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2월호

황성신문 세 번째 사옥 사진 찾아냈다

을사늑약 직전 옛 제용감 관아 4개월간 사용

  • 오인환 전 연세대 교수·신문방송학 ihoh@yonsei.ac.kr

    입력2005-01-26 14: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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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5년은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된 지 100년이 되는 해다. 당시 민족지 황성신문은 장지연이 피를 토하며 쓴 논설 ‘시일야방성대곡’으로 온 백성의 심금을 울렸다. 그러나 황성신문 관련 사진 한 장 남아 있지 않은 게 오늘의 현실이다. 최근 구한말 민족지들의 사옥 터를 끈질기게 추적해온 한 언론학자가 황성신문의 세 번째 사옥이 위치했던 곳의 사진을 발견했다.
    • 이 사진의 사료적 의미를 살펴본다.[편집자]
    황성신문 세 번째 사옥 사진 찾아냈다

    황성신문의 세 번째 사옥이던 제용감 건물.

    우리나라에서 근대적 신문의 역사는 통리아문(統理衙門) 산하 박문국(博文局)이 1883년 10월1일 ‘한성순보’를 발간하면서 시작됐다. 관보적 성격이 강하던 한성순보는 1884년 갑신정변의 소용돌이 속에서 박문국이 불타 폐간되고 말았다. 그 뒤 1886년 1월 한성순보의 복간 형식으로 한성주보가 발간됐으나 재정 사정으로 1888년 7월 다시 폐간되기에 이른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난 1896년 4월7일 ‘독립신문’이 발간됨으로써 국내 민간신문의 역사가 열렸다. 독립신문 발간을 계기로 ‘황성신문’ ‘제국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민족진영계의 주요 신문들이 잇따라 발간됐다. 이들 민족지는 제국주의 일본의 한국 침탈 야욕에 맞서 구국언론의 기치를 올렸으나, 1905년 11월17일 을사늑약(乙巳勒約)을 거쳐 1910년 8월28일 불법적인 합병조치를 통해 일본에 국권을 완전히 빼앗김으로써 1945년 8월15일 광복을 맞을 때까지 활동이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한성순보 발간 이래 우리 근대 언론이 겪어온 활약상과 수난·영욕의 역사는 그간 몇몇 뜻있는 언론사학자의 집념에 찬 연구 덕분에 많은 사항이 정리돼 있다. 다만 근대언론 초기에 관한 연구 가운데 아직 본격적으로 자료수집이 이뤄지지 않은 분야 중 하나가 언론과 관련한 사진을 통한 연구가 아닌가 생각된다.

    필자의 관심사는 바로 이런 ‘틈새’와 관련돼 있다. 필자는 3년여 전부터 우리나라 초기 신문인 독립신문, 황성신문, 제국신문, 대한매일신보 등의 사옥 위치를 보다 정확히 알아보고 사옥 사진을 찾는 작업을 벌여왔고, 그간 부분적 성공을 거둬 이를 논문 형식으로 발표한 바 있다.

    이 과정에서 독립신문사 사옥으로 추정되는 건물의 사진을 찾았고, 대한매일신보사의 창간사옥 사진과 두 번째 사옥 사진도 찾아낼 수 있었다. 황성신문에 관해서는 사옥이 있던 4개 지점에 대한 정확한 위치는 찾을 수 있었으나 사옥 사진은 하나도 찾지 못했는데, 최근 세 번째 사옥인 옛 제용감(濟用監) 관아 건물의 사진을 찾게 됐다.



    황성신문의 세 번째 사옥은 구한말 제용감 관아가 오래 사용하다 관리서(管理署)라는 관아가 잠깐 사용한 것으로 전해진다. 필자는 최근 이 제용감 건물의 사진을 발견했다. 황성신문은 1904년 4월 중순에 이 건물로 옮겨와서 세 번째 사옥으로 약 4개월간 사용하다 새로 개설된 농상공학교(農商工學校)에 건물을 넘겨주고 네 번째 사옥으로 떠난 바 있다.

