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6월호

공중전화는 범인 알고 있었다

양평 통나무집 살인사건 45일간의 수사기록 X파일

  • 황일도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shamora@donga.com

    입력2004-09-15 17: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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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월26일 오전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 중미산 휴양림. 방갈로 두 채가 형체도 없이 타고 남은 잿더미 속에서 어른 두 명과 아이 두 명의 사체가 발견됐다. 지문 등 범인을 추적할 수 있는 단서도 모두 화염 속에서 사라졌다.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일까. 경기도 양평경찰서 형사 12명의 수사는 시작부터 벽에 부딪혔다.
    두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국립과학수사연구소 감식반이 현장에 도착했다. 두 채의 방갈로는 서울 삼성동에 사는 소모씨(42·D통상 대표)가 예약한 것이었다. 사체는 소씨와 그의 부인 정모씨(42), 아들(14·서울 E중 3년)과 딸(12·서울 E중 1년)로 추정됐지만 당장 확인할 길이 없었다. 유전자 감식을 위해 부산에 살고 있는 소씨의 부모가 급히 날아왔다.

    사건이 발생한 휴양림 출입구는 비수기의 경우 관리인이 24시간 출입을 체크하지 않는다. 누가 언제 어떻게 들어오고 나갔는지 아무도 지켜본 사람이 없었다. 3월29일 현장을 조사한 화재 감식반은 현장에서 휘발유 냄새가 나는 등 방화가 분명해 보인다는 의견서를 제출했지만 자살이냐 타살이냐는 여전히 물음표였다.

    현장에서는 모두 4개의 열쇠가 나왔다. 아파트 열쇠, 방갈로 열쇠 2개, 그리고 현장에서 전소된 부인 정씨의 쏘나타 자동차 키. 남편 소씨의 자동차 키는 보이지 않았다. 소씨의 감색 그랜저 승용차는 화재현장에서 200m 가량 떨어진 주차장에서 발견됐다. 거리는 그리 멀지 않지만 언덕자락과 숲에 가로막혀 방갈로에서 시야가 미치는 곳은 아니었다.

    휴양림 관리팀장 이영섭씨(34)는 남들이 지나친 부분에 주목했다. 그랜저의 지붕에 붙어있는 두 점의 잿가루. 시체가 발견되기 전날인 25일 밤에는 안개가 자욱했고 이 때문에 차에 남아있던 물기가 재를 붙여놓은 것이다. 경찰은 승용차의 한쪽 면에서 강한 열에 그을린 자국도 찾아냈다. 잿가루가 날려 자동차까지 날아갔다고 하기에는 너무 먼 거리였다. 게다가 지난밤에는 불이 거의 번지지 않았을 만큼 바람도 없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현장에 누군가 다른 사람이 있었다. 불타는 방갈로를 뒤로한 채 사망자의 그랜저를 몰고 주차장까지 빠져나온 사람, 그는 과연 누구인가. 사건은 급속히 타살로 방향을 틀었다.



    죽은 소씨는 종업원 20여 명 규모의 컴퓨터 자수회사를 운영했다.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소씨와 부인 정씨는 1985년 무렵 친구의 결혼식 피로연장에서 만나 연애를 시작했다. 두 사람 다 경남 하동이 고향이다. 한 다리만 건너면 지인들이 수두룩했던 것도 인연이 맺어진 배경이었다. 두 사람은 6개월 연애 끝에 결혼했다.

    친척들과 함께 자수회사에 근무하던 소씨는 10년 전 독립해 지금의 사업체를 꾸렸다. 외환위기 무렵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서울 강남에 32평 아파트를 장만할 만큼 탄탄한 사업가도를 달렸다. 유족들에 따르면 6명의 딸을 낳은 뒤 얻은 아들인 소씨는 부모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자랐다고 한다. 소씨는 본가와 처가로 매월 꼬박꼬박 용돈을 부칠 만큼 착실한 가장이었다.

