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나는 깡패를 보면 잠이 안 온다”

한국 최고 ‘주먹통’ 조승식 검사가 말하는 조폭과의 20년 전쟁

  • 조성식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airso2@donga.com

“나는 깡패를 보면 잠이 안 온다”

2/4
폭력세계에는 은폐된 칼부림 사건이 많다. 말하자면 누가 찔렸다는 얘기만 있고 누가 찔렀는지는 알려지지 않은 사건들이다. 대부분 조직간 싸움이다. 조검사는 이미 잡힌 폭력배들을 고리로 삼아 과거 사건의 진상을 밝히고 범인들을 찾아냈다. 이런 식으로 그가 군산에서 잡아들인 폭력배가 수십명에 이르렀다. 그들 중 법원에서 무죄가 선고된 사람은 단 한명도 없다.

“그때는 조무래기들이었는데 뒷날 보니 조직의 두목급들로 성장했더라. 하여간 싹수없고 건들거리는 놈들은 다 잡아넣었다. 그러다보니 군산을 떠난 후에도 나를 음해하는 얘기가 들려왔다. 폭력배들은 관계기관에 진정을 내 나를 골탕먹이기도 했다. ‘수사과정에 맞았다’거나 ‘깡패와 골프 치고 다닌다’ 따위의 내용이었다. 그런데 당시 나는 골프를 전혀 치지 못했다. 내가 골프를 배운 것은 뒷날 지청장을 하면서다. 나중에 들으니, 어떤 주먹 하나가 사석에서 ‘서울에 올라가 조검사와 골프나 한번 쳐볼까’ 하고 말한 것이 소문의 발단이 됐다는 것이다.”

군산지청을 떠난 그는 독일국제형사법연구소 객원연구원, 법무부 근무 등으로 한때 수사일선을 떠났다. 그가 다시 ‘전공’을 살린 것은 1988년 서울지검 특수1부에 배속되면서부터다. 이후 부산지검 강력부에서 활약한 1991년까지 약 3년간이 그의 조폭수사 전성기다. 당시 서울지검 특수1부장은 심재륜 검사(현재 고검장)였다. ‘고집불통’ 심부장과 ‘대한민국 깡패들을 모조리 소탕하겠다’는 사명감에 불타던 조검사는 손발이 잘 맞았다.

첫 ‘희생자’는 이육래씨였다. 전남 보성 출신의 이씨는 호남 주먹의 실세로 통하고 있었다. 그해 8월 이씨가 구속됐을 때 언론은 그를 ‘국내 3대 폭력조직의 대부’니 ‘OB파의 대부’니 하면서 요란을 떨었다. 실제로 그는 범서방파 두목 김태촌씨나 OB파 두목 이동재씨로부터 선배 대접을 받았다. 특히 이동재씨와 가까웠다.

이육래씨의 혐의는 이권 갈취였다. 매립지 인가를 받은 부산의 사업가 송아무개씨를 납치, 서울 이태원의 한 오피스텔에 사흘 동안 감금해 시가 100억원대의 토지에 대한 양도각서를 강제로 받아낸 것이다. 그 과정에 송씨는 김씨에게 맞아 갈비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전국 규모의 우익단체인 호청련(호국청년연합회·총재 이승완) 간부이기도 한 그는 서울에서 몇몇 카바레와 나이트클럽 지분을 갖고 있으면서 ‘고급 건달’ 행세를 하고 있었다. 매립지 업자 납치·폭행사건에는 서아무개, 배아무개씨 등 호청련의 일부 간부가 가담한 것으로 드러났다. 조검사는 이씨를 비롯해 4명을 구속했다.

이육래와 호남 출신 검사들

조검사가 이씨를 수사하기 직전 이씨가 몇몇 호남 출신 검사와 친분이 깊다는 진정서가 청와대에 접수된 일이 있었다. 청와대는 이를 검찰에 넘겼는데, 조사를 벌인 검찰은 진정서에 이름이 거론된 검사들에게 특별한 문제가 없는 것으로 결론지었다. 하지만 검찰 안팎에선 이씨의 검찰 인맥에 대한 소문이 무성했다.

처음엔 수사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이씨가 사전에 정보를 입수하고 행방을 감췄기 때문이다. 권력기관에 있는 사람들이 전화를 걸어와 이씨 수사 상황을 관심 있게 물어보기도 했다. 검찰 내부에서도 비슷한 내용의 전화가 몇 차례 걸려왔다. 무언의 압력이었지만 조검사는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려버렸다.

