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2월호

항일 斷指시위 벌이고 조폭으로 쫓기는 사람들

  • 조성식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mairso2@donga.com

    입력2004-11-16 14: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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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8월13일 오전 11시30분 서울 서대문구 독립공원. 몇 대의 승용차가 공원 앞에 미끄러져 들어왔다. 차에서 내린 사람들은 모두 25명. 하나같이 검은옷에 짧은 머리를 한 건장한 체구의 20∼30대 사내들이었다. 그들은 차 트렁크에서 ‘구국결사대’라고 적힌 머리띠와 태극기를 꺼내 몸에 둘렀다.

    아침부터 쏟아진 장대비가 독립문을 거세게 후려치고 있었다. 비 탓인지 공원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사전에 정보를 알았거나 탑골공원에서부터 이들을 뒤쫓아온 일부 언론사 취재진 10여 명 외에 일반시민은 별로 없었다. 독립관 앞으로 모여든 이들은 줄지어 늘어섰다. 이어 대표인 듯한 30대 후반의 사내가 앞으로 나와 구호를 외쳤다.

    “한국을 침략하는 일본은 반성하라!”

    “일본 수상 고이즈미는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중단하고 사죄하라!”

    나머지 사내들이 한 손을 치켜들고 ‘반성하라’ ‘사죄하라’ 등 끝말을 세 번 복창했다. 고이즈미 일본 총리의 신사참배, 일본의 역사왜곡, 불평등한 한·일어업협정 등을 규탄하는 항일(抗日)의 구호들이었다.



    구호를 외친 사내들은 4개의 도마를 땅바닥에 깔고 그 위에 각각 소형 작두를 올려놓았다. 한 번에 4명씩 모두 13명이 돌아가면서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잘랐다. 손가락이 잘릴 때마다 “일본은 사죄하라”는 울부짖음이 피를 토하듯 공중에 흩뿌려졌다. 그것은 흡사 짐승의 울음과도 같았다.

    끓는 냄비에 수증기가 맺히듯 반토막이 된 새끼손가락에서 실핏방울이 몽글몽글 솟아나오더니 곧 선홍빛 피가 물컹물컹 쏟아졌다. 피는 빗물을 타고 빠르게 공원 뜨락으로 번져나갔다. 상처를 붕대로 싸맨 사내들은 마지막으로 만세삼창을 했다. ‘대한민국 만세!’ 잘린 손가락들은 태극기에 싸여 승용차 트렁크로 옮겨졌다.

    그로부터 5시간 후인 오후 4시30분. 고이즈미 총리는 신사참배를 강행했다. 야스쿠니신사에 몰려든 1만여 명의 지지자들은 일장기를 흔들며 ‘고이즈미 총리 야스쿠니 참배 만세!’를 외쳤다. 대다수 일본 방송은 정규방송을 중단한 채 긴급뉴스로 이를 보도했다.

    이날 밤 국내 방송은 단지의식과 신사참배 장면을 대조시켜 보도했다. 다음날 미국의 ‘뉴욕타임스’는 극명한 대립을 보이는 두 장의 사진을 나란히 실었다. 이미 단지 장면은 전날 CNN 방송을 타고 전세계로 전파된 상태였다.

    이날 단지의식에 참여한 사내들은 그뒤 어떻게 됐을까. 취재결과 그들은 수사기관이 조직폭력배로 인정해 구속됐거나 수배된 것으로 드러났다. 주먹계의 한 관계자는 “어이없어 말이 나오지 않는다”며 “자기 손가락을 잘라가며 일본에 항의한 애국청년들에게 정부가 이럴 수 있는가” 하고 분통을 터뜨렸다.

    이 사태에 대한 시각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는, 그들이 폭력조직의 일원이며 주먹계에서 세(勢)를 과시하려는 목적에서 단지사건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둘째는, 폭력조직 연루 여부를 떠나 손가락을 자른 행동 자체는 우국적인 것이며 그들을 ‘갑작스럽게’ 조직폭력배로 간주해 수사하는 것은 무리라는 시각이다. 셋째는 단지와 조직폭력을 별개로 보는 시각이다. 즉 단지에 담긴 뜻과 별개로 그들은 조직폭력배로서 검찰의 내사대상에 올라 있었다는 것이다.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

    이 사건은 충남 아산경찰서와 천안경찰서에서 나눠 수사하고 있다. 단지시위에 참가한 사람들의 주거지가 이 지역인 까닭이다. 아산경찰서는 단지사건을, 천안경찰서는 조직폭력 수사를 맡고 있다. 두 건 다 천안지청의 지휘를 받고 있다. 아산경찰서 수사과는 단지사건 관련자들을 집시법위반 혐의로 입건했다. 독립공원에서 집회를 갖기 전 관계기관에 신고를 하지 않았다는 혐의다.

