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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수지김’ 정은복 사건 추적기

의혹의 안기부 수사 20일, 자살시도, 그리고 실종20년

  • 글: 황일도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hamora@donga.com

‘제2의 수지김’ 정은복 사건 추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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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엄마가 갑자기 우리 곁을 떠난 뒤 저희 아버지는 다니시던 직장에 휴직계를 내고 일년 동안 엄마를 찾으러 전국 방방곡곡을 헤매셨습니다. … 새벽녘이면 숨죽여 흐느끼던 아버지의 울음소리를 저는 죽는 날까지 잊지 못할 것입니다. …
  • 유골이나마 찾아 뼛조각 하나하나에 입맞추며 작별인사라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오랫동안 고민한 듯, 사건진정 마감을 사흘 남겨둔 2000년 12월29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이하 의문사위)에 접수된 한 통의 진정서는 그렇게 끝맺고 있었다. 읽어본 조사관들이 숙연해질 정도로 사연은 절절했다.
  • 정여인은 과연 간첩이었나. 그녀는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제2의 수지김’ 정은복 사건 추적기
“나꼭 나가봐야 돼. 너는 절대로 따라오지 마.”1983년 12월15일 밤 9시 서울 반포의 한 아파트. 여동생 집에 머물고 있던 한 중년여성이 딸과 현관에서 승강이를 벌이고 있었다. 처음에는 “배가 아파 약국에 간다”고 말하던 엄마는 “내가 사다주겠다”는 딸의 대답에 잠시 망설였다. 그러더니 “사실은 누가 기다리고 있다는 전화가 와서 빨리 가야 한다”고 말을 바꾼다.

“나도 같이 가요, 응? 몸도 성치 않으면서 추운데 어딜 혼자 가요.”

“중요한 일이라 혼자 알아서 할 테니까 너는 상관하지 마. 알았지? 절대로 따라오지 마!”

평소와 달리 화를 내며 쏘아붙이고는 급하게 현관을 빠져나가는 엄마. 이날 따라 자꾸 횡설수설하는 모습에 불안해진 딸은 바로 뒤를 쫓아나갔지만 골목 어디에서도 엄마의 그림자를 찾을 수 없었다. 사람을 만나고 있을 만한 인근의 다방과 제과점을 모두 뒤졌지만 흔적도 없었다. 순간 ‘지금 놓치면 평생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이 딸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맥이 탁 풀린 딸은 길바닥에 주저앉았다.

그 후 20년. 불길한 예감은 어김없이 들어맞았다. 전국을 누비며 찾아헤맨 가족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실낱 같은 소식 하나 들려오지 않았다. 사라진 여인의 이름은 정은복. 마흔여덟 살의 평범한 가정주부였다.

‘월북자의 딸, 간첩의 조카’

1983년 국가안전기획부(이하 안기부)는 검거한 대남공작원들로부터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었던 정경희가 1970년대 남파되어 공작활동을 벌였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80년대에는 이선실, 70년대에는 정경희’라 할 만큼, 그는 노동당 중앙위 연락부장을 맡으며 대남공작사업을 진두지휘한 ‘전설적인 존재’였다. 이런 정경희가 남한에 다녀갔다는 것, 그런데도 검거는커녕 다녀간 사실조차 한참이 지난 뒤에야 알았다는 것은 안기부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수치’였다. 더욱이 당시는 각종 조직사건을 통해 민심을 수습하려 했던 전두환 정권 초기였다.

정경희는 본래 대구 출신으로 한국전쟁 기간 중에 월북한 인물. 1983년 가을 안기부는 남한에 살고 있는 정경희의 가족과 친척들을 연행해 남산 청사에서 조사를 벌이기 시작한다. 대구에 살고 있던 정경희의 친형제는 물론 역시 월북한 정경희의 오빠가 남겨둔 딸들도 예외일 수 없었다. 한 날 한 시에 가족 대부분이 지하 조사실에 구금됐다. 정은복씨는 정경희의 조카였다.

아버지의 월북 이후 어머니, 동생들과 함께 상경한 정은복씨는 가족을 보살피면서도 이화여대 국문과에 진학할 정도로 생활력이 강한 여성이었다. 그러나 그의 지인들은 “힘겨웠던 성장환경을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낙천적이고 단아한 성격이었다”고 이야기한다. 심지어 정씨의 큰딸 최현정(가명)씨는 “어른들이 안기부에 끌려가기 전에는 외할아버지와 외고모할머니가 월북했다는 사실조차도 몰랐다”고 말했다.

대학을 마친 정씨는 서울의 한 사립고등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하는 한편 틈틈이 습작소설을 지을 정도로 감수성도 풍부했다. 어머니가 운영한 하숙집에서 기거하던 은행원과 결혼한 그녀는 3녀1남을 낳은 후 건강상의 이유로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 후 1979년 강원룡 목사가 운영하던 ‘크리스천 아카데미하우스’의 주부아카데미 교육을 받고 ‘생명의 전화’ 상담원으로 활동하는 등 봉사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정씨의 집 또한 흠잡을 데 없는 ‘전형적인 중산층 가정’이었다. 1983년 당시 중견은행의 강남지역 지점장이었던 남편 최회영씨와 대학에 다니던 세 딸, 중학생이었던 막내아들은 함께 둘러앉아 책 읽기를 즐기곤 했다. 정씨 가족이 다니던 성당의 주임신부였던 김준회 현 서울대교구 보좌주교는 “일요일이면 어김없이 아이들의 손을 잡고 교회에 나오던 정씨 부부의 모습은 누가 봐도 부러워할 만했다”고 회고했다.

“당시는 그게 관행”

평범한 가족에게 어머니의 연행은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이었다. 알고 있는 것은 ‘기관’에 끌려갔다는 것 뿐, 누가 왜 데려갔는지에 대해 아무런 통보를 받지 못했던 가족들은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며 정씨의 행방을 수소문했다. 남편 최회영씨는 김보좌주교에게 청해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함세웅 신부를 소개받기도 했다. 함신부를 통해 부인과 처가 사람들이 안기부 남산 조사실에 있다는 것을 전해들을 수 있었지만, 무슨 이유로 조사를 받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안기부에서 조사를 받는다’는 것은 이들 가족에게 상상해 본 적도 없는 일이었다. 엄혹했던 1980년대 초반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발만 동동 구르며 속을 태우는 것이 전부였다. 항의할 곳도, 물어볼 곳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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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황일도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hamo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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