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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대사관저 하비브하우스의 120년 비사

  • 최영재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cyj@donga.com

美대사관저 하비브하우스의 120년 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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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비브하우스는 미국이 1884년에 조선왕조로 부터 사들인 것으로 조선왕실이 외국인에게 매각한 최초의 부동산이다. 또 전세계 각국에서 미국 정부가 대사관저로 갖고 있는 부동산 가운데 가장 오래된 곳이다. 서울에 있는 각국 대사관저 가운데 한국 고유의 가옥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유일한 곳이기도 하다.
지하철 시청역에서 가로수와 벤치가 편안하게 배치된 덕수궁 돌담길(정동길)을 따라 10분 정도 걷다보면, 중앙에 분수대가 있는 아담한 사거리가 나온다. 곧바로 나가면 정동극장과 이화여고후문, 예원학교, 러시아공사관 옛터, 경향신문사가 나오고,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개신교회인 정동제일교회를 끼고 왼쪽길로 걸어가면 서소문길로 빠진다. 이 길에서는 현재 주한러시아대사관 신축공사가 한창이다.

문제는 오른쪽 길이다. 덕수궁 담장을 끼고 있는 이 길은 경찰이 삼엄하게 경계를 펴고 있어 일반인이 접근할 엄두를 내기 힘들다. 용기를 내서 걷다보면 왼쪽에 시선을 차단하는 육중한 갈색 철제문이 몇 개 나오는데, M16을 메고 경계하는 전투경찰의 위세가 당당하다. 조금 더 걸으면 오른쪽에 덕수궁 후문이 나오는데, 이 문으로 들어가면 곧 덕수궁의 석조전이다. 여기서 조금 더 걸어나가면 광화문 네거리가 눈에 들어온다.

인적이 드문 이 길 왼쪽의 갈색 철제문은 하루 한 차례, ‘001001’이라고 씌어진 노란색 번호판을 단 짙은 남색 캐딜락이 나타나면 미끄러지듯 열린다. 방탄유리를 끼운 이 자동차는 한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사람 중 하나인 주한미국대사의 관용차다. 노란색 번호판의 앞숫자 001은 미국대사관을 뜻하고, 뒤의 001은 대사를 의미한다. 그러나 일단 대문만 통과해서 이곳에 들어서면 삼엄한 바깥 분위기와는 달리 마음이 편안해진다. 잘 손질된 녹색 잔디와 정원수, 석등, 해태상 뒤에 배치된 전통 기와집을 바라보면 쾌적한 별장에 온 듯하다.

서울 세종로 세종문화회관 건너편의 주한미국대사관은 미 대사가 업무로 사용하는 곳이지만, 그가 사는 곳은 바로 이 집이다. 대사관저의 이름은 하비브하우스로 역대 주한 미국대사 중 한 사람인 필립 C 하비브 대사(1971년 10월∼1974년 8월)의 이름을 따 지었다.

하비브하우스가 있는 정동은 한국의 개화를 상징하는 공간이다. 정동의 역사는 1400년대 중반에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이 작은 궁(현재의 덕수궁)을 지으면서 시작되었으나 16세기 말에 이르러서야 조선의 중심부로 떠올랐다. 임진왜란 중에 경복궁과 창덕궁이 화재로 소실되면서 선조가 덕수궁을 왕실의 거처이자, 정무를 보는 곳으로 삼았던 것이다. 1600년대 초에 선조는 덕수궁 인근에 두 개의 궁을 증축하였다. 역사학자들은 하비브하우스가 이 당시 즉, 1600년대 초에 궁의 일부로 지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이후 선조가 사망한 뒤, 광해군이 경복궁을 재건하면서 덕수궁은 쇠퇴의 길을 걷다가 구한말에 이르러 다시 역사의 중심지로 부상하게 되었다.

