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4월호

“김좌진의 신민부에 살해당하고, ‘김좌진 영웅 만들기’로 친일파 몰렸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재정위원 구영필 유족의 항변

  • 글: 엄상현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gangpen@donga.com

    입력2005-03-23 17: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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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년 9월11일 영고탑 아문압 동채시에서 괴한에 피습, 사망
    • 김좌진 휘하 신민부 제3보안대장 문우천 범행기록 확인
    • 영고탑 차지 위한 세력다툼이 배경
    • 구영필, 1922년 워싱턴회의 결과에 실망해 사회주의 선택
    • 무산자 교육기관 ‘대동학원’ 김좌진 파 밀고로 해산
    • 구영필, 좌익·친일 혐의로 서훈 거부당해
    “김좌진의 신민부에 살해당하고, ‘김좌진 영웅 만들기’로 친일파 몰렸다”

    1920년대 초반 북만주 영안현 영고탑에서 활동할 당시의 구영필

    역사는 모든 이에게 진실하고 평등해야 한다. 특정한 인물이나 단체에 의한 편파적인 해석이나 평가는 금물이다. 우리의 독립운동사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최근 독립운동가 구영필(具榮泌·1890∼1926)씨 유족회가 “김좌진 장군이 이끌던 신민부 세력이 북만주 독립운동의 근거지인 영안현 영고탑을 차지하기 위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재정위원 출신 독립운동가 구영필을 죽였다”면서 “광복 후 정치적 목적과 신민부원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사건의 진실이 왜곡됐을 뿐 아니라 독립운동가가 친일파로 내몰리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고 주장하고 나서 주목된다.

    만일 유족회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그 동안 정리된 한국독립운동사의 근간이 흔들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예민하고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사안인 것이다.

    이에 따라 ‘신동아’는 객관적인 사료를 근거로 유족회의 주장을 확인하는 한편, 독립운동사에 정통한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 이현희 성신여대 명예교수, 신주백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책임연구원, 박환 수원대 교수 등에게 자문했다. 또 이들 교수의 저서와 만주 일대 독립운동사를 오랜 기간 연구한 중국 옌볜대 박창욱 교수의 논문 및 저서에 등장한 관련 사료를 참고했다.

    ‘신민부와 정의부의 관계인 듯…’



    구영필씨의 호는 일우(一友)다. 일제 강점기에 만주에서 활동할 당시 ‘최계화(崔桂華)’라는 이름으로 중국 국적을 취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역사에 그는 과연 어떤 인물로 기록돼 있을까.

    가장 대표적인 기록이 1926년 10월18일자로 그의 사망소식을 전한 ‘동아일보’ 기사 내용이다. 특히 이 기사는 구영필의 과거 행적에 대해 가장 많은 양의 정보를 담고 있다. 다음은 기사 내용을 재정리한 것이다.

    [ ‘군정서 창설자 길림 간민회장 구영필씨 피화

    최근은 이주동포 지도 활동

    중국 길림성(吉林省) 영고탑(寧古塔)에서 상회 공제호(共濟號)를 설립하고 이주동포를 지도하던 일우 구영필(35)은 지난 9월11일 오전 7시에 영고탑 아문압 동채시(東菜市)에서 어떤 흉한에게 복부에 칼을 맞아 많은 피를 흘리고 사흘이 지난 14일 오후 4시30분경에 굳은 혀(舌)로 말을 못하고 오른팔을 들어 곁에 있던 동지들에게 민족을 위해 진력하라는 뜻을 보이고 마침내 최후의 길을 떠났다는데 구씨의 짧은 일생의 약력은 다음과 같더라(영고탑통신).

    구씨는 경상남도 밀양 출생으로 15세까지 한문 수학, 17세에 경성공업전습소를 졸업한 후에 3년간 일본 와세다대학 정경과를 연구하다가 한일합병 후 2년에 동지 몇 사람과 같이 봉천성 류하현 삼원보에 가서 1년 동안 활동하다가 다시 본국으로 돌아왔다. 3년 동안 무슨 계획을 세워 다시 봉천성에 나가다가 경찰에 잡혀 평양감옥에서 6개월 복역 후 기미년에 다시 봉천성에서 삼광상회, 안동현에 원보상회를 개설하고 독립운동의 교통기관이 되어 내외를 연락.

    동년 3·1운동 당시에 상해에 가서 임시의정원 의원에 추선되어 임시정부를 조직하고 재무부위원이 되어 내외지에 활동. 동년 5월에 길림에서 동지 황상규(黃尙奎)와 같이 군정서를 조직하고 군수과장을 본직으로 교통사장(司長)을 겸임, 익년 경신 2월경에 영고탑에 가서 현재의 근거를 정돈하고 익년 신유에 다시 본국에 잠입하였다가 출판법위반으로 3년 징역의 결석재판을 받았다.

