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5월호

조선왕조실록으로 본 문종 독살설

주치의는 왜 종기 걸린 임금에게 독성 강한 꿩고기를 처방했나

  • 글: 이종호 과학국가박사 mystery123@korea.com

    입력2004-04-29 15: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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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조는 조카 단종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비정한 삼촌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최근 발굴된 역사자료에서 세조가 자신의 형이자 단종의 아버지인 문종의 죽음에도 관여했다는 정황이 발견됐다.
    • 세조는 문종의 주치의관 전순의를 사주해병약한 임금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는데….
    조선왕조실록으로 본 문종 독살설

    과연 세조는 자신의 형인 문종의 죽음에 관여했을까. 경남 합천 해인사에 있는 세조의 화상.

    조선왕조 500년 역사에서 가장 피비린내 나는 정치적 격변 중 하나는 계유정난(癸酉靖難, 1453)이다. 어린 나이에 단종이 즉위하자 삼촌인 수양대군이 난을 일으켜 왕권을 손에 넣었으며 이에 불복한 사육신이 단종 복위를 꾀하다 무자비하게 처형당하는 등 정치세력간의 갈등은 큰 상처를 남겼다.

    세자 향(珦). 삼촌에 의해 왕권과 목숨까지 잃은 비운의 왕 단종의 아버지이자, 조선왕조의 황금시대를 연 세종의 맏아들인 향은 세종 재위기간 32년 중 마지막 8년을 섭정했다. 그는 평소 학문을 좋아하고 집현전 학자들을 아끼는 등 성군의 자질을 보였으나 어려서부터 병약했다. 세종이 그로 하여금 서무(庶務)를 결재하게 하였으나 신하들이 그의 각종 질환을 이유로 반대했을 정도였다.

    1450년 세종이 사망하자 세자 향은 왕으로 등극했다. 조선왕조의 제5대 왕 문종(1414~52)이 바로 그이다. 문종은 세자 시절부터 진법(陣法)을 편찬하는 등 군정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군제 개혁안을 스스로 마련하여 제시했고, 조선 초기 로켓포인 신기전(神機箭)을 발사하는 화차를 직접 설계하기도 했다(이 화차는 ‘문종 화차’로도 불린다).

    그러나 문종은 재위 2년4개월 만에 39세의 나이로 병사하고, 세자 단종(1441~57)이 조선왕조를 통틀어 가장 어린 나이인 12세에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단종의 즉위는 앞서 말했듯 정치적 회오리바람을 몰고 왔다. 세조(1417~68)는 단종을 끌어내리고 왕위에 올랐고, 이 과정에서 단종과 사육신 등 많은 이가 목숨을 잃었다.

    그럼에도 역사학자들은 세조에 대해 비교적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다. 조카 단종을 살해하고 왕위를 찬탈한 것은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세조가 아니었더라면 어린 단종을 둘러싼 구신(舊臣)들의 세력 다툼에 조선왕조가 멸망했을 개연성이 높다고 추정하는 것이다. 단종이 어리다는 것을 빙자하여 구신들이 세력다툼을 벌이자 세조가 조선왕조를 세운 이씨 왕가의 종친으로서 불가분 일어서지 않을 수 없었다는 설명도 있다.



    그런데 근래에 발굴된 자료에는 세조가 문종의 사망 이전부터 왕권을 탈취하려 했다는 정황이 나타나고 있다. 즉 세조는 어린 단종이 왕위에 오른 후 벌어진 불안한 정치상황 때문에 왕위를 찬탈한 것이 아니라, 문종의 사망에 깊숙이 관여하는 등 애초부터 왕위 찬탈을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는 것이다. 또한 문종의 의관 전순의(全循義)가 수양대군의 비호를 받으며 문종의 병을 고의로 악화시켜 빨리 죽게 만들었다는 정황도 발견됐다. 세조의 비호를 받은 의관에 의해 문종이 독살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문종 살해 정황 발견

    조선왕조실록은 문종이 원래 병약했으므로 오래 살지 못할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때문에 실록은 문종이 왕위에 오른 지 3년도 채 되지 않아 사망한 것에 대해 어떠한 의문도 제기하지 않은 채 문종의 아들 단종과 동생 세조의 갈등만 주로 다루고 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을 다른 각도에서 살펴보면 세조가 문종의 사망에 관여했다는 정황이 여러 면에서 나타난다. 문종과 세조의 중간 매개체 역할을 한 사람이 당시 의관 전순의이다.