19세기 후반 당시 조선은 쇄국정책을 펴고 있었다. 쇄국정책은 1876년 조선이 일본과 우호조약을 체결하고 4년 뒤인, 1880년 일본이 첫 외교관을 조선에 파견함으로써 막을 내렸다. 그런데 1880년 이전까지만 해도 서울의 도성 4대문 안에는 외국인 거주가 허용되지 않았다. 조선에 파견된 첫 외국 공관인 일본공사관의 경우도 남대문이 내려다보이는 성밖 남산 자락에 자리잡고 있었다.

4대문 안으로 들어온 최초의 외국 공관이 미국공사관이다.

한국 개화를 상징하는 정동

이후 모든 서방국가의 공사관은 덕수궁 근처 정동에 밀집하게 되었다. 미국공사관의 뒤를 이어 영국, 독일, 러시아, 이탈리아 그리고 프랑스공사관이 이웃하여 들어섰다. 개신교의 선교사들도 역시 정동으로 모여들어 살 집과 학교, 클럽 등을 세워나갔다. 1890년에 이르자 정동 일대의 서양인 수는 80명으로 늘어났으며 모두가 덕수궁 근처에 살았다.

당시 정동거리에는 중국인 야채상과 외국인을 위한 양복점, 러시아대사의 처형인 손탁 부인이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가 있었다. 또 정동거리에는 1886년 감리교 선교사들이 왕실의 후원 아래 배재학당을 세웠다. 배재학당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을 비롯하여 많은 인재를 길러냈다. 감리교 선교사들은 같은해에 정동거리에 이화학당을 세웠다. 한국에서 출생한 최초의 서양인은 1885년에 태어난 앨리스 아펜젤러다. 이 아이를 당시 미국 공관의 의사인 호러스 앨런 박사가 받았다고 한다.

조선이 미국에 문호를 개방한 것은 1882년 5월이다. 양국은 제물포조약을 맺고 그 이듬해인 1883년 5월 루셔스 푸트(Lucius Foote) 공사가 부임했다. 당시 푸트 공사는 아내와 비서인 C.S. 스쿠더, 소므소니언협회의 P.L. 라우이 등과 통역관 사이토로 이루어진 수행단을 데리고 조선에 도착했다. 미 국무부가 부여한 푸트 공사의 직책은 특수사절 및 전권공사다. 미공사관의 인력이 워낙 적었던 시기라, 푸트 공사는 미 정부 차원의 중요 업무뿐만 아니라 공사관 사무실 및 관저로 쓸 장소를 찾는 일상업무도 처리해야 했다.

이를 위해 미 국무부는 연간 미화 3000달러의 예산을 책정해 공사관의 각종 비용 및 서기와 번역관의 급여를 충당했다고 한다. 당시 푸트 공사의 연봉은 미화 5000달러였다. 푸트 공사 일행이 처음 서울에 도착해 어디에 거처를 두었는지는 알려진 바 없다. 당시 서울에는 서구식 집이나 호텔이 없었고, 여관만 몇 개 있었을 뿐이다.

초대 주미공사 루셔스 푸트가 매입

푸트 공사 일행은 도착한 뒤 왕실에서 마련한 거처에서 머물렀을 수도 있다. 당시 외국사절에게는 왕실의 수많은 왕자들과 동등한 예우를 베푸는 것이 관례였다. 그래서 왕실에서 공사 일행을 위해 거처를 마련해 주었을 가능성이 크고, 이것은 관례를 벗어나지 않는 것이었다. 조선 왕실은 오래 전부터 덕수궁 근처 민씨 일가 소유의 건물을 이러한 용도로 쓰고 있었다.

1884년 8월 미대사관의 기록을 보면 민씨 가문 소유인 이웃한 부동산 두 곳을 당시 금액으로 미화 2200달러에 ‘부덕(‘푸트’라는 외국어를 한국식 한자어로 표기했을 때 가장 가까운 발음이었다) 공사’가 사들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때 한 건물은 관저로 사용하고, 다른 한 건물은 공사관으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푸트 공사는 당연히 미 의회가 건물을 매입하는 데 필요한 예산을 지급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1884년 미국 의회가 이를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하지 않은 채 휴회하자 푸트 공사는 자신이 직접 돈을 지불하고 본인 명의로 부동산을 매입했다.