    동년 영고탑에서 한교호회(韓僑戶會)를 설립하고 회장에 추선되어 이주동포를 지도하다가 국제문제로 중국관헌에게 한교의 간판은 압수되고 다시 입적간민호회(入籍墾民戶會)로 조직을 변경, 또한 회장에 추천, 익이년 계해에 동지 김사국(金思國)과 같이 무산자교육기관 대동학원(大同學院) 중학교(中學校)를 경영하다가 간도동양학원의 후신이란 혐의로 중국관헌으로부터 폐쇄의 처분을 받았다. 그후 끊임없이 민족회사 두 방면으로 운동의 길을 개척하다가 불행히 35세를 일기로 실절.’ ]

    이 기사는 35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구영필씨의 일생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주고 있다. 또 이 내용은 광복 후 공개된 다양한 기록을 통해 대부분 사실로 확인됐다. 그런데 이 기사에는 가장 결정적인 내용이 빠져 있다. 어떤 이유로, 누구에게 피살됐는지에 대한 내용이 없는 것이다.

    이에 앞서 그해 9월25일자 동아일보는 구영필 피습 당시 그 배경에 대해 ‘신민부(新民府)와 정의부(正義府) 사이의 어떠한 관계(에 의한 사건)인 듯싶다’고 보도한 바 있다. 여기서 신민부는 바로 김좌진 장군이 만든 독립운동단체다. 어쩌면 1910~1920년대 북만 독립운동사 재조명의 시발점이 될 수도 있는 대목이다.

    “김좌진의 신민부에 살해당하고, ‘김좌진 영웅 만들기’로 친일파 몰렸다”

    중국 영안현 영고탑 간민호회 지도자였던 구영필씨 장례행렬.

    광복 후 국내 항일독립운동사 자료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국사편찬위원회가 편역한 ‘한국독립운동사’와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에서 만든 ‘독립운동사자료집’이다. 그런데 이들 자료에는 구영필씨의 죽음은 물론 당시 상황에 대해 전혀 기록돼 있지 않다.

    유족회는 어쩔 수 없이 1968년 동아일보 기사와 ‘일본군에 의해 피살됐다’고 기록돼 있는 한국인명대사전과 국사대사전을 근거로 국가보훈처에 독립운동가 서훈을 신청했다가 거절당했다. 좌익이라는 이유였다. 하지만 국가보훈처는 별다른 근거자료를 제시하지는 않았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본외무성 경찰사’ ‘일본외무성 외교사료관 자료’ 등 그동안 공개되지 않은 일본 정부의 기밀사료들이 공개되기 시작했고, 그 사료를 정리한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편)’는 국내 학자들의 연구에 주요 참고자료가 되고 있다.

    이들 사료는 자료 부족으로 연구가 미진하던 항일독립운동사, 특히 1910~1920년대 만주 일대 독립운동사에 대한 학계의 새로운 접근과 해석을 가능하게 했다. 이와 함께 구영필씨 피살사건에 숨어 있는 독립운동사의 ‘그늘’이 드러나는 계기를 제공했고, 이에 대해 관련 학자들은 “앞으로 새롭게 조명해야 할 부분”이라고 평가하기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과연 구영필씨의 피살사건에는 어떤 비밀이 감춰져 있던 것일까. 일본 고등경찰연표 내용 중 일부다.

    ‘대정 14년(1926) 11월 불온단(不穩團) 신민부 보안대장 문우천 이하 7명이 영안현에서 군자금 모집 중 중국관헌에게 체포되었는데, 이는 반대파 최계화(구영필)의 밀고에 의한 것으로 생각하여 문 일파가 최를 살해했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에서 1928년 3월에 작성한 ‘재만불온단체(在滿不穩團體) 및 사회주의(社會主義) 단체상황’이라는 제목의 문건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그해(1925년) 11월에 신민부 보안대장 문우천 등 7명이 영안현 영고탑에서 중국 관헌에게 체포되자, 신민부 쪽에서는 이는 반대파인 영고탑 거주 최계화(구영필)의 밀고에 의한 것으로 추단(推斷)하여 앙심을 품게 되었다. 1926년 5월에 구영필은 돌연 암살되었는데, 신민부원의 행위라고 한다.’

    이 두 기록에서 확인되는 사실은 구영필씨의 죽음이 신민부와 밀접한 관계가 있고, 밀고한 데 따른 보복 살해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하지만 또 다른 기록을 보면 이유가 그처럼 단순해 보이지는 않는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에서 1928년 정리한 것으로 보이는 ‘길림성 동부지방의 상황’이라는 문서에는 ‘1926년 신민부 보안대가 영안현 입적간민호회의 수령 최계화를 노상에서 암살하고 그 지반을 신민부가 차지했다’고 기록돼 있다.

    또 비슷한 시기 일본 외무성 경찰사에는 ‘최근 영고탑에서 최계화의 횡사(橫死)와 더불어 신민부파가 진출하여 세력을 만회했다’고 적혀 있다.