    전순의는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는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성종 등 조선왕조 5대 임금의 질환을 치료했던 당대의 명의로 내의원 의원에서 첨지중추원사에까지 올랐다. 그의 출세가 남다르다는 것은 그가 노비나 백정 등 출생 신분이 대단히 미천한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단종 3년 대사헌 권준 등은 “전순의는 계통이 심히 미천한데 세종대왕 같은 밝은 임금을 만나 초법적으로 발탁되어 그 지위가 3품에 이르렀고, 그 상급과 은총을 누린 것이 셀 수 없다”고 상소를 올렸다. 즉, 전순의는 당시 의관이나 역관의 신분이던 중인이나 상민계급 출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미천한 신분임에도 종2품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오른 전순의는 남다른 재주를 가지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단종 3년 신하들이 그를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성화를 부리자 전의감제조가 전순의의 천재성을 설파하며 더 이상 그에 대한 처벌을 운운하지 말 것을 상소한 기록이 있다.

    전순의는 의관 노중례, 최윤과 함께 한의학 3대 저술 중 하나인 ‘의방유취(醫方類聚)’를 공동 편찬했고, 근래 발견된 ‘식료찬요(食療纂要)’와 세종 때 세계 최초로 과학영농온실을 건설했다는 기록을 적은 ‘산가요록(山家要錄)’을 펴냈다.

    그런 전순의가 세조의 사주로 문종 살해에 가담했다는 의혹을 받는 까닭은 문종의 종기를 치료하면서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행동을 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전순의의 문종 치료 과정은 다음과 같다. 가능한 원문을 그대로 전재한다.

    내의(內醫) 전순의가 내전(內殿)에서 나오면서 말하기를, “임금의 종기가 난 곳이 매우 아프셨으나, 저녁에 이르러 조금 덜하고 농즙(膿汁)이 흘러 나왔으므로, 두탕(豆湯)을 드렸더니 임금이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음식의 맛을 조금 알겠다’ 하셨다” 하니, 여러 신하들이 모두 기뻐하였다.(문종 2년 5월5일)



    유시(酉時)에 임금이 강녕전(康寧殿)에서 훙(薨)하시니, 춘추(春秋)가 39세이셨다. 이때 대궐의 안팎이 통하지 않았는데, 오직 의관(醫官)인 전순의, 변한산, 최읍만이 날마다 나와서 안부(安否)를 보살폈지마는, 모두가 범용(凡庸)한 의원(醫員)이므로 병증(病症)을 진찰(診察)할 줄은 알지 못하여, 해로움이 없을 것이라고 여기면서 임금에게 활 쏘는 것을 구경하고 사신(使臣)에게 연회를 베풀도록 하였다. 종기의 화종(化腫)이 터지므로 전순의 등이 은침(銀針)으로써 종기를 따서 농즙을 두서너 홉쯤 짜내니, 통증(痛症)이 조금 그쳤으므로, 그들은 밖에서 공공연히 말하기를, “3, 4일만 기다리면 곧 병환이 완전히 나을 것입니다” 하였다.

    의정부(議政府)와 육조(六曹)에서는 날마다 임금의 기거(起居)를 물으니, 다만 대답하기를, “임금의 옥체(玉體)가 오늘은 어제보다 나으니 날마다 건강이 회복되는 처지입니다” 하였다.

    이날 아침에 전순의 등이 나아가서 안부를 보살피고는, 비로소 임금의 옥체가 위태로워 고생하는 줄을 알게 되었다.

    (중략)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외정(外庭)에서 통곡하면서 말하기를, “어째서 청심원(淸心元)을 올리지 않는가?” 하니, 전순의가 비로소 청심원을 올리려고 했으나 시기가 미치지 못하였다. 조금 후에 임금이 훙서(薨逝)하였다(사망하였다는 뜻).(문종 2년 5월14일)



    문종이 사망하고 단종이 즉위하자 곧바로 문종의 사망 원인을 놓고 의관들에 대한 문책이 시작된다. 의관들에 대한 문책 등 전말의 중요 부분은 다음과 같다.



