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2월호

“남북통일, 총론 아닌 각론으로 시작해야”

  • 대담: 권오기 전 동아일보 사장, 와카미야 요시부미 아사히신문 논설주간

    입력2004-01-29 10: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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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북통일, 총론 아닌 각론으로 시작해야”

    김일성 출생 70주년을 기념해 세운 평양의 주체사상탑.

    와카미야 1980년 9월 김일성 주석을 가까이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자민당에 ‘아시아·아프리카연구회(AA硏)’라는 비둘기파 그룹이 있는데 이들이 초청을 받아 북한에 갈 때 동행기자단의 한 사람으로 저도 방북했습니다. 일주일의 체류기간 동안 대표단이 김일성과 만나는 일정이었는데, 꽤 애를 태웠습니다.

    많이 기다리게 하지요.

    와카미야 네. 안절부절못하게 만들고는 간신히, 그것도 갑작스럽게 만날 수 있었습니다. 회담 때는 김일성이 직접 마중을 나와 한 사람 한 사람과 악수를 했습니다. 숙청을 반복하며 독재체제를 구축해온 인물이기에 권위적이고 냉혹한 지도자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풍모가 대단히 솔직하고 지도자다워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자잘한 것은 아랫사람에게 맡기고 어려운 일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는 태도였지요. 20년 후인 2000년 남북정상회담 때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김대중 대통령을 맞이했을 때의 태도가 아버지를 꼭 닮아서 감탄했습니다.

    김일성은 공산주의자라고 하지만 ‘자본론’ 같은 것은 읽지 않았으리라 생각해요. 당시 한국어로 된 ‘자본론’은 없었으니까. 1917년 러시아혁명이 일어났을 때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여서 좌익 인사들 중엔 중국공산당에 들어간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이 김일성입니다. 공산주의자라기보다 반일민족주의자였죠. 그후 치열한 권력투쟁 끝에 권좌에 올랐지만, 김일성의 북한체제는 옛날 한국의 유교적 정치체제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공산주의라고 하기에는 좀 이상하지요.

    와카미야 해방 전 천황제를 본보기로 한 것 같아요.



    그것도 직접 통치의 천황제처럼 된 것이 북한의 불행이지요.

    와카미야 그런데 이상하게도 일본 정치가들은 김일성과 만나면 한순간 반해버리는 경우가 많아요. 예를 들어 사회당의 아스카다 이치오(飛鳥田一雄)씨가 대표적이고 자민당에서는 우쓰노미야 도쿠마(宇都宮德馬)씨라든지 구노 마사하루(久野忠治)씨가 친했죠. 가네마루 신(金丸信)도 김일성과 대면한 후 홀딱 반해버렸죠. 1980년 방북단 회담에서 김일성이 일본 의원에게 담배를 권했습니다. 그랬더니 한 의원이 ‘그런데 주석, 여기에 중국제 담배와 소련제 담배가 있다면 어느 걸 피울 겁니까?’라고 물었어요. 김일성은 ‘저는 조선 담배 이외에는 안피웁니다’라고 했죠. ‘만약 조선 담배가 없다면 어느 걸 피우죠?’ 하니 ‘그때는 안 피웁니다’하더군요. 김일성이 자주노선과 소련과 중국과의 등거리 외교에 매우 신경쓰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김일성은 자주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어요. 소련과 중국은 원조의 대가로 북한에 종종 성가신 부탁을 했어요. 사정이 괜찮을 때는 들어주지만 그렇지 않으면 거절하죠. 그때 김일성은 항상 자주성이라는 말을 합니다.

    북한은 적이면서 형제

    와카미야 김영삼 정권에서 부총리 겸 통일부 장관을 지내셨습니다만 당시 대북정책의 기조는 무엇이었습니까?

    첫째, 북한을 적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적이면서 형제라는 복수의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둘째, 지금 한국에는 김정일 체제가 붕괴하면 곧 남북통일이 실현된다고 생각하는 풍조가 있어요. 그러나 그렇게 되지는 않습니다. 분단은 우리 민족이 원해서 된 것이 아닙니다. 국제정치의 결정이므로 통일방법도 국제정치의 맥락에서 찾지 않으면 안 됩니다. 국제적인 맥락에서 통일을 논의하되 결정은 우리 판단으로 해야 합니다. 이것이 자주적 통일입니다. 남북한끼리 악수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김대중 대통령의 방식은 곤란합니다. 그리고 통일을 위한 준비를 해야죠.

    와카미야 세 번째군요.