    황성신문의 첫 사옥은 현재의 서울 세종로 사거리 교보문고 앞 기념비전(紀念碑殿) 자리에 있었고, 두 번째 사옥은 소공동 웨스틴 조선호텔 부근에 있었으며 1904년 4월 중순에 세 번째 사옥인 ‘중서 수진방 수동 전(前) 관리서’ 건물로 옮겨 약 4개월간 신문을 발행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황성신문은 1904년 8월 초순 네 번째 사옥인 현재의 서린동 영풍빌딩의 종로 사거리 쪽 입구 근처로 옮겨 1910년 8월 하순 일본이 우리의 국권을 강탈할 때까지 신문을 발행했다(‘신동아’ 2003년 12월호 ‘황성신문 옛터를 찾아서 : 현 세종로 네거리 → 조선호텔 인근 → 국세청 본청 → 영풍문고 입구로 네 차례 이사’ 기사 참조).

    지금의 국세청 본청 자리

    황성신문 세 번째 사옥 사진 찾아냈다
    황성신문이 세 번째 사옥인 제용감 터를 떠나게 된 것은 그 자리에 관립 농상공학교가 들어섰기 때문이다. 이 학교는 1899년에 설립된 상공학교에 농학과를 통합해 1904년 6월에 새로 설립이 공포되고 8월에 제용감 건물로 들어가 9월 초에 신입생을 모집, 본격적인 실업교육을 시작한 관립학교였다. 이 학교는 1906년에 공업전습소, 수원농림학교, 선린상업학교로 분리된다. 이 3개 학교의 후신이 각각 현재의 서울공고, 서울대 농업생명과학대학(전 농과대학), 선린정보산업고(전 선린중·선린상고)다. 이 3개 학교의 교사(校史) 속에 첫 교사(校舍)인 제용감의 한옥 사진이 나와 있다.

    서울공고, 선린상고, 서울대 농대의 교사(校史)에는 각기 자기 학교의 모태인 농상공학교가 옛 제용감 건물에서 문을 열었다는 사실이 나와 있다.

    ‘서울공고백년사’에는 “처음에 농업과는 서울 중구 훈동에 설치하였다가 뒤에 상공학교와 합하여 중구 수송동 제용감 자리로 옮겼다”(29쪽)고 되어 있고, ‘선린백년사’에는 “농과는 처음부터 상과 및 공과와 교사(校舍)를 같이 쓰지 않고 따로 사대문 안의 북부 훈동(勳洞)에 소옥(小屋)을 두었다가 그 후 중부 수진동(壽進洞) 제용감(지금의 수송동 중동전기공고 구내) 자리로 옮겼다”(63쪽)고 적고 있다.

    ‘서울공고백년사’(34쪽)와 ‘선린백년사’(58쪽)에 옛 제용감의 사진과 함께 농상공학교에 대한 설명이 실려 있는데, 여기에는 “농상공학교. 기존의 상공학교에다 농과를 추가하여 농상공학교(1904년)가 개설되어, 당시…제용감 자리에 교정을 마련했다. 이곳은 과거 숙명여자중학교가 있던 자리로 지금의 종로소방서 뒤편에 위치한 것으로 보인다”고 기록돼 있다.

    한편 ‘수원농업칠십년’(21쪽)과 ‘수원농업팔십년’(18쪽)에는 “1899년에 세워진 商工學校는 지금의 명동 중국대사관 뒤에 있었고 1904년 농과의 증설로 출발한 農商工學校는 처음에 農科만이 勳洞 小屋을 교사로 사용하였다가 다시 합쳐서 壽松洞 濟用監(현 淑明女子中高等學校 構內)으로 옮겼다”고 나와 있다.

    이 3개 학교의 교사(校史)를 보면 모두 자기 학교의 모태가 구한말의 농상공학교라는 점, 농상공학교가 옛 제용감 건물을 교사(校舍)로 썼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다만 첫 교사인 제용감이 있던 위치에 관해서는 ‘현 중동전기공업고등학교 구내’ ‘과거 숙명여자중학교가 있던 자리로 지금의 종로소방서 뒤편’ ‘현 숙명여자중고등학교 구내’ 등으로 엇갈린다. 그러나 여기서 제용감 자리로 언급된 곳이 그리 넓은 지역이 아니기 때문에 그 위치 추정에 있어 다소의 오차는 크게 문제될 것이 없을 듯하다.

    이와 관련, 필자는 제용감의 위치에 관해 이를 좀더 정확히 추정해보려 옛 지도와 현재의 지도를 놓고 대조해본 결과 황성신문 세 번째 사옥인 제용감 건물이 있던 곳은 현재의 국세청 본청 자리로 추정된다.