    의금부에서 전순의는 수종(首從)으로 죄를 중하게 하고, 변한산, 최읍은 1등을 감하여 곤장 100대에 유(流) 3천리로 하고, 조경지, 전인귀 등은 장 90대를 때리게 했다. 다시 전순의는 고신(告身, 조정에서 내리던 벼슬아치의 임명장)을 거두고 전의감 청직으로, 변한산, 최읍은 영사로 하였다. 같은 날 사헌장령 이보흠, 사간원 우헌납, 조원희가 전순의, 변한산, 최읍에게 경한 죄를 줄 것이 아니라 중죄를 청했다.(단종 원년 5월18일)

    전의감 청직 전순의, 영사 변한산, 최읍을 방면하다.(단종 1년 1월4일)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허리 위에 종기는 비록 보통 사람이라도 마땅히 삼가고 조심하여야 할 바인데, 하물며 임금이겠습니까? 움직이는 것과 꿩고기는 종기에는 금기하는 것인데, 전순의가 문종께서 종기가 난 초기에 사신의 접대(接待)와 관사(觀射) 등 여러 가지 운동을 모두 해로움이 없다고 생각하였고, 이어서 구운 꿩고기를 바치기에 이르면서도 꺼리지 않았습니다. 또 종기가 농(濃)하면 침으로 찌를 수 있으나 농하지 아니하면 침으로 찌를 수가 없는 데도, 전순의는 침으로 찌르자고 아뢰어서 끝내 대고(大故)에 이르게 하였으니, 비록 의원을 업으로 하지 않는 자라 할지라도 방서(方書)를 펴서 보면 일목요연(一目瞭然)한 것인데, 하물며 전순의는 의원(醫員)으로서 어찌 이것을 알지 못하여서 모두 계달(啓達)하지 않았겠습니까? 이를 마땅히 극형(極刑)에 처하여야 하는데, 특별히 말감(末減)에 따라서 다만 전의감(典醫監) 청지기로 정하였다가 얼마 안 되어 내의원에 출사하도록 하시니, 심히 미편(未便)합니다” 하였다.(단종 1년 4월27일)

    의관 전순의의 수상쩍은 행동

    대사헌 기건(奇虔) 등이 상소하기를, 질병(疾病)은 마땅히 치료(治療)하는데 삼가야 하고, 약이(藥餌)는 반드시 금기하는 바가 있는데 치료를 잘못하고 금기를 범하면 그 병이 심해져서 마침내 구료할 수가 없는 지경에 이릅니다. 문종대왕(文宗大王)께서 편찮던 초기에 내의 전순의가 자기의 편견(偏見)을 믿고 여러 의서(醫書)를 널리 찾아보지 아니하고, 마침내 ‘해롭지 않다’고 아뢰어 임금에게 사신을 문밖까지 전송하도록 하여, 종기의 증세를 더욱 심하게 하였는데, 또한 이를 살펴보고 놀랐을 터인데도 오히려 ‘해롭지 않다’고 하여 수라상에 식료(食療)를 또한 꺼리지 아니하고 바쳐서 종기가 매우 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전순의와 최읍, 변한산이 들어가 내진을 보고 침으로 종기의 입구를 따고서, 외부에 드러내어 말하기를, ‘상체가 마땅히 며칠 안 되어 좋게 회복될 것이라’ 하였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대소 신료(大小臣僚)들이 모두 기쁘게 생각하였는데, 갑자기 안가(晏駕)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전순의 등을 목을 베어서 통분(痛憤)을 풀려고 하였는데, 단지 관직만을 삭탈하여 천예(賤隸)로 유배시켰다가 곧 또 이를 석방하고 조정의 반열(班列)에 끼이게 하니, 신 등은 통분함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조선왕조실록으로 본 문종 독살설

    삼촌 세조에 의해 유배당한 단종이 머물렀던 강원도 영월의 집터. 이곳에서 단종은 17세의 어린 나이에 사약을 받고 생을 마감했다.