    통일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정치가는 거창하게 말하지만 총론은 별 의미가 없어요. 구체적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통일 준비는 각론에서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북한에 전염병이 퍼졌다고 합시다. 인천 주변은 38선에서 가까워요. 그러니 한국의 보건복지부도 대책을 강구해야 합니다. 또 식량 부족을 겪고 있는 북한에 대해 한국의 농림부가 나서서 북한 식량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이것을 저는 ‘각론화’라고 말합니다. 통일은 ‘내가 한다’ 해서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한다’가 아니라 그것이 ‘되도록’ 해야 하는 것이죠. 영어로 말하면 ‘Do unify’가 아니라 ‘Let unification come true’죠.

    “남북통일, 총론 아닌 각론으로 시작해야”

    <b>權 五 琦</b><br>1932년 생. 동아일보 도쿄특파원으로 63년 부임, 한일교섭 등을 취재했다. 그후 워싱턴 특파원, 편집국장, 논설주간, 사장을 역임. 김영삼 정권에서 부총리 겸 통일원 장관으로 남북문제를 담당했다. 현재 동아일보 21세기평화재단 이사장, 울산대 석좌교수.

    와카미야 ‘통일하자’가 아니라 ‘통일을 실현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군요.

    1994년 북미제네바합의가 성립되고 한국이 북한의 발전용 경수로 건설자금을 내게 됐어요. 총사업비 46억달러의 7할을 한국이 내기로 했는데 왜 한국이 부담해야 하느냐며 화를 내는 정치인이 많았어요. 그때 제가 주부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통일은 누가 하는 것입니까? 여러분은 관계 없습니까? 여러분의 남편은 통일문제를 정치문제화하려는 경향이 없습니까?’라고요. 한국은 전기료가 싼 편이에요. 산업육성을 위해 싸게 책정되었지요. 같은 전기료라도 농촌은 더욱 싸지요. 그래서 전기요금 3%만 올리면 경수로 건설자금은 충분하다고 말했습니다. 주부들에게 ‘남자들이 모여서 예산을 짜거나 법률을 만들어도 지불하는 것은 여러분입니다. 매월 100원씩 내던 전기료를 103원 내서 통일사업에 참가할 수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라고 했더니 모두가 대찬성이었습니다.

    국회의원 중에도 ‘북한은 적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북한은 형제다’라며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지만 그러한 접근이 아니라 각론으로 가야해요. 전력회사에도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북한에 발전소를 건설하고 나면 만주(중국 동북부)와 시베리아도 전기가 부족하니 그쪽에도 발전소를 만들어달라고 할 가능성이 있다. 경수로 건설사업으로 손해 볼 일은 없다’고. 통일사업이다 뭐다 그런 것이 아니라 한국전력의 비즈니스라고 생각하자고요. ‘아주 좋은 선전 기회다, 당장은 손해를 보더라도 해보자’고 여러 번 말했습니다. 제가 통일부 장관일 때 구체적인 형태로 KEDO(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 사업을 시작했지요.

    대북정책 기조 바꾼 잠수함 사건

    와카미야 하지만 1996년 한국 동해안에서 북한의 잠수함이 좌초하여 승무원이 상륙하는 사건으로 인해 한국의 대북정책 기조가 바뀌었지요?

    네, 강릉에서 벌어진 그 사건 때문에 김영삼 대통령의 대북 유화정책이 강경책으로 바뀌었습니다. 소형 잠수함에 26명이 타고 있었지요. 한국에 배치된 간첩들과 연락을 취하고 근무교대를 하려다 엔진고장으로 흘러온 것으로 알려졌지요. 마침 그때는 UNDP(국제개발계획) 등이 주도하는 나진·선봉경제특구 투자설명회가 열리고 해상에서는 평화의 배가 북한으로 가던 때였는데 바다밑에서는 잠수함이 남쪽으로 침투한 거예요. 이상한 그림이었죠.

    와카미야 상륙 후 총격전이 벌어져 다수가 사망했죠.

    잠수함에 타고 있던 11명이 산속에서 시체로 발견됐고 1명이 체포됐어요. 소탕전에서 한국군 6명이 사망했고 동원된 군인이 2만명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정전협정 위반 여부가 문제가 됐어요. 만약 당시 한국 정부가 북한 잠수함 침투를 정전협정 위반이라고 규정하면 미군이, 정확하게는 유엔군이 소탕작전을 지휘해야 합니다. 그러나 한국 군대는 미국이 관여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전협정 위반이 아니다’고 결론지으려 했어요. 가능한 한 일이 복잡하지 않도록 처리하려고 한 건데 김영삼 대통령이 느닷없이 ‘이것은 침략이다!’라고 말해버린 겁니다. 결국 유엔 안보리가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고 정전협정 준수를 촉구하는 의장성명을 채택했습니다. 미국도 처음엔 이 사건을 군보다는 경찰에 맡기고 과잉반응을 하지 말자는 입장이었는데 할 수 없이 개입하게 됐죠. 한국은 한국대로 미군 장교가 현장검증을 하러 오자 ‘보여주지 않겠다, 당신들은 관계가 없다’고 했습니다. 나중에 미국대사가 화를 내며 ‘대체 이게 뭐야’ 했다더군요.

