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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이우정 선생의 아름다운 삶

민주화와 결혼한 ‘작은 거인’

  • 정호재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demian@donga.com

고 이우정 선생의 아름다운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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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는 있으나마나예요. 나는 어디 있으나 잘 보이지 않아요.” 고인은 수줍은 낯빛으로 이렇게 말하곤 했다. 하지만 고은 시인의 말마따나 그는 어디에서나 잘 보였다. 이우정(李愚貞) 선생은 유신체제 이래 이 땅의 민주화와 인권, 통일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거인이자, 진실로 민중을 사랑한 어머니, 언니, 누나였다.
”아니 선생님은 뜨개질도 못하세요?”

“허허, 구박하지 말고 잘 좀 알려줘….”

1970년대 중반 서울 종로5가 기독교 회관 301호 여신도회 사무실. 1974년 민청학련사건으로 학생과 교수 1024명이 수사대상에 올라 169명이 실형을 받고, 1976년 3·1 구국선언으로 거의 모든 민주화 인사들이 구속되는 사건이 이어졌다. 긴급조치가 세상사람들의 눈과 귀를 막고 있던 그 시절, 301호실은 구속자 가족들을 위한 공간이었다.

기독교장로회 여신도들은 이 방에서 ‘빅토리 숄’이라고 이름 붙인 보라색 숄을 매일같이 뜨개질해서 해외 교회에 내다 팔았다. 보라색은 고난의 색이자 승리의 색. 여신도들은 “민주회복, 민주회복…”이라 되뇌어가며 뜨개질을 했다. 이우정 선생은 뜨개질을 못한다고 제자들에게 면박을 받았지만 금방 익숙해져 많은 숄을 만들었다.

그로부터 3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난 6월3일 서울 수유리 한신대학교. 수많은 인사들이 지난날의 ‘빅토리 숄’을 떠올리게 하는 보라색 스카프를 매고 교정으로 모여들어 고인이 된 이우정 선생 앞에 헌화했다. 여성운동, 통일운동, 노동운동, 민주화운동…. 굴곡진 우리 현대사의 중심에 서서 어느 곳 하나 빼놓지 않고 보듬어준 고인의 빈자리는 너무도 컸다.

강단 떠나 현장으로

“하나님! 저희들의 피와 땀의 결실로 100억달러 수출을 달성했다고 거리는 들떠 있는데 저희들은 왜 이렇게 외로워야 합니까? 다들 잘살게 됐다는데, 저희는 왜 이렇게 배가 고픕니까?…하지만 저희는 압니다. 당신만은 이 가난한 무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방림방적 근로자도, 평화시장 근로자도, 구로공단의 근로자도….”

1978년 원풍모방의 열악한 근로여건에 맞서 싸우다 구속된 장남수(당시 20세)양의 기도는 1970년대의 암울한 노동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혹독했던 그 시절, 학생들은 거리로 뛰쳐나가야 했고, 양심적인 교수들은 가르침을 이어갈 수 없었다. 인권과 통일, 민주화를 향한 열망은 뜨거웠지만, 누구도 그런 단어조차 입에 올릴 수 없었다.

1970년 한신대 사태는 저항의 시발이었다. 이로써 박정희 정권은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들어선다. 그해 한신대 교수 전원이 박정권의 독재에 항거하다 사직서를 내기 전까지만 해도 선생은 17년 동안 헬라어와 신학을 가르치는, 학생들을 끔찍이도 아끼는 온화한 교수님일 따름이었다. 독신으로 기숙사 사감을 하면서 학생들의 고민을 함께 나누려 했던 어머니 같은 존재였다고 제자들은 회고한다. 학생들을 감싸다 동료 교수들과 함께 해직된 후 선생은 기독교장로회 여신도회에 적극 참여하면서 사회활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그때 나이가 48세였다.

“한신대에서 보낸 17년은 제가 산 게 아니었어요. 밖에선 노동자들의 인권이 그처럼 혹독하게 유린당하고 있는데, 저는 그런 일이 있는 줄조차 모르고 학교 울타리 안에서 강의에만 충실했죠…그래서 교수노릇 그만둔 것을 진실로 후회하지 않아요.”

선생은 그때껏 이론으로 공부해온 신학을 현실 사회에서 구현하려 마음먹었다. 민중신학을 받아들이고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을 찾아다니면서 신학의 새로운 방향을 깨치기 시작했다. 늦은 나이에 세상의 어려움과 고통에 눈떴지만 그후의 활동은 누구보다도 열정적이었다. 1972년 서울여대에서 잠시 교편을 잡기도 했으나 사회 참여와 교수 노릇을 함께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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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재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demi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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