    대저 독(毒)이 있는 종기는 처음에 그 미미(微微)하게 나타나며 등에 있는 것은 더욱 독이 있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터인데도 이에 말하기를, ‘해가 없다’고 하였으니, 그 죄를 용서할 수 없는 것의 첫째입니다. 몸의 기운을 피로하게 움직이는 것은 등창에서 크게 금하는 것인데도 이를 아뢰지 아니하였으니, 그 죄를 용서할 수 없는 것의 둘째입니다. 식물의 성질이 반드시 병과 서로 반대되면 해로움이 있는 것인데 꿩고기 같은 것이라면 등창에서 크게 금하는 바인 데도 날마다 꿩고기 구이[雉灸]를 드렸으니, 그 죄를 용서할 수 없는 것의 셋째입니다. 등창에서는 농하여 터지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데, 그것이 농하지 아니하였는데 이를 침으로 찔러서 그 독을 더하게 하였으니, 그 죄를 용서할 수 없는 것의 넷째입니다.(단종 1년 5월1일)

    병조(兵曹)에 전지하기를, “전순의, 최읍, 변한산 등의 고신을 환급(還給)하도록 하라” 하였다.(단종 2년 2월19일)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순의, 변한산, 최읍에게 고신을 도로 준 것을 불가하다고 아뢰었다.(단종 2년 2월28일 및 3월3일)

    좌사간 조어가 상소에서 전순의의 죄목을 상술했다.① 종기치료방법에는 처음에 노동을 삼가고, 음식물을 조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② 항상 입시하여 증세만 진찰하고, 방서를 살피지 않았으며, 여러 신하와도 상의가 없었다.③ 항상 ‘종기의 증세가 대단치 않다’고 말하고④ 대신들이 문안할 때마다 늘 ‘증세가 순조롭다. 며칠 안으로 평복(平復)될 것이다’라고 말했다.⑤ 사신(使臣)의 접대(接待)와 관사(觀射)·진선(進膳) 등의 일을 하나도 삼가시라고 하지 않았고⑥ 화농한 종기의 끝을 침으로 째서 그 독을 더 누그러지게 해야 하는데, 대소 신료들로 하여금 종기의 증세가 위태한 줄 모르게 하고⑦ 달 13일에 이르러서도 오히려 말하기를, ‘증세가 순조롭다’ 하고, 14일에 갑자기 빈천(賓天)하시게 했다.(단종 2년 3월4일)

    행전의감정(行典醫監正) 전순의와 행우군사정(行右軍司正) 변한산의 과전(科田)을 도로 주게 하였다.(단종 2년 3월13일)

    단종 때 이미 복권된 전순의는 세조가 왕위에 오른 후에도 승진에 승진을 거듭하며 세조의 총애를 받는다. ‘세조실록’에 기록된 전순의에 대한 내용은 무려 18건이나 된다. 다음은 전순의가 세조로부터 얼마나 총애 받았는지 보여주는 내용이다.

    임금이 크게 웃고 장난 삼아 이구로 하여금 주먹으로 이계전을 때리게 하니, 신숙주가 말하기를, “내가 만약 손으로 때리게 되면, 비록 명의(名醫)로 이름난 전순의, 임원준 같은 사람이 좌우에서 서로 교대하며 구호한다 하더라도 끝내 효험이 없을 것이다”라 말했다.(세조 1년 8월16일)

    전순의를 자헌대부(資憲大夫)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로, 임원준을 가정대부(嘉靖大夫) 예조참판(禮曹參判)으로 삼았다. 전순의, 임원준은 시약(侍藥)하는 데 공로가 있었기 때문에 특별히 명하여 가자(加資)하였다.(세조 10년 11월4일)

    임금의 옥체가 조금 편안하여서 정사를 보살폈다. 아종(兒宗)과 한계희(韓繼禧)·노사신(盧思愼)·내의 전순의·김상진 등으로 하여금 궐내(闕內)에 들어와서 대렵도(大獵圖)의 노름을 하도록 하고는 이를 구경하였는데, 노사신이 노름에 이기니 말 1필을 하사(下賜)하였다.(세조 12년 9월26일)

    의료인이자 정치인

    의학자들은 종기란 고량진미(膏粱珍味)를 과식할 경우 생기며 초기 치료를 잘 하면 사망에 이르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그런데도 문종이 종기로 사망한 것은 원래 몸이 약하다 하더라도 매우 특이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을 그대로 따른다면 전순의의 죄목은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 종기가 번성했을 때 움직이는 것을 금기하는데, 전순의는 문종에게 사신들을 접대하는 연회 참석을 삼가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둘째, 종기가 이미 화농되었을 때는 침을 써서 배농시키지만 초기 증상에 배농(排膿)시키면 도리어 증상이 악화되고 염증이 심화되는데, 전순의는 화농되지 않은 종기를 고의적으로 건드려 증상이 더욱 악화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셋째는 전순의가 문종을 독살했음을 입증하는 보다 분명한 증거이다. 원래 꿩이나 닭, 오리고기는 껍질에 기름이 과다하여 종기가 났을 때 금기로 치는 음식임에도 불구하고 전순의는 문종에게 계속 꿩고기를 먹게 했다.

