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학술

동아시아 고대사의 열쇠 ‘치우천왕’ 논쟁

“치우를 잃으면 고조선 역사도 사라진다”

  • 글: 박정학 치우학회 회장 suryang@chollian.net

동아시아 고대사의 열쇠 ‘치우천왕’ 논쟁

1/6
  • ●‘붉은악마’와 함께 부활한 군신 치우는 역사인가 신화인가
  • ● 동아시아판 트로이 전쟁 ‘탁록대전’
  • ● 염·황·치의 자손임을 강조하는 중국의 속내
  • ● 치우는 동아시아 공동의 조상이다
동아시아 고대사의 열쇠 ‘치우천왕’ 논쟁

2002 월드컵 축구대회에서 치우의 모습으로 분장한 응원단.

중국이 지난해부터 5년에 걸쳐 200억위안(약 3조원)을 투입해 고구려를 그들의 역사 속으로 편입시키는 ‘동북공정(東北工程)’ 프로젝트를 추진중이라고 한다. 중국 공산당을 대변하는 ‘광명일보’는 아예 ‘고구려는 중국 역사의 일부분’이라고 못박았다(자세한 내용은 ‘신동아’ 2003년 9월호 ‘중국은 왜 고구려사를 삼키려 하는가’ 참조). 이 소식을 접한 한국인들은 왜 갑자기 중국이 남의 나라 역사를 훔쳐가려 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응이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는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니다. 단순히 중국의 국경문제나 동북지역 소수민족의 동요를 차단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며, 따라서 고구려사 왜곡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 속에는 중화사상이라고 하는 오래된 중국의 패권주의 역사가 자리잡고 있다.

고구려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한 동북공정의 다음 목표는 치우천왕(蚩尤天王)이 될 것이다. 치우를 중국 역사로 편입함으로써 기자조선, 위만조선, 한사군(이 부분은 이미 그들의 역사가 됐다)을 포함한 고조선 전체의 역사를 가져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치우천왕의 존재는 2002년 월드컵 대회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붉은악마’의 상징물로 활용된 귀면(鬼面)의 주인공이 바로 치우천왕이다. 기원전 28∼26세기에 존재했던 치우는 금속을 제련하여 무기를 만들고 이를 바탕으로 각종 전투에서 엄청난 위력을 발휘해 황제 헌원을 위협했다. 그래서 훗날 사람들은 그를 전쟁신·군신·수호신으로 받들었다.

치우천왕은 누구인가

치우에 대한 기록은 ‘사기’를 비롯해 40여 종의 중국 사서에 등장하지만 불행하게도 한국의 정사에는 남아 있지 않다. 다만 ‘환단고기’나 ‘규원사화’처럼 위서(僞書)로 치부되는 책에 자세히 기록돼 있을 뿐이다. 먼저 ‘사기’를 비롯한 중국 역사서에 나오는 치우 관련 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치우는 구려의 임금이었으며, 고대 천자의 이름이다.

▲ 구리 머리에 철 이마(銅頭鐵額)를 하고 모래를 먹었으며, 금속을 제련해서 다섯 가지 병기를 만들었다(청동기 유적 발굴로 입증되고 있음).

▲ 난을 일으키기 좋아하고 난폭하여 황제에 굽히지 않다가 잡혀 죽었다.

▲ 그의 묘는 산동성 수장현에 있고, 매년 10월에 제사를 올리는데 붉은 연기가 솟아올랐다.

▲ 군(軍)의 우두머리는 모두 그에게 제사를 올렸는데, 특히 유방은 통일을 위한 마지막 풍패전투에 나가기 전에 치우사당에 참배하고 승리한 후 서안에 그의 사당을 짓고 높이 받들었다.

한국의 사서에 나오는 치우에 대한 기록으로는 ‘삼국사기’와 ‘동사강목’에 ‘치우기’라는 혜성이 나타났다는 내용이 유일하며, ‘연려실기술’ ‘대동야승’ ‘청장관전서’ 등에서는 중국의 기록을 인용해놓았을 뿐이다. ‘성호사설’에는 우리의 민속을 설명하면서 치우를 수호신으로 모시고 제사(이순신의 ‘난중일기’에도 치우사당에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세 차례 나온다)를 지냈다는 내용이 언급돼 있다.

그러나 ‘환단고기’와 ‘규원사화’에는 치우천왕이 배달나라 14대 임금(재위 109년, 기원전 2707∼2599)이며 황제와 치우가 패권다툼을 벌이게 된 경위, 치우가 만들었다는 무기의 종류와 전투방법, 10년간 73회나 치렀다는 주요전투의 내용, 염제 휘하의 한 군장이었다가 난을 평정하는 과정에서 염제로 등극하는 과정, 쇠를 캐 제련하는 과정 등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지금까지의 기록을 종합해보면 치우는 바로 ‘고구려’의 전신인 ‘구려(九黎=九麗·九夷·句麗)의 임금이었으며, 치우가 수도를 청구로 옮겼다고 했으니 구려의 영역은 태백산 신단수가 있던 만주지역에서 청구가 있는 산동반도까지 이어졌던 것 같다. 기마족의 이동폭이 넓었음을 인정하면 이해할 수 있다.

오늘날 중국의 역사학자들은 상고시대 동북아시아에는 화하족(華夏族 또는 漢族), 동이족(東夷族), 묘만족(苗蠻) 등 3개의 부족집단이 있었다고 본다. 분포지역을 보면 화하족은 섬서(陝西)성 황토고원을 발상지로 황하 양안을 따라 중국의 서방과 중부 일부지역을 포함했고, 황제가 대표적 인물이었다.

동이족은 산동(山東)성 남부를 기점으로 산동성 북부와 하북(河北)성, 만주지역, 한반도, 일본까지 이르고, 서쪽으로는 하남(河南)성 동부, 남쪽으로는 안휘(安徽)성 중부에 이르며, 동으로는 바다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에 거주했다. 동이족을 대표하는 인물로는 소호·태호·염제·치우 등이 있다. 묘만족은 호북(湖北)성과 호남(湖南)성을 중심으로 거주했고, 삼묘·구려·형만·요족 등 30여 개의 지파가 있으며 치우는 그들의 공통 조상이다. 여기서 치우는 동이의 대표적 인물이면서 묘족의 조상이기도 하니, 구려가 동이의 부락이었다가 남쪽으로 이동하여 묘족연맹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1/6
글: 박정학 치우학회 회장 suryang@chollian.net
목록 닫기

동아시아 고대사의 열쇠 ‘치우천왕’ 논쟁

댓글 창 닫기

2018/10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