    25명의 ‘구국결사대’가 서울로 올라온 것은 ‘거사’ 전날인 8월12일 밤 자정 무렵이다. 그들은 이날 밤 KBS 9시 뉴스를 통해 고이즈미 일본총리가 다음날 신사참배를 강행한다는 보도를 접하고 나서 급히 상경한 터였다.

    애초 시위장소로 정한 곳은 종로구 중학동에 있는 일본대사관 앞. 강남의 한 여관에 집단투숙한 이들은 새벽 2시께 현장을 답사했다. 그런데 경비가 심해 일을 벌이는 게 쉽지 않아 보였다.

    아침 8시가 되자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비가 쏟아졌다. 청담동에서 아침식사를 한 그들은 시위장소를 바꿔 탑골공원으로 향했다. 탑골공원에 가니 공원 문이 닫혀 있었다. 경찰이 사전에 정보를 입수하고 봉쇄한 것이다(아산·천안경찰서는 이들의 단지계획을 사전에 알고 있었고, 이때쯤엔 서울 경찰에도 비상이 걸렸다). 탑골공원에서 뜻을 이루지 못한 그들은 독립공원으로 차를 몰았다. 일종의 ‘기습’이었다. 경찰도 이것만은 막지 못했다.

    “시키는 대로 자른 사람 많다”

    아산경찰서는 사건 직후 단지사건과 관련해 20여 명을 조사했다. 한차례 조사 후 일단 모두 귀가조치했다. 수사과 형사계 관계자는 이들의 혐의에 대해 “더 조사해 봐야 알겠지만, 집시법위반도 경우에 따라서는 실형이 선고된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에 따르면 관련자 중에는 ‘내용’도 모르고 단지의식에 참여한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구국결사대장이라는 윤호현(38)씨와 몇몇 주동자를 뺀 나머지 사람은 ‘시키는 대로’ 손가락을 잘랐다. 전날 여관에 투숙할 때 단지계획을 알았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심지어 당일에야 알았다는 사람도 있다. 재소환에 잘 응하지 않아 조사에 애를 먹었다.”

    단지사건 관련자 중에는 20대가 많다. 자영업자, 유흥업계 종사자, 공익근무요원,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청년, 무직자 등으로 구성돼 있다. 하지만 단지의식을 주도한 이들은 무술도장을 운영하거나 무술인협회에 소속된 사람들이다.

    겉으로 드러난 이 사건 관련자는 독립공원에 집결했던 25명이다. 그러나 내막을 들여다보면 훨씬 많은 사람이 이 사건에 관련돼 있음을 알 수 있다. 사건 당일 서울에는 이들 25명과 뜻을 같이하는 100명 안팎의 군중이 일본대사관 주변과 동작동에 있는 국립현충원에 모여 있었다. 이들은 단지의식과 더불어 항일궐기대회를 가지려 했으나 경찰의 강력한 제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 많은 인원은 어떻게 동원된 것일까. 단지사건의 배경을 추적하면 조일환(64)이라는 인물을 만나게 된다. 주먹계 거봉인 김두한씨의 후계자인 조씨는 제3세대 주먹의 맏형 격으로 한때 전국 최고의 주먹으로 이름을 날렸다. 지금도 주먹계에서는 그의 위상을 무시하지 못한다. 1980년 중반 일선 주먹계를 떠난 이후 사업가로 자리를 굳히는 한편 불우 청소년을 대상으로 장학사업을 하고 교도소 교화강연을 다니는 등 주먹계 주변에서 나름대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번 사건의 배경엔 그의 그림자가 짙게 깔려 있다. 이는 경찰도 인정한다. 아산경찰서의 한 관계자는 “단지의식에 참가한 청년들은 조일환씨의 추종세력”이라고 귀띔했다. 조씨도 이를 숨기지 않는다. 사건 직후 그는 아산경찰서에 찾아가 단지의식이 자신의 주도로 이뤄졌음을 밝히기도 했다.