    안덕균 교수(전 경희대 한의대)는 “꿩은 생리적으로 반하(半夏, 천남성과의 다년초)를 좋아하는데 특히 음력 4월경은 반하의 독성이 매우 강한 시기라서 사람이 반하 한 숟가락을 먹으면 숨을 거둘 정도”라고 지적했다. 그러므로 꿩고기는 반드시 겨울철 대지가 얼었을 때 먹어야 한다. 그럼에도 전순의가 이를 무시하고 문종에게 꿩고기를 계속 섭취토록 했다는 것은 고의가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처방이다.

    만약 전순의가 아닌 다른 의관이 임종 직전의 문종을 지켜보았다면, 문종의 비정상적인 용태를 알아차렸을 것이다. 문종이 사망한 날의 ‘문종실록’의 기록에서도 이 점이 엿보인다.

    이때 의정부의 대신(大臣)들이 임금의 병환이 위급한 때를 당하여, 본부(本府)에 앉아서 사인(舍人)을 시켜 안부만 물었을 뿐이고, 한 사람이라도 임금을 뵈옵고 병을 진찰(診察)하기를 청하지는 않고서 범용(凡庸)한 의관(醫官)에게만 맡겨놓고 있었으니, 그때 사람들의 의논이 분개하고 한탄하였다.

    전순의는 당대의 명의로서 저술과 의술, 그리고 강의에 충실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문종의 병증을 더욱 심화시켜 결국 사망에 이르게 했다. 이러한 상황은 왕의 주치의관으로서 그야말로 비상식적인 처신이다.

    문종은 등극하기 전부터 병약하여 주변에서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러므로 문종이 일찍 병사한다하더라도,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상황이다. 때문에 마침 문종의 종기 치료를 두고 세조의 사주를 받은 전순의가 교묘한 의술을 이용해 문종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종기로 고생하는 문종에게 반하를 주로 먹어 독성이 강한 꿩고기를 먹게 했다는 것은 의학에 매우 밝은 의관이 아니라면 생각해낼 수 없는 기막힌 아이디어이다.

    여기에서 당연히 제기되는 의문은, 의관 혼자서 이와 같이 비상식적인 행동을 했다고는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누군가의 사주에 의해 문종이 독살되었다는 가설은 바로 이 대목에서 성립한다.

    문종의 사망과 관련하여 의심스러운 행동을 하였음에도, 또 별다른 공헌을 세운 바도 없이 전순의는 세조가 왕위에 오른 후 1등 공신 책록에 올랐다. 이 점으로 미루어볼 때 전순의는 세조와 사전 공모해 문종의 병증을 더욱 위독하게 만들어 사망에 이르게 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생긴다. 물론 전순의가 어떠한 경로로 세조와 결탁하여 문종 살해에 적극 가담했는지는 알려진 바 없다.

    그러나 세조는 왕권을 찬탈하기 위해서는 문종이 보다 빨리 사망할 필요성이 있었다. 단종의 나이가 성년에 이르러 친정을 하게 되면 세조의 야욕은 물거품이 되기 때문이다. 전순의가 눈치 빠르게 세조 편을 들었으리라는 점은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이다. 전순의는 의료인이자 정치인이었다고 설명할 수도 있다.

    전순의, 復權 후 출세가도

    조선시대 임금의 치료를 전담하던 의관들은 왕이 사망하면 질병을 잘못 다스렸다는 죄목으로 탄핵되는 것이 관례였다. 전순의와 함께 ‘의방유취’를 저술한 노중례도 중궁과 수양대군의 질병을 잘못 다스렸다는 이유로 탄핵되어 직위가 강등되는 수모를 겪었고, 효종(1619~59)이 사망하자 의관 신가규는 사형을 당했다. 그러나 단종 원년에 관례대로 의금부에서 전순의의 죄를 논했음에도 그에 대한 단죄는 그야말로 솜방망이였다.