    부인 정씨에게서도 특별한 점은 발견되지 않았다. 장이 좋지 않은 남편을 위해 아침마다 손수 녹즙을 갈고 자녀들의 과외에 신경쓰던 평범한 주부였다는 것. 5년째 소씨 부부와 함께 테니스 모임을 갖곤 했던 조모씨는 “부부와 아이들 모두 온순하고 찬찬한 사람들이었다”고 전한다. 소씨 가족의 주인 잃은 아파트는 거실 한쪽에 피아노가 놓인, 전형적인 ‘단란한 가정’의 분위기였다.

    죽은 사람에 대해서는 좀체 나쁜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소씨네가 서울 강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하고 성실한 중산층 가정이었던 것은 사실인 듯했다. 유가족과 친구들은 한결같이 “가족이 함께 자살할 만큼 심각한 불화는 없었다”고 했다. 지난 3년간 부부가 매주 테니스클럽에 함께 다녔을 만큼 화목했다는 것.

    그러나 참고인 조사가 거듭되면서 몇 가지 이상한 징후가 포착되기 시작했다. 소씨의 친구 진모씨는 경찰에서 “소사장이 최근 ‘1억원을 투자하면 90억원을 벌게 해주는 아이템을 찾았다’고 하더라”고 진술했다. 또한 소씨의 한 친척에 따르면 소씨가 “땅 1만3000평을 2억원에 사면 5억원에 되팔 수 있어 8000만원을 투자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4월2일 양평경찰서 형사계의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유전자 감식결과를 알리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전화였다. 부모자식간의 유전자를 확인하는 것은 형제간 유전자 확인에 걸리는 시간의 절반이면 충분하다. 소씨·정씨의 부모 유전자와 비교해 두 사람의 신원이, 그리고 부부의 유전자와 비교해 아이들의 신원이 확인됐다.

    테니스. 소씨 가족 주변을 탐문하던 수사팀은 거듭 등장하는 이 단어에 주목하게 된다. 두 부부가 최근 열중했던 운동도 테니스였고, 소씨가 “테니스장에서 사귄 사람이 ‘대박 터지는 아이템’을 소개해줬다”고 한 진술도 확보됐다.

    소씨의 집 서랍에서 발견된 테니스클럽 동호회 수첩에 올라 있는 인물들을 상대로 확인작업에 착수한 수사팀은 4월 초순 마침내 한 사람의 용의자에 시선을 집중했다. ‘정교수’라는 인물이었다. 동호회원들에 따르면 정교수는 소씨 부부와 유난히 친하게 지냈다. 뿐만 아니라 사건이 발생한 후 정교수는 자주 드나들던 테니스장에서 자취를 감췄다고 한다. 수사팀 사무실은 돌연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소씨와 아내의 휴대전화 사용내역서가 도착한 것이 바로 이 무렵이었다. 수백장에 이르는 통화내역을 확인하던 경찰은 사건 당일 오후 소씨와 통화한 그의 친구로부터 결정적인 증언을 확보한다. 소씨가 “오늘은 드디어 내가 떼부자가 되는 날”이며 “나를 떼부자로 만들어줄 사람을 지금 만나기로 했다”고 말했다는 내용이었다. 경찰은 바로 이 사람이 문제의 정교수이며, 그가 살인범일 공산이 크다고 판단했다. 한준순 형사계장은 “그때만 해도 사건해결은 시간문제인 것 같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었다. 상당수의 사람들이 정교수를 알고 있었고 만난 적도 있었지만, 정확한 신분이나 연락처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동호회원들과 테니스장 관계자들은 정교수를 ‘해외 유명대학에서 공부한 중년의 서울대 교수’로 알고 있었다. 정교수는 국가적으로 중요한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어 연락처를 공개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서울대 교수 전원의 사진을 증인들과 함께 확인했다. 그런 사람은 없었다.

    주변인들이 알고 있는 이름도 조금씩 차이가 났다. 정인협, 정인혁, 정인엽. 그러나 전산망에 떠오른 사람들 가운데 조건에 맞는 인물은 없었다. 수사는 다시 벽에 부딪혔고 사무실은 침묵에 휩싸였다. 이때가 4월10일경. 양평경찰서 김종윤 수사과장은 “경찰 생활 30년에 이처럼 완벽하게 베일에 가려진 인물은 처음 봤다”고 토로했다.

