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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 학벌이냐, 실력이냐

선발투수 강준만, 중간계투 한완상, 마무리는 시민운동

안티학벌을 외치는 사람들

  • 육성철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sixman@donga.com

선발투수 강준만, 중간계투 한완상, 마무리는 시민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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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일식 사회민주주의 정책이냐, 미국식 시장경제 모델이냐. 한완상 전부총리의 학력란 폐지 발언 이후, 학벌타파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교육관련 단체들은 학벌의 폐해에 공감하면서도, 구체적인 대안에 대해서는 이견을 보이고 있다.
조선 세종 때의 과학자 장영실이 다시 태어난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한낱 ‘우화’에 불과하지만, ‘실화’일 수도 있는 장영실의 부활을 추적해보자.

‘초등학교 때부터 각종 발명왕 대회에서 1등을 놓치지 않았던 장영실은 과학고등학교 입학시험에서 미역국을 먹었다. 과학은 잘했지만 영어와 수학 실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장영실은 지방대학을 졸업한 뒤 연구소에 지원했지만, 박사학위가 없다는 이유로 연거푸 떨어졌다. 학벌이 나빠서 대기업에 취직할 수도 없었다. 이때 장영실의 잠재력을 높이 평가한 미국의 한 벤처기업이 아파트와 자동차까지 제공하며 그를 특별 채용했다. 그러자 장영실은 이에 보답하기 위해 연구에 몰두했고 마침내 ‘타임머신’과 ‘영구동력기’를 만들어냈다. 뒤늦게 한국정부가 SOS를 보냈지만,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문학박사 이기문 선생이 감수한 ‘동아 새국어사전’에는 학벌(學閥)의 정의가 ‘①학력이나 출신 학교의 지체 ②같은 학교 출신자나 같은 학파의 학자로 이루어진 파벌’이라고 나와 있다. ①은 일정한 수준의 학교를 나왔다는 의미이고, ②는 학연 또는 학맥과 비슷한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하지만 학벌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벌(閥)의’ 의미를 확대 해석한다. 족벌·문벌·군벌·재벌 등에 쓰인 벌은 그 자체가 이미 하나의 권력을 상징하기 때문에, 학벌은 출신학교로 특권을 누리는 일체의 사회적 관계망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1월22일 한완상 교육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은 국무회의에서 학벌문화 타파를 공개적으로 거론한 직후 언론과 일부 정치인으로부터 집중적인 비판을 받았다. 대다수 언론은 원칙에 공감하면서도 현실성이 없다는 점을 지적했으며, 한나라당 김용갑 의원은 “시장경제의 원리를 거스르는 사회주의적 발상”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교육관련 시민사회단체들은 환영의 뜻을 밝히고 학벌타파 운동에 나서겠다고 선언했다. 결국 한부총리는 ‘책임론’에 떠밀려 경질됐지만, 학벌논쟁은 이제부터가 시작인 셈이다.



역사학자 이이화의 시련


1월25일 오후 2시 서울 낙원동 문예아카데미 강의실에서는 ‘학벌 없는 사회를 위한 모임(이하 ‘학사모’·http://antihakbul.org)’ 월례토론회가 열렸다. 주제는 ‘우리 역사 속에서 본 학벌’, 초청강사는 이이화 역사문제연구소 고문이었다. 30여 명의 회원들이 모여들자 이고문은 강연을 시작했다.

“내가 대학 다닐 때는 얼굴만 비치고 졸업장을 받는 사람이 수두룩했습니다. 남들은 그 졸업장으로 출세했지만, 가난해서 등록금을 내지 못한 나는 졸업장이 없다는 이유로 연구비 신청도 못했어요. 아무리 책을 많이 읽고 열심히 논문을 발표해도 대학을 나오지 않았다고 무시한 겁니다.”

이고문은 광주고등학교와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학과에서 수학했다. 하지만 그는 전공과 무관한 길을 걸었다. 그는 동아일보와 서울대 규장각에서 근무한 뒤 재야사학자로 활동했다. 어린 시절부터 한문을 열심히 공부한 덕분에 그는 ‘인물한국사’와 ‘한국사 이야기’ 라는 역작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이고문의 독보적인 실력은 교육부의 연구비 지급기준까지 바꿔놓았다. 이고문은 교육부 산하 학술진흥재단(이사장 박석무)에 연구비를 요청했다가 박사학위가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한 일이 있었다. 이때 박이사장이 “이이화 같은 학자는 자격이 있는 거 아니냐?”고 항의하는 바람에 예외조항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고문은 당시의 일을 떠올리며 “더 이상 이 땅에서 학벌 때문에 차별받는 사람은 없어야 한다”고 강변했다.

“능력 있는 사람이 인정받되 능력 없는 사람까지 보살펴 주는 세상이 와야 합니다. 능력이 있는 사람만 잘 살거나, 능력이 없으면서도 좋은 학교 나왔다고 출세하는 세상은 좋은 세상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이고문은 한장관의 학벌란 폐지 주장에 대해서도 ‘용기있는 행동’이라며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이론보다 실천을 중시하는 진보적 역사학자답게, 그는 적극적인 대응을 주문했다.

“한완상 같은 사람이 우리 사회 곳곳에서 자꾸 나와야만 학벌이 깨질 수 있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학벌은 더욱 단단해지거든요. 12월 대통령 선거가 경기고와 경복고의 싸움이 되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에서 ‘학벌주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한 사람은 아마도 전북대 강준만 교수가 처음일 것이다. 강교수가 1996년 펴낸 ‘서울대의 나라’는 학벌이 한국사회에 끼치는 부정적 영향을 다양한 각도에서 분석했다. 강교수는 이 책의 서문에서 학벌주의의 폐해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학벌주의와 학연주의를 타파 내지 완화하지 않는다면 대학입시 전쟁은 영원히 지금처럼 살벌할 수밖에 없다. 더 큰 문제는 우리 사회에 바람직한 의미의 경쟁이 뿌리내릴 수 없다는 것이다. 패자부활전이 없으니 승자나 패자 모두 열심히 노력해야 할 필요성이 그만큼 줄어들지 않겠느냐 이 말이다.’

‘서울대의 나라’는 ‘학사모’ 탄생에도 영향을 끼쳤다. 학사모 초대 대표를 맡았던 김상봉 문예아카데미 교장은 “강교수의 책을 보면서 자극을 받았다. 우리들의 아이들을 위해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연세대 철학과 76학번인 김교장은 독일 유학을 다녀온 뒤 한국 교육의 모순점을 뚜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김교장은 1999년부터 ‘함께 하는 시민행동’의 교육분과위원장을 맡아 ‘학벌 없는 사회를 위한 시민행동’을 출범시켰는데, 이것이 학사모의 모태가 되었다. 홍훈 연세대 교수, 김동훈 국민대 교수, 김경근 전북대 교수, 이철호 전교조 정책위원, 이병호 사당중 교사 등이 이때부터 멤버로 참여했다. 학사모는 서울 안국동에 사무실을 두고 있으며, 15명의 실무자와 500여 명의 후원회원이 활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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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성철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sixm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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