    단순 보복 아닌 세력다툼

    이 기록을 보충해주는 중국측 자료도 발견됐다. 옌볜대 박창욱 교수가 공개한 ‘1928년 길림성 동부지방상황 기록문건’인데, 일본 자료보다 당시 상황을 훨씬 자세하게 전하고 있다.

    ‘신민부는 영안 지방을 자기 세력범위에 넣고 군자금을 모으고 자기 단체 세력을 뻗치는 데 매우 필요한 지방으로 느꼈다. 때문에 간민호회를 타도하고 전 영안을 장악하기 위하여 대정 14년 9월 먼저 보안대를 파견하여 길에서 간민호회 수령 최계화(구영필)를 암살하는 것으로, 기타는 위협, 공갈하였다. 영안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인들은 신민부의 이러한 태도에 질겁을 먹고 이전에 구영필을 수령으로 한 경상도파는 신민부와 연계를 갖고 있는 평안도파에 눌리게 됐다.

    신민부에는 3개 보안대가 있었는데, 문우천을 대장으로 한 제3대가 영안지방을 관리했다. 그들은 정기적으로 영안, 해림, 수문하와 기타 성시에 출몰하면서 군자금을 강제로 징수했다(제3보안대장 문우천은 구영필을 암살하였다는 혐의로 현(縣)공서에 구류되어 지금 심문을 받고 있다).’

    이 기록들을 보면 당시 중국 관헌과 일본 총독부는 구영필씨 피살사건을 단순한 보복 살해라기보다는 영안지방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신민부와 간민호회 간의 세력다툼에서 발생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당시 중국 만주지역의 독립운동 상황은 어땠을까. 특히 이 북만 영안지역에서 세력다툼을 벌인 신민부와 간민호회는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고, 두 단체의 지도자인 김좌진 장군과 구영필씨는 어떤 관계였을까.

    1919년 3·1운동 이후 만주지역의 무장투쟁단체들은 급속한 변화를 겪는다. 신주백 연구원의 저서 ‘1920~30년대 중국지역 민족운동사’의 일부 내용이다.

    “3·1운동 이후 독립군은 국내에 들어와 일제와 친일파를 공격했다. 일제로서는 조선의 통치가 불안정해지는 것을 좌시할 수 없었다. 그 와중에 일어난 싸움이 1920년 6월 봉오동전투와 10월 청산리전투다. 청산리전투는 계획된 것이 아니었다. 일제의 토벌에 대응하고 역량을 보전하기 위해 백두산 일대로 이동하는 과정에 치러진 싸움이었다. 청산리전투 직후 일본군이 연변에서 저지른 경신년 대학살을 계기로 대부분의 무장단체는 와해됐으며, 다수의 무장대원이 러시아로 이동해야 했다.”

    간민호회의 탄생과 고려국 건설계획

    한편 비슷한 시기인 1919년 11월9일 구영필씨는 ‘동지 황상규, 김대지와 함께 일합사(一合社)를 해체한 후, 중국 길림에서 밀양 출신 후배 김원봉(金元鳳)과 한봉근(韓鳳根), 한봉인(韓鳳仁) 등을 중심으로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하고 자금을 지원했다’고 일본 고등경찰요사와 의열단 판결문에 기록돼 있다. 여기서 한봉근과 한봉인은 구영필씨의 외사촌조카로 두 사람 모두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됐다.

    비밀결사단체인 의열단은 1920년 5월과 12월에 두 차례 밀양경찰서 폭탄사건을 시도하는데, 구영필씨가 직접 참여한 5월에는 거사 전에 발각돼 상당수 대원이 경찰에 체포되고 만다. 구영필씨는 이때 체포망을 피해 무사히 도망쳐 만주로 되돌아갔다. 그는 1920년 3월 북만 영안현 영고탑에 민족학교 ‘여명의숙(黎明義塾)’을 설립하고 교장으로 있으면서 조선어와 국사, 산수, 중국어 등을 가르쳤다.

    1920년대 후반 경신년 대학살 이후 일본군은 북만주 일대까지 모두 장악한다. 1921년 중반 일본군이 철수하기 전까지 이 일대의 항일운동은 암흑기나 다름없는 시기였다.

    1921년 초 구영필씨는 영고탑에 조선인 자치기관인 ‘한교호회’를 설립했다가 중국 관헌에게 간판을 압수당한다. 1915년 중국과 일본 사이에 체결한 ‘만몽조약’으로 만주지역에서 조선인의 재산권이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국인으로 귀화할 경우에는 재산 소유가 가능했다.