    3개 학교 校史에 남아 있는 사진

    여기서 잠시 제용감 사진을 살펴보자. 이 사진이 언제 촬영된 것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한적한 것으로 미뤄 농상공학교가 각기 분리되어 떠나고 난 1907년경이나 그 직후일 것으로 짐작된다. 농상공학교가 떠난 뒤 이 건물이 어떻게 사용됐는지, 언제 헐렸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관련기록을 찾지 못했다. 사진 왼쪽 뒤편에 보이는 건물은 한성사범학교 건물의 일부로 추정된다.

    제용감 건물의 제일 왼쪽에는 지붕과 기둥만 있고 벽이 없는 헛간 같은 것이 보인다. 그보다 조금 오른쪽에는 처마에서 아래로 햇빛을 가리기 위한 차양이 쳐져 있다. 그 오른쪽 툇돌 앞에 양복 입은 사람이 서 있는데 모자를 쓰고 코트를 걸친 듯하다. 제용감 건물 본채의 중간에는 넓은 대청이 있고 오른쪽엔 작은 창이 여럿 달린 큰방이 있는 것이 보인다. 큰방 앞 바깥으로 벽돌이나 돌로 쌓아 만든 듯한 아궁이가 보인다.

    구한말 민족지 가운데 독립신문사는 그 사옥으로 추정되는 건물의 사진이 확인된 바 있다. 대한매일신보도 창간 사옥과 두 번째 사옥의 사진이 최근 확인됐다. 그러나 구한말 4대 민족지 가운데 하나인 황성신문의 경우 신문을 발행하던 사옥 4개 중 현재까지 건물 사진이 확인된 것은 세 번째 사옥인 옛 제용감 관아의 건물이 처음이다.

    ‘서울육백년사’에 의하면 제용감은 “조선 초기에…제용고(濟用庫)로 설치했다가 후에 제용감(濟用監)으로 이름이 고쳐졌고 세조 7년(1461년)에 염색을 담당하던 관청인 도염서(都染署)를 병합시켰다.…이곳에서 관장하던 일은 진헌(進獻)되는 모시(苧), 마포(麻布), 피물(皮物), 인삼(人蔘) 등과 사여(賜與)되는 의복, 사라(紗羅), 능단(綾緞) 등과 포화(布貨), 채색(綵色), 입염(入染), 직조(織造) 등에 관한 것이었다. 고종 31년(1894년)에 폐지했다가 광무 8년(1904년)에 제용사(濟用司)로 고쳐서 선수(膳羞)와 특종 산물에 관한 일을 장악케 했다가 이듬해 3월에 이를 다시 폐지시키고 말았다.”(제1권, 333쪽).

    ‘서울육백년사’는 제용감이 있던 위치를 “中部 壽進坊(오늘날의 수송동 숙명여자중고등학교 북쪽)”이었다고 밝히고 있다(제1권, 333쪽).

    제용감 관아 건물에는 1903년에 신설된 관리서가 들어서게 됐다. 관리서는 산림보호, 사찰, 유물, 유적 등을 관리하기 위해 궁내부 산하에 설치한 관아였으나 1년 만에 폐지되고 소관업무는 내부관방(內部官房)으로 이관됐다가 내부지방국으로 넘어가게 된다.

    제용감 터에 얽힌 이야기

    옛 제용감 터는 원래 고려 말 이성계 역성혁명의 일등공신인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이 살던 집터의 일부였다. ‘서울육백년사’에 의하면 정도전의 집터는 매우 넓어, 남쪽으로는 현 종로구청에서부터 북쪽으로는 중학동, 동쪽으로는 현재의 연합뉴스 터 일부에까지 걸쳐 있었다고 한다.

    황성신문의 세 번째 사옥으로 쓰인 제용감 터는 앞에서 언급한 바 있듯 제용감 → 관리서 → 황성신문 → 농상공학교로 이어졌다. 그 뒤 어떻게 됐는지를 알려주는 자료를 아직 찾지 못해 확실히 이야기할 수는 없으나 변천과정을 짐작해볼 수는 있을 것 같다.

