카오 카지노에 진출한 그는 한국인들을 상대로 고리의 도박자금을 대주는 일을 했는데, 국내에서 부하들을 시켜 빚을 받아낸 다음 해외로 송금하게 했다.”

    조검사는 이씨의 국내 하수인들을 구속하는 한편 해외에서 귀국하지 않는 이씨를 수배했다. 그런 다음 마카오 카지노에서 거액의 도박을 일삼은 한국인들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조검사는 이 사건을 끝까지 조사하지 못했다. 수사 도중인 그해 8월 부산지검으로 발령이 났기 때문이다.

    후배인 남기춘 검사(현 부산지검 마약수사부장)가 후속수사를 맡았다. 김태촌씨에 대한 보강조사도 남검사 몫이 됐다. 남검사는 두 사건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해외카지노 도박사건의 경우 그해 10월 재벌2세 장아무개씨 등 23명을 상습도박 및 외환관리법위반 혐의로 무더기 구속했다. 남검사는 또 그해 12월 김태촌씨를 범단 조직혐의로 추가기소했다.

    부산지검 강력부로 발령난 조검사는 수석검사로서 부산 주먹 토벌에 나섰다. 당시 부산에서는 전국적으로 강세인 호남 주먹도 전혀 맥을 추지 못했다. 부산 주먹의 판도는 4파전이었다. 칠성파, 신20세기파, 영도파, 신칠성파 등 4개 조직이 부산의 암흑가를 분할하고 있었다. 그중 최대 조직은 일본 야쿠자와 결연의식을 가졌던 칠성파였다.

    조검사에 따르면 칠성파의 조직형태는 일본 야쿠자처럼 두목을 정점으로 한 피라미드 구조다. 두목 밑에 각 구역 책임자가 있고, 각 구역은 다시 여러 개의 소구역으로 나뉘어 각각의 책임자가 있었다. 부산 시내 중심가를 휘어잡고 있던 신20세기파는 안용섭·정상수씨 두 사람이 공동으로 두목을 맡고 있었다. 안씨는 조직관리를, 정씨는 대외관계를 총괄하는 책임자였다. 이 보기 드문 ‘공동 두목제’는 대법원 판결에서도 인정됐다.

    영도파와 신칠성파는 둘 다 칠성파와 관련이 깊다. 영도파 두목 천달남씨는 과거 칠성파 두목 이강환씨의 친구였다. 김영찬씨가 두목인 신칠성파는 이강환씨에게 반기를 든 칠성파 조직원 일부가 집단으로 이탈해 만든 조직이다. 이들 네 조직간의 영역 다툼으로 부산 암흑가는 바람잘 날이 없었다. 조직간 칼부림은 예사고 살인사건도 일어났다. 특히 칠성파와 신칠성파의 충돌이 심했다.

    “‘범죄와의 전쟁’으로 한창 깡패 수사가 불붙고 있었다. 각 파 조직원의 명단을 파악해 그들의 전과기록과 행적을 샅샅이 조사했다. 과거 은폐된 사건의 범인을 추적하고 이름이 알려진 폭력배들의 여죄를 찾았다. 밖에선 몰라도 주먹세계에는 누가 한 짓인지 알려져 있다. 한두 명을 잡아 추궁하면 범인이 잡히지 않아 묻혀진 과거 사건의 진상이 드러났다.”

    영도파 두목의 여인과 공중전화

    부산 주먹의 최강자로 ‘전국구 주먹’으로 통하는 이강환씨는 조검사가 부하들을 잡아들이고 자신에 대한 수사망을 좁혀오자 부산을 떴다. 영도파 두목 천달남씨도 마찬가지였다. 조검사는 두 사람을 전국에 수배했다.