“깡패 수사는 집요하게 달라붙어야 성공할 수 있다. 한번 외압에 흔들리면 그 다음부터는 수사하기 힘들다. 나는 늘 하늘이 무너져도 잡아넣겠다는 각오로 임했다. 이육래를 잡아넣을 때 여기저기서 전화가 걸려 왔다. 외압이라는 건 수사검사가 흔들릴 때나 해당되는 말이다. 부담을 느끼긴 해도 압력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외압이란 건 있을 수 없다. 또 수사검사에게 직접적인 압력을 넣는 경우는 드물다. ‘어떻게 돼가냐’고 물어보는 정도다. 나는 애초 압력이라는 걸 받아들일 생각이 없기 때문에 액면 그대로만 받아들였다.”

이씨를 잡은 것은 치밀한 정보수집과 오랜 잠복근무 덕분이었다. 이씨의 재산을 샅샅이 뒤진 수사팀은 그가 서울 시내 모처에 빌라 형태의 별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때부터 별장 주변에 숨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그가 잡힌 것은 수사 착수 한 달 만이었다.

조검사는 이씨로부터 100장에 이르는 자술서를 받아냈다. 거물급 주먹으로부터 그토록 방대한 양의 자술서를 받아낸 것 자체가 기록적인 일이라 검찰 내에서 화제가 됐다. 이씨는 자술서에 성장과정과 주먹세계에서 살아온 얘기를 자세히 털어놓았다. 그것을 통해 자연스럽게 주먹계 세력판도가 파악됐다. 검찰 고위층은 이씨의 자술서를 강력부 검사들에게 ‘교재용’으로 돌렸다.

그런데 조검사는 이 자술서 때문에 곤욕을 치렀다. 이씨가 자술서에 자신이 아는 몇몇 검사의 이름을 적어놓았기 때문이다. 대부분 호남 출신인 그들은 조검사의 선배들이다. 당사자들은 크게 분개했고 그 일로 조검사는 두고두고 부담을 안게 됐다. 이씨는 이듬해 2월 1심에서 5년형을 선고받았다.

1990년 1월 검찰은 서울지검에 민생특수부를 설치했다. 민생특수부는 검사5명, 경찰관15명, 검찰수사관 24명으로 편성돼 조직폭력 인신매매 음란퇴폐사범 등을 전담했는데 그해 5월 강력부로 이름을 바꿨다. 심재륜 특수1부장이 민생특수부장을 겸임했다. 심부장을 따라 조검사도 민생특수부로 옮겼다.

김태촌의 허리춤을 붙들다

민생특수부는 ‘이름값’을 하기 위해 대형 주먹수사를 기획했다. 1987년 통일민주당 지구당창당 방해사건의 배후 혐의를 받아온 호청련 회장 이승완씨와 당시 국내 최대폭력조직인 범서방파를 이끌던 김태촌씨가 표적이었다. 이씨는 함승희 검사(현재 민주당 의원)가, 김씨는 조검사가 맡았다. 그런데 민생특수부 발족 이전에 이미 김씨는 검찰 수사대상에 오른 상태였다. 이육래씨 수사가 한창이던 1989년 8월 대검에 김씨의 비위사실을 알리는 진정서가 접수된 것이 그 출발이었다. 대검으로부터 진정서를 넘겨받은 서울지검 특수1부는 비밀리에 김씨 수사를 준비했다.

“민생특수부가 발족하면서 전시상태에 돌입했다. ‘범죄와의 전쟁’이 선포된 것은 1990년 10월이지만, 실제로는 1989년 여름 이육래를 수사하면서 조폭과의 전쟁이 시작된 셈이다. 공식 선전포고가 늦었을 뿐이다. ‘범죄와의 전쟁’이 선포될 무렵 검찰은 이미 상당한 전과를 올린 상태였다.”

1987년 인천 뉴송도호텔사장 황아무개씨를 칼로 찌른 혐의로 구속됐던 김태촌씨는 1989년 1월 폐암판정을 받아 형집행정지로 풀려난 후 신우회라는 조직을 결성한 상태였다. 기독교 친목모임을 표방했는데, 검찰은 이를 범단으로 규정했다. 출소후 순복음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김씨는 조용기 목사라는 든든한 후원자를 등에 업고 있었다. 그가 ‘회개’했다고 믿은 조목사는 그를 종교집회에 데리고 다녔다.

검찰은 먼저 김씨의 출소 이후 행적을 면밀히 조사했다. 그 결과 그가 제주도 서귀포 KAL호텔과 광주 신양파크호텔 파친코 운영권 강탈사건에 관여한 사실을 확인했다. 이제 문제는 그를 어떻게 잡느냐는 것이다. 당시 김씨의 주거는 경기도 파주군의 오산리기도원에 제한돼 있었다. 규정에 따르면 주거지를 연속 30일 이상 벗어나면 형집행정지가 취소된다. 이를 피하기 위해 김씨는 한 달에 며칠 정도 기도원에 머물렀는데 진짜 은신처는 확인되지 않고 있었다.