    주먹계 주변에서 ‘우국지사’로 통하는 조씨는 ‘현역’으로 활동할 때나 지금이나 ‘국가와 민족을 위한 주먹’을 신조로 삼고 있다. 그의 신념이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난 것이 바로 1974년의 단지사건이다. 육영수 여사 피살사건에 대한 일본 정부와 일본 언론의 태도에 분개해 일으켰다는 이 사건은 한일 양국 정부에 큰 충격을 안겼다.

    당시 천안 시내 중심가에 있던 유관순 동상 앞에서 새끼손가락을 자른 조씨는 110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상경, 일본대사관 앞에서 집단 단지의식을 감행했다. 애초 100명이 단지를, 10명이 할복을 하려는 계획이었으나 경찰의 제지로 34명의 단지로 끝이 났다. 당시 경찰은 관련자들을 차에 태워 서울대학병원으로 가 치료를 받도록 조처했다. 관련자들은 손가락 봉합수술을 거부한 채 손가락을 일본대사관에 전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당국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시 조씨 일행은 천안에서 시민들의 환영 속에 시가행진을 벌이기도 했다. 1996년 KBS는 이 사건을 소재로 ‘단지의 꿈’이라는 교양프로그램을 제작해 방영하기도 했다.

    이번 단지사건은, 말하자면 1974년 단지사건의 재판인 셈이다. 단지시위 계획이 무르익은 것은 사건이 일어나기 한 달전쯤이다. 조일환씨가 자신이 고문으로 있는 충우회 회원들 및 평소 그를 따르는 청년들과 더불어 항일 궐기대회를 구상한 게 출발점이다. 충청지역의 주먹출신 사업가와 지역유지 등으로 구성된 충우회는 그동안 장학사업을 비롯해 각종 사회봉사사업을 벌여왔다.

    단지시위대의 주축이 된 사람들이 바로 윤호현씨가 대장을 맡은 ‘구국결사대’다. 시위대는 3개조로 편성됐는데, 그중 유일하게 ‘행사’ 하루 전날 상경한 윤씨 조만이 뜻을 이룬 셈이다. 조씨는 당일 오전 7시쯤 지지자 60여 명과 함께 상경했다가 경찰의 강력한 제지에 부딪혀 시위계획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단지사건이 일어나기 하루 전날 오후, 경찰이 ‘구국결사대’측과 접촉했다는 사실이다. 그 자리에서 ‘구국결사대’ 대표들은 단지시위를 만류하는 경찰 간부들에게 “고이즈미가 신사참배를 하지 않으면 단지계획은 철회하고 궐기대회만 갖겠다”고 약속했다. 약속대로라면 ‘구국결사대’는 고이즈미 총리가 신사참배를 할 때까지는 움직이지 말았어야 했다. 그런데 신사참배에 앞서 단지의식을 결행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경찰과 한 약속을 어긴 셈이다.

    경찰뿐만 아니라 검찰도 사전에 단지시위 계획을 알고 있었다. 천안지청 검찰 관계자는 사건 이틀 전인 8월11일 조일환씨를 만나 단지시위를 하지 말라고 설득했으나 조씨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최근 기자와 만난 조씨는 “모든 일은 내가 지시했으며 동지들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울분을 터뜨렸다.

    “우리나라에는 아직 친일파가 너무 많다. 독도를 지키는 데 우리 조상이 얼마나 고생을 했나. 그런데 지금 독도는 공동수역으로 인정돼 사실상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역사교과서 왜곡과 어업협상은 또 어떤가. 고이즈미의 신사참배에서 보듯 일본은 다시 군사대국의 길을 걷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 정부의 대응태도는 실망스럽기만 하다. 일본에 반성을 촉구하기 위해 일으킨 행동을 조직(폭력)으로 몰다니 이것이 한국의 경찰인가 일본의 경찰인가. 일이 이렇게 돼 단지시위에 참여한 동지들에게 미안한 마음이다. 하지만 그들이 자랑스럽다.”