    먼저 잡힌 사람은 천씨. 조검사가 직접 천씨의 은신처인 대구까지 가서 잡아왔다. 천씨를 잡는 과정도 김태촌씨를 검거할 때처럼 드라마틱했다. 천씨 주변 사람들을 찾아나선 수사팀은 천신만고 끝에 천씨와 관계가 깊은 한 여인의 집을 알아냈다. 그 집 전화를 장기간 도청한 결과 천씨의 행방을 추적할 수 있었다.

    전화 발신지를 추적하니 대구였다. 천씨는 용의주도했다. 철저하게 공중전화만 이용했는데, 그것도 장소를 옮겨가며 걸었다. 조검사는 2만5000분의 1 지도를 펴놓고 천씨로부터 전화가 걸려올 때마다 그 발신지를 점으로 찍어나갔다. 천씨가 사용하는 공중전화 부스는 20여 개로 파악됐다. 그러던 중 결정적 단서를 잡았다. 매일 처음 걸려오는 전화의 발신지가 일정 지역을 벗어나지 않았던 것. 이는 천씨가 은신처에서 가까운 공중전화 부스를 이용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 근방에 천씨의 은신처가 있으리라 짐작한 조검사는 수사팀을 꾸려 대구로 날아갔다. 지도를 통해 파악해둔 공중전화 부스 주변에 수사관들을 잠복시켰다. 1991년 1월16일, 여느 날처럼 공중전화 부스에 나타나 전화를 걸고 은신처로 돌아가던 천씨는 새벽부터 잠복한 수사관들에 의해 체포됐다. 체포 당시 천씨는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하지만 천씨의 얼굴을 아는 수사관이 있어 식별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조검사가 현장지휘를 했다. 김태촌씨를 잡을 때도 그랬지만 “큰 놈을 잡을 때는 직접 움직여야 마음이 놓인다”는 원칙 때문이다. 고도의 작전을 쓰려면 검사가 현장에 나가지 않을 수 없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부산 주먹의 대부 이강환씨가 잡힌 것은 그 석달 뒤인 1991년 4월이다. 서울에서 시경특수대에 의해 체포됐다. 부산지검에서 수배령을 내린 까닭에 이씨의 신병은 부산지검 강력부로 넘겨졌다. 이씨는 1989년 3월 행동대원들을 시켜 신칠성파 두목 김영찬씨를 회칼로 난자해 12주의 중상을 입히고, 같은 해 5월 역시 행동대원을 시켜 신칠성파 중간보스 김아무개씨의 다리를 회칼로 절단케 하는 등 10여 차례에 걸쳐 폭력을 배후조종한 혐의를 받고 있었다. 조검사는 이씨를 천달남씨와 마찬가지로 주먹들이 가장 끔찍하게 여기는 범단조직 혐의(두목은 징역 10년 이상 무기·사형 가능)로 구속했다.

    ‘해방 이후 최고의 악질검사’라는 별명을 얻으며 부산 주먹계를 휘저어놓은 조검사는 이강환씨를 잡아들인 후 부산을 떠났다. 새로운 임지는 대전지검 강경지청. 지청장으로 부임한 그는 충남 논산 유흥가를 주무대로 서민들을 갈취해오던 폭력조직 한실파를 초토화했다. 약 50명의 조직원을 파악해 그중 20여 명을 구속하는 한편 두목 정지택씨를 비롯해 달아난 조직원 전원을 수배했다.

    해방 이후 최고의 악질검사

    다음 임지는 광주지검 순천지청. 어느 검찰청이든 조검사가 부임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그 지역 폭력조직을 파악하는 것이다. 순천지청 부장검사로 부임한 그는 광양 일대의 최대 폭력조직인 라이온스파에 대한 수사를 기획했다. 이영렬 검사(현 대검 연구관)에게 첩보를 수집케 하고 내사를 시작했다. 그 결실은 조검사가 떠난 직후 나타났다. 1993년 초 이검사는 광양 라이온스파 조직원 36명을 구속하는 개가를 올렸다.