    ‘실체 없는 인물’을 찾기 위한 지리한 발품 팔기가 시작됐다. 마땅한 단서가 없으니 저인망식으로 훑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증인들의 말을 토대로 몽타주를 그렸다. 강남구 관내도를 사무실 벽에 붙여두고 30여 곳의 강남구 일대 테니스장을 일일이 확인했다. 출근하자마자 서울 강남으로 출근해 하루종일 헤매고 다니는 날들이 계속됐다. 밤낮없이 지겹도록 계속되는 강남지역의 교통체증과 양평경찰서 형사들에겐 낯설기만한 서울 지리가 수사의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

    수사팀은 정교수의 얼굴을 아는 5∼6명의 증인들과 함께 개포 1·2·3·4동과 원지동 등 정교수가 나타났던 지역의 동사무소로 흩어졌다. 1998년 무렵과 사건이 발생한 이후의 전·출입자 중 1947∼60년생 남자의 주민등록부 사진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그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 1998년이고, 사건이 발생한 후 다른 지역으로 이사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성과는 없었다. 테니스장 주변 주택가를 가가호호 방문해 몽타주를 들이대며 반응을 살피기도 했지만 강남 고급주택가의 인심은 야박하기만 했다. 몽타주를 보여주기도 전에 인터폰에선 “그런 사람 모른다”는 퉁명스런 대꾸만 튀어나오기 일쑤였다. 자동차가 없으니 차적조회도 불가능했다. 모든 방향으로 손을 뻗었지만 잡히는 것은 없었다. 시간만 대책없이 흘러갔다. 서울로 매일 출근하다시피 했던 수사팀 최영우 반장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마지막 남은 희망은 통화기록. 하지만 증인들은 정교수가 휴대전화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했다. 소씨와 부인 정씨의 휴대전화 통화내역에 나와있는 모든 인물을 추적했지만 용의점이 있는 번호는 없었다. 좀 특이한 점이라면 공중전화에서 걸려온 전화가 비교적 많았다는 것.

    그랬다. 문제는 공중전화였다. 휴대전화를 갖고 다니지 않는다면 당연히 공중전화를 사용할 터. 강남 일대 70여 개 공중전화에서 걸려온 통화기록이 두 사람의 휴대전화에 남아있었다. 경찰이 주목한 것은 두 사람에게 전화를 건 시간을 전후해 같은 공중전화에서 건 전화. 용의자가 한꺼번에 전화를 걸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수사팀의 판단이었다. 그래서 앞뒤로 5개씩의 번호를 하나하나 추적해 당사자들을 찾아가 만났다. 그러나 다들 정교수를 알지 못한다고 했다.

    어느새 사건 발생 한 달이 훌쩍 지나갔다. 양평경찰서 수사팀 형사들에게 서서히 피로가 몰려왔다. 지방경찰청의 담당 간부들과 수사지도반이 하루가 멀다 하고 진척사항을 캐물었지만 답해줄 것이 없었다.

    그러던 4월26일, 수사팀에 한 중년 여성이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다. 경찰이 조사한 공중전화 통화내역 리스트에 있던 휴대폰을 갖고 있던 사람이었다.

    “정교수를 잘 안다. 잠자리도 같이 했다. 그렇지만 남편이 무서워 말을 할 수 없었다. 남편에게 들통나기 전에 정교수가 잡혔으면 좋겠다. 다시 연락이 오면 전화를 주겠다.”