    사전에 경찰·검찰과 접촉

    현재 조직폭력배로 쫓기고 있는 ‘구국결사대’측은 “경찰이 ‘괘씸죄’를 적용해 보복수사를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사건 직후 아산·천안경찰서의 일부 간부가 이 사건과 관련해 타 지역으로 전보 조치됐는데, 경찰이 이에 대한 앙갚음으로 강경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단지사건이 이 지역 경찰 관계자들의 인사에 영향을 끼쳤다는 얘기는 검찰 주변에서도 들린다. 아산경찰서의 한 관계자는 이에 대해 묻자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우리한테는 아주 징글맞은 사건”이라며 말을 삼갔다.

    그런데 보복수사 주장은, 적어도 수사기관 설명대로라면 설득력이 떨어진다. 천안경찰서 수사과의 한 형사는 “단지사건이 일어나기 전 이미 검찰이 문제의 조직을 내사하고 있었다”며 단지사건과 조직폭력 수사가 별개임을 강조했다. 그에 따르면 수사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철저하게 검찰이 주도하고 있다는 것.

    수사과의 한 간부도 비슷한 얘기를 들려줬다. “우리는 검찰 지시를 받을 뿐”이라고 했다. 검찰도 이를 부인하지 않는다. 단지사건 이전에 이 지역의 조직폭력배들을 내사하고 있었는데, 그들 중 일부가 ‘우연히’ 단지사건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건의 인과관계는 어떻게 봐야 할까. 앞뒤 사정을 살펴보면 단지사건이 조직폭력수사에 촉발제가 된 것은 분명하다. 천안경찰서 형사는 “단지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사실 조직의 실체가 잘 파악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수사과 간부도 “단지사건 이후 조직폭력배를 검거하고 수배했다”고 말함으로써 두 사건이 밀접하게 관련돼 있음을 시인했다.

    검찰 주변에서는 단지사건이 오히려 조직폭력 수사에 방해가 됐다는 얘기도 들린다. 말하자면 조용히 내사를 진행해 일망타진하려 했는데, 단지사건이 발생해 일부 조직원이 드러나는 바람에 상당수 조직원이 잠적해 버렸다는 것이다.

    어쨌든 검찰이 단지사건을 계기로 본격수사에 나선 것만은 틀림없어 보인다. 단지사건과 관련해 검찰의 수사대상이 된 폭력조직은 송악파다. 6월말부터 내사에 들어간 검찰은 단지사건이 일어나기 두 주 전쯤인 8월초에는 이 조직의 윤곽을 어느 정도 파악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송악파 조직원으로 구속된 사람은 34명이고 그보다 더 많은 사람이 지명수배된 상태다. 핵심 조직원 10여 명의 범죄혐의는 검찰이 직접 조사하고 있으며 나머지는 경찰이 추적중이다. 검찰은 구속된 사람들을 모두 ‘범단(범죄단체)’ 구성 혐의로 기소했는데, 일부 관련자에 대해서는 개별범죄 혐의도 적용했다.

    수사기관에 따르면 송악파 결성시기는 1980년대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송악이라는 이름은 이 지역에 있는 송악저수지에서 유래된 것이다. 1989년 송악저수지 부근의 한 가든에서 최초 모임을 가졌다고 해 송악파라는 이름이 붙었다.

    송악파는 뿌리가 다양해 체계적인 계보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수사기관에 따르면 현재 구속된 사람의 상당수는 합숙사실 등을 시인하며 범단구성 혐의를 인정했다고 한다.

    수사기관은 또 미제(未濟) 폭력사건 등에 대한 조사를 통해 송악파 조직원들의 개별 범죄사실을 추적하고 있다. 집단범죄인 ‘범단’으로만 기소할 경우 자칫 증거부족으로 재판에서 불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경찰의 한 관계자는 “‘범단’ 구성 외의 여죄가 있다면 법원 판결을 받는 과정에서 당연히 (수사기관이) 유리한 것 아니냐”고 말했다.

    수사기관 분석에 따르면 송악파는 최근 경쟁조직의 약화를 틈타 천안 일대에서 가장 세력이 강한 조직으로 자리잡았다. 수사기관은 특히 이 조직과 학교폭력의 관계를 주목하고 있다. 폭력서클에 관계된 고등학생들을 통해 이와 관련된 사실을 파악한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재학중 주먹으로 이름을 날린 학생들은 졸업 후 각 조직으로 진출하며 그중 일부 ‘특출한’ 학생은 ‘스카우트’되는 게 요즘 주먹계 풍토다. 최근 몇 년 사이엔 우리 사회에 불어닥친 ‘조폭 열풍’을 타고 지원자가 늘어 ‘경쟁률’이 높다는 얘기도 들린다.