    대구지검 강력부장 시절엔 별다른 활약이 없었다. 임기가 워낙 짧았던 탓도 있지만, 조검사의 말대로라면 “‘범죄와의 전쟁’ 탓에 워낙 많이 잡혀 들어가고 도망가버려 특별히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조검사는 6개월 만에 수원지검 강력부장으로 옮겨갔다. 안산은 그때껏 ‘범죄와의 전쟁’의 여파가 미치지 못한 지역이었다. 조검사는 그곳에서 안산 원주민파를 소탕했다. 주임검사는 이기동 검사(현 광주지검 장흥지청장)였다. 검찰이 입건한 조직원만 해도 75명이다. 숫자로 봐선 전국적으로 꼽힐 만한 큰 조직이었다. 그중 23명을 구속하고 달아난 조직원들을 전원 지명수배했는데, 그 뒤로도 꾸준히 잡아들였다.

    조검사는 수원지검 근무를 끝낸 후 대전고검을 거쳐 대구지검 김천지청장에 부임했다. 그곳에서도 그의 관심은 변함없이 ‘주먹’이었다. 김천지청은 연주파 행동대장 김창기씨 등 33명을 범단 조직 및 가입 혐의로 구속하는 한편 달아난 두목 박연주씨 등 31명을 같은 혐의로 수배했다. 주임검사는 최윤수 검사(현 부산지검 검사)였다.

    김천지청장 다음으로 맡은 직책은 인천지검 형사1부장. 그 시기에는 특별한 주먹수사가 없었다. 그후 사법연수원 교수, 서울지검 총무부장, 인천지검 부천지청 차장검사를 거쳐 지난해 7월 서울고검으로 옮겼다.

    폭력배를 전문적으로 수사하는 검사들은 종종 ‘역공’에 시달린다. 주먹들이 검사를 괴롭히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직접적인 위협이나 협박이고 또 하나는 투서나 진정서 등을 통한 흠집내기다. 조검사는 아직까지 신체위협이라고 볼 만한 일은 겪어보지 못했다. 1989년 주먹수사로 한창 이름을 날릴 때 폭력조직의 일원으로 짐작되는 누군가가 집에 전화해 죽이느니 살리느니 협박한 것이 고작이다.

    주먹들이 노골적인 위협보다 애용하는 수법은 은근한 협박이다. 1990년 12월 초 조검사의 근무지인 부산지검 강력부에 김태촌씨의 누나가 찾아왔다. 김씨의 누나는 ‘대전 판·검사 술자리 사건(대전의 일부 판·검사들이 폭력배 두목들과 룸살롱에서 어울린 사건으로 진술파 두목 김진술씨의 법정 폭로로 세상에 알려짐)’으로 사표를 낸 김아무개 부장검사 얘기를 들먹인 후 조검사를 걱정(?)해주는 듯한 얘기를 하고 돌아갔다. 당시 김태촌씨에 대한 1심 재판은 증인 불출석 등으로 파행을 겪고 있었는데, 조검사는 부산에 있으면서도 김씨 재판에 관여하고 있었다.

    “제대로 된 조직이라면 수사검사를 직접 위협하지 않는다. ‘수호지’를 보면 싸움수칙 제1조는 ‘관군과는 싸우지 않는다’는 것이다. 검사에 대한 신체위협은 어설픈 조직에 있는 놈들의 영웅심에서 빚어진 것이다. 머리가 돌아가는 깡패 두목들은 ‘검사님을 존경하기 때문에 이런 말씀 드리는데…’ 하면서 ‘우리 애들이 검사님을 손보겠다는 것을 말리고 있다’는 식으로 돌려 말한다. 그러면 나도 이렇게 맞받아친다. ‘야 나도 걱정이다. 너를 괜찮은 건달로 생각하는데, 후배 검사들이 모조리 잡아들이겠다고 난리를 치니 말리는 데도 한도가 있지 않느냐’.”