    서울 강남에서 다방을 운영하는 장모 여인이었다. 바로 영장을 발부받아 장씨의 집 전화를 감청하기 시작했다. 혹시 정교수가 다시 전화를 걸어도 수사팀에 알리지 않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5월3일, 드디어 그렇게 기다리던 정교수의 전화가 걸려왔다. 형사들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5월6일 오전 11시 서울 지하철 2호선 사당역 지하 1층. 한산한 평일 오전의 풍경 그대로였다. 벤치에 앉아 퍼즐을 푸는 연인들, 배낭을 둘러멘 학생들, 목발을 짚고 불편한 걸음을 하다 잠시 쉬고있는 장애인…. 그러나 이들 중 상당수는 양평경찰서 소속 수사요원들이었다. 여경 4명을 포함해 19명의 요원이 현장에 깔렸다. 정교수에게서 전화가 왔다는 장씨의 제보에 따라 변장한 채 타이밍을 기다리고 있었다.

    11시30분. 약속한 위치에 서 있던 장씨 옆으로 40대 남자 한 사람이 스쳐갔다. 한 마디 말도 없이 손가락만 까딱하며 지나갔지만, 수사팀은 그가 바로 몽타주 속의 정교수임을 직감했다. 현장을 지휘한 수사과장 김종윤 경감의 신호에 따라 형사들이 남자를 덮쳤다.

    “저놈이다!”

    실랑이 끝에 사내를 제압한 경찰이 신분을 캐물었지만 그는 대답 대신 “도대체 나를 왜 체포하느냐”고 소리치며 저항했다. 주머니에서는 신분증 한 장 나오지 않았다. 현장에서 지문을 채취한 수사팀은 그 길로 경찰청에 달려가 신분확인을 의뢰했다. 드디어 가명으로만 존재했던 정교수의 실체가 드러났다. 사건 발생 42일, 연인원 500명이 투입된 수사가 성과를 거두는 순간이었다.

    본명 정○○. 나이 45세. 혼인빙자 간음 및 사기 전과 1범. 중학교 졸업 학력에 검정고시로 고등학교 과정 수료. 그는 수년 전 잠깐 체신청에서 하급공무원으로 일한 이후로는 제대로 직업을 가져본 일이 없다. 그의 이름은 그 동안 테니스클럽 등에서 그와 알고 지낸 사람들로부터 확보한 가명과는 거리가 멀었다. 전산조회를 통해 그를 찾을 수 없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압수수색영장이 발부되자 수사팀은 서울 개포동에 있는 정씨의 집을 찾았다. 뚜렷한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단서가 된 것은 서랍에서 나온 약 봉투. 강원도 양양의 ㅅ약국에서 조제한 자상(刺傷) 치료제였다. 경찰이 해당 약국에 확인한 결과 조제일자는 3월26일 아침. 사건이 일어난 다음날이었다.

    약국을 통해 정씨가 양양의 ㅅ병원에서 처방전을 발급받은 것을 확인한 수사팀은 병원에서 또 다른 중요한 정보를 알아냈다. 정씨가 병원을 찾던 날 그에게 일행이 있었다는 것. 인상착의를 추적한 끝에 이튿날 경찰은 그와 동행했던 현모씨(40)와 김모씨(25·여)를 연행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경찰의 추궁에도 세 사람은 관련사실을 부인하거나 묵비권을 행사했다. 그런데 의외의 곳에서 결정적인 계기가 불거졌다. 정씨를 유치장에 넣기 위한 인정신문 과정을 우연히 들은 김씨가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 것. 정씨의 실제 이름과 나이, 그리고 그가 이미 결혼을 해 곧 대학에 갈 아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김씨는 그제서야 자신이 속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민 김씨는 온몸을 사시나무 떨 듯하더라고 수사팀 관계자는 전한다. 김씨의 입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한 정황을 바탕으로 10여 차례에 걸친 심문을 통해 사건은 서서히 윤곽을 드러냈다.

    경찰이 파악한 당시 정황은 이렇다. 사건 당일 오전 11시45분, 정씨는 서울 대치동의 한 공중전화에서 김씨에게 전화를 걸어 전기충격기를 사오라고 했다. 저녁에 ‘교육’(상자기사 참조)이 있는데, 김씨의 도움이 필요하니 같이 가자는 것이었다.

