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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발굴

‘간도협약’ ‘中朝밀약’은 무효, 대한제국 말기까지 국내성은 한국 땅

사료로 본 고구려 수도 국내성의 영토주권

  • 글: 심백강 민족문화연구원장 shimbg2001@hanmail.net

‘간도협약’ ‘中朝밀약’은 무효, 대한제국 말기까지 국내성은 한국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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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당과 고구려의 싸움은 국내전쟁 아닌 침략전쟁
  • ●거란과 대치했던 고려는 국내성 경계지역에 요새선 구축
  • ●중국 고대사서에서 고구려는 이역(異域)·외국(外國)
  • ●고구려 국내성이 중국에 편입된 역사는 100년도 안된다
‘간도협약’ ‘中朝밀약’은 무효, 대한제국 말기까지 국내성은 한국 땅

중국 지린성에 있는 고구려 수도 국내성 성벽 일부. 중국 정부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앞두고 이 일대를 말끔히 정비했다.

7월1일 제28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HC)는 북한과 중국이 신청한 고구려 유적을 각각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한다고 발표했다. 북한은 ‘고구려 고분군’이라는 이름으로 동명왕릉 주변 고분군 등 5개 지역 63기(벽화고분 16기)를 신청했고, 중국은 중국 영토내 ‘고구려 수도, 왕릉과 귀족묘’라고 해서 국내성·오녀산성·환도산성 등 왕성 3곳과 태왕릉·장군총 등 왕릉 13기, 그밖에 귀족묘 26기와 광개토대왕비 등 43건을 신청한 바 있다.

이번 세계문화유산 등재는 무엇보다도 고구려 유적의 문화적 가치를 세계가 인정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한국언론들도 세계문화유산은 인류의 자산이지 특정국가와 국민만을 위한 국가유산이 아님을 강조하고, 고구려 유적의 현재 소재지가 북한이냐 중국이냐에 관계없이 세계와 인류의 유산으로 인정받았다는 데 의의를 두었다.

그러나 고구려 문화유산의 세계문화유산 지정은 단순히 국제사회의 문화재 보존이라는 차원에 그치지 않고 고구려 문화유산의 주인과 주체를 결정하여 국제사회로부터 공인받는다는 의미가 내포돼 있다. 우리의 안이한 생각과 달리 중국은 곧 속내를 드러냈다. 중국 ‘인민일보’와 신화통신’ 등 주요언론을 통해 노골적으로 “고구려사는 중국사”라고 강조하며 여론몰이에 나선 것이다.

‘인민일보’는 “고구려가 한(漢) 당(唐) 시기 중국 동북의 소수민족 정권”이라고 했고, ‘신화통신’은 “고구려가 역대 중국 왕조와 예속관계를 맺어왔으며 중원 왕조의 제약과 관할을 받은 지방정권”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한 한국의 반응은 분노와 항의였다. 일단 한국정부는 “고구려사를 중국역사의 일부로 편입하려는 것은 절대로 인정할 수 없다”며 중국 정부의 공식입장을 요구한 상태다.

중국 관영언론들이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되풀이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고구려의 주요 문화유산이 현재 중국 영토에 편입돼 있기 때문이다. 500년 가까이 고구려의 도읍지로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중심지였고 광개토대왕비와 벽화고분을 위시해 고구려 유물유적이 집중분포돼 있는 국내성만 해도 현재 중국 지린(吉林)성 지안(吉安)시에 있다. 또 고구려의 첫 수도인 졸본(혹은 홀본)은 현재 랴오닝(遼寧)성 환런(桓仁)현에 있고(오녀산성), 환도산성은 국내성과 함께 지린성 지안현에 있다. 이를 근거로 중국정부는 ‘동북공정(東北工程)’ 프로젝트를 통해 고구려 역사의 중국 귀속을 주도면밀하게 진행시키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국내성이 적어도 1908년까지 조선에 속한 우리 땅이었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그것은 사료로도 명백히 입증된다. 고구려·고려·조선·대한제국에 이르기까지 국내성은 한번도 중국에 귀속된 적이 없이 줄곧 한국의 영토였다.

고구려 유물유적의 세계문화유산 지정이 동북아시아 역사·문화에서 중요 이슈로 떠오른 지금, 국내성의 역사적 실체를 사료를 통해 명확히 밝혀서 역사분쟁의 소지를 없애는 것만이 중국의 야욕으로부터 고구려의 역사주권과 영토주권을 지키는 가장 강력한 방법이다.

거란 접경지대에 있던 국내성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의하면 고구려는 기원전 37년 건립되어 첫 수도를 졸본으로 정했다가 40년 후인 기원 3년(유리왕 22년)에 수도를 국내성으로 옮겼다. 이때부터 기원 427년 제20대 장수왕 15년에 수도를 평양으로 옮길 때까지 약 425년 동안 국내성은 고구려의 수도였다. 즉 국내성은 고구려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수도로서 존속하며 고구려의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중심지가 됐다.

또 ‘고려사’ 94권 열전 제7 유소(柳韶)열전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덕종(德宗)이 즉위하자 유소를 중군병마원수(中軍兵馬元帥)로 임명했고 뒤이어 문하시랑 동 내사문하 평장사(門下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로 옮겼다. 덕종 2년에 유소가 비로소 북부 국경에 관방(關防)을 설치했는데 서해 해변에 있는 옛 국내성(國內城) 경계 압록강 물이 바다로 들어가는 어구를 기점으로 동쪽에 위원(威遠), 흥화(興化), 정주(靜州), 영해(寧海), 영덕(寧德), 영삭(寧朔), 운주(雲州), 안수(安水), 청새(淸塞), 평로(平虜), 영원(寧遠), 정융(定戎), 맹주(孟州), 삭주(朔州) 등 13개소의 성을 걸쳐 요덕(耀德), 정변(靜邊), 화주(和州) 등 3개 성(城)에까지 이르는 큰 요새선을 구축했다. 이 공사에서 거란인이 와서 방해하던 것을 교위(校尉) 변유(邊柔)가 재빨리 앞장을 서서 격퇴하여 그 공로로 중랑장(中郞將)에 등용되었다.”

‘고려사’의 이 기록은 고려 중군병마 도원수 유소가 덕종 2년 북쪽 변경지역에 관방을 설치할 때 서해 해변 옛 국내성 경계 압록강 물이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곳을 기점으로 수천리에 걸친 장성(長城)이 설치됐음을 알려준다. 또 당시 고려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던 거란이 관방 설치작업을 방해하는 책동을 펼쳤으나 고려 교위(校尉)인 변유(邊柔)에 의해 즉각 격퇴당한 사실 등을 전하고 있다.

이 기록을 통해 우리는 고려시대에 국내성이 거란과 고려의 접경지대에 위치해 있었으며, 분명히 거란의 영토가 아닌 고려의 영토에 속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만약 국내성이 거란의 영토였다면 고려가 어떻게 국내성 경계지역에 성을 쌓을 수 있었겠는가.

압록강은 그 자체가 천연의 국경선을 형성하고 있으므로 압록강 이남에다 성을 쌓았다면 굳이 국내성을 따로 언급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국내성 경계를 기점으로 성을 쌓았다”고 언급한 것으로 보아 당시 국내성이 고려의 영토였음을 간접적으로 증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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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심백강 민족문화연구원장 shimbg200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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