    흑색선전에 의한 압박도 폭력배들이 검사에 대항하는 전형적인 수법 가운데 하나다. 김태촌씨가 범단 혐의로 기소되기 직전 검찰 주변에서는 주요 폭력조직의 두목들이 가족이나 부하를 동원해 자신들 수사에 직·간접으로 참여한 검사 세 명에게 ‘비리를 폭로하겠다’고 협박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조검사도 거기에 포함돼 있었다. 당시 폭력배들이 떠들어댄 조검사의 ‘비리’는 ‘군산지청에 근무할 때 단골 술집 여종업원과 깊은 관계를 맺었다’는 것이다. 도덕적으로 상처를 입히려는 시도다. 조검사는 이 ‘비리’의 진실 여부에 대해 “깡패 수사를 하면서 약점 잡히는 짓을 한다면 배겨날 수가 없다”는 말로 답변을 대신했다.

    “깡패들이 검사를 골탕 먹이는 수법 중에 가장 효과적인 것은 진정이나 투서다. 수사과정에 그런 것이 관계기관에 접수되면 상부에선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이 자식, 왜 이렇게 수사를 시끄럽게 하는 거야’하고 못마땅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게 공조직의 생리다. 깡패들이 그 점을 꿰뚫어보고 그런 짓을 하는 것이다.

    80년대 초 군산에서 깡패들을 잡아들이면서 ‘악질’ 소리를 들은 이후 술자리에서 몸가짐을 조심해왔다. 83년 이후 여자 나오는 술집엔 가지도 않는다. ‘평생 포장마차에서 술 마시면서 너희들(깡패들)을 괴롭혀 주겠다’고 다짐했다. 80년대 후반 서울지검 특수부에서 심재륜 부장을 처음 만났는데, 그분도 나와 생각이 비슷했다. 심부장과 한팀을 이뤄 수사할 때 우리에게 외압이라는 건 통하지 않았다.”

    조검사는 왜 그토록 주먹수사에 정열을 바쳤을까. 그의 답변이 재미있다.

    “잠 안 자고 열심히 연구해 깡패를 잡으면 남다른 보람을 느낀다. 나는 나쁜 놈을 보면 잠이 안 온다.”

    조검사는 주먹수사에서 일절 타협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깡패 또는 깡패 출신이 저지른 것이라면 아무리 사소한 범죄라도 절대 봐주지 않는다는 원칙을 갖고 있다. 똑같이 무허가 술집을 운영했더라도 깡패 출신에게는 오히려 관련법을 더 엄격하게 적용해 왔다. 그 탓에 ‘적’을 많이 만들었다.

    “깡패를 보면 잠이 안 온다”

    깡패 두목이나 깡패 출신 사업가에게 검찰 고위직을 지낸 변호사가 붙으면 수사검사로서는 여간 부담스럽지 않다. 이런 거물급 변호사는 대개 선임계를 내지 않은 상태에서 수사검사 또는 그 윗선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든다. 이용호 게이트에서 드러난 김태정 전 검찰총장의 역할이 그 경우다. 검찰 안팎에서는 수사검사가 거물급 변호사의 부탁을 무시할 경우 음해성 소문에 시달리거나 심지어 인사에서 불이익을 당한다는 얘기마저 들린다.

    김영삼 정권 말기인 1997년 중반 이후 조검사가 거쳐간 보직을 살펴보면, 이른바 ‘잘 나가는 자리’와는 거리가 멀다. 강력수사통인 그가 수사권이 없는 한직으로 도는 것에 대해 ‘주먹수사의 후유증’으로 보는 시각이 있어 흥미롭다.

    즉 과거 조검사가 주먹들을 수사하는 과정에 구설수에 올랐던 검사들 가운데 고위직에 오른 이들이 그를 ‘물 먹여 왔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검찰의 한 고위 관계자는 “조승식 검사에 대한 인사에는 보복으로 비치는 측면도 있다”고 조심스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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