    그래서 1921년 6월 구영필씨가 중국명 ‘최계화(崔桂華)’라는 이름으로 중국국적을 취득한 후 만든 조직이 바로 ‘영안현 입적간민호회(이하 간민호회)’다. 간민호회는 당시 중국정부로부터 입법, 사법, 행정 등의 권한을 획득해 실질적인 자치기관의 면모를 갖춘다. 이후 영고탑에는 학교와 병원, 정미소, 교회 등이 세워지고 별도의 청년회도 조직된다. 조선인의 이주도 급증해 1923년 10월에는 거주 조선인이 420여 가구에 이르는 것으로 관련 사료에 기록돼 있다.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 중 대정11년(1923) 10월5일자 보고내용에는 이런 기록도 있다.

    ‘고려국 건설 계획에 관한 건. 밀정의 정보에 따르면 고려국 건설 계획이 있다고 보고함.’

    이처럼 나날이 커지는 영고탑 조선인 자치지역 내에서 간민호회와 김좌진 장군의 군정파 간의 갈등은 일본군이 물러나고 1년 정도 지난 1922년 중반부터 시작된다. 다음은 신주백 연구원이 조선총독부 ‘길림성 동부지방의 상황’과 ‘경찰사-하얼빈 총영사관 외편’ 등의 기록을 바탕으로 정리한 당시 상황이다.

    독립군단, 영고탑으로 재집결

    “입적간민호회는 친일단체인 조선인민회의 대항단체로 결정돼 중국 지방정부의 후원을 받았다. 경신참변을 피해 북만지역에 이주해온 동만지역 무장독립세력은 입적간민호회와 같은 자치조직과 원만한 관계를 정립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대한독립군단은 1922년 말 목릉현 마교하(馬橋河)에서 한인의 무장활동을 견제하는 중국 지방관헌에게 무장을 해제당하자 이후 주요 간부들이 영안현 영고탑으로 집결해 재기를 도모했다. 하지만 활동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이들의 의무금 징수활동은 입적간민호회와 그곳 주민들에게 원성을 샀다. 이에 중국의 지방관헌은 대한독립군단의 간부를 체포하려 하였고, 대한독립군단의 간부는 다시 흩어져야 했다. 이렇게 하여 쌓인 갈등은 신민부가 결성된 이후 폭발했다.”

    신민부는 1925년 3월 결성됐는데, 김좌진과 이윤범 등이 1922년 8월 결성한 대한독립군단과 김혁의 북로군정서 등 두 단체가 주축이 된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 있다. 1920년대 초부터 만주 독립운동진영에 사회주의 사상이 급속도로 확산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이다. 수원대 박환 교수의 연구 논문 중 일부다.

    “만주지역은 공산주의 사상이 만연할 만한 기본적인 배경을 갖고 있었다. 이주 조선인의 열악한 정치적·경제적 상황이 바로 그것이다. 또 당시 한인들은 워싱턴 회의(1921.11~1922.3)에서 한국의 독립을 지원해줄 것이라고 기대했으나 그렇지 못해 크게 실망하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코민테른이 개최한 ‘제1회 동양제민족대회(1920.9.1~8)에서는 피압박 민족의 운동을 지지했던 것이다.”

    신주백 연구원은 그의 저서에서 “만주지역 한인사회에서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주로 젊은 청년 인텔리들이었다. 이들은 민족주의운동 계열이 벌여온 무장투쟁 일변도의 활동방식을 비판하며 야학과 잡지 발행 등을 통해 계몽과 선전활동에 주력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김좌진의 신민부에 살해당하고, ‘김좌진 영웅 만들기’로 친일파 몰렸다”

    중국 북만 영고탑에서 동지들과 함께 찍은 사진 (뒷쪽 가운데가 구영필).

    기록을 보면 구영필씨의 이후 행적은 두 학자의 설명과 맥을 같이한다. 일본 ‘명치백년사총서’에 기록된 1921년 12월 일본군 보고 내용이다.

    ‘상해 임시정부 재무부장 최계화 이하 십수명은 영고탑에서 만나 독립운동에 좌(左)의 방침을 결정했다. 상해 임시정부는 재정난으로 앞으로 유지가 곤란해 전원 사직하고 이후 북경의 박용만(朴容萬)의 지도를 받아서 소련 공산당과 손을 잡고, 동지연선과 시베리아 방면으로 세력을 확장했다.

    ‘영안 고려공산당 북만 지부 수령 : 최계화, 강구우. 관련인 : 이동휘, 박용만, 구춘선, 홍범도, 문창범, 최명록, 백인민, 안무, 마진.’

    1923년 12월1일, 구영필씨가 대동학원 중학교를 설립할 때 함께한 김사국씨는 사회주의 단체인 서울청년회 창설자다. 학교 설립 목적은 무산자 교육. 대동학원에 대한 국내외의 관심은 컸다. 그러나 대동학원은 설립되고, 한 달을 조금 넘긴 1924년 1월 해산되고 말았다.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 기밀문서에는 ‘대동학원이 공산주의 사상의 적화선전 기관이며 러시아 공산당의 자금지원을 받고 있다고 군정서 계통이 중국 관원에 밀고해서 해산됐다’고 기록돼 있다. 여기서 군정서 계통은 신민부를 준비하던 김좌진 세력을 의미한다.