    정씨는 뒤이어 현씨에게 전화를 걸어 휘발유 두 통을 사오라고 지시했다. 이들은 함께 현씨의 자가용을 타고 양평으로 향했다. 양평에 도착한 정씨는 공중전화로 소씨에게 전화를 걸어 휴양림으로 나오라고 했다.

    오후 5시. 사건이 발생한 중미산 휴양림에 소씨가 도착했다. 30분 가량 지나 정씨 일행도 현장에 도착해 소씨를 만났다. 정씨는 방갈로에서 저주파 치료기를 이용한 ‘교육’을 실시했다. 저녁 6시30분, 정씨는 공중전화로 소씨의 부인에게 전화를 걸어 휴양림으로 오라고 했다. 현씨와 김씨가 저녁식사를 하러 내려간 저녁 8시경, 정씨와 소씨는 그 동안 소씨가 투자한 돈에 대해 말다툼을 벌였다. 밤 9시10분, 정씨는 소씨의 아내 정씨와 아이들을 휴양림 밖에서 만나 방갈로로 돌아왔다.

    어느새 밤 12시30분. 상황은 파국을 향해 치달았다. 정씨는 현씨에게 방갈로로 오라고 지시했다. 경찰은 이 때 살인이 일어났다고 보고 있다. 소씨와 정씨가 느티나무집에서 말다툼을 벌이던 중 정씨가 소씨의 복부를 발로 차 숨지게 하고, 이를 잣나무집에서 자고 있던 소씨의 부인에게 알렸다는 것. 부인 정씨가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펄펄 뛰자 싱크대에 있던 칼로 정씨와 아이들을 찔러 죽였다는 것이 경찰의 추정이다.

    현씨와 김씨의 진술에 따르면 당시 정씨는 오른손에 상처를 입어 수건으로 감고 있었다고 한다. 김씨가 “왜 다쳤느냐”고 캐묻자 정씨는 “소씨가 발작을 일으켜 칼로 내 손에 상처를 입혔다”고 답했다.

    세 사람은 함께 정씨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양평의 병원을 찾았지만 큰 병원에 가야 한다는 이야기만 듣고 병원문을 나섰다. 이때가 새벽 1시30분 경. 이들은 문제의 방갈로로 되돌아 왔다.

    현씨의 차에서 휘발유를 꺼낸 정씨는 두 사람에게 주차장에 가 있으라고 하고 홀로 남았다. 수사팀은 이때 정씨가 휘발유를 방갈로에 뿌리고 불을 질러 증거를 없앴다고 본다. 정씨는 소씨의 그랜저 승용차를 몰고 주차장으로 와 현씨의 차로 옮겨 타고 현장을 벗어났다.

    경찰에 따르면 한마디로 모든 게 정씨의 계획적인 범행이었다는 것. 경찰은 정씨가 소씨 일가족을 휴양림으로 부를 때부터 살인과 방화를 계획하고 있었다고 확신한다. 애초에 현씨와 김씨에게 휘발유와 전기충격기를 갖고 오라고 시킨 것 역시 범행을 위해서였다는 것. 이대로라면 정씨는 ‘사전계획에 따른 고의 살인범’이 되는 셈이다.

    5차 심문에서 드디어 “내가 살인을 저질렀다”는 자백이 정씨의 입에서 나왔다. 수사팀에선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러나 이후 정씨는 “경찰의 가혹행위에 따른 허위 자백이었다”며 말을 뒤집었다. 소씨와 말다툼을 벌이다 상처를 입은 것은 사실이지만, 병원에 갔다가 되돌아가서 휘발유를 소씨에게 건네준 후 그 길로 바로 현장을 빠져나왔다는 것. 정씨는 “살인과 방화에 대해 아는 바 없다. 그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났든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다”고 주장했다. 휘발유와 전기충격기 역시 소씨가 갖다달라고 해서 갖다준 것일 뿐이라고 했다. 5월13일 현장검증 때도 정씨는 계속해서 “경찰에서 사흘 동안 맞았다”고 주장했다.