수사팀은 김씨 주변 사람들의 전화통화를 추적하고 끈질기게 탐문수사를 벌인 끝에 그가 서울 동부이촌동의 미주아파트에 숨어 지낸다는 것을 알아냈다. 체포하기 한 달 전쯤 일이었다. 조검사는 서두르지 않았다. 아파트 근처에 수사관을 잠복시켜 김씨의 행동 반경을 정확히 파악했다. 김씨는 거의 매일 밤 늦게 집에 돌아왔고 오전 10시쯤이면 늘 아파트 부근의 제일사우나로 향했다.

남은 문제는 수사기밀 유지였다. 김씨는 거물답게 경찰은 물론 검찰을 비롯한 권력기관 곳곳에 비호세력을 두고 있었다. 김씨의 ‘정보원’들은 수시로 수사팀의 움직임을 염탐했다. 이들 중 일부는 김씨 수사가 극비리에 진행되자 “도대체 김태촌을 수사하기는 하는 거냐” 하며 수사팀을 자극해 정보를 캐내려 했다. 몇몇 사회지도급 인사는 직접 전화를 걸어 수사방향에 관심을 나타내기도 했다.

수사팀이 김씨의 은신처를 알아내고도 곧바로 검거에 나서지 않은 이유는 한마디로 완벽하게 체포하기 위해서였다. 김씨는 외출할 때 늘 20명 이상의 부하와 동행했다. 이들이 있는 한 물리적 충돌이 불가피했다. 수사팀은 꾀를 냈다. 수사정보를 캐러 검사실에 들르거나 전화하는 사람들에게 “김태촌이 부하들과 떼지어 다니는데, 계속 그러면 형집행정지를 취소할 수 있다”고 은근히 ‘역정보’를 흘린 것이다.

김씨의 정보력은 과연 대단했다. 곧바로 경호원 수를 한 명으로 줄인 것이다. 그 한 명은 운전기사 겸 경호원이었다. 김씨를 속이는 데 성공한 수사팀은 D데이를 5월19일로 잡고 몇 차례 예행연습까지 마쳤다. 체포장소는 사우나탕으로 결정했다.

드디어 검거 당일, 조검사를 비롯해 총 6명이 출동했다. 조검사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실탄이 장전된 권총을 허리에 찼다. 김씨가 나타나기 전 수사관 한 명이 미리 사우나에 들어갔고, 나머지 4명은 조검사와 함께 밖에 대기했다. 당시 조검사는 두렵지 않았을까.

“내가 직접 김태촌의 허리춤을 잡았는데 저항을 포기한 듯 허리에 힘이 느껴지지 않았다. 김태촌의 경호원이기도 한 운전사는 체격이 엄청 좋은 칼잡이 ‘꼬마’였는데, 두목이 고분고분 잡히자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했다. 내사하는 데 6개월, 잠복·감시하는 데 1개월이 걸렸다. 이런 얘기는 처음 하는 건데, 체포 전날 밤 집에서 정화수 떠놓고 일이 잘 되길 기도했다. 그날 밤 김태촌 꿈까지 꾸었다. 체포 직후 심재륜 부장에게 보고한 후 김태촌을 차에 태우고 검찰청사로 오는데, 온몸에 힘이 쫙 빠지는 것을 느꼈다.”

김씨를 잡아들인 조검사는 곧바로 이아무개씨 수사에 나섰다. 김씨와 절친한 친구 사이로 범서방파의 방계조직을 이끌던 이씨는 김씨가 구속된 직후 마카오로 달아났다. 이씨가 검찰 수사망에 걸려든 것은 김씨가 검거될 때 갖고 있었던 1억원짜리 당좌수표 2장 때문이었다. 수사팀은 김씨를 추궁해 그 수표가 이씨로부터 나온 것임을 밝혀냈다. 게다가 소문에 실려온 이씨의 발언이 조검사를 자극했다.

“해외에 나가 있는 이씨가 자기의 아픈 친구를 잡아넣었다며 ‘조승식 이 새끼, 가만 안 둔다’고 말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당시 이씨는 위장 철강회사를 세우고 홍콩에 본사가 있는 것처럼 꾸며 외화 300만달러를 밀반출한 혐의를 받고 있었다. 일찍이 마카오 카지노에 진출한 그는 한국인들을 상대로 고리의 도박자금을 대주는 일을 했는데, 국내에서 부하들을 시켜 빚을 받아낸 다음 해외로 송금하게 했다.”

2/4
조성식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airso2@donga.com
목록 닫기

“나는 깡패를 보면 잠이 안 온다”

댓글 창 닫기

2019/09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