    그러자 구영필씨는 별도의 청년단체를 조직하거나 재정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한다.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 등의 자료에 따르면 구영필씨는 신흥무관학교 졸업생을 중심으로 공산문화주의 계열 단체인 ‘학우단(學友團)’을 결성하는 한편, 의열단에서 발행한 잡지 ‘적기(赤旗)’에서 이름을 딴 공산주의단체 ‘적기단(赤旗團)’을 결성한다.

    그리고 1925년 3월 구영필씨는 이동휘씨를 중심으로 신한노농회(新韓勞農會)를 조직하는 데 합류한다. 당시 조직의 임원은 신한노농회장 이동휘, 총무 김하석, 재무 최계화(구영필), 외교 김해룡 등. 이동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까지 지내다가 공산당으로 전향한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로 1995년 뒤늦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서훈 받았다.

    구영필씨를 중심으로 한 간민호회와 김좌진이 이끈 신민부는 시대적 상황과 이념적 차이로 인해 대립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양측의 갈등과 대립을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은 수없이 많다. 대부분 영고탑 일대 주민을 대상으로 군자금을 강제 징수하려는 신민부와 이에 저항하는 간민호회 간의 갈등,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간의 이념적 대립에서 파생된 것.

    ‘명치백년총서’의 내용 중 일부다.(보훈처가 서훈 흠결사항으로 지적한 부분)

    김좌진의 부하 박두희는 이전 동빈현으로부터 영고탑의 동지 앞으로 “학우단은 일본으로부터 출금을 받고 있으며 동단의 최계화 및 이기호는 일본의 밀정이다”라고 통신했다. 학우단은 이에 분개, 박두희에게 그 근거를 물으며 구타하게 됐다. 이것이 군정서와 학우단간의 싸움으로 확대됐다. 김좌진이 중재에 나서 ‘그와 같은 통신을 한 것은 불근실하다’며 학우단을 위로해 싸움이 끝났다.

    그런데 군정서에서 수년 전 김군삼이 최계화와 함께 粟(좁쌀)문제(영사관으로부터 1만9000천원을 받아서 조선인을 구제한 일이 있는데 그들이 그것을 착복했다는 문제)에 관련했다는 세평을 이유로, 김군삼을 잡아 “최계화의 속사건과 일본 밀정의 일을 상세히 고하라. 그러지 않으면 사형에 처한다”고 협박했다.

    학우단 및 창조파는 김의 궁황을 동정해 지나 관헌에 고소할 것을 권했다. 김의 고소로 군정파 상당수가 체포된다. (중략)농민 등은 김군삼의 일을 크게 덕이라고 여기는 것 같다.

    신민부 세력과 가장 치열한 대치양상을 보인 사회주의 단체는 적기단이다. 독립운동 방법뿐만 아니라 이념적으로도 정반대였기 때문이다. 관련 사료에 양측의 갈등이 구체적으로 나타난 시기는 신민부가 창설된 1925년 3월 이후다.

    신민부와 적기단의 치열한 대치

    1925년 7월 ‘재만불온단 겸 사회주의단체의 상황’이라는 제목의 보고서 내용이다.

    ‘김좌진이 새로 신민부를 조직했는데, 적기단은 공산주의계에 속하는 관계로 이에 참가하기를 거부했다고 한다. 따라서 그 뒤 본단(신민부)과 적기단은 매사 반목해 상쟁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렇다고 늘 대립한 것만은 아니다. 구영필씨가 ‘1925년 군정서측의 밀고로 문닫은 대동학원을 김좌진 장군과 함께 사관학교로 변경해 운영하는 방안을 논의했다’는 기록을 보면 말이다. 또 같은해 ‘영고탑에서 신민부, 정의부와 연합모원대(聯合募員隊)를 편성해 독립자금을 모금할 때 구영필이 김좌진(東路司令官)과 박두희(東路軍令部長)와 함께 동로군향관(東路軍餉官)의 직책을 맡아 활동했다’는 기록도 있다.

    구영필씨는 대종교의 주요 간부로도 활동했는데, 대종교가 신민부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점을 보더라도 서로 일정한 긴장관계와 협조관계를 병행하고 있었을 가능성도 엿보인다.

    그렇다면 학자들은 당시 상황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신주백 연구원의 관련 논문 내용 중 일부다.

    “김좌진이 신민부 운영을 주도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바탕 가운데 하나는 보안대였다. 그런데 이들은 한인으로부터 군자금을 징수하거나 대항적인 단체와 갈등을 빚을 때 주로 군대를 동원했다. 또한 신민부는 영역 확보를 위해 입적간민호회처럼 자연 발생적인 한인단체나 광진단, 적기단과 같은 항일단체와 끊임없이 적대적인 대결을 벌였다.”