    와카미야 대단히 복잡한 한반도의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는군요.

    통일부 장관일 때 독일 주간지 ‘사이트’의 발행인이던 테어 좀머씨가 찾아왔습니다. 그때 저는 좀머씨에게 ‘독일인은 동서독과 남북한을 비교해 통일을 말하지만 제가 보기엔 오히려 팔레스타인·이스라엘 관계와 비슷한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랬는데 막상 기사는 ‘권이라는 한국의 통일부 장관은 한반도에 대해 동서독보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쪽이 참고가 된다고 말한다. 즉 통일은 대화만으로 가능한 것은 아니다’라고 나왔죠. 그후 김대중 대통령은 팔레스타인·이스라엘 같은 남북관계를 동서독적인 것으로 바꾸고자 했습니다. 어느 정도는 그렇게 된 것 같지만 남북정상회담 후에도 서해안에서 총격전이 벌어지곤 했지요. 폭력적인 측면의 북한을 고려하지 않으면 진정한 북한을 볼 수 없다는 생각엔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통일정책은 북한을 공백지대(空白地帶)로 만들려는 것이 아닙니다. 북한 사람이 모두 남으로 내려와서 북한이 텅 비면 통일이 되겠지요. 그러나 북한은 북한이고, 거기서 사람들이 탈출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사람들이 살 수 있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남북통일, 총론 아닌 각론으로 시작해야”

    <b>若宮啓文</b><br>1948년 생. 70년 아사히신문 입사. 정치부장 등을 거쳐 2002년부터 논설주간. 연세대 어학당에 1년간 유학. 일찍이 월드컵축구 한일공동개최를 주장. 저서에 ‘전후 보수의 아시아관’ 등.

    와카미야 일본에서는 북한이 얼마 안있어 스스로 붕괴한다거나, 김정일이 없어지면 통일이 이루어진다 혹은 북한 민중을 구하기 위해서는 무력행사를 해서라도 김정일을 배제해야 한다는 등의 여러 가지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북한의 체제붕괴는 여러 측면에서 볼 때 가능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가능성(possibility)일 뿐 개연성이라고는 할 수 없지 않습니까?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은 독재시절 죽인 사람이 많아서 그만큼 저항 세력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북한은 대를 이은 장기집권에도 저항활동이 없어요. 적어도 보이지는 않지요. 이를 통해, 북한의 ‘신민(臣民)들’이 상부의 지시에 따르는 것에 너무도 익숙해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김일성은 김정일이 20세 때부터 후계자 수업을 시켰습니다. 1960년대 초반입니다. 김일성이 환갑이었을 때 김정일은 누가 봐도 후계자였어요. 북한에 놀랄 만큼 큰 기념비적 건물이 지어지기 시작한 것은 김일성이 아니라 김정일 체제 들어서입니다. 김일성-김정일 후계 구도에 비춘다면 김정일 후계 대비는 조금 늦은 감이 있습니다. 지금 김정일이 환갑인데 그의 아들은 아직까지 후계 무대에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와카미야 ‘체제붕괴는 시간 문제니 경제 제재조치나 다른 어떤 방법을 통해서라도 몰아세우라’는 의견도 있습니다만 그것은 지나치게 희망적 관측입니다. 궁지로 몰아넣으면 오히려 위험할 수도 있지요. 소련이나 동구의 경우 동서관계가 완화되면서 여러 가지 정보가 유입되고, 사람과 자금, 기술이 들어옴으로써 점점 효과를 나타내 결국 붕괴로 이어졌어요. 그렇게 본다면 현재 북한이 과거의 소련, 동구보다 더한 쇄국체제일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론 자금이나 사람, 기술 등 여러 가지 교류를 통해 체제 변혁이 이어지지 않겠습니까. ‘아사히신문’의 그런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현재까지 그런 주장이 주류입니다. 김대중의 햇볕(포용)정책도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소위 연착륙 논의지요. 그러나 북한이 핵을 갖게 되면 달라집니다. 핵개발을 하고 있다면 자칫 지원이 핵개발을 돕는 것이 될 수도 있지요. 단 부시도 ‘북한이 핵개발을 포기하면 지원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큰 흐름으로 봐서 지금 북한을 말살할 수는 없습니다. 6자회담이 북한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CSCE(유럽안보협의회, 현재 OSCE=유럽안보협력기구)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동독의 체제전환결정적으로 작용한 제일 공로자였습니다. NATO(북대서양기구)의 하드 파워에 반해 CSCE는 소프트 파워입니다. 이것은 아시아의 긴장을 푸는 데 중요한 힌트가 됩니다. 동과 서의 교통·정보의 흐름은 원칙적으로 규제하지 않는다는 것이 CSCE의 합의입니다.