    즉 옛 제용감 관아 건물은 구한말에는 주요 민족지 황성신문의 세 번째 사옥이었고, 광복 후에는 우리의 주요 언론기관의 하나이던 합동통신이 1970년대 후반 현대식 빌딩을 신축해 언론활동을 펼친 자리였다는 것, 그리고 바로 옆 터는 1904년 7월 영국인 언론인 배설(裵說·Ernest Thomas Bethell)이 배일·구국(排日救國)의 기치를 내건 신문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한 곳이다. 현재 우리나라 주요 통신사인 연합뉴스(연합통신의 후신)가 옛 대한매일신보 사옥 터의 일부를 포함한 대지 위에 사옥을 짓고 언론활동을 벌이고 있으니 우연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연합뉴스 빌딩 터는 100년 전 대한매일신보 사옥 터와 일부가 겹쳐 있고, 길 건너 중학동에는 ‘한국일보’가 자리잡아 근 50년째 신문을 발행해오고 있다.

    황성신문이 옛 제용감 건물에서 신문을 발행한 것은 1904년 4월 중순부터 8월 초순까지 4개월간이다. 이때 황성신문의 사장 겸 편집인은 장지연(張志淵)이었다. 당시는 러·일전쟁 초기로서 우리나라가 일본의 강요로 1904년 2월23일 제1차 의정서를 체결한 직후부터 1904년 8월22일 한·일협정서를 체결해 이른바 ‘고문(顧問)정치’라는 명목하에 한국을 일본의 실질적인 속국으로 만들기 직전까지다.

    황성신문이 옛 제용감 건물을 떠나 네 번째 사옥으로 이전하고 그로부터 1년여가 지난 1905년 11월17일에 일본의 강압으로 불법적인 을사늑약이 ‘체결’됐다. 이에 분격한 황성신문은 11월20일자 신문에 사장 겸 주필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란 제목의 논설을 실어 국민봉기의 불길을 지피게 된다. 황성신문의 항일·구국 언론활동과 이 과정에 황성신문이 겪었던 어려움에 관해서는 상당한 연구가 이뤄져 있으므로 재론하지 않는다.

    미발굴 사진의 사료적 가치

    옛 제용감 관아 건물의 사진이 필자의 눈에 띈 것은 2003년 12월호 ‘신동아’에 황성신문 사옥들의 위치에 관한 글을 실은 직후였다. 당시 필자는 대한매일신보 사옥의 위치와 사진을 찾는 작업을 마무리하고 있었는데 그 탐색과정에서 옛날 그 신문사 주변에 있던 학교들의 문건에서 결정적인 자료들을 찾을 수 있었기에 황성신문의 경우도 그럴 개연성이 높다는 기대감에 관련 학교들을 찾아 나섰다.

    필자는 우선 동작구 대방동에 있는 서울공고를 찾았다. 먼저 동창회 사무실에 연락했더니 학교 역사자료관이 있다고 했다. 동창회 사무실이 들어선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복도 벽면에 옛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그중 하나인 옛 한옥 사진에 눈길이 갔다. 사진설명에 첫 교사(校舍) ‘제용감’이라 적혀 있었다. 그 순간 황성신문의 4개 사옥 가운데 하나의 사진을 찾았다는 기쁨이 온몸을 감싸왔다.

    두 번째로 용산구 청파동의 선린정보산업고(전 선린상업고)를 찾았다. 학교 행정실 관계자에게 농상공학교가 시작된 제용감이 황성신문 사옥이었다고 이야기하니 새로 알게 된 이 사실에 관심을 표명하면서 학교 역사자료관으로 안내해 주어 귀한 자료들을 접할 수 있었다.

    서울대 농과대학의 교사(校史)는 연세대 중앙도서관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이 3개교의 역사인 ‘서울공고백년사’ ‘선린백년사’ ‘수원농업칠십년’ ‘수원농업팔십년’에는 모두 제용감 사진이 들어 있다.

    필자는 구한말 민족지를 펴낸 사옥 터 연구를 일단 마무리지으면서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해본다.

    황성신문의 세 번째 사옥이던 제용감 관아 건물의 사진은 있었다. 다만 그 사진을 다루거나 본 사람들 중에는 제용감이 황성신문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없었고, 언론사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도 제용감 사진이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었다.

    황성신문의 경우처럼, 우리의 근대언론 초기의 실상을 보여주는 사진자료는 분명 남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사진들은 언론사적 의미를 누군가가 확인해주길 고대하고 있지 않을까.

    우리 언론사에서 사료적 가치가 있는 미발굴 사진들에 대한 세인의 관심이 커지고, 이 분야의 연구에 동참하는 연구자가 늘어나 연구 성과가 하나둘씩 쌓여 가칭 ‘사진을 통해 본 한국초기 언론사(史) 연구’ 분야가 성립될 날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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