    신민부 보안대의 횡포는 이후로도 계속돼 1928년 10월 이른바 ‘빈주사건(賓州事件)’을 일으키기에 이른다. 이 사건은 빈주에서 한인 40~50명이 보안대의 무력적인 행동에 대한 자위책을 협의하는 모임을 갖자, 보안대가 자신들을 반대하는 운동을 모의한다며 무장대를 파견해 수명을 사살하고 다수의 중상자를 낸 사건이다.

    신 연구원은 “이 사건이 발생하자, 1928년 11월 하순경 영안현에 6개현, 16곳에 거주하는 대표들이 모여 북만주민대회를 열고 김좌진을 비판함과 동시에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이에 민정파에서도 김좌진을 ‘반혁명의 주구(走狗)’라고 성토하는 등 이를 성원했다. 이 사건 이후 (신민부는) 민정파와 군정파로 완전히 분리됐다”고 설명했다.

    여기까지가 관련 기록과 학자들의 연구결과를 중심으로 살펴본 내용이다. 구영필씨의 피살배경은 분명 당시 신민부 세력과의 끊임없는 대결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독립운동가들 간에 특정지역을 장악하기 위해 중국 관헌에 밀고하고 살인까지 저지른 행위는 우리 독립운동사의 어둡고 아픈 부분임에는 틀림없다. 그렇더라도 역사적 평가를 피할 수는 없는 일.

    보훈처 ‘속사건’ 부연설명 번역 오류

    유족회는 “역사적으로 한번만이라도 제대로 평가받고 싶다”는 생각이다. 현재 구영필씨는 친일로 변절한 독립운동가로 낙인찍혀 있다. 유족회는 1996년 국가보훈처와 국민고충처리위원회에 구영필씨에 대해 독립유공자 포상을 신청했지만 또다시 거절당했는데 이유가 친일파라는 것. “일제 밀정으로 활동한 혐의를 받고 있으며, 1926년 사망당시 신민부와 의열단 활동에 대한 밀고자로 처단되는 등 흠결사항이 발견됐다”는 것이 당시 보훈처의 답변이었다.

    이에 대해 유가족측은 “보훈처는 당시 시대적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 매우 편향된 시각으로 접근하고 있다”며 “과연 무슨 근거로 밀고자로 처단됐다고 주장하는지 모르겠다”고 반박한다.

    보훈처가 문제 삼은 흠결기록이다.

    (1)[고등경찰 관계년표 208면](총독부 경무국 발행) 신민부 보안대장 문우천 이하 7명이 앞서 1923년 2월에 중국 영고탑에서 군자금 모집 중 중국 관헌에게 체포된 것은 반대파인 영고탑 거주 구영필(일명 최계화)이 밀고한 탓이라 하여 문우천 일파가 그를 살해했다.

    (2)[명치백년사총서 2권](조선군 참모부 보고서) 군정서 박두희가 학우단은 일본으로부터 돈을 받고 동단의 최계화와 이기호는 일본의 밀정이라고 연락함. 이에 학우단과 군정서 간 충돌이 발생했을 시는 최계화의 粟사건(영사관으로부터 조선인을 구제한다는 명목으로 속1만9000원을 받아 착복한 사건)에 대해 당시 세평 등을 들어 동 사건에 관여되었다고 군정서측이 판단한 김군삼을 구타하자, 학우단의 최계화는 김군삼을 조종해 이를 중국 관헌에 고소케 하여 군정서계통의 박운집 등 수명이 체포됨.

    (3)[독립운동사 7권 378, 379, 523] [부산 경남 3·1 운동사 238면]

    (가)구영필은 일본의 자금으로 실업을 경영하면서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한다는 이유로 1926년 신민부 별동대원 황덕환에게 피살됨.

    (나)경남을 중심으로 중대운동을 계획하던 이종암은 변심한 동지의 밀고로 일제에 피체되었는데 신휴철에 의하면 구영필이 밀고하였다 하여 그는 영고탑에서 동지의 손에 암살되었다 함.

    (4)[확인서(이용하 : ‘77건국훈장 애족장 수훈자, 이명 이중실)]

    구영필은 반민족자임을 확인.

    유족회측은 첫째 흠결기록부터 차근차근 문제점을 지적했다.

    “문우천 일당 7명이 중국 관원에 체포된 것은 1923년 2월이 아니다. 1925년 7월과 11월이다. 그리고 연이어 발생한 간민호회와 신민부 간의 갈등과정에 피습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특히 신민부가 구영필이 밀고한 생각 또는 추단했다는 것이지 실제 구영필이 밀고했다는 증거는 기록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여기서 밀고는 세력다툼에 따른 것이지 친일행위가 아니다.”