    수사기관에 따르면 결국 단지사건의 주역은 ‘조폭’들이다. 그렇다면 수사기관은 단지사건을 어떻게 해석할까. 이에 대한 시각은 수사기관 내에서도 엇갈린다. 아산경찰서의 한 관계자는 이들이 손가락을 자른 이유에 대해 “세력 과시와 관련됐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경찰에 따르면 일부 폭력조직에서 단지는 충성도의 한 잣대로 간주되기도 한다. 또 과거 조직간 칼부림사건이 일어났을 때 관련 조직의 대표자들이 단지로써 화해한 사례도 있다고 한다.

    그렇지만 수사기관의 또다른 관계자는 “실제로 대의명분을 갖고 단지를 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며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요컨대 단지사건과 조직폭력 수사는 별개라는 얘기다.

    검찰이 송악파 두목으로 보는 장아무개씨는 아직 잡히지 않은 상태다. 경찰의 한 관계자는 “두목이 검거돼야 수사결과를 발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단지사건 당시 외국에 나가 있었던 장씨는 일부 개별적인 범죄행위는 인정하지만 ‘범단’ 혐의에 대해서는 억울해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단지사건의 주인공 윤호현씨는 부두목으로 수배된 상태다. 윤씨 또한 ‘범단’ 혐의를 강력히 부인하고 있다(상자기사 참조).

    윤씨와 더불어 손가락을 자른 강아무개(40)씨는 일본의 ‘죄목’을 조목조목 설명하면서 수사기관의 처사에 대해 울분을 터뜨렸다.

    “오늘날 일본의 정신적·문화적 침략은 위험수위를 넘었다. 자식 키우는 부모 입장에서 교과서 왜곡 문제를 가장 심각하게 여기고 있다. 수사기관이 죄 없는 동지들을 전과자로 만들고 있다. 털어 먼지 안 나는 사람 있나. 이런 식으로 하면 누가 나라 위해 피를 흘리겠나.”

    강씨는 ‘범단’ 혐의대상에서 벗어나 있다. 이에 대해 그는 “샅샅이 조사해도 나오는 게 없으니 빠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경찰이 손가락을 일본대사관에 전달하지 않고 임의로 버리면 법적으로 대응하겠다”고 말했다.

    현재 문제의 손가락은 아산경찰서 냉동실에 보관돼 있다. 손가락이 이곳으로 넘어온 경위는 이렇다. 8월13일 단지의식을 치른 후 독립문을 빠져나온 ‘구국결사대’ 일행은 서울에서 천안으로 돌아가는 길에 안양 시내 모 병원에 들렀다. 출혈이 심해 응급처치를 받기 위해서였다. 이들이 손가락 봉합수술을 거부하자 병원측은 안양경찰서에 신고했다. 현장에 출동한 안양경찰서 형사들은 손가락을 압수했는데, 연락을 받고 올라온 아산경찰서 형사들이 이를 인수했다.

    아산경찰서는 손가락을 온양 시내에 있는 광혜병원에 맡겼다. 광혜병원 관계자에 따르면 8월15일 경찰 관계자가 찾아와 “버리지 말라”며 손가락 13개가 담긴 비닐봉지를 맡겼는데, 한 달 후 다시 찾아갔다는 것이다.

    아산경찰서 관계자는 “손가락을 돌려주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므로 당사자가 요구해도 돌려줄 수 없다”고 말했다. 경찰은 당사자들에게 손가락 권리포기에 관한 위임장을 요구하고 있는데, 당사자들이 일본대사관 전달을 고집하며 거부해 골머리를 앓고 있다.

    손가락에 대한 ‘권리’와 관련해 최용석 변호사는 “변사체의 경우 경찰이 부검을 하려면 압수수색영장을 받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손가락이 범죄행위와 관련된 것이라면 경찰이 절차를 통해 압수할 수는 있다고 본다. 하지만 단지 자체는 범죄가 아닌 만큼 본인이 요구하면 돌려주는 게 맞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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