푸트 공사가 서울에 도착했을 당시에 덕수궁 일대는 왕실이 거주하는 곳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러나 왕실의 일원이 살고 있었음에도 제대로 관리되지 않아 잡초가 무성했다고 한다. 왕실 가족은 덕수궁보다 훨씬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경복궁에 거처하고 있었고, 고종도 경복궁에서 국사를 보고 있었다.

미 의회는 1887년이 되어서야 부동산 매입 예산을 책정하여 지급했다. 같은해 9월, 푸트 공사는 자신이 사들인 부동산을 미화 4400달러에 미국 정부에 넘긴다는 증서를 발급했고, 1888년 3월8일 한성부(Seoul City Office)는 이 부동산이 ‘영구히’ 미국 정부에 매각되었음을 기록한 증서를 발급했다. 공사관 본 건물은 푸트 공사가 사용하기 전에는 왕실 후궁 한두 명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 인접 건물들도 비슷한 용도로 지었을 것으로 보인다.

푸트 공사가 1884년 매입한 건물은 현재 하비브하우스의 일부분을 구성하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이후 미국 공사관은 1890년 6월에 민씨 가문 하인 소유의 야채밭이던 땅을 일괄적으로 사들여 터를 더 넓혔다. 1948년 9월20일, 주한미국대사관은 한국정부로부터 미화 14만9345달러88센트에 부동산 세 군데를 더 사들였다. 관저 담 바로 밖의 땅으로 이전에 서울유니언클럽 터와 정원 담 너머인 주거지역으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이들 건물은 한때 왕실 여인들의 처소로 사용되다가 일제 치하 때는 일본인 주거지역으로 쓰이기도 했다. 현재 이곳은 미대사관 부대사, 정무참사관 등이 관저로 사용하고 있다.

King’s road

하비브하우스 자리는 고종의 아관파천으로 한국 근대사에서 더욱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아관파천 당시 고종이 하비브하우스의 정원 뒤로 난 길을 이용하여 미국공사관 북서쪽에 있던 러시아공사관(현재 사적지로 보존되고 있음)으로 몸을 피한 것이다. 당시 미국공사관 정원 뒷길은 덕수궁과 외국공사관을 잇는 통로였다. 이 길은 자연스레 만들어진 보통 길이었으나 당시의 정치적 상황 때문에 특별히 중요성을 띠게 되었다.

아관파천 당시 고종은 자신이 미국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 노력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하비브하우스의 정원 뒷길을 미국 해병대가 지키고 있었고, 이 때문에 이러한 인상은 더욱 짙어졌다. ‘King’s road’라고 불리는 이 길은 지금도 그 자리에 있다.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1904년 아관파천 뒤 러시아공사관에 머물던 고종은 덕수궁을 정비하여 그곳으로 환궁했다.

이후 일제식민통치, 1·2차세계대전, 6·25전쟁을 겪으면서도 이 낡은 건물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1차세계대전 당시 미국은 일본과 우호조약 관계에 있었다. 미국은 서울에는 영사관을, 일본에는 대사관을 유지했다. 따라서 정동의 옛 공사관은 그대로 보존되었다. 미국과 일본이 전쟁을 벌이던 태평양전쟁 시기에도 이 집은 살아남았다. 미국은 2차세계대전 당시 스위스 정부와 특별 조치를 맺어, 정동의 대사관저에 스위스 국기를 내걸었다. 하비브하우스는 스위스의 중립성 아래 화를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미 군정기에도 이 건물은 미국 관계자들의 숙소 노릇을 했다. 대한민국 군정을 이끌던 존 R 하지 장군의 정치자문관 역할을 수행한 미국무부 관계자들이 이 대사관저에서 기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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