    “김좌진의 신민부에 살해당하고, ‘김좌진 영웅 만들기’로 친일파 몰렸다”

    병원 관계자와 구영필씨 가족이 영고탑 영안병원 개원을 기념해 촬영한 사진.

    유족회측은 둘째 항목에 대해 “누가 이런 엉터리 번역을 했는지, 의도적이고 악의적인 문서변경의 범죄”라고 주장했다. 유족회측의 주장에 따르면 ‘명치백년사총서’에는 ‘영사관으로부터 1만9000원을 받아서 조선인을 구제한 일이 있는데, 그들이 그것을 착복했다는 문제’라고 적혀 있다. 실제 문건을 확인해본 결과 유족회측의 주장이 사실임을 알 수 있었다. ‘구제한다는 명목으로 착복한 사건’이라는 표현과 ‘구제한 일이 있는데, 그들이 착복했다는 문제’라는 표현은 천양지차(天壤之差)다.

    이강훈 광복회장은 신민부 대원

    유족회측은 “이처럼 중요한 사안에 대해 번역 자체를 달리한 것은 일부 인사의 회고에 의존한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고 비판했다. 여기서 유족회측이 지목한 ‘일부 인사’는 광복회장을 역임하고 지난 2003년 11월 고인이 된 이강훈 전 회장이다.

    유족회측이 이 전 회장을 지목한 이유는 보훈처에서 제시한 셋째 흠결기록이 이 전 회장이 과거에 한 주장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또 이 전 회장은 1920년대 중반 구영필씨와 대립각을 세운 신민부 대원으로 산하 각급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한 전력이 있어 유족회의 의구심을 부추겼다.

    참고로 이 전 회장은 1992년 2월 ‘광복’지에 기고한 ‘내가 밝혀야 할 두 악한’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구영필은 최계화로 행세하면서 일제 무리, 그리고 공산당과 깊은 관계를 맺고 이중 내지 삼중 밀정 노릇을 하고 있었다. 신민부에서 벼르다가 별동대의 황덕환이 1927년 여름 백주대낮에 비수로 찔러 죽이고 유유히 본부로 돌아왔다”고 주장한 바 있다.

    유족회측은 이에 대해 “그 어디에도 구영필의 죽음과 황덕환이 연결돼 있다는 기록을 확인할 수가 없다”면서 “구영필의 독립유공자 서훈을 막기 위해 이미 서훈을 받은 황덕환으로부터 피살된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유족회측은 이어 “이종암은 1920년 5월 의열단 밀양경찰서 폭탄 미수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됐는데, 관련 기록인 고등경찰요사 판결문을 보면 구영필도 사건의 주모자로 기소돼 있다”면서 “또 증언자 신휴철은 신철휴의 오기인 것 같은데, 도대체 무슨 근거로 밀고했다는 것이고, 보훈처가 그 사람의 말을 인정한 이유도 이해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유족회측은 마지막 흠결 기록인 이용하씨의 ‘구영필 반민족자 확인서’에 대해서도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확인서를 작성했는지 모르겠지만, 역사는 무엇보다 객관적인 근거로 판단해야 하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한편 국가인권위원회는 보훈처가 제시한 흠결사항을 받아들이면서 한 가지를 더 문제 삼았다. 명치백년총서에 기록된 ‘영고탑 부근에 있어서 조선인 등의 현황보고의 건’(1922년 2월6일 조특보 제4호)이다. 다음은 위원회의 판단.

    ‘이 자료에 의하면 최계화는…(중략)… 1918년 10월 수집자금 4만여원을 착복하고 봉천을 떠나 영고탑에 이르러 주요한 지나행정관에 증여하여 교묘하게 영고탑 부근의 가옥을 매수하고, 겉으로는 지주 겸 자본가가 되고 안으로는 영고탑 부근의 부정선인을 흡수하여 수전(水田)사업을 경영해 그 세력이 왕성했다. 대일인 관계에 있어서도, 이제 그는 부정행동을 그만두고 영안흥업주식회사와 서로 제휴하여 수전사업에 종사할 뿐 아니라, 이해를 회사와 함께하고부터는 크게 친일을 하기에 이르러 유력선인(有力鮮人)으로 분류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살피건대 흠결사항에 대한 객관적인 반증자료가 필요하다고 판단된다.’

    이 글만 보면 구영필씨는 친일로 변절한 셈이다. 그러나 유족회측은 이에 대해 어처구니가 없다는 반응이다. 먼저 ‘친일을 하기에’가 아니라 ‘친일을 가장(假裝)하기에’로 번역돼야 한다는 것이 유족회측의 지적이다. 유족회측은 이어 반증자료로 위원회에서 문제 삼은 ‘명치백년총서’ 문건의 나머지 전문을 제시했다. 다음은 전문 가운데 위원회가 제시한 내용 이후의 기록이다.

