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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먼 다큐멘터리

베트남 보트피플과 한국인 선장의 극적 상봉

“캡틴 전, 당신을 만나게 해달라고 19년 동안 기도했습니다”

  • 김지현 재미 자유기고가 lia21c@hotmail.com

베트남 보트피플과 한국인 선장의 극적 상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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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명호의 선장과 선원들은 난민구조에 대한 교육을 받은 적이 한 번도 없었지만 선박 구조수칙에 입각해 일사불란하게 대처해 갔다. 전 선장은 선원들에게 난민들로부터 일체 물품을 받지 말라고 당부했다. 동전이나 지폐 또는 기념품 등 사소한 선물을 받는 것도 금지시켰다. 그는 “사람이 사람을 구하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다. 의사도 병자를 다 구하지 못한다. 좋은 일을 해놓고 절대 대가를 바라지 말라”고 강조했다.

전 선장에게는 또 다른 고민이 있었다. 본사인 고려원양에 보트피플을 구조하게 된 경위를 보고해야 했다. 그러면 본사는 해양항만청, 외무부, 안기부 등 관계부처에 즉각 보고하도록 돼 있었다. 고심 끝에 전 선장은 전날 밤 일어난 구조경위를 간략하게 작성해 본사에 타전했다. 예상했던 대로 본사는 ‘난민들을 부산항에 입항시키지 말라’는 지시를 보내왔다. 막막했다.

하지만 보트피플 96명을 실은 광명호는 그 해(1985년) 11월26일 부산항에 무사히 입항했다. 한국 정부는 어쩔 수 없이 그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난민들은 11월30일 부산 대한적십자 난민보호소에 수용됐다. 그리고 전 선장은 그날부로 하선조치 당했다.

전 선장과 피터 누엔씨, 두 사람이 배에서 함께 지낸 날은 12일에 불과했지만 서로 깊은 신뢰를 쌓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보트피플이 난민보호소에 수용된 지 2개월 후 전 선장은 누엔씨로부터 손수 만든 크리스마스카드와 편지 한 통을 받았다. 내용인즉, “전 선장이 구조한 난민이 96.5명에서 97명으로 늘어났다”는 소식이었다. 그가 구조해 준 임부가 수용소에서 아들을 낳았다는 것. 전 선장으로서도 무척 기쁜 일이었겠지만, 그는 수용소를 찾지 않았다. 난민들이 부산 수용소에 남아 있던 1년 반 동안 단 한 번도. 그 후 전 선장과 난민들 간의 연락은 완전히 두절됐다.

LA ‘리틀 사이공’의 영웅



그로부터 17년이 지난 2002년 5월 초 어느 날, 전 선장은 한 재미교포로부터 뜻밖의 연락을 받았다. “미국에 있는 피터 누엔씨가 당신을 애타게 찾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전 선장은 누엔씨가 자신을 잊지 않고 있을 뿐 아니라 찾으려 애쓰고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어렵게 연락이 닿은 두 사람은 그 뒤 편지와 크리스마스카드, 연하장을 주고받다가 2003년 가을 무렵 서로 만나자는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고 2004년 5월 전 선장은 누엔씨로부터 미국에 와달라는 초청장을 받는다.

전 선장이 LA에 도착하기로 예정된 날은 2004년 8월5일. 그때 이미 전 선장은 미국 내 한국교포 사회는 물론 베트남인 사회의 영웅이 돼 있었다. LA의 베트남 커뮤니티인 ‘리틀 사이공(Little Saigon)’의 최대 일간지인 ‘누이 비엣’지가 전 선장이 방문하기 1주일 전쯤인 7월27일, 20여년 전 한국인과 베트남인 간에 벌어진 한 편의 드라마 같은 휴먼스토리를 보도했기 때문이다.

신문 기사는 베트남 보트피플 출신 피터 누엔씨가 20년 전 남중국해상에서 자신들을 구조해준 한국인 전 선장을 애타게 찾다가 마침내 연락이 돼 미국으로 초청했다는 내용이었다. 전 선장이 인도적인 난민 구조를 했음에도 선장직에서 쫓겨났다는 내용도 함께 실려 있었다.

미담은 한인 언론과 미국 주류언론에 잇따라 보도되면서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특히 보트피플이 주축이 된 미국 내 베트남 커뮤니티는 거족적인 ‘환영위원회’까지 구성할 정도였다.

지난날 공산 베트남을 탈출해 보트피플이 되었던 사람들은 당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구조를 외면했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베트남의 주변 국가들조차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선창에 구멍을 내면서까지 항변에 나선 난민선박이 있었겠는가. 그런 상황에서 전 선장이 보여준 행동은 리틀 사이공에서 ‘영웅’으로 칭송되기에 충분했다.

리틀 사이공은 미국에서 베트남인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지역이다. 코리아타운에서 동남쪽으로 약 60km 정도, 오렌지카운티의 ‘제2의 코리아타운’에서는 불과 몇 블럭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1975년 4월30일 수도 사이공이 공산 베트남 정권에 의해 호치민시로 이름이 바뀌자 미국에 정착한 베트남인들은 자신들이 사는 타운 이름을 ‘리틀 사이공’으로 내걸고 잃어버린 조국의 상징으로 삼았다.

2004년 8월5일 오후 4시경, 전 선장은 부인 김기자(47)씨, 막내딸 휘진(16)양과 함께 대한항공편으로 LA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이날 공항에는 한 시간 전부터 누엔씨 가족과 ‘전제용 선장 환영위원회’ 관계자, 그리고 취재진으로 북새통을 이뤘다. 베트남인들은 한글로 ‘전제용 선장님을 환영합니다’라고 쓴 피켓을 들고 나왔다.

전 선장이 입국장에 모습을 나타내자 누군가가 “영웅이 도착했다!”고 소리쳤다. 입술이 타들어갈 만큼 애타게 기다리던 누엔씨는 그 길로 뛰어나가 전 선장을 왈칵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전 선장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누엔씨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거렸다. 전 선장은 “참 오랜만이야. 11시간이면 이렇게 만나는데…. 몸 건강한 걸 보니 정말 기쁘군” 하고 말하며 “땡큐”를 연발하는 누엔씨에게 환한 미소로 답했다. 19년이라는, 실로 오랜 기다림 끝에 찾아온 만남의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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