    단종 1년(1453) 1월4일 전순의, 조경지, 전인귀 등은 방면되고, 전순의는 내의원에 다시 출사한다. 탄핵된 지 채 7개월도 지나지 않은 때이다. 이에 불복한 신하들은 방면과 내의원 출사가 불가하다는 상소를 올렸으나 거절됐다. 그럼에도 상소가 끊이지 않아 전순의에 내린 처벌은 ‘내의원에 출사하지 말라’는 것이 고작이었다. 특히 전순의는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지었음으로 가산을 몰수, 처자를 관노로 영속시켜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히려 단종 2년에는 고신과 과전을 돌려주기까지 했다. 전순의는 완전히 면죄부를 받은 셈이다.

    이후 전순의의 출세는 더욱 놀랍다. 세조 1년 계유정난과 더불어 개국공신이라 하여 원종공신1등에 녹훈(상호군(上護君)으로 제수)되고 세조 2년에는 첨지중추원사로 임명된다. 세조 3년에는 성삼문 등 사육신이 처벌되면서 적몰된 가산(家産)을 받았으며 세조 7년에 행첨지중추원사가 되었다. 세조 10년에는 종2품 자헌대부에 이르렀다.

    또 세조 12년 전순의로 하여금 대궐로 들어와 ‘대렵도’라는 놀이를 구경하도록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등 전순의는 천민으로서는 최고의 영화를 누렸다. 그가 성종 대에 이르러 어떻게 사망했는지 알려지지 않으나, 성종 9년 ‘세조 때에 의술을 중요시한 전순의는 의관으로서 당상관에 올랐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볼 때 평생 영화를 누리다 자연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무력에 의해 왕위에 오른 세조는 구신들의 충성심을 무자비하게 짓밟아 만고의 비난을 받는 왕이 되었다. 그러나 세조는 왕으로 등극한 후로 태종과 세종이 확립한 국가 체제를 공고히 하는데 힘을 썼다. 세조는 우선 백성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태종 때 실시했던 호패법을 복원했다. 종래의 현직과 휴직, 또는 정직 관원에게 나눠주던 과전을 현직 관원에게만 주는 직전제를 실시하여 국비를 줄였으며, 지방 관리들의 반란을 사전 예방하기 위해 지방의 병마절도사로 그 지방 출신을 억제하고 중앙의 문신을 파견했다.

    세조에 대한 상반된 평가

    세조는 국방 등 외치(外治)에서도 남다른 정력을 쏟았다. 그는 조선의 왕들 중에서도 남다르게 병서에 능한 데다 무인을 중용하여 정권을 잡았기 때문에 무인을 크게 우대했다. 세조는 북방의 여진족 등 야인을 회유 정토했고, 하삼도민(下三道民)을 평안 황해 강원도 등으로 이주시켜 북방을 개척하게 했다. 이로써 세조는 국방과 농업을 장려하는 이중 효과를 거뒀다.

    이러한 업적 때문에 역사학자들은 세조에게 점수를 후하게 준다. 관리들에 대한 관제 개편과 기강 확립을 통해 중앙집권제를 확립하고, 민생안정책으로 백성의 편리를 꾀했으며, 법전편찬사업과 문화사업으로 사회를 일신시켰다는 점 등이 세조의 업적으로 평가된다. 정치 운영에서는 ‘문치’가 아닌 ‘강권’으로, 인쟁 등용에서는 실력 중심이 아닌 측근 중심 인사로 일관해 조선왕조가 후대에 갈수록 붕당정치로 변질되는 단초를 제공했다는 비판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 역사학자들은 세조가 이씨 왕조를 튼튼한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는 점에 동의한다.



    그러나 문종의 죽음이 의관 전순의의 술수와 세조의 계략이 작용한 결과라면 세조는 반만년에 걸친 우리 겨레의 역사에서 두 명의 왕을 죽음에 몰아넣은 유일한 왕이 된다. 유교 사상을 국시로 내세우며 탄생한 조선왕조에서 군주를 두 명씩이나 제거하고 권력을 잡은 세조에 대한 평가는 군주로서의 업적과 도덕적 정당성 사이에서 크게 엇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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