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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민의 리걸 에세이

‘어떤 일이 있었다’고 말하는 일에 대해

  • 정재민|전 판사·소설가

‘어떤 일이 있었다’고 말하는 일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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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일이 있었다’고  말하는 일에 대해

인공지능(AI) 판사 시대가 도래한다면 빅 데이터 분석을 통해 최적의 사실관계 재구성이 가능해질까.[동아 DB]

‘어떤 일이 있었다’고 우리는 하루에도 수도 없이 말을 한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확신을 가지고 하기가 쉬운 말이 아니다. 칸트는 인간이 사건의 실체 자체를 있는 그대로 인식할 수 없으며 그저 자신의 감각기관에 비친 제한된 현상만을 놓고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추론할 수 있을 뿐이라 했다. 일상에서는 철학자의 수준만큼 엄밀하게 따질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어떤 일이 있었다고 말하는 것은 역시 쉽지 않다. 남의 일은 더 그렇다. 어떤 일이란 일어나는 순간 과거 속으로 넘어가버리고 그 일에 대한 기억도 연약한 꽃잎처럼 금세 어디론가 날아가버린다. 재판이란 바로 그 꽃잎들을 찾아서 과거를 복구해 ‘어떤 일이 있었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판결의 화법과 일상의 화법 간의 이런 차이를 유의해야 한다.

첫째, 판결에서 “어떤 사실이 인정되지 않는다”고 한 것이 “그런 사실이 없다”고 판단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 사실을 입증할 증거가 부족하다는 뜻일 뿐이다. 증거가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그 사실을 인정했을 수도 있다. 우리나라 형사재판에서 판사가 “피고인은 무죄”라고 선고하는 것도 피고인에게 죄가 전혀 없음을 확인해준 것은 아니다. 판사가 유죄로 인정할 만큼 확신이 들지 않는다는 것뿐이다. 이런 의미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 미국 판사는 “Not Guilty(유죄가 아님)”라고 선고한다.

둘째, 입증책임에 따라서 사실확정이 판가름 날 때가 많다. 판사는 어떤 사실의 존부(存否)에 대해 확신이 들지 않을 때에는 입증책임에 따라 판단한다. 다시 말해서 당사자들 중 어느 한쪽을 인간적으로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보거나 다른 쪽을 거짓말쟁이라고 보기 때문이 아닐 때가 많다.



판결 불만의 가장 큰 원인

이러한 차이를 모르고 판결을 읽으면 불필요한 오해가 발생하기 십상이다. 아는 형으로부터 지금까지 판사를 칭찬하는 말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 형이 어느 회사에서 일을 하고도 월급을 못 받아서 사장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적이 있다고 한다. 자기는 돈도 없고 ‘빽’도 없고 좋은 학교도 못 나온 비정규직인 반면 사장은 주변에 힘 있는 사람도 많고 돈도 많아서 비싼 변호사를 선임해 당연히 자기가 질 줄 알았더랬다. 그런데 의외로 판사가 자기 손을 들어주었다는 것이다.

형은 그 이후 다른 사람은 판사가 다 썩었다고 욕해도 자기만은 판사들을 믿는다고 했다. ‘믿는다….’ 나에 대한 칭찬도 아닌데 그  한마디 말에 가슴이 훈훈해졌다. 판사에게 ‘믿는다’는 말보다 더 큰 찬사가 없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그 형에게 ‘믿는 구석’이 되어준 이름 모를 판사에게도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그 형이 덧붙이기를 자기가 판사를 믿는 것은 그 판사가 자기를 믿어주었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그 판사가 자신을 믿을만한 사람으로 판단한 반면, 그 사장의 거짓말은 티가 났다고 믿고 있었다. 물론 그런 점도 영향이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 판사는 그저 입증책임에 충실했을 뿐이다. 임금을 지급했다는 사실에 대한 입증책임은 사장에게 있는데 사장이 그에 대해 충분하게 증거를 제시하지 못한 것이다. 사장은 임금을 현찰로 지급했다며 어설픈 영수증을 제시했는데 거기에는 그 형의 이름조차 제대로 적혀 있지 않았다.

정반대 경우도 있다. 아는 후배는 판사에 대한 원망과 불신에 휩싸여 있다. 자신의 외삼촌이 자기 집에 왔을 때 아버지의 인감도장과 서류를 훔쳐서 몰래 은행 앞으로 근저당권을 설정해놓았는데 판사가 아버지, 어머니 말을 안 믿어주고 힘센 은행의 손을 들어주더라고 했다. 그 때문에 자신의 부모님은 평생 모은 재산인 아파트를 경매로 날렸다고 했다. 후배는 평생 경찰서 한 번 안 가본 자신의 부모님을 판사가 안 믿어주었다면서 분개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그 판사 역시 입증책임에 충실한 판결을 했을 뿐이다. 일단 등기가 설정되고 나면 추정력이 생기기 때문에 등기가 무효임을 입증할 책임을 후배 아버지가 지게 된다. 그 강력한 추정력을 깨기 위해서는 말만으로는 안 되고 후배의 아버지가 처남을 고소해서 형사판결을 받는 등 확실한 증거를 제시했어야 한다. 이 역시 판사가 당사자를 인간적으로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아니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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