    ‘(유력선인) 최계화는 각지호회의 장으로서 일본어, 중국어, 조선어의 3국어에 능통하고 중국에 있은 지 20년, 황기둔에 농장을 갖고 그 산출미를 그의 점포 공제호에서 판매하고 있다. 조선인간에는 아무튼 평이 나 있으나 식자로서 외경(畏敬)되고 있다.

    (수괴에 관한)임시정부수괴 최계화

    - 이력 : 본인은 일본합방 이후 우리 조선통치에 불평을 품고 봉천에 망명하여…(중략)…이제는 최의 세력은 확고하여 뿌리를 뽑을 수 없게 되었다. 현재 영고탑 현내에 최계화의 동지로 인정될 만한 자가 200여명에 이른다고 한다.

    - 독립에 관한 선전(宣傳) : 본인은 상당한 학식이 있어서 이후로 극단적인 배일행동은 없어도 항시 문화적 독립사상을 갖고 언제나 동지에게 이르기를,

    “우리 조선민족은 일본의 압박정치를 배제하고 의당히 윌슨이 제창하는 민족자결을 결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들은 동지를 규합하고 먼저 지반으로 해야 할 토지를 얻어서 생활의 안정을 얻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일이 이루어진 후에 비로소 문화적 독립수단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합리적 문화독립은 자연의 이(理)로서 각국 식자도 크게 우리들에게 성원을 주는 바 있으나 무력적 독립은 불합리하고 시세(時勢)에 적합하지 않다.’

    글이 작성된 시점은 1922년 2월. 그 이후 드러난 여러 가지 사료는 물론 이 내용만으로도 구영필씨를 친일 변절자로 보기는 어렵다. 정부기관에서 왜 이처럼 편파적으로 평가하는지 유족회는 답답할 뿐이다.

    “김좌진 장군도 훌륭한 독립투사다. 하지만 구영필도 나름의 훌륭한 독립운동을 했다. 1920년 후반 독립운동 진영의 추진방향인 식산흥업과 교육진흥 등 자치활동을 가장 먼저 선구적으로 시도한 주인공이다.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신민부에 피살됐기에 지금까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것 아닌가 싶다. 이제 역사적 진실을 밝힐 때가 되지 않았는가.”

    유족회측은 광복 후 정권 차원에서 김좌진 장군을 지나치게 높이 평가하면서 한때 그와 적대적 관계였을 뿐만 아니라 김 장군의 부하에게 피살된 구영필씨를 의도적으로 평가절하한 것이 아닌지 의심하고 있다.

    “편파적 고증 있었던 건 사실”

    이에 대해 학자들은 매우 조심스러운반응을 보였다. 신용하 교수는 “그동안 서훈을 받지 못했다면 좌익이라는 것이 큰 원인이었을 것이다. 다행히 얼마 전부터 몽양 여운형 선생 등 과거 사회주의 독립운동가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으니 다시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올 것”이라면서도 “하지만 친일논란이 있는 운동가라면 과거 역사적 자료를 통해 철저한 고증절차를 거쳐야 한다”는 단서를 달았다.

    이현희 교수는 “친일 여부가 쟁점인 데 상당히 미묘한 대목이 많아서 쉽게 판단하기 어렵다”면서 판단을 유보했다.

    1920년대 이후 만주지역 민족운동사에 대해 집중적으로 연구하면서 최근 ‘1920~30년대 중국지역민족운동사’(도서출판 선인) ‘1930년대 국내민족운동사’ 등을 동시에 출간한 신주백 연구원은 비교적 솔직하게 견해를 밝혔다.

    “참 흥미로운 경우다. 구영필이 친일을 했느냐, 안 했느냐가 관건인데 당시 친일 논란이 있었던 것은 분명 독립운동 방향을 놓고 대립하는 과정에 나온 것 같다. 또 밀정 논란이 있던 당시 공개적으로 성명서까지 발표한 것을 볼 때 실제 친일은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역사적 사실에서 만주의 독립운동은 역시 무장투쟁이다. 싸우기 위해 만주에 갔고, 그것을 위해 계획을 세웠다. 구영필은 북만 지방에서 그다지 높지 않은 위치의 초창기 독립운동가인 것 같다. 자치 우선의 노선을 걸었는데 조선인의 생활안정을 위해 활동한 것은 당연히 긍정적으로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그것도 하나의 독립운동이다.

    광복 후 평가받지 못한 데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것이다. 먼저 정치적 필요성이다. 광복 후 남쪽은 역사적 정통성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뒀고, 북쪽은 항일무장투쟁에 뒀다. 임시정부는 김좌진 장군을 중심으로 한 신민부 등 민족주의계열로 이어진다. 분단 이후 반공주의 속에서 역사를 다루면서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등 분명 도외시한 부분이 있다. 어느 정도 역사적 고증을 편파적으로 한 것도 사실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최근에 많이 극복되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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