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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48주년 특별기고

한국인 피폭자 보상 길 연 곽귀훈씨의 40년 투쟁기

“단돈 1원이라도 일본의 전쟁 책임 묻고 싶었다”

  • 글: 곽귀훈 한국원폭피해자협회 전 회장

한국인 피폭자 보상 길 연 곽귀훈씨의 40년 투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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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원폭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입장은 어떠했던가. 일본은 패전 후 원폭문제에 대해서는 말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일본에서 원폭 피해가 사회문제가 된 것은 1952년 샌프란시스코조약이 체결된 후다. 일본 정부는 1957년 ‘원자폭탄피해자의 의료에 관한 법’을 제정해 병 치료를 시작했다. 이어 1960년부터는 ‘특별피해자에게 수당을 지급하는 법’을 만들어 원폭피해자들을 ‘원폭2법’으로 원호했다.

손진두는 출입국관리법 위반으로 구금된 상태에서 일본 시민단체들의 후원으로 1972년 10월2일 후쿠오카(福岡)지법에서 후쿠오카 지사를 상대로 수첩소송을 벌이기에 이르렀다. 1974년 3월30일 후쿠오카 지법에서는 “원폭피해자라면 국적이 다르다거나 밀항해온 범법자라도 수첩을 교부해서 병을 치료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고 손진두의 손을 들어주었다.

같은 해 7월22일 신영수(辛泳洙) 원폭협회 회장이 도쿄도(東京都)에 건강수첩 교부를 신청하자 그 날짜로 ‘이 수첩은 일본국 영토를 벗어나면 무효’라는 후생성 공중위생국장의 ‘통달 402호’가 통첩됐다.

반면 손진두의 수첩소송은 고법에서도 승소했고 1978년 3월30일 최고재판소에서도 승소해 확정됐다. 비록 ‘통달 402호’의 효력이 최고재판소의 판결보다도 더 큰 효력을 유지하는 기현상이 빚어지긴 했으나 이 판결로 한국인도 일본에 가면 수첩을 받을 수 있고 의료혜택은 물론 수당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일본 국경을 벗어나면 수첩이 휴짓조각이 되는 파행 현상은 1998년까지 24년간 계속됐다. 다시 강조하자면 손진두 재판을 통해 한국인도 피폭자의 자격을 얻을 수 있는 문이 열리자 일본 정부가 ‘통달 402호’를 통해 그 효력을 유명무실하게 만든 것이다. 1978년 최고재판소가 “‘원폭2법’은 국경과 민족을 차별할 수 없는 국가보상적인 법”이라고 판결하자 일본 정부는 이듬해 후생대신의 자문기관인 ‘원폭피해자대책 기본문제간담회’라는 이상한 기구의 자문을 내세워 한국인을 제외하는 조치를 취했다. 세월은 흘러 50년 철옹성이던 자민당 정부가 무너지고 사회당과의 연립정권이 들어서자 ‘원폭2법’은 원호법으로 바뀌었다. 그렇지만 한국인에 대한 차별정책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출국했으니 수당 지급 못한다”

우리 민족은 일제 식민지시대에 참으로 형용할 수 없는 피해를 입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을 꼽자면 첫째가 20만 위안부 문제이고, 둘째가 8만 원폭피해자 문제, 셋째가 사할린의 5만 교포 유기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문제말고도 여러 피해자들이 전후에 일본국을 상대로 70여 건의 전후보상 소송을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손진두 재판 외에는 이겨본 재판이 없다. 시모노세키(下關) 위안부 재판에서 피해자들에게 30만엔씩을 지불하라는 일부 승소 판결이 있긴 했으나 그것도 고법에서는 패소했다. 우키지마마루(浮島丸) 생존자 15명에게 300만엔씩을 지불하라는 1심 판결을 오사카(大阪) 고법이 뒤집은 것이다.

왜 지는가. 그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명치헌법인 국가무답책(國家無答責)론, 즉 국가가 통치행위를 행사한 천왕의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시효(時效)다. 국제법에는 시효라는 것이 없다는데, 일본 법원은 10년, 20년 등 시효를 적용해 모두 패소 판결을 내리고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더러는 양심적인 법관이 있어 피해자에게 동정적인 판결을 내리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대세는 바뀌지 않고 있다. 수구 보수 세력이 천왕을 상전으로 받들고 있는 한 이런 국수 노선은 미동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가운데도 전쟁범죄를 속죄하려는 양심적인 시민운동가나 정치가가 늘어나는 추세이고 적지 않은 시민들이 이에 가세하고 있다.

이런 시민단체들의 후원과 인권변호사들의 희생적인 노력으로 그 많은 재판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일본 정부와 소송을 벌이는 건 한국 사람만이 아니다. 중국인, 필리핀인, 그리고 대만인 등 여러 나라 사람들이 일본에 전쟁 피해를 보상하라고 재판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특히 UN인권위원회나 ILO(세계노동기구) 등도 일본의 인권침해나 전범처리 문제에 대해 몇 차례 시정권고를 한 바 있지만 일본 정부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일본 정부가 가장 신경을 쓰고 무서워하는 말이 전후보상이다. 어떠한 사건도 전후보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판단되면 그것을 저지하려고 국력을 총동원해 대응한다. 이것이 일본의 기본 국책노선이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재판투쟁에 나서기로 했다. 여러 친지가 무모한 행위라고 만류하였지만 “비록 지더라도 운동이니까 해야 한다”는 ‘한국 원폭피해자를 구원하는 시민회’ 회장인 이치바 준코(市場淳子)의 굳은 신념에 크게 고무되었던 것이다.

1998년 5월 나는 미쓰비시 징용공 재판의 증인으로 증언을 준비하려고 오사카(大阪)의 한 병원에 입원했다. 입원 중 수첩갱신과 건강관리수당지급을 신청해 향후 5년간 매월 약 35만원씩을 지급하겠다는 오사카부 지사의 인정서를 받은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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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곽귀훈 한국원폭피해자협회 전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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