    현씨와 김씨의 범행가담 여부에 대해서도 의견이 엇갈린다. 경찰은 당초 현씨와 김씨가 살인과 방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판단했다. 화재가 발생한 방갈로와 두 사람이 대기하고 있던 주차장이 200여m 가량 떨어져 있다 해도 심야에 불이 일어났다면 두 사람이 모를 리 없었다는 것. 하지만 두 사람은 이를 강력히 부인하고 있다.

    다시 사건 당일로 돌아가보자. 시간이 바뀌어 새벽 2시. 세 사람은 서울로 향했다. 새벽 2시20분 양평의 양수리 다리 부근에서 정씨는 차창을 열고 금속성의 물체를 물속에 버린다. 경찰은 이것이 소씨의 그랜저 열쇠라고 보고 있다.

    새벽 3시에 정씨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서울 모 종합병원에 도착했지만 “입원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말에 강원도로 출발했다. 새벽 6시에 강원도 양양에 도착한 정씨는 입고 있던 옷가지를 불태웠다. 아침 8시30분 양양의 ㅅ의원에서 치료를 받은 정씨와 일행은 약국에 들렀다가 서울로 돌아왔다.

    문제는 경찰의 주장대로 정씨가 살인범임을 입증할 증거가 없다는 것. 정씨가 살인과 방화를 저질렀다는 결정적인 물증은 경찰의 손에 없다. 이에 따라 경찰은 5월7일 정씨에 대해 사기혐의로만 구속영장을 신청했고, 9일 영장이 발부됐다. 현씨와 김씨에 대해 신청된 살인방조혐의에 대한 영장은 검찰에서 기각됐다.

    양평경찰서와 경기지방경찰청은 이 대목에서 작은 실수를 했다. 아직 영장이 떨어지기 전에 경기경찰청에서 기자들에게 배포한 보도자료를 통해 “정씨는 살인혐의로, 다른 두 사람은 살인방조혐의로 구속할 예정이다”고 서둘러 발표했던 것. 이에 따라 5월10일 대부분의 신문과 방송은 ‘살인범’이 잡혔다는 오보를 냈다. 특히 영장이 기각된 현씨와 김씨의 모습이 피의자 신분인 것처럼 방송전파를 타게 한 것은 작지 않은 실수였다.

    법적으로 볼 때 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정씨는 현행법상 ‘사기피의자’일 뿐 살인범이 아니다. 현씨와 김씨는 5월10일 아침 석방돼 경찰수사를 돕고 있다. 경찰은 현재 정씨가 버린 것으로 추정되는 그랜저 승용차 열쇠와 정씨의 범죄를 입증할 결정적인 증거물을 찾기 위해 총력을 다하고 있다.

    경찰이 찾고 있는 결정적인 증거물은 휴양림 현장을 떠나 이동할 때 버린 망치. 김씨는 이 망치에 머리카락이 잔뜩 엉켜있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살인의 흉기로 쓰였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형사들은 이번에는 현씨와 김씨를 앞세우고 망치를 찾아 길바닥을 헤매고 있다.

    양평경찰서 이운우 서장은 “법적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우리는 정씨가 범인이라고 확신한다”며 “반드시 증거를 찾아내 살인혐의를 추가하고 말겠다”고 강한 의지를 보였다. 오히려 앞으로가 ‘진짜 수사’라는 것.

    수사팀의 장수일 반장은 5월11일 새벽, 자고 있던 아들을 깨워 사우나에 데리고 갔다. 아들과 보내는 유일한 시간이 일주일에 한 번씩 함께 가는 사우나였지만, 사건발생 이후로는 도저히 틈을 낼 수가 없었다.

    “아직 수사가 끝난 것은 아니지만 애들한테 얼굴은 보여줘야 되겠다 싶었죠. 전날 밤에도 새벽 2시에 집에 들어갔지만 억지로 눈을 떴어요.”

    그러면서 장반장은 “경찰은 나쁜 아빠일 수밖에 없다”며 씁쓸한 웃음을 보였다. ‘나쁜 아빠’가 간만에 아빠 노릇을 한 이 날은 사건발생 46일, 수사착수 45일째 되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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