    체제유지와 개방의 딜레마

    와카미야 헬싱키합의지요.

    서독TV를 동독에서 볼 수 있게 된 것이 결정적이었어요. 정보 유입이 동독의 통제사회를 해체했습니다. 그래서 6자회담 결과 동아시아에서도 정보 흐름을 규제하지 않기로 합의한다면 북한도 동독과 같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와카미야 6자회담의 목표는 당면한 핵문제를 중심으로 북한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있지만 이것이 잘 된다면 앞으로 이 틀을 동아시아에서 유지·발전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럴 가능성이 있어요. 이런 의미로도 6자회담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북한이 핵을 단념케 하려면 채찍도 필요하지만 당근도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즉, 불가침조약과 같은 약속도 중요하지만 경제협력이나 지원조치가 이어지지 않는다면 북한은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김정일은 자력으로는 경제개혁이 무리라는 것을 알고 일본에 기대를 걸었습니다. 일본은 북한에 대해 대단히 엄격한 부시 정권에게 다소의 영향력을 줄 수 있는 존재입니다. 일북 국교정상화 교섭만 잘 된다면 식민지 지배 청산의 대가로 막대한 경제협력을 얻을 수 있었죠. 이것을 지렛대로 쓰려 했던 것이죠. 이런저런 판단으로 북측은 일본인 납치문제를 인정하고 사죄하는 것으로 타개하려 했어요. 그것이 2002년 ‘평양선언’으로 이어졌어요. 만약 6자회담이 진행되어 핵문제 타개 전망이 나온다면 그때 일북은 다시 납치문제를 진지하게 해결하는 방향으로 나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남북통일, 총론 아닌 각론으로 시작해야”

    1996년 9월 강릉 해안에서 좌초한 채 발견된 북한 잠수함.

    딜레마는 소련이나 동구의 붕괴를 가장 신경쓰는 것이 북한이라는 점입니다. 2002년 초 영국에서 국제포럼이 열려 저도 참가했습니다만, 거기에 한국의 학자와 북한 연구자도 참가했습니다. 부시가 ‘악의 축’ 발언을 한 직후였는데 한국의 학자가 이 발언을 비판한 후 ‘김정일이 고르바초프와 같기를 기대한다’고 말했어요. 요컨대 ‘북한도 경제와 나라를 개방하여 국제화하면 되지 않는가’라는 취지였지요. 그러자 그때까지 조용히 있던 북한측 연구자가 일어나 정색을 하며 ‘지금 발언은 그대로 넘길 수 없다. 고르바초프는 가장 타도해야 할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나라를 멸망시켰으니까’라며 반론했습니다. 좀 놀랐습니다만 그것이 바로 김정일의 딜레마입니다. 경제를 활성화하려면 서방으로부터 자금과 기술을 유입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나 나라를 개방하면 할수록 정보가 유입되어 체제유지가 어려워지는 것 또한 사실이죠.

    그렇습니다. 또 한 가지, 북한과의 관계에서 말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미국의 윈스턴 로드 국무차관보와 대화했을 때, 제 어머니가 자주 하시던 얘기를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밭을 사주는 것만으로 먹고 살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밥을 숟가락으로 떠서 입에 넣어줘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요. 북한은 스스로 생각해서 살아가는 방법을 모릅니다. 지금 북한은 식량이 부족해요. 그러나 북한에 식량을 주기보다 어떻게 식량을 얻을 수 있는지 가르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랬더니 중국인 부인을 둔 로드 차관보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잡은 생선을 주기보다는 생선 잡는 방법을 가르쳐라. 중국에 이런 속담이 있다’고. 이 점이 중요합니다. 아무리 일본이 자금을 지원한다해도 북한이 이 자금을 더 높은 탑을 세우는 데 쓰거나 군비로 쓴다면 북한체제는 유지되기 어렵습니다. 저는 중국의 시장경제, 이것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장경제는 모두 자본주의라고 생각되지만 자본주의에 자본주의시장경제가 있듯이, 사회주의에는 사회주의 시장경제라는 것이 있다고 덩샤오핑(鄧小平)은 말했어요. 그 사회주의시장경제라는 것이 중국식이겠지요. 북한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연착륙을 하기 어렵습니다.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목적지는 알지만 어디를 통해서 가야 하는가. 바로 그 지점에서 답보상태에 빠져 있는 것이 지금의 북한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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