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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48주년 특별기고

한국인 피폭자 보상 길 연 곽귀훈씨의 40년 투쟁기

“단돈 1원이라도 일본의 전쟁 책임 묻고 싶었다”

  • 글: 곽귀훈 한국원폭피해자협회 전 회장

한국인 피폭자 보상 길 연 곽귀훈씨의 40년 투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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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 정부는 한국인 피폭자들의 요구에 귀를 막고 있었다.
  • 일본 법원이 “국적이 다르더라도 치료받게 해줘야 한다”고 판결했지만, “일본 영토를 벗어나면 무효”라는 규정을 내세워 이를 거부했다. 그러나 곽귀훈씨를 비롯한 한국인 피폭자들의 끈질긴 법정투쟁은 마침내 일본 정부를 굴복시키는데….
한국인 피폭자 보상 길 연 곽귀훈씨의 40년 투쟁기

2심에서 패소한 일본정부가 상고를 포기하기로 결정한 지난해 12월18일 곽귀훈씨가 ‘한국 원폭피해자를 구원하는 시민회’회장인 이치바 준코와 감격의 포옹을 하고 있다. (일본 마이니치신문 제공)

나는 1924년(갑자년)생으로,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4년 9월 전주사범학교 졸업을 반년 남겨놓고 일본군에 징집되어 일본 히로시마(廣島)의 서부 제2부대에 입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 해 만 20세인 갑자생은 역사상 가장 운이 나쁘고 팔자가 기구하다고 해서 “묻지 마라 갑자생”이란 말이 유행하고 있었다.

세상이 다 아는 바와 같이 인류 최초의 원자폭탄은 1945년 8월6일 오전 8시15분에 군도인 인구 42만명의 히로시마를 눈 깜짝할 사이에 괴멸시켰다. 나는 폭심(暴心)에서 2km 지점인 공병대의 영정(군부대의 운동장)에서 고공을 선회하는 미 폭격기 B-29가 햇빛에 빛나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며 찬사를 발하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천지를 뒤덮는 불벼락으로 히로시마는 지옥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B-29는 태평양의 고도인 사이판섬의 부속도 격인 테니 안 섬에서 출격한 비행기였고, 13kt의 우라늄탄을 탑재하고 있었던 것으로 나중에 판명되었다.

3일 후인 8월9일 같은 장소에서 출발한 B-29는 규슈(九州)의 고쿠라(小倉)를 목표물로 삼았다. 하지만 일기가 나빠 목표물을 제대로 찾지 못하고 나가사키(長崎)로 직행, 11시2분 조선소가 많은 나가사키를 일순에 괴멸시켜 인류 역사상 씻을 수 없는 오욕의 역사를 만들었다. 이때의 폭탄은 TNT 22kt의 플루토늄탄이라지만 두 개 다 낙하산을 달아 지상 500m 상공에서 폭파시켰으므로 효력은 거의 같다. 뒷날 이 두 발의 원폭 투하는 반인류적인 범죄행위라고 지탄받았다.

한국인 원폭피해자들의 참상

당시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살고 있던 한국인의 수는 상세히 알 길이 없고 조사할 자료도 없지만 어림잡아 7만∼8만명으로 추산한다. 이들은 나처럼 징병과 징용으로 끌려갔거나, 살기 위해 이주해간 사람들이었다. 당시 히로시마의 한국인 가운데 경남 합천에서 온 사람들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것도 특기할 만한 사실이다.

이 7만∼8만명 중 원자탄 투하 당시 폭사한 사람은 4만∼5만명이고, 살아서 귀국한 사람은 2만3000명, 일본에 남아 있는 사람은 7000명 정도로 추정된다는 것이 정설이다. 일본 전체의 피폭자가 70만명이니까 그 10분의 1, 즉 1할이 한국인인 셈이다.

1923년 9월1일 동경대지진 때 한국인을 7000여 명이나 학살한 일본 국민들이다. 순식간에 지옥으로 변한 단말마의 거리에서 자기 살기도 어려운데 한국사람 구해 줄 일본인이 있을 리 만무하다. 혹시나 그런 기회가 있었다 해도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면 의도적으로 방치했을 것이다.

오죽하면 까마귀가 한국인의 시체를 쪼아먹는 광경이 허다하게 발견됐다고 해 그것을 그린 마루야마(丸山) 화백의 까마귀 그림이 국보급 명화로 평가받고 있을까.

4만∼5만명이 폭사한 지옥을 겨우 벗어나 해방된 조국에 돌아온 이들에게 살 집이 있을 리 만무했다. 입에 풀칠을 하려 해도 농사 지을 전답이 있는가, 그렇다고 신체가 강건해 막일이라도 감당할 수 있는 체력이 있는가. 육체는 방사선 피해로 벌집처럼 되었고, 외모는 한센병 환자와 구별이 안 되니 상대해주는 이웃도 없었다. 그러니까 거지 중에도 상거지, 사람들 눈을 피해 깊은 산중에서 움막을 짓고 살기가 일쑤였다.

가난하고 병들고 약 사먹을 돈이 없으니 죽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 살아남아 협회에 등록되어 있는 피폭자는 2100명 정도다. 일본의 피폭자가 28만5000명이니까 한국인 피폭자는 그 1할인 3만명 가까이 돼야 하는데 10%는커녕 1%도 못 된다. 다 어디로 갔는가? 모두들 천추의 한을 품고 저승으로 간 것이리라.

나는 그들의 참상을 직시하면서 반세기를 살아왔다. 눈뜨고 차마 바라볼 수 없는 참혹한 광경,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그들의 처절한 신세타령. 그들은 외치다 쓰러지면서 “내가 죽거든 시체를 일본대사관으로 가지고 가라”는 말을 남기고 죽어갔다. 그래서 한국인 원폭피해자들을 3중의 피해자라고 한다. 박수복의 ‘소리도 없다, 이름도 없다’나 강수원의 ‘가공 원자폭탄 투하’라는 책에는 원폭 피해자들의 참상이 실명으로 자세히 서술돼 있다.

일본 정부의 냉대

한국인 원폭피해자들은 자기가 원해서 일본에 건너가 원폭을 맞은 게 아니다. 따지고 보면 모두 일본의 전쟁수행도구로서 강제로 연행돼간 사람들이다. 마땅히 일본 정부가 책임을 지고, 구호도 하고 보상도 해야 한다. 그럼에도 일본 정부는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회담 때 이 문제에 대해 한국 정부가 언급하지 않으니까 모르는 척 슬쩍 넘어가고 말았던 것이다. 일본 정부는 1967년 한국인들이 원폭피해자협회를 조직하고 피해보상을 요구하니까 한일협정에서 모두 청산되었다면서 상대도 해주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부산에 사는 일본 태생의 손진두(孫振斗)란 사람이 일본에 밀항했다가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는 “나는 원폭피해자로서, 원폭 병을 치료하기 위해 왔으니 치료할 수 있는 건강수첩을 교부해달라”고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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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곽귀훈 한